당시 일본은 고토쿠천황이 즉위하였지만 실세는 나카노에였고, 나카노에는 이후에 덴지천황이 됩니다.

나카노에의 동생 오오아마는 형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오오토모를 몰아내고 덴무천황이 됩니다.

(역사와는 다른 팬픽이니 연도나 사실 따지지 말고)

 

1. 647

어이, 신라의 귀공자께서 도착했다는군.”

거리낌없이 다다미를 홱 열어젖히고 들어서는 나카노에를 향해서 오오아마는 고개를 들었다. 오오아마의 형인 나카노에는 황실의 외척세력이었던 소가 가문을 대전에서 참살하고, 삼촌인 고토쿠천황을 천황의 자리에 올려놓은 후, 실질적으로 일본의 정권을 잡고 있는 젊은 맹주였다.

오만함과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듯 한 위세의 형과 달리 오오아마는 나이가 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상투를 틀지 않고 긴 머리를 내려뜨린 채 아이과 같은 머리모양과 옷을 입고 있었다.

왕위계승자인 김춘추가 직접 일본까지 온 걸 보면, 백제의 칼끝이 신라여왕의 목 앞에 다다른 모양이군.”

나카노에의 혼잣말에 오오아마는 횟대에 홀로 앉아있는 새장 속의 새에게로 다시 눈을 돌리며 물었다.

듣자하니 꽤 예쁘다던데잡아먹을꺼야 아니면 갖고 놀꺼야?”

나카노에는 픽 웃으며 오오아마를 뒤에서 안았다.

보기도 전에 질투하는거냐?”

오오아마는 나카노에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보는 사람마다 홀리는 요물이라던데 조심하라구.”

나카노에는 크게 웃으며 오오아마를 놓고 벽에 걸린 칼을 잡아 뽑았다.

내가 관심있는 쪽은 상대등 비담이야. 신라, 아니 삼한에서 제일가는 검술가라던데 한번 시험해 볼까.”

 

백제와의 전쟁이 막 끝난 시점에, 춘추가 갑자기 왜나라를 가겠다고 하는지 비담은 알 수 없었다.

춘추는 왜국의 왕이 바뀌었으니 인사 차 놀러 간다고 말했지만, 왜국은 백제의 동맹국이었고, 백제의 요청에 따라 춘추를 잡아서 백제에 넘겨줄 가능성도 있었다.

춘추가 걱정되어 궁시렁거리는 비담에게 춘추는 혀를 차며 말했다.

왜국은 신라의 배후를 위협하는 세력이니 미리 손을 써두어야 해. 그렇다고 네가 가면 목숨이 위험할테니 내가 가는 수밖에.”

? 내 목숨이 위험해? 어째서?”

나케노에는 검술이 뛰어난 자를 보면 겨루고 싶어 안달이라더라. 네가 지면 목숨을 잃을 테고, 네가 이겨도 그자가 화가 나서 너를 죽이려고 들텐데, 쓸데없이 문제 만들지 말고 그냥 얌전히 신라에 있는게 어때?”

춘추의 말에 비담은 어깨를 으쓱 하며 돌아섰다.

그래. 니말대로 나는 가지 않는 게 좋겠어.”

 

춘추의 일행이 왜국의 궁에 들자, 궁녀들과 신하들이 춘추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목을 길게 빼고 몰려들었다. 신라에서 사신이 오는 것도 드물었지만, 이렇게 높은 직위의 사신이 오는 것은 몇십 년만의 일이었다. 더군다나 왕위계승자인 춘추의 모습에서는 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귀티와 기품이 흘러넘쳤다. 화려한 수가 놓인 비단옷을 입고 차분하면서도 당당하게 걸으며 대전으로 향하는 외국의 젊은 공자의 모습에 궁이 술렁거렸다.

대전에 든 춘추에게로 신하들의 시선이 쏠렸다. 고토쿠천황, 나카노에와 오오아마를 비롯해서 모두들 춘추의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숨을 멈추는 듯 했다. 그림에서 튀어 나온 듯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 보일듯 말 듯 미소를 머금은 입술, 보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 한 기름한 눈 속에서 빛나는 별처럼 또렷한 눈빛에 빨려들어가는 듯 했다.

왜국의 새로운 왕의 즉위에 신라여왕께서 축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마법에 걸린 듯 조용하던 좌중의 침묵 위로 춘추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빙긋이 미소지으며 춘추를 바라보던 나카노에는 앞으로 나서 춘추의 앞에 섰다.

갑옷을 입은 나카노에의 어깨는 더욱 넓어보였고, 걸을 때마다 쇠붙이가 부딫쳐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국의 왕은 이제부터 천황이라 칭하시오. 왕이 아니라 천황에 즉위하신 것이오.”

춘추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신라여왕의 신하로서 여왕폐하의 말씀을 들은 대로 고할 따름입니다. 여왕폐하께 황자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나카노에는 기가 죽지도 않고 거만하지도 않게 부드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춘추의 미소에 씩 웃으며 마주보며 웃었다.

오오아마가 그런 나카노에를 노려 보며 날카롭게 춘추에게 말했다.

상대등 비담공은 어디에 계신지요?”

상대등은 배멀미가 심하여 신라로 돌아갔습니다.”

"그것 참 아쉽게 되었습니다. 무예가 뛰어나시다고 들었는데 그깟 배멀미를 이기지 못해서야."

나카노에의 비꼬는 말에도 춘추는 대답없이 미소지을 뿐이었다.

 

신라 사절단을 환영하는 연회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무희들이 나와서 춤을 추었는데, 한참 연회가 무르익을 즈음에, 무희들이 물러가고, 칼을 든 여인들이 나와서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칼끝이 춘추를 향하며 무희들이 점점 춘추에게로 위협적으로 다가왔지만 춘추는 여전히 태도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춤을 감상했다.

나카노에는 재미있는 듯 싱글싱글 웃으며 오오아마에게 말했다.

"제법인데? 전혀 무서워하지 않잖아. 칼이라곤 잡아본 적이 없는 애송이 인것 같은데 말이야. 담력이 보통 아니네."

그러나 오오아마는 그런 형을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대답했다.

"눈치가 없거나 바보 아닐까? 시험해보면 알겠지. 바보인지 담력이 센건지."

그러더니 오오아마는 춤을 추는 무희 한명에게 찡긋 눈짓을 했다. 무희는 춤을 추는 척 빙빙돌며 춘추에게 다가가서 칼끝을 춘추의 코앞까지 홱 내밀었다.

무희의 도발에 좌중이 다들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춘추는 무희의 칼이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데도 태연히 앉아있었다.

칼이 거의 춘추의 하얀 목의 동정 깃에 닿을 지경이 되었을 때, 다른 칼이 그 칼을 가로막았다.

비담은 무희의 칼을 빙글 돌려 날려버렸고, 날아간 칼은 나카노에와 오오아마의 사이의 탁자에 제대로 꽂혔다. 음악은 멈추고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말았다.

왜국의 병사들이 수십개의 창으로 비담을 둘러싸며 겨누었지만 비담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며 비아냥거렸다.

"왜국은 사신 목에 칼을 겨누는 춤을 추는 것이 예의인겁니까?"

나카노에는 일어나서 큰 소리로 웃으며 무마하려했다.

"결례라고 느꼈다면 미안합니다. 사신을 다치게 할 리 없잖습니까? 왜국의 칼춤이 그만큼 정확하고 정교하다는 것을 보여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신라에는 이런 칼솜씨가 없는 모양입니다."

비담이 발끈하여 나서려는데 춘추가 비담의 옷깃을 잡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왜국의 검술이 무척 뛰어나다는 것을요."

하지만 나카노에는 불꽃이 번쩍번쩍 튀고 있는 비담의 눈을 보며 말했다.

"신라에도 검술이 무척 뛰어난 상대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어째서 오시지 않은 건지요?"

이번에는 춘추가 말리기도 전에 비담의 대답이 튀어나갔다.

"상대등 비담께서 이런 유치한 장난같은 검법을 구경하러 왜국까지 오시겠습니까?"

이번에는 나카노에게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대의 검법은 어느정도인지 보여주시게."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비담의 옷깃을 춘추가 잡은 것과 거의 동시에 나카노에의 옷깃을 오오아마가 잡았다.

오오아마는 술병을 들고 일어서서 춘추와 비담의 앞으로 가며 애교스럽게 웃었다.

"관습의 차이로 이해해주시기를 부탁드려요. 오오아마가 두분께 화해의 술잔을 올리겠어요."

오오아마가 비담에게 술잔을 따를 때 비담은 그에게서 이전에는 맡아 본 적이 없는 묘한 느낌의 향이 나는 것을 느꼈다.

 

숙소로 돌아온 비담과 춘추는 그들이 느낀 왜국의 정세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이전보다 점차 강성해지고 있고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서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나카노에와 오오아마에 대한 평은 서로 엇갈렸다.

"나카노에를 조심해야겠어. 신라를 우습게 알고 사신을 위협하잖아. 언제 쳐들어올 지 몰라."

비담의 말에 춘추는 픽 웃었다.

"진짜 조심해야 할 상대는 오오아마야."

"? 그 형의 뒤에만 숨어있는 겁쟁이 녀석을?"

"넌 그에게서 나는 향이 뭔지 알아?"

비담이 고개를 젓자 춘추는 약간 뜸을 들이다 말했다.

"나도 수나라에서 딱 한번 맡아봤는데... 가휘향이라고... 남자가 남자를 유혹할 때 쓰는 향이야."

"?"

"그러니까 넘어가지 말라고. 남자를 유혹해서라도 권력을 쥐려고 하는 무서운 아이니까. 나카노에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이 오오아마일거야."

춘추의 말에 비담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춘추의 말이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카노에와 오오아마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다면 왜국을 분열시킬 수 있을텐데."

춘추는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면서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왜 말린거야? 녀석의 콧대를 눌러놨어야 하는데."

으르렁거리는 나카노에에게 오오아마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그는 일개 호위무사이고, 형은 왜국의 일인자인데, 굳이 싸워서 득될게 없잖아."

"일개 호위무사? 그런 자가 다른 나라의 대전에서 겁도 없이 칼을 뽑아들겠어? 게다가 그 자가 날려버린 칼이 우리 식탁에 꽂혔잖아. 나를 도발한거라구."

오오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형말대로 분명 범상치 않은 자인데... 좀 더 알아보자구."

오오아마의 기억에도 지금까지 나카노에황자에게 감히 칼로 위협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보인건지 담력이 센건지."

오오아마는 새장속의 새에게 다시금 먹이를 주었다.

 

비담은 오오아마가 자신을 떠보기 위해 찾아올거라는 춘추의 예상이 맞아들자 놀랐지만, 태연한 척 그를 맞았다.

"저같은 미천한 자를 공께서 어찌 찾으신겁니까?"

오오아마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꺼냈다.

"저의 형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리려고요."

오오아마가 술병을 들고 술을 따르자 소매에서 지난번에 맡았던 가휘향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별 느낌이 없지만 계속 맡으면 그에게 덤벼들게 될껄.'

비담은 춘추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한번 오오아마를 차근히 훑어보았다.

하나하나 뜯어보니 그다지 눈에 띄게 예쁘지는 않았지만, 작고 귀여운 이목구비에 긴 머리와 화려한 옷과 화장에 가휘향이 더해서 여자에게도 남자에게도 느낄수 없는 독특한 느낌이 들었다.

춘추의 말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몽롱해지는 듯 하고 오오아마가 점점 야하게 보이는 듯 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듯 한 저 사람이 색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지고,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느낌이었다.

"저를 지켜 줄 호위무사를 찾고 있었는데... 신라에 이렇게 훌륭한 검사가 있었네요."

비담이 정신없이 자기 얼굴을 쳐다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오아마는 계속 생글생글 웃으며 술잔을 따랐다.

오오아마와 눈이 마주치자 비담은 저도모르게 당황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에취~에취~"

비담은 기침을 하며 소매로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여 고뿔에 걸린 모양입니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만 혼자 침소에 들까 합니다."

돌변한 비담의 태도에 오오아마는 뾰루퉁하여 술병을 들고 물러갔다.

비담은 소매 안쪽에 팔에 묶인 생강가루 주머니를 다시 한번 들이마셨다. 춘추가 가휘향의 해독에 필요할거라며 직접 팔에 묶어준 것이었다.

 

춘추는 오오아마의 행동은 예측했지만 자신의 처소에 기별도 없이 나카노에가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신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율령제도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나카노에는 빙글빙글 웃으며 춘추의 방에 허락도 없이 서슴없이 들어섰다.

춘추는 기분이 나빴지만 수나라에서도 자신의 권력만 믿고 무례한 행동을 했던 자들에게 익숙했던터라 표정없이 예의를 갖춰 안내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궁금하신 점이 무엇입니까?"

"신라는 백제와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율령을 반포하여 시행하고 있다고 들었소. 우리 왜국에도 율령을 반포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소.

헌데 문제는 율령을 반포한 후에 지키도록 하는 것이 문제요. 지켜지지 않을 율령을 반포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일단 율령을 전국에 널리 알리고, 각 고을의 막부들에게 율령을 지키도록 하는 책임을 주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경우에 그자에게 벌을 주면 됩니다. 왕이 일일이 나설 필요가 없지요."

춘추는 율령제의 시행 방안에 대해서 나카노에에게 조언을 했다.

"율령이 제대로 지켜지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오?"

춘추가 어떻게 대답하는지가 궁금해 죽겠다는 듯 턱을 고이고 춘추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집요하게 질문하는 나카노에에게 춘추는 오히려 눈을 마주보고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들을 감시하는 자를 파견해야지요. 그들이 공을 두려워한다면 제대로 보고를 할 것이고, 막부들을 더 두려워한다면 다른 말을 하겠지요."

나카노에는 허를 찔린듯 피식 웃었다.

"결국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거로군."

나카노에는 쩝 입맛을 다시며 춘추를 다시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예쁘장한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짱도 있는 듯 싶더니, 예의를 지키면서도 천연덕스럽게 할말은 다 하면서, 천하의 나카노에를 쥐었다 풀었다 하고 있었다.

나카노에는 춘추를 일단 적으로 돌리기보다는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아름답기에 곁에 두면 즐거울 뿐 아니라, 듣기 싫은 이야기도 듣기 좋게 해서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춘추를 잡아야겠다고 느낀 것은, 춘추가 신라의 다음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이었다. 춘추가 신라의 왕이 되면, 춘추의 마음에 따라 왜국의 동맹국이 하나 생길수도, 적국이 하나 생길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카노에는 춘추에게 다가오며 손을 잡았다.

"공의 조언이 도움이 되겠군요. 감사를 전하고 싶소."

춘추는 나카노에의 손길에 놀랐지만, 뿌리치지 않고 짐짓 무심한 듯 한마디를 던졌다.

저도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오오아마 황자는 왜 머리를 올리지 않았나요?”

뜬금없는 춘추의 말에 나카노에는 멈칫하며 눈쌀을 찌푸렸다.

"오오아마황자는 왜 혼인을 하지 않으시나요?”

춘추는 나카노에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것도 모르냐는 듯 놀리듯이 말했다.

"왜 아이를 갖지 않을까요? 황실의 후손을 늘려서 가신들에 대적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물어본 적 있으신가요?"

나카노에는 오오아마에 대해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사실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춘추를 놓아주고 자리를 떴다.

나카노에의 돌발행동에 당황하기는 춘추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손을 잡고 다가오는 바람에 놀라서 오오아마 이야기를 해버린 것이었다.

"이런, 패를 너무 일찍 알려줘버렸네. 더 아껴뒀어야 하는데."

춘추는 아까운 듯 쩝 입맛을 다셨다.

 

나카노에는 춘추가 이미 그와 오오아마의 사이를 눈치채고 있는 것에도 놀랐지만, 그보다 놀란 것은 춘추가 오오아마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에 놀랐다.

나카노에는 오오아마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오아아마는 어려서부터 나카노에를 졸졸 따랐고 나카노에가 소가 가문을 참살하고 실세가 되도록 지략을 짜서 그를 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오아마는 머리도 올리지 않고 여자에는 관심이 없고 나카노에하고만 잠자리를 했다. 나카노에에게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지만 오오아마는 늘 나카노에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오아마

?”

너는 혼인을 해서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

오오아마는 갑작스러운 나카노에의 질문에 의아해서 보았지만 이내 그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난 형만 있으면 돼. 형의 아이가 내 아이인걸.”

나카노에는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헌신한 오오아마를 의심하는 것이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춘추의 말이 머리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비담의 처소에 들어선 춘추는 방안에 진동하는 가휘향에 눈쌀을 찌푸렸다.

"오오아마가 뭐래?"

"뭐고 자시고... 가휘향때문에 정신이 어지럽던데?"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니가 가르쳐준대로 했지."

춘추는 오오아마의 행동을 예상은 했었지만 기분이 상해서 중얼거렸다.

"... 그형에 그동생이군."

"? 나카노에가 왔었어?"

비담의 날카로운 물음에 춘추는 아차 싶었지만 숨길건 없다 싶어서 이야기했다.

". 나한테 반했나봐. , 질투나?"

"아니, 질투는 무슨... 너가 뭐라고... 근데 그형에 그동생이라니..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

관심없는 척 하면서 꼬치꼬치 물어보는 비담에게 춘추는 약이 올라서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손을 잡던데."

"뭐야? 이자식이 감히 누굴 건드려?"

눈이 뒤집혀서 벌떡 일어나서 칼을 들고 나가려는 비담을 춘추가 당황해서 잡았지만 비담은 홱 뿌리쳤다.

춘추는 뒤에서 비담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아 그만해. 아무 일 없었어. 내가 그냥 당했을거 같아?"

그제서야 비담은 씩씩거리며 칼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놈들이 신라의 왕족을 뭘로보고... 감히 어디다 들이대?"

"어차피 그 둘을 갈라놓으려면 당분간 좀 더 들이대게 놔둬야 할것 같은데."

춘추는 비담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분간 너는 오오아마가 부르면 거절하지 말고 만나줘."

"너는 나카노에를 만나고? 그딴 수작 하려고 날 데리고 온거야?"

어이없어하는 비담에게 춘추는 냉정하게 말했다.

"목숨을 빼앗는 것만이 전쟁은 아냐. 마음을 빼앗는 것도 전쟁이지. 우리는 전쟁을 하고 있는거야. 정신 바짝 차려."

그때 신라로부터 타고 온 배의 선장이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항구에서 나카노에황자의 명 없이는 배에 오를수도 출항을 허가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춘추와 비담은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마주보았다.

"올때는 사신이었지만 이제는 볼모라는 말이군."

춘추가 쯧쯧 혀를 차며 말하자 비담이 말했다.

"밤에 몰래 배를 빼앗아서 돌아가면 되잖아."

"배를 하나 빼앗는다해도 신라의 배는 크고 속도가 느리니 다시 붙잡혀올껄."

"그럼 어쩌자는거야?"

"후일을 도모하고 방법을 찾아보자. 어차피 나카노에와 오오아마는 신라에 위협이 될 자들이니 미리 작업을 하고 돌아가는게 좋겠어."

춘추는 상 위에 놓인 백제산 찻잔에 차를 다시 채웠다.

 

비담은 내키지 않았지만 춘추가 하라는 대로 선물을 들고 오오아마를 찾아갔다.

"지난번에 몸이 좋지 않아 결례를 하였습니다."

오오아마는 뜻밖의 방문에 놀랐지만 환히 웃으며 비담을 맞았다.

"천만에요. 몸이 나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신라의 화랑이나 검술에 대해 궁금한게 많았는데 잘 오셨어요."

비담은 또다시 몸을 휘감는 가휘향에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면서도 짐짓 태연한 척 자리에 앉았다.

"저는 화랑도 아니고 검술도 보잘것 없는 일개 무사이옵니다."

슬쩍 물러서는 비담에게 오오아마는 생긋 웃으며 다시 매화주를 권했다.

"분명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었는데 계속 감추실건가요?"

"감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날 대전에서 오오아마 황자님이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나카노에 황자님에게 죽었을 것입니다."

비담의 칭찬에 오오아마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듯 웃으며 비담에게 더욱 바짝 다가 앉았다.

"정말로 제게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알려주실건가요?"

비담은 오오아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며 대답했다.

".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춘추는 나카노에를 찾아갔다.

"어찌해서 출항을 허락하지 않으신겁니까?"

"당연히 왜국의 영토를 떠날 때는 내 허락이 있어야 하오. 나는 그대와 함께 더 오래 있고 싶은데 공의 생각은 어떻소?"

춘추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카노에의 눈을 바라보았다.

"제게 마음이 있으신겁니까? 제가 여기 머무른다면 제게 뭘 해주실 수 있나요?"

춘추의 말에 나카노에는 다가가서 춘추의 어깨를 잡았다.

"그대가 왕위계승자라고는 하나 세력으로는 상대등 비담이 우위라고 들었소. 비담을 무찌를 군사를 내가 빌려주겠소."

"오오아마황자도 같은 생각일까요?"

"내 동생은 내 오른팔이나 다름 없으니 걱정할 것 없소."

그러나 춘추는 나카노에의 서선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오오아마황자는 제가 왕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아보이던데요. 오오아마황자에게 직접 제 뜻을 전하고 황자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오오아마는 비담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자 다가 앉아서 그의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몸이 정말 단단하시네요. 무사의 몸이군요. 저는 무예를 배운 적이 없어서 몸이 부드럽답니다."

그러면서 오오아마는 비담의 손을 자신의 몸으로 끌고 갔다.

비담은 어정쩡하게 몸을 뒤로 물렸지만 오오아마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며 비담의 손을 더욱 자신의 몸 안쪽으로 이끌었다.

오오아마의 숨결이 비담의 목에 느껴질 정도로 가까와졌을 때 갑자기 미닫이 문이 휙 열렸다.

나카노에는 방안으로 들어서서 비담의 무릎에 앉아서 그과 엉켜있는 오오아마를 보고 날카롭게 물었다.

"이자와 여기서 뭘하고 있는거지?"

오오아마는 당황해서 풀어진 옷매무새을 수습했다.

춘추는 뒤에서 그런 오오아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해하지 마, . 그자의 정체를 염탐하고 있었던 것 뿐이야. 분명히 그자는 실력이 뛰어난 단련된 무사이고, 왜국을 염탐하기 위한 비밀임무를 가지고 신분을 속이고 있는것 같아."

나카노에는 이마를 찡그렸다. 오오아마의 말을 믿었지만, 오오아마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안겨 있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고, 그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혜로운 혈육은 도움이 되면서도 불안한 존재이죠.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수 없으니까요."

춘추의 말이 다시금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나카노에는 어렸을 적부터 겁이 많고 자신에게 의지하던 오오아마를 떠올렸다.

"무서워 형... 소가가문이 우리를 반역죄로 몰아서 죽일거야. 어떡하지?"

소가가문의 대신들이 세를 과시하며 그들 형제를 위협할 때마다 울먹거리며 나카노에에게 매달리던 어린아이였다.

"걱정하지 말고 형만 믿어. 그자들을 모두 쓸어버릴테니."

나카노에가 안아주며 달랠때마다 안심한 듯 눈물을 닦으며 미소짓던 오오아마가 갑자기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너 아주 그녀석한테 푹 빠져있더라? 재미 좋았어?"

화를 억누르며 빈정거리는 춘추에게 비담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니가 시켰잖아. 난들 그녀석이 좋아서 그러고 있었겠냐?"

"받아주라고 했지 붙어먹으라곤 안했잖아."

"니가 빨리 왔어야지. 계속 달라붙는데 밀어낼수도 없고 어쩌라고. 그리고 내가 뭘하던 니가 무슨 상관인데?"

"여왕폐하를 연모한다면서 적국의 황자와 놀아나는게 신하의 도리야?"

"어쭈? 너는 혼인까지 하고 나카노에 녀석을 홀려보려고 꼬리치고 다니면서 뭐?"

비담과 춘추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서로 씩씩거리며 노려보았다.

"관두자. 우리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거니."

침묵을 깨고 춘추가 말했다.

"그래. 뭐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고. 니가 그런 녀석인거 하루이틀일도 아니고."

끝까지 빈정거리는 비담을 춘추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내 기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신라의 신하라는 것만 잊지 말자. 여왕폐하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만 기억해."

비담은 풀이 죽은 춘추를 보자 마음이 약해져서 괜히 다시 성질을 냈다.

"그니까 빨리 신라로 돌아가자니까. 여기서 뭐하는 짓이야. 고생만하고."

춘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나카노에와 오오아마 정도는 쉽게 요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담이 얽혀들어가니 춘추는 자신이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며칠 후 춘추는 나카노에의 사냥에 초대되었다.

"사냥과 같이 위험한 행사에 초대한다는 건 필시 함정이 있을거야. 조심해."

비담의 말에 춘추는 골똘히 생각끝에 말했다.

"함정에 빠뜨리려는 사람이 과연 너일까 나일까?"

"당연히 너 아니겠어? 나같은 일개 무사를 함정에 빠드려서 뭘하겠어."

그러나 춘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난번 일로 나카노에가 너를 벼르고 있을거야. 나는 걱정하지 말고 너나 조심해."

 

말에 오를 준비를 하는 춘추에게 나카노에가 다가왔다. 등에는 화살통을 메고 칼로 무장한 나카노에와 달리 춘추는 빈손이었다.

"사냥을 가면서 무기도 챙기지 않고 오다니요."

"어차피 다룰 줄 모르니 짐이 될 뿐입니다. 도망가려면 몸이라도 가벼워야죠."

춘추는 어깨를 으쓱 하며 농치듯이 대답했다. 나카노에는 껄껄 웃으며 춘추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요즘같은 이른 봄에는 멧돼지가 굶주려있어 흉폭하기로 유명하니 조심해야 합니다. 내게 바짝 붙어있는 것이 좋을거요, 춘추공."

나카노에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춘추는 말없이 목례로 답했다.

비담은 열이 확 받았지만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오오아마가 춘추와 나카노에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춘추는 나카노에와 함께 앞서나갔고, 비담은 자연스럽게 뒤로 처진 오오아마에게 다가갔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오오아마는 복잡한 표정이었지만, 비담이 말을 걸자 이내 표정이 밝아 졌다.

"지난번에는 결례를 하였네요. 갑자기 형이 오는 바람에 술자리를 급히 파하게 되었네요."

"아닙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제가 술을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담의 말에 오오아마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생긋 웃었다.

"불러만 주신다면 오오아마는 언제든 좋아요."

그때 풀숲에서 갑자기 산처럼 거대한 멧돼지가 뛰쳐나왔다. 멧돼지에게 놀란 말이 오오아마를 떨어뜨렸고, 멧돼지는 다시 흙먼지를 일으키며 난폭하게 오오아마를 향해 달려왔다.

오오아마가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순간, 비담이 쏜 화살이 날아와서 멧돼지에게 박혔다. 폭주한 멧돼지가 오오아마에게서 돌아서자, 비담이 다시 검을 빼들고 멧돼지에게 올라타서 급소를 찔렀다. 멧돼지는 비명을 지르며 큰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비담은 얼굴에 튄 멧돼지의 피를 쓱 닦고 오오아마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피묻은 손을 옷에 슥슥 닦고는 손을 내밀어 오오아마를 일으켜주었다.

오오아마는 놀라서 얼이 빠져 덜덜 떨면서 비담에게 기댔다. 비담이 오오아마의 등을 쓸어주며 안심을 시키고 있을 때, 나카노에와 춘추가 말을 달려 도착했다.

"무슨일인가."

나카노에의 날카로운 물음에 비담이 멧돼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멧돼지가 오오아마황자를 공격하여, 제가 잡았습니다."

나카노에는 말에서 내려 죽은 멧돼지를 살펴보았다.

"특이한 검법이로군. 신라 화랑이 쓰는 호국검법이 아닌데. 어디서 배운 검법인가?"

나카노에는 비담에게 다가갔다.

"칼자국이 이렇게 반대방향으로 나려면 검을 어떻게 잡는지 궁금하군."

나카노에는 칼을 뽑아 비담의 목을 겨누었다.

"그대가 바로 역검을 쓴다는 상대등 비담이었군. 그대의 검법을 보여주게."

오오아마는 놀라서 비담을 쳐다보았다.

"상대등 비담? 그대가?"

오오아마는 나카노에에게 말했다.

", 이분은 나를 구해주었으니 예를 갖춰줬으면 해."

그러나 나카노에는 오오마아의 말을 무시하고 기분나쁜 듯 비담에게 말했다.

"신분을 속이고 왜국에 온 것 부터가 첩자노릇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뭐겠는가? 어서 칼을 뽑으시게."

춘추가 입을 떼려는 순간, 비담이 손을 들어 막고 먼저 말했다.

"상대등 비담, 나카노에황자에게 인사드립니다. 어차피 저도 나카노에 황자의 무공을 보고 싶었습니다. 황자의 무공은 신라에까지 소문이 났으니까요."

비담은 말없이 자신에게 안겨있는 오오아마를 떼놓고 허리에서 칼을 뽑았다. 비담의 칼은 가볍고 길이가 짧았지만, 나카노에의 칼은 길이가 길고 무거웠다. 비담의 공격이 번번이 나카노에의 칼에 막힌 반면에 나카노에의 칼은 위협적으로 비담의 몸에 가까이 갔다. 나카노에의 칼이 움직일 때마다 칼끝에 비담의 옷에 칼자국이 났다. 마침내 십여합만에 나카노에의 무거운 칼에 비담의 칼이 부러지고 말았다.

나카노에는 비웃듯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까지가 한계로군. 신라의 검술이나 신라의 칼이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더니."

비담은 분한 듯 나카노에를 노려보았지만 춘추는 서둘러 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역시 나카노에 황자의 검술은 듣던대로 대단하십니다. 상대등이 나카노에 황자의 무공과 비견될 것을 걱정하여 신분을 속인 것이니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춘추의 말에 나카노에는 기분이 좋은 듯 웃었지만, 비담을 어찌 처리할지 잠시 고민했다. 꼬투리를 잡았는데 이대로 곱게 비담을 놓아주기에는 뭔가 아쉬운 면이 있었다.

그때 오오아마가 다시 나섰다.

"상대등이 다른 마음을 먹고 왜국에 왔다면 나를 구해줬을 리가 없잖아."

나카노에는 오오아마를 의미심장하게 보더니 말없이 뒤돌아서서 자신의 말에 올랐다.

 

"비담을 시험하려고 멧돼지를 풀어놓은거야?"

신경질적으로 묻는 오오아마의 질문에 나카노에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비담이 자신의 무술실력을 발휘하지 않았겠지."

오오아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는 나카노에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화를 참으며 다시 말했다.

"그의 실력이 보잘것 없었다면 내가 죽을수도 있었겠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했어?"

"그자가 실력을 감추고 있다는 건 네 생각이었잖아. 나는 부하들에게 비담에게 멧돼지를 몰아보내라고 했을 뿐이야. 네가 그자와 같이 있을 줄 몰랐지. 어째서 늘 둘이 붙어다니는거야?"

오오아마는 오히려 따지듯이 묻는 나카노에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자들을 언제까지 여기 잡아 놓을 생각이야? 신라에서 그들을 돌려보내라는 전갈이 계속 오고 있는데."

나카노에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서 비담과의 결투로 인해 생긴 검날의 상처들을 쓸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돌려보내지 않으면 이를 구실로 김유신이 쳐들어 올 수도 있으니 보내긴 해야겠지. 우선 한명만 보내주고... 상황을 지켜보자구."

오오아마는 나카노에가 춘추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고, 김춘추를 어서 나카노에와 떼어놓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생각엔 신라는 비담이 실세를 잡고 있으니 김춘추는 돌려보내서 비담이 없는 틈에 세력을 키우도록 하는게 좋을것 같아. 둘의 세력이 갈라져서 다투도록 해야 우리한테 좋을테니."

그러나 나카노에는 춘추를 계속 옆에 두고 싶었다.

"글쎄... 내 생각엔 김춘추를 잡아두고, 그 사이에 춘추를 후계자로 밀고 있는 여왕을 비담이 몰아내고, 왕이 되도록 비담을 부추켜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나서 김춘추가 다시 반란을 일으킨 비담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우리가 군대를 보내서 춘추를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서 신라를 먹는 것이 좋겠어."

오오아마는 나카노에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춘추에게 집착하는 것을 알게 되자,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손앞에 있던 꽃병을 집어서 벽에 던져 버렸고 꽃병은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나카노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오오아마를 바라보았고 밖에 있던 시종도 놀라서 달려왔다.

 

 

"오오아마황자님이 많이 놀라셨나봅니다. 저때문에 다투신건 아니겠지요?"

"그대의 귀에까지 들어간건가?"

나카노에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왜의 궁 한가운데서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정보를 입수하는지 춘추의 수완에 혀를 찼다.

"한번도 다툰 적 없는 의좋은 형제사이에 고성이 오간 것이 처음이니까요."

춘추는 나카노에를 위로하듯 다가가서 팔에 살풋이 손을 올렸다.

"결속을 위해서는 혼례만한 것이 없지요. 따님을 오오아마에게 시집보내서 그를 감시하고 그의 아이를 낳게 하면 공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듣자하니 우노노사라라 왕녀가 가장 영특하다고 하던데요."

"그 아이는 이제 겨우 13살인데... 아이나 낳을 수 있을까"

나카노에는 눈썹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빨리 2세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오아마의 지략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재원을 보내지 않으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노노사라라는 어렸지만 언니들보다 눈치도 빠르고 언변이 뛰어났다. 춘추의 말대로 그녀라면 오오아마를 잘 설득할 수도 있고, 오오아마의 심리를 빨리 파악하여 정보를 줄 수 있을것 같았다.

"내 딸 4명을 모두 오오아마에게 보내면 되겠군. 어느 딸이라도 빨리 후손을 낳으면 그만이니."

나카노에의 말에 춘추는 어이가 없어서 미소만 빙긋 짓고 말았다.

 

나카노에는 우노노사라라를 포함한 자신의 4명의 딸들과 혼인할 것을 오오아마에게 명했다.

"어째서 나를 혼인시키려는거야? 내겐 아내는 필요 없어. 내게 필요한 사람은 형 뿐이야."

오오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카노에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나카노에는 냉랭하게 말했다.

"너도 이젠 후사를 보아서 황실의 인원을 늘려야 하지 않겠니? 내 딸들과 결혼해서 내 자식들을 늘려주는 게, 네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이야."

나카노에의 뒷모습을 보며 오오아마는 분을 참지못해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고 춘추에게로 향했다.

"네가 감히 형과 내 혼사를 논해?"

춘추는 개의치 않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오지랍이 넓어 형제의 의를 돈독히 하기 위해 중매를 선 것 뿐입니다. 제게 고마와할 줄 알았는데... 형의 눈치를 보느라 혼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요?"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춘추는 오오아마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사실은 형을 죽이고 왕이 되고 싶지?”

춘추의 말에 오오아마는 차갑게 대꾸했다.

웃기지 마. 난 너같이 권력에 눈이 먼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춘추는 개의치 않고 오오아마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형의 노리개가 되는 것만이 너의 목숨을 지키는 방법이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형의 등에 칼을 꽂을 생각인거야."

"네가 아무리 우리를 이간질하려고 해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어. 우리 형제는 한배를 탄 운명이야."

"하지만 언제까지 형이 널 좋아해줄까. 형의 아들은 커서 왕이 될테고 너는 늙어가는데.”

분해서 쌕쌕거리는 오오아마에게 춘추는 한걸음 다가가서 그의 귀에 속삭였다.

"오오아마, 내가 너의 욕망에 날개를 달아줄께. 난 네 욕망이 마음에 들어."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오오아마에게 춘추는 다시 귓속말을 했다.

"다른 왕녀들은 몰라도 우노노사라라는 아버지를 버리고 네 편이 될거야. 그애 역시 너 못지 않게 권력을 탐하니까."

오오아마는 자신을 보며 웃는 춘추의 웃음에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문을 홱 닫고 나왔다.

"김춘추... 이대로 두면 안되겠어."

오오아마는 이를 으드득 갈며 다짐했다.

 

오오아마는 춘추를 공격할 약점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춘추의 정적인 비담을 이용하는 것이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오오아마가 지금까지 둘을 지켜본 바로는 춘추와 비담은 정적이라기에는 이상한 관계였다. 늘 서로 의견이 안맞아 노려보며 티격태격하는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둘이 서로 공을 다투거나 권력을 다투는 느낌은 아니었다. 서로의 뒷통수를 노리면서 발톱을 감추는 관계라기 보다는, 어린애들끼리 투닥거리며 싸우고 노는 느낌이었다.

춘추가 왕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해보였지만, 비담은 그런 춘추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꺾어버릴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것은 춘추를 후계자로 삼은 신라여왕을 비담이 연모하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얘기했지만, 오오아마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비담이 같이 있을 때 춘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나, 나카노에가 춘추와 함께 있는 것을 보는 비담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을 떠올린 오오아마는 손가락을 딱 울리며 킥킥거리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랬었군. 어디 너도 똑같이 당해봐라, 김춘추."

 

"형은 상대등과 김춘추를 대립시켜 신라를 분열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무슨말이냐는 듯 보는 나카노에에게 오오아마는 손을 뻗어 창밖의 복숭아나무 가지에 핀 도화꽃을 쓸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둘이 서로 죽고 못하는 사이 같은데?"

"무슨 소리야? 상대등 비담이 여왕을 연모하는 것이 여기 왜국까지 소문이 자자한데 "

의심스러워하는 나카노에에게 오오아마는 도화꽃 가지를 꺾어 빙글빙글 돌리며 향기를 맡았다.

"직접 알아보면 되잖아?"

 

춘추는 늘 자신을 따로 불러서 만나던 나카노에가 어째서 비담과 같이 자신을 불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술상이 차려진 방안에는 나카노에 뿐 아니라 오오아마가 와 있었다.

나카노에는 춘추에게 연거푸 술을 따랐고 비담은 그런 나카노에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도 말이 없는 가운데 방안에는 이유없이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술이 서너잔 돌고 나서 나카노에는 비담을 도발하듯이 보며 춘추에게 말했다.

"춘추공이 왕이 되면 상대등의 세력을 춘추공이 다스릴 수 있겠소이까? 나는 왕권에 대항하는 소가가문을 몰살시켰소. 상대등의 세력이 왕을 능가하는데, 상대등을 쳐내지 않으면 그대는 상대등의 허수아비가 될 뿐이오. 그럴 수 없다면 신라는 상대등에게 넘겨주고 여기서 나의 신하가 되어 지내는 것이 어떻겠소?"

노골적인 나카노에의 말에 비담이 어이없어하며 입을 열려는 순간, 춘추가 먼저 말했다.

"상대등은 신라의 충성스러운 신하이며, 권력에 대한 욕심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카노에는 춘추의 말을 듣지 않고 비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김춘추를 여기 남겨둔다면, 상대등은 신라로 돌려보내주겠소. 그것이 그대를 위해서도 신라를 위해서도 더 좋지 않겠소?"

나카노에는 춘추의 팔을 잡아 확 끌어당겼고 춘추는 바람에 날려가는 꽃잎서럼 나카노에의 품에 끌려들어갔다.

비담은 마치 금방이라도 화산이 폭발할 듯이 뛰쳐 일어나 나카노에의 멱살을 잡아 날릴 기세였지만, 춘추는 제발 참으라는 듯 애원하는 눈빛으로 비담을 보며 고개를 저었고, 오오아마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듯 가소로운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무거운 정적을 깨고 비담이 말했다.

"신라는 여왕께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일개 신하로서 답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희는 더이상 머물 계획이 없고 사신으로 왔으니, 이제 신라로 돌려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답할 수 없다.... 김춘추는 내 뜻대로 해도 상관 없다는 말인가?"

나카노에는 더욱 춘추를 품으로 바싹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카노에의 입술이 춘추의 귓볼을 지긋이 깨물었다. 후우 한숨을 몰아쉬며 분노를 삭이는 비담을 비릿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나카노에에게 춘추가 말했다.

"저는 황자님과 이곳에서 지내는 것도 좋습니다. 비담공이 신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출항허가증을 주시지요."

다들 놀라서 춘추를 보았지만 춘추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카노에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비담은 거칠게 의자를 콰당 밀치고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오오아마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두사람을 노려보다가 이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나카노에는 춘추를 보며 물었다.

"무슨 속셈이지? 그대가 왕좌를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비담을 연모하여 그를 살리기 위해서인가?"

"왕좌를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죠."

춘추는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춘추는 깨진 그릇이며 부서진 가구들로 난장판이 된 비담의 방안으로 들어서며 비담에게 나카노에가 써 준 출항허가증을 내밀었다.

"일단 이걸 가지고 먼저 배를 타고 있어. 난 오늘 밤에 알아서 뒤쫒아 갈께."

"나케노에가 널 보내줄 것 같아? 그 자식이 안아주니까 좋냐?"

화가 나서 죽일듯이 노려보는 비담에게 춘추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질투하는거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께."

춘추의 말에 비담은 기다렸다는 듯이 울분을 쏟아냈다.

"질투 좋아하네. , 너 신라의 왕이 되겠다면서 무식한 오랑캐녀석에게 아양이나 떨고, 신라의 국격을 그렇게 떨어뜨리고 다녀도 되는거야? 완전히 나라망신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 너 왕족이 그렇게 천박하게 행동하고 다닐 수가 있냐?"

춘추는 말없이 비담에게 다가가서 그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비담은 얼어붙은 듯 있다가 춘추의 손을 홱 뿌리치고 노려보았다.

하지만 비담은 이내 다시 춘추의 허리를 안고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뿐이야, 비담. 알잖아."

춘추의 숨가쁜 속삭임에 비담은 이를 갈며 말했다.

"뻥치지 마. 너같이 헤픈 녀석한테 속을 줄 알아?"

그러나 말과는 달리 비담은 춘추를 침대에 쓰러뜨렸다.

"너같은 녀석은 진짜 혼나야 돼."

옷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비담의 손길에 춘추는 신음을 흘렸다.

"어서 혼내줘. 빨리."

 

날이 어두워질 무렵 오오아마는 자신을 방문한 춘추에게 질투를 숨기고 비아냥거리며 약을 올렸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그렇게 잘난척 하더니만."

춘추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신라로 돌아가길 바라지?"

오오아마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말했다.

"휴전 제의인가?"

춘추는 오오아마를 보며 차갑게 미소지었다.

"나하고 전면전을 하고 싶지 않으면 내가 신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는게 좋을거야."

오오아마는 먼곳을 보며 딴전을 피웠다.

"글쎄... 형이 너를 보내주고 싶어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나서겠어."

춘추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보내주지 않으면, 나도 계속 네 형에게 눌러붙어서 왜국의 정치에 관여할 수 밖에 없어."

그제서야 오오아마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씰룩거렸지만 이내 마지못해 대답했다.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네 가마를 빌려줘."

오오아마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시종을 불러 가마를 대령하라고 일렀다. 춘추는 나가다 말고 뒤돌아서며 말했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 신라는 언제든 너와 손잡을 생각이 있어, 오오아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춘추는 오오아마의 가마를 타고 무사히 궁을 빠져나와 비담이 기다리고 있는 배에 올라탔다.

비담과 춘추가 신라로 돌아간 후, 오오아마는 나카노에의 4명의 딸과 차례로 결혼하였고 그중에는 우노노사라라 왕녀도 포함되었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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