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만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춘추는 정계에 나서지 않고 여전히 한가로이 풍류에 젖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서라벌 세력가들의 여식들이나 부인들과 청유를 다니거나 잔치를 열어 사람들을 불러모아 구경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미 보량궁주와 혼인했지만 아름답고 다정하면서 예의바르고 말솜씨가 뛰어난 춘추에게 많은 서라벌 여인들이 반해있었다.

보량은 늘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춘추가 걱정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춘추가 그들의 마음을 얻을 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들리는 이야기는 보량으로서도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춘추가 유신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유신의 여동생 보희를 자주 만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여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보량은 신경이 쓰였다.

공께서 유신공의 여동생 보희와 자주 어울리신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보량이 어렵게 꺼낸 말에 춘추는 아무일 아니라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보희는 유신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우연히 같이 본 것 뿐입니다. 우리가 혼인하던 날 내가 하던 말 기억하십니까.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믿고 따라주겠느냐 했지요. 부인께서는 그러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게는 부인 외에 다른 여인도 다른 아내도 없을 것입니다.”

보량은 춘추의 속을 알 수 없었지만 춘추가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유신의 골치를 썩이고 있는 것은 보희보다도 둘째 여동생 문희였다. 춘추가 유신을 보러 온다는 핑계로 뻔히 유신이 집에 없을 시간에 드나들며 여동생들을 만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희는 몸가짐이 바르고 수줍어서 춘추가 집에 찾아와도 인사만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지만, 문희는 춘추에게 떨어질 줄 몰랐다. 뿐만 아니라 춘추가 청유라도 간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가 있는 곳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여동생이 혼인을 한 남자와 가까이 지낸다는 소문이 나는 것은 자존심 강한 유신으로서는 부끄러운 수치였다. 아무리 문희를 혼내도 문희는 아랑곳 하지 않았고, 마침내 참다 못한 유신은 춘추에게 말했다.

춘추공께서는 혼인을 하신 몸으로 어찌 문희를 가까이 하시는 것입니까. 남부끄러운 일이니 저희집에 찾아오시는 것을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춘추는 도리어 유신에게 부탁했다.

문희가 나를 쫒아 다니는데 내가 피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유신공께서 문희를 잘 타일러 주시지요.”

유신은 부끄러움과 분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유신은 문희를 불러 진지하게 타일렀다.

이미 혼인을 한 춘추공을 쫒아다니다니 네가 어찌 가문에 먹칠을 하려 드느냐.”

그러나 문희의 결심은 굳었다.

춘추공은 왕위에 오르실 분입니다. 왕이 되시면 어차피 후궁들을 두시게 될텐데 한시라도 빨리 인연을 맺어 장자를 얻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유신은 화를 내며 문희를 꾸짖었다.

폐하께서 계신데 어찌 그런 불경한 말을 하는 것이냐. 그리고 네 어찌 왕족의 피가 흐르는 몸으로 후처의 자리로 가려 하는 것이냐.”

문희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차 왕의 어미가 될 수도 있는 자리가 아닙니까. 그리고 오라버니, 춘추공께서도 우리 가문과 혼인을 하실 요량이시니 우리집에 자주 드나드시는 것입니다.”

춘추공은 네게 관심이 없다고 하셨다. 소용없는 일이니 더 이상 공을 귀찮게 쫒아다니지 말거라.”

문희도 알고 있었다. 춘추가 유신의 가문과 혼인을 위해 관심을 두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언니 보희였다.


춘추는 유곽에서 기다리겠다는 보희의 서찰을 받고 염종의 유곽으로 향했다. 그러나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보희가 아니라 문희였다.

보희언니가 아니라 실망하셨습니까.”

문희는 물음에 춘추는 대답없이 웃을 뿐이었다.

공께서는 어째서 저보다 언니를 취하려 하시는지요. 제가 언니보다 미모나 지혜나 여인으로서의 성품이 떨어진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대처럼 총명하고 용기있는 여인은 내게는 과분하오.”

춘추는 다정하지만 뼈가 있는 말투였다.

저를 공의 뜻대로 다스리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문희는 굴하지 않고 춘추에게 거듭 자신을 받아주기를 청했다.

공께서는 사랑할 여인이 아니라 충성스런 신하를 원하고 계신 듯 합니다. 제가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면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결코 공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따를 것입니다. 보량궁주를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황후로 삼으신다 해도 따를 것입니다. 저희 가문과 유신 오라버니가 공을 주군으로 섬기도록 만들 것입니다.”

문희의 당돌한 말에 춘추는 제법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몇 달 후 유신은 문희가 춘추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어머니의 말에 펄쩍 뛸듯이 놀랐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어찌하겠느냐. 춘추공에게 후처로라도 문희를 시집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어머니의 성화에 유신은 하는 수 없이 춘추를 찾았다.

문희가 춘추공의 아이를 가졌으니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춘추는 유신의 속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말했다.

문희가 사정하여 하루밤 같이 보낸 것 뿐입니다. 게다가 난 이미 병부령 설원공의 가문과 혼인을 한 몸입니다. 보량궁주 외에 다른 여인을 맞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보량궁주는 제가 설득할 수 있지만 설원공과 한 가문간의 약조와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유신은 상처받은 자존심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비담은 춘추가 요즘 유신에게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을 아는 터라 춘추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랐다.

어쩐 일이야? 하루걸러 하루씩 유신의 집에 드나든다더니만…”

아무래도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왔어.“

춘추는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문희가 내 아이를 가졌어.”

?”

문희와 혼인을 해야겠는데 설원공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꺼야.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유신과 설원공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비담은 어이가 없어서 킥킥 웃었다. 이미 혼인한 춘추였지만 그가 여인과 관계를 갖고 마음을 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아프게 느껴졌다.

내가 왜 네 도둑결혼을 도와줘야 하는데?”

춘추는 삐딱하게 웃는 비담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내가 문희를 취해서 유신을 내 사람으로 만들면… 폐하의 곁에는 너만 남게 되잖아. 안그래?”

그래서 네가 문희와 혼인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싫어?”

싫을 이유가 없었다. 없어야 했다. 그러나 비담의 마음은 생각과 달리 자꾸만 무겁게 가라앉아갔다.

춘추는 대답없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 비담을 바라보다 그에게 물었다.

넌 폐하랑 잘 지내?”

응 뭐… 폐하께서 워낙 바쁘시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야기하는 비담을 바라보는 춘추의 마음도 아려왔다. 비담이 덕만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비담이 덕만과 잘 되는 것도 싫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고 무엇 때문에 비담을 찾아왔는지도 잊어버렸다.


유신의 집에 비담과 염종이 찾아왔다. 유신은 그들을 위해 술상을 봐오도록 했다. 셋은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염종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유신공..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뭘 말인가?”

이미 온 저자거리에 소문이 났습니다. 문희낭자께서… 춘추공의 아이를…”

유신은 수치심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염종은 유신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유신공께서 춘추공에게 문희를 받아달라고 사정사정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닥치시오!”

유신은 눈이 뒤집힐 듯 흥분하여 칼을 뽑아들었다.

문희는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으니 죽어 마땅할 것이외다. 내 손으로 직접 벨 것이오.”

비담은 문희의 방으로 향하는 유신을 막아서고 칼을 뽑아든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진정하게, 유신. 자네가 문희를 벤다고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겠나.”

옆에서 염종도 거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화형을 시키시면 모를까… 뭐… 그러면 아무도 감히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못하겠지요.”

염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신은 하인을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당장 마당에 커다란 장작불을 피우거라! 그리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라!”


덕만은 병부령 설원공과 함께 신라군의 군사훈련 현황을 시찰하고 궁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덕만은 가마의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유신공의 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화재가 난 것이냐?”

놀란 덕만의 물음에 신하는 대답했다

알아보고 오도록 하겠사옵니다.”

덕만은 가마를 멈추도록 하고 가마에서 내려 연기가 피어오르는 유신의 집을 바라보았다.


몰려든 사람들을 헤치고 덕만의 일행이 유신의 집 마당에 도착했을 때는 문희를 장작불에 던지려는 유신을 비담이 간신히 말리고 있었다. 유신은 덕만을 보고 흠칫 놀라 예를 갖추었다.

대체 무슨 일이요. 공의 여동생인 문희를 불태워 죽이려 한다니.”

덕만의 물음에 유신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희가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기에 단죄하려 한 것이옵니다.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혀드려 송구하옵니다.”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덕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춘추를 바라보았지만 보량이와도 그런식으로 혼인한 춘추였기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덕만의 군사훈련에 춘추가 따라나선 것도 미리 계산된 일인 듯 했다. 덕만은 유신에게 말했다.

유신공의 마음은 알겠으나 그런 일로 공의 여동생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은 가엾은 일이오. 춘추가 문희와 혼인을 하면 되지 않겠소.”

그말을 듣자 설원공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때까지 남의 일인 양 잠자코 있던 춘추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하오나 저는 이미 병부령의 여식인 보량궁주와 혼인한 몸입니다. 다른 가문과 혼인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설원공은 춘추의 말에 다소 안도하며 다시 덕만을 바라보았다. 덕만은 춘추의 마음을 읽기 위해 잠시 춘추의 눈을 바라보았지만 희미하게 웃고 있는 춘추를 보고 이내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병부령. 아무래도 그대가 양해를 해주어야 할 듯 하오. 춘추가 문희를 후처로 맞아들일 수 있도록 허락해주겠소? 내 친히 그대에게 부탁하리다. 문희의 뱃속에 있는 아기는 왕족이며 내 조카손주이기도 한데 이대로 불에 타죽도록 할 수는 없소.”

비담도 설원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문희는 후처일 뿐 황후의 자리는 보량궁주의 것이 될 테니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폐하의 명이니 받아들이시지요.”

설원은 하는 수 없이 춘추와 문희의 혼인을 허하였다.


여왕폐하께서 문희와의 혼인을 명하시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구료.”

춘추의 말에 보량은 눈물을 글썽였다.

저 이외의 여인은 없을 것이라 하셨는데 어찌 문희가 공의 아이를 가진 것입니까. 어찌하여 저를 속이신 것입니까. 처음부터 문희에게 마음이 있으니 후처로 들이고 싶다고 하셨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서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부인과의 약조를 지키고 싶었소. 비록 문희에게 잠시 끌렸다 하나 그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혼인을 할 마음은 없었기에 문희를 받아달라는 유신의 청을 거절했소. 폐하의 앞에서도 내가 혼인할 수 없다고 말씀드린 것을 그대도 알고 있을 거요. 내 비록 폐하의 명으로 문희와 혼인하지만 앞으로도 당신은 내게 가장 소중한 여인일 것이오.”

춘추의 말에 보량은 그제야 눈물을 닦고 춘추의 품에 안겼다.


설원공과 보량을 달래어 무사히 치르게 된 춘추와 문희의 혼례식은 간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춘추와 문희가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던 중 문희가 비담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비담공의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춘추공과 혼인까지 하게 되었으니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비담은 비릿하게 웃을 뿐이었다. 춘추도 그들에게 다가왔지만 비담도 춘추도 둘 다 굳은 얼굴로 말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느낀 염종이 헤헤 웃으며 춘추에게 말했다.

비담공께서는 아직도 혼인을 못하고 있는데 춘추공께서는 두번이나 혼인을 하십니다그려. 비담공도 혼인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지요.”

대답이 없는 춘추 대신 문희가 웃으며 답했다.

힘이 닿는 한 그리 할 것입니다.”


며칠 후 춘추는 비담의 집을 찾았다. 자신을 경멸하는 듯 한 비담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었다.

고마워. 네 덕분에 유신의 가문과 혼인을 하게 되었어.”

비담은 무뚝뚝하게 춘추를 흘낏 볼 뿐 말이 없었다. 춘추는 다시 비담을 떠보았다.

이제 이모님 곁에는 너뿐이니 잘해봐.”

비담은 여전히 냉랭하게 말이 없었고 춘추는 비담에게서 뭐든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슬쩍 찔러보았다.

근데 넌 폐하와 맨날 일만하고 회의만 하면서… 그게 무슨 연모라고 할 수 있냐.”

그제야 비담은 불끈 하며 춘추를 돌아보았다.

그럼 니가 하고 있는 건 연모냐? 보량이와 문희를 가문을 보고 꼬셔서 혼인하는 거… 그게 연모야?”

“… 말했잖아. 내가 연모하는 건 너뿐이야.”

까불래? 니가 만나는 여자마다 그 말 하고 다니는 거 모를 줄 알아?”

난 언제나 너한테만은 진심을 이야기했어. 네가 믿지 않는 것 뿐이야.”

춘추는 조용하면서도 슬픈 어조로 말했지만 비담은 여전히 비아냥거릴 뿐이었다.

아 그래? 근데 어떻게 연모를 둘로 나눌 수가 있냐? 아니 넌 네가 편할대로 셋으로도 넷으로도 나누잖아.”

나눈적 없어.”

관두자.”

비담.”

춘추는 비담의 손을 잡았지만 비담은 매정하게 뿌리쳤다.

더러워.”

비담은 왜이렇게 가슴이 부글부글 끓는 것일까 생각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책상위에 있던 꽃병이 떨어져 산산조각 나며 깨졌다.

정말로 내가 왜 문희와 혼인을 해야했는지 모르는거야? 가야계 세력을 안심시키고 가야계와 신라계로 분열된 나라를 통합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너는 왜 폐하가 국혼을 안하시는지, 왜 너를 가까이하지 않으시는지, 내가 왜 보량이와 문희와 혼인을 해야 했는지, 정말 아무것도 이해가 가지 않아?”

춘추의 눈에서는 차가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담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 잘난 대의니 뭐니 하는 말 하려거든 집어치워.”

그래. 그 잘난 대의… 네가 한마디만 해주면… 나도 다 버릴 수 있어.”

춘추는 비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을 듯 손을 뻗었지만 비담이 또 뿌리칠까 차마 잡지 못하고 내렸다.

너만 나를 좋아해준다면… 다 버릴 수 있어. 폐하를 연모해도 좋아. 하지만 나도… 좋아해줘.”

비담은 춘추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마음을 다잡고 비꼬았다.

난 너처럼 연모를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그렇게까지 연극하지 않아도 너를 적으로 돌리지는 않을 테니 걱정마.”

네가 날 믿지 않아도… 난 네가 좋아.”

춘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깨어진 꽃병조각을 집어들고 자신의 손목에 내리쳤다. 붉은 피가 춘추의 손목에서 솟구쳤고, 비담은 놀라서 춘추의 팔을 잡았다.

무슨 짓이야?”

비담은 손목의 피가 멎도록 꽉 눌러 잡고 춘추를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피를 멎게 하는 약재를 찾아와 춘추의 손목에 바르고 천으로 단단히 감아주었다. 춘추는 창백해진 얼굴로 뭔가 말하려는 듯 자신을 치료해주는 비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도 내 진심을 못 믿겠어?’

비담은 그런 춘추를 기가 막힌 듯 보았지만, 힘없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그를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천천히 안아주었다.

그래. 진심이 아니더라도 또 속아 줄께.’

춘추는 비담이 자신을 안아주자 피곤한 듯 그의 어깨에 기대며 그제서야 편히 눈을 감았다.

정말 감당이 안되는 녀석이야.’

비담은 이렇게 생각하며 며칠째 가슴에 맺힌 답답한 응어리를 풀기 위해 다시 한번 깊이 숨을 내쉬었지만, 춘추를 가만히 안고 있노라니 무엇 때문에 춘추에게 화가 났었는지도 점차 잊어갔고 화가 났었다는 사실조차도 아득하게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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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르가 내일 입대하는군요

건강하게 잘 다녀오고 빨리 다음 작품을 시작했으면 좋겠네요


부모님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미모로 여인들을 유혹한다는 점에서 춘추는 서라벌 판 나쁜남자 인 듯...

선덕여왕 40회에서 춘추가 부군으로 나서기 위해 밤에 미실을 찾아가는 장면임


“어느게 먼저 생길까? 여자임금? 아니면 진골임금?”

춘추가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비담에게 노골적으로 털어놓은 후 비담은 더욱 머리가 복잡해졌다. 바로 내일이 덕만을 부군으로 추인할 것을 논의하는 화백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춘추가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 비담은 밤늦도록 춘추의 처소 밖에서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정이 지나도록 불이 꺼지지 않더니 춘추가 은밀히 처소를 나와 당도한 곳은 바로 미실의 집이었다.

“야심한 밤에 어쩐 일이십니까”

미실은 놀란 척 하고 있었지만 춘추를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비담은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갔지만 하인들이 지키고 있어서 지붕을 타넘어 미실의 처소로 간 후 창문을 통해 미실의 방 옆 복도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방 밖에 대기하던 하녀들이 자리를 비우도록 유인한 후 방 안으로 몰래 잠입해 들어갔다. 비담은 문갑 뒤에 몸을 숨긴 채 두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어느 정도 이야기가 오간 듯 했다.

“진골이신 춘추공께서 성골이신 덕만공주님을 이기실 수 있겠습니까.”

“당장은 승부를 가리기 어렵겠지만 시간을 끌 수 있겠죠. 그것만 해도 우리가 이득입니다.”

비담은 춘추가 속으로는 미실 일당을 해치우려고 마음 먹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태연하게 웃으며 적극적으로 미실에게 접근하는 춘추를 보자 오싹했다. 비담이 생각하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더 위험한 길을 가고 있는 듯 했다. 미실과 춘추가 손을 잡으면 덕만은 고립되고 말 것이었다. 또 춘추가 마음을 돌린다 해도 그렇게 되면 미실이 배신한 춘추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상황이 나쁘게 흘러갈 뿐이었다.

미실은 춘추와의 회담이 만족스러운 듯 깊이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럼 춘추공. 하나만 약조해주시겠습니까?”

“무엇을 약조해드리면 될까요?”

“춘추공께서 보량이와 친밀히 지내신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춘추공의 베필은 제가 정해드리는 여인으로 맞아주실 것을 약조해 주십시오.”

춘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새주께서 정해주시는 여인과 혼인할 것입니다. 새주를 어머니처럼 여기고 따를 터이니 잘 가르쳐 주십시오.”

춘추의 말에 미실도 자애로운 미소를 띄며 말했다.

“저 역시 춘추공을 아들처럼 여기고 성심을 다할 것입니다.”

두사람의 대화를 듣는 비담은 어이가 없어서 비웃음만 나왔다.

‘어머니를 죽인자를 어머니로 여기겠다고? 무서운 놈이군.’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춘추가 일어나려 하자 미실이 말했다.

“가시기 전에 만나보실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담이 있는 쪽을 보며 말했다.

“숨어있는 것 알고 있다. 어서 나오너라.”

비담은 놀랐지만 이미 들킨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비담이 문갑 뒤에서 나오는 것을 보자 춘추 역시 깜짝 놀랐다.

“비담? 네가 어째서 여기에…”

미실은 비담을 조롱하듯 말했다.

“덕만공주께 가서 네가 본 대로 고하거라. 춘추공께서는 이 미실과 한뜻이며, 덕만공주님을 부군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이다.”

비담은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내 미실을 보고 비죽 웃으며 말했다.

“춘추공. 조심하시지요. 새주님은 아들 따위는 언제든 버리실 수 있는 분이니까요.”

이번에는 미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미실의 집을 나오자마자 춘추가 따져물었다.

“나를 감시한거야?”

비담도 질새라 춘추를 몰아세웠다.

“겨우 이런 것이 네가 생각한 수냐? 미실을 등에 업고 왕이 되겠다? 넌 미실의 꼭두각시가 되고 말거야.”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누가 누구의 꼭두각시가 되는지.”

춘추는 교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모님보다 먼저 미실을 무너뜨리면 어떻게 할래? 그러면 나를 인정할거냐?”

“미실을 무너뜨려? 네가?”

비담은 말도 안된다는 듯 말했지만, 춘추의 대담한 행보를 보면 정말 미실을 무너뜨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가슴이 답답했다. 춘추가 천명공주가 당했듯이 미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까 걱정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춘추가 미실에게 당하는 것도 싫었다. 비담은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말을 돌렸다.

“아무튼 너 덕만공주님께 방해되는 행동을 가면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

춘추는 열이 확 오르는 것을 느끼며 덕만을 감싸는 이런 말이 나를 더욱 질투에 불타게 한다는 걸 비담은 아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생각했다.

“방해하면? 날 베기라도 할꺼야? 그랬다간 이모님이 널 가만두지 않을텐데.”

“누가 그랬는지 알게 뭐야. 나말고도 널 베어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잖아.”

비담의 냉정한 말에 춘추는 가슴이 찔린 듯 아파왔다.

‘그래.. 서라벌에 내편은 아무도 없지. 너도 나를 감시하기 위해 같이 다니는 것 뿐… 너한테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언제든 베어버리면 그만인 존재인거지.’

춘추는 말없이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비담은 의기양양하던 춘추가 갑자기 힘이 쭉 빠져서 가버리자 어쩔 줄 몰라 멀찍이 떨어져 따라갔다. 집 앞에 도착한 춘추는 비담을 돌아보고 말했다.

“언제까지 따라 다닐 거야?”

“내일까지 무슨 수를 꾸미는지 감시한다고 했잖아.”

비담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춘추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럼 들어와서 감시해”

비담은 춘추를 따라 들어갔다.

“심심한데 술이나 한잔 해.”

춘추는 매실주 한 병을 내왔다. 비담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았다.

“싫어.”

“그럼 나 혼자 마시지.”

춘추는 매실주를 한잔 따라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새콤한 매실향이 코끝을 스치자 종일 춘추를 미행했던 비담도 목이 말랐다.

“나도 한잔 줘봐.”

춘추는 피식 웃으며 비담에게 잔을 건넸다. 비담은 춘추의 잔을 받으며 물었다.

“정말로 미실이 정해준 여인과 혼인할꺼야?”

“글쎄… 어쨌든 상황을 봐서 필요하다 싶은 여인과 곧 혼인할꺼야.”

춘추의 말에 비담은 어쩐지 갑자기 술맛이 더욱 쓰게 느껴졌다.

“넌 혼인을 참 쉽게도 생각하는구나.”

비담의 비아냥거림에 춘추는 반박했다.

“쉽게 생각한다구? 내가 서라벌 세력가들의 수많은 여식들 중에 보량이를 가까이 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얼마나 많은 계산을 해봤는지 알기나 해?”

“네 감정은 생각하지 않아?”

비담과 춘추의 시선이 잠시 부딫쳤다.

‘내게 접근했던 건 뭐야… 그것 역시 나를 네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술수였던거냐…’

비담의 추궁하는 듯한 눈빛에 춘추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렇게 비난하는 눈으로 쳐다보지 마… 너무 아프잖아… 넌 내게 관심도 주지 않으면서…’

춘추는 비담의 눈길을 피하며 다시 비담의 잔에 술을 따랐다.

“혼인은 세력간의 결합이야. 유치한 감정 따위로 할 수 있는 게 아냐. 넌 정치의 기본이 안되어 있구나.”

비담은 자꾸 가슴이 답답해지는 듯하여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춘추가 누구와 혼인하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비담은 단호하게 말했다.

“난 내가 연모하는 사람과 혼인할거야. 그 사람이 반역자이든 왕이든…세력 따위는 상관없어.”

비담이 연거푸 두 잔을 들이키는 것을 보고 춘추가 말했다.

“내일 화백회의까지는 이모님께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야겠어.”

“뭐라구?”

비담은 점차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술에 뭘 탄거야?”

춘추는 소매에서 약을 꺼내 먹으며 말했다.

“술이 좀 독한가본데… 술깨는 약은 하나 밖에 없어서 말이야. 난 내일 화백회의에 가서 이모님께 반대표를 던져야 하니까 내가 먹을께.”

“춘추 너 이자식…”

비담은 춘추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죽여버리겠다구?”

춘추는 해사하게 웃었다.

“무서워서 내일 네가 깨어나기 전에 반드시 널 없애야겠는걸.”

비담은 불끈해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음 순간 주저앉으며 잠들어버렸다. 춘추는 그런 비담을 쓸쓸하게 바라보았다. 염종에게 내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반드시 죽여야 할 자라고 말했지만, 그리고 지금이 바로 아무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바보라고 혹은 비열하다고 손가락질해도… 너만은 나를 이해해줄거라는 느낌은… 그저 내 착각인걸까.’

하지만 춘추의 바램과 달리 비담은 만나기만 하면 춘추를 긁어대고 덕만을 따르지 않는 것을 비난할 뿐이었다.

‘나도 세상에 단 하나쯤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바로 너인데… 넌 어째서…’

춘추는 손을 꽉 쥐었다.

‘이미 내 길은 정해졌다. 아무도 내 뜻을 거스르지 못하게 할 것이다. 비담, 너 역시 언젠가는 내 것으로 만들고 말겠어. 네가 아무리 거부한다고 해도…’


비담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깨어났다. 이미 화백회의는 끝났을 것이고 결과가 어찌 되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비담은 한숨을 푹 쉬고 투덜거리며 일어나다가 자신의 옷이 온통 풀어헤쳐져 있는 것을 알았다.

‘무슨 짓을 한거야?’

비담은 자신의 몸을 살펴보다 곳곳에 춘추의 흔적을 발견하고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 자식이 정말… 미쳤나…’

비담은 옷을 추스르고 칼을 찾아 들고 화백회의 결과를 듣기 위해 염종의 유곽으로 향했다.


다음날 비담은 춘추가 훈육시간에 나타나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춘추는 제시간에 나타났다.

“너 부군으로 나섰다며? 게다가 골품제는 천박하다고 했다며?”

비담이 사납게 째려보며 다그쳤지만 춘추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응.”

“잘도 나를 속였겠다. 왜 나를 없애지 않았어?”

비담의 물음에 춘추는 대수롭지 않은 듯 흘낏 보며 말했다.

“너같이 속이기 쉬운 녀석은 언제든 해치울 수 있으니까.”

춘추의 말에 비담은 점점 더 약이 올랐고 하지 않으려던 말이 결국 입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너 그날 밤에 나한테 무슨 짓 한거야?”

춘추는 얄궂게 미소지으며 비담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네가 생각하는 그거…”

비담은 결국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야, 이게 좋게 좋게 봐주니까 정말…”

춘추는 칼을 뽑아들고 덤비는 비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너도 좋아했잖아…”

“뭐? 내가 언제…”

비담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춘추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 오늘 반쯤 죽을 줄 알아. 목검 들고 마당으로 나와.”

비담은 버럭 소리지르며 방문을 홱 밀치고 나갔다. 비담은 춘추가 핑계를 대며 도망갈거라 생각했지만 춘추는 순순이 목검을 들고 따라 나왔다. 비담은 사정없이 춘추를 공격했다. 춘추는 삼합도 받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미실을 무너뜨리겠다구? 앉아서 머리만 굴려서 그게 가능할 거 같아? 칼질 한번이면 모든게 끝이야. 네 목숨 하나 못 지키면서 누구를 치겠다는 거야?”

비담의 말에 춘추는 다시 검을 들고 일어섰다.

“내 목숨 걱정했다면 서라벌에 돌아오지도 않았어.”

“너 아직 뜨거운 맛을 덜 봤구나”

비담의 공격이 이번에는 춘추의 검이 아니라 몸을 향했고, 춘추는 가슴을 목검으로 얻어맞고 푹 쓰러졌다. 비담은 자신이 얻어맞은 듯 아팠지만 거칠게 말했다.

“너같이 약해 빠진 녀석이 뭘 하겠다는거야? 네가 진검으로 승부를 해봤어? 사람을 죽여봤어? 전쟁을 겪어봤어?”

춘추는 말없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일어섰다.

“네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나를 알려면 멀었구나.”

춘추는 씁쓸한 표정으로 비담을 보며 말했다.

“넌 네 목숨을 노리는 자들과 한 지붕 밑에서 살아 봤어? 부모가 죽임을 당해봤어? 네 손을쓰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계략에 빠뜨려 죽인 적 있어?”

비담은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춘추는 비담의 예상을 뛰어넘는 녀석이었다. 미실에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오히려 지금 가장 수세에 몰린 것은 춘추나 미실이 아니라 덕만인 듯 했다. 비담은 칼을 거두었다.

“이제 어쩔 셈이야?”

춘추는 어둡게 대답했다.

“미실과 이모님의 사람들을 빼내서 내 세력을 차근차근 늘려가야지.”

“어떻게?”

춘추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슬프게 들렸.

“보량이와 혼인한 후에는… 문희도 손에 넣을 꺼야.”

“유신을 네 사람으로 만들겠다?”

비담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지만 마음이 또다시 쓰려왔다. 이 아이는 대체 어디까지 달려가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런 춘추의 모습이 자꾸 안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또 비담의 가슴을 싸르르 아프게 만드는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네 세력을 키우는 가장 빠른 길은 네가 덕만공주님의 사람이 되는거야.”

비담의 말에 춘추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너를 연모하는데… 네가 연모하는 이모님에게 굴복하라구? 그것만은 내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

춘추는 검을 떨어뜨리고 돌아섰다.

‘보량이를 만나러 가는 것일까. 아니면 문희인가. 그게 아니면...’

비담은 머리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숨을 후 들이마쉬며 말했다.

경고하는데... 내손으로 너를 베고 싶지는 않으니 그럴 일은 만들지 마라.”

춘추는 희미하게 웃었다.

너야말로 이모님의 세력이 스스로 분열하기 시작할테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할껄.”

춘추가 떠난 텅 빈 연무장에 서있는 비담의 주위를 마른 모래바람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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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비추 엔딩(비담이 구귀족세력들을 제거하고 자폭하기 위해 거짓으로 난을 일으킴) 전날  장면에 해당하는 내용

나쁜남자가 3주째 결방을 하니 다시 비추가 그리워지네요

건욱태성라인도 기대되긴 하는데 태성이 건욱에 비해 캐릭터의 포스가 약하게 설정되어서 비추만큼 누가 이길지 흥미진진함은 덜할거 같아요


 

덕만은 병이 깊어가자 춘추에게 선위를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춘추를 지지하는 가야계와 신진세력들은 이를 환영했지만 비담을 지지하는 구귀족 세력들은 반발하였다. 춘추가 자신을 수나라로 쫒아보내고 천명공주를 죽게 만든 구귀족세력들을 그냥 두지 않을거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서라벌에는 조용한 가운데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덕만은 비담을 불러 말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구나.

비담은 이미 오래전부터 어의에게 덕만의 상태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덕만을 못보게 되는 날이 곧 올 거라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춘추를 잘 부탁한다.

덕만의 말에 비담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지만, 덕만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네가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의 사람들은 다르다.

폐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비담은 자신 때문에 덕만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폐하께 심려를 끼치지 않도록 제가 그들을 처리할 것입니다.

어찌할 생각이냐?

역심을 품은 자들을 제가 곧 모두 색출할 것입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내가 못다한 일을 네게 넘기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부디 조심하고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마라.

덕만은 비담이 어떤 과격한 행동을 할 것인지 걱정되었지만, 이미 판세는 얼마 남지 않은 덕만에게 주어진 시간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춘추는 비담의 전갈을 받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염종의 유곽도 있는데 한밤중에 집으로 부른 것을 보면 아무도 몰래 긴히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비담의 집은 상대등이라는 직위에 걸맞지 않게 한적하고 하인도 별로 없이 썰렁했다. 비담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밤중에 왜 불러낸거야?

비담은 대답없이 피식 웃으며 춘추의 잔에 술을 따랐다.

경하드립니다 춘추공

춘추는 잔을 받으며 말했다.

축하받기는 아직 이른 것 같은데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까.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거 같은데?

귀족들이 너한테 무슨 말 안해? 화백회의에서 반대를 하자던가…”

비담은 대답없이 도리어 춘추에게 물었다.

너야말로 염종과 귀족들을 어쩔셈이야?

춘추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당분간 끌어안고 가야겠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분명히 내 뒤통수를 물어뜯을 자들이야. 언젠가는 결국 한판 붙어야겠지. 나는 이모님같은 인내심이 없으니까. 또 내가 아무리 싸울 의도가 없다고 한들 그들이 나를 믿지 못할테고.

비담은 낮은 목소리로 소근거리듯 말했다.

내가 다 없애줄까?

이번에는 춘추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무슨 수로? 한두명도 아니고다 네 사람들인데 너를 다치지 않고 그들을 쳐낼 방법이 없잖아.

비담은 씨익 웃으며 잔을 비웠다.

내가 걸림돌이 되어서 미안한 걸

비담은 빈 잔을 다시 채우며 물었다.

진지왕의 아들인 나로 인해서 계속 분란이 생길꺼야. 네게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나를 왕으로 세운다는 명분을 들고 나올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존재 자체가 네겐 위협이지.

비담은 춘추의 마음을 읽으려는 듯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가 두렵지 않아? 폐하가 안계시면 나를 제어할 사람이 없으니, 결국 화근을 없애기 위해 나를 쳐내고 싶어질 거 같은데…”

춘추도 비담을 다루기 어려워 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비담의 우려가 말도 안된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널 두려워 한다구? 넌 나한테 상대가 안돼.

비담 역시 전혀 취하지 않은 듯 서늘한 눈으로 마주보며 말했다.

그럴까? 잊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미실의 아들이야.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불꽃튀는 눈으로 팽팽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윽고 춘추가 침묵을 깼다.

갑자기 왜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거야? 그 이야기 하려고 한밤중에 부른거야?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 듣고 싶은 말도 다 들었고.

춘추는 비담이 뭔가 말을 다 하지 않는 느낌이었지만 캐묻는다 해도 이야기해주지 않을 것 같아 굳이 묻지 않았다. 비담은 혼잣말처럼 딴소리를 했다.

난 이제 어쩐다 폐하를 얻고 천년의 이름을 얻겠다는 꿈은 이룰 수 없게 되었네…”

춘추는 비담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냉소적으로 말을 받았다.

나도 유혹해보지 그래? 내게 색공을 바치면 천년의 이름을 내가 줄 수도 있는데…”

춘추의 말에 비담은 킥킥 웃으며 의자에 뒤로 기대며 말했다.

내가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맹세한 건 여왕폐하 뿐이야. 네가 왕이 된다해도 나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춘추는 비담의 노골적인 거절에 상처받았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비죽 웃으며 말했다.

됐거든? 궁에 지금 내가 왕이 되기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유화들이 수백명이야.

춘추의 수습에도 비담은 개의치 않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춘추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춘추는 자꾸만 목이 타는 듯 하여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왜 비담에게 이야기 할 때면 마음과 달리 말이 비비꼬여서 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비담은 그런 춘추를 마치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뚫어지게 보았고 춘추는 기분이 어쩐지 이상했다. 비담은 춘추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춘추의 유혹에 비담이 몇번 넘어간 적은 있었지만, 비담이 먼저 춘추에게 접근해 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담의 손길이 옷속을 파고들자 춘추는 움찔거리며 신음했다. 비담은 색으로 물든 춘추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가 혹시 역모를 꾀하더라도 그게 너한테 색공을 바치기 싫어서 그러는게 아니라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무슨 소리야? 역모라니?

퍼득 정신이 들어 묻는 춘추에게 비담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 말이야…”

그리고는 춘추가 말을 하지 못하도록 더 거칠게 그를 안았다.

…”

춘추는 밀려오는 짜릿한 쾌감속에서도 비담의 말뜻을 헤아리려 애썼다.

설마무슨 짓을 하려는거야 비담…’

비담은 춘추가 지쳐서 잠들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다음날 춘추가 눈을 떴을 때 이미 비담은 떠나고 없었다. 춘추는 옷을 입다가 자신이 끼고 있던 자수정반지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비담이 가져간 것일 터였다.

내 반지는 왜 가져간거야. 보석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춘추는 고개를 갸웃했다. 춘추가 비담의 집을 막 나서려 할 때 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쳤다.

춘추공, 무사하셨군요. 상대등에게 납치되어 감금되셨다기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소립니까?

놀라서 묻는 춘추에게 유신이 말했다.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명활성에 염종과 귀족들과 함께 집결해 있습니다.

유신의 말에 춘추는 얼굴이 하얘졌다. 비담이 반란을 일으킨 이상 춘추와 비담 둘 중 한 사람은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럴거였으면 어째서 나를 잡아가거나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둔거지?

아무래도 앞뒤가 들어맞지 않았다. 지난 밤의 비담은 어딘지 예민하긴 했어도 살기를 띄고 있다거나 적대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역모나 뜻 모를 이야기들을 한 걸 보면 이미 결단을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춘추는 유신과 같이 서둘러 여왕이 있는 월성으로 향했다.

 

비담군은 명활성에서, 여왕과 춘추는 월성에서 전투없이 10일간 대치하였다. 여왕은 비담을 척살하라는 명을 내렸고, 춘추도 서둘러 난을 종결지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수비가 단단한 명활성을 섣불리 공격할 수는 없었다.

10일째 되던 날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 비담은 그것을 보고 군사들에게 선포하였다.

천신황녀 미실의 아들인 상대등 비담이 말한다. 월성이 떨어졌으니 이는 여왕이 몰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의 뜻이 비담에게 있다.

비담군의 사기는 높아졌고 반대로 유신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비담은 손에 끼고 있는 춘추의 자수정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미소지었다.

어떻게 할거냐 춘추 빨리 승부를 내야지.

 

큰일입니다. 여왕폐하의 환후도 심상치 않으신데 민심이 비담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어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유신의 말에 춘추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담 이자식.. 정말 제대로 한번 붙어 보자는 거야?

춘추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왕폐하께서 일식을 이용해 미실의 천신황녀 지위를 끌어내리지 않았습니까. 저도 같은 방법으로 비담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다음날 밤 서라벌의 밤하늘에 밝은 별이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월성이 다시 떠오른다! 여왕폐하의 별이 다시 떠오른다!

반란군은 크게 동요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도 술렁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별은 사실은 유신군이 날린 연에 달린 불빛이었다.

바로 그 때 유신의 군사들이 명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유신군이다!

유신군은 명활성의 서문과 남문에서 동시에 성문을 부수며 진입을 시도했고 당황한 귀족들은 동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어서 피하십시오, 상대등!

눈깜짝할 사이에 명활성 안으로 유신의 군사가 물밀 듯 몰려들어오고 있었다. 반란군은 방어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후퇴하기에 바빴다.

제법인데 춘추…’

비담은 하늘로 떠오르는 별을 잠시 바라보며 씩 웃고는 불타오르는 명활성을 빠져나갔다.

 

비담은 놓친듯 합니다만 추격중에 있으니 곧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은 전투결과를 춘추에게 보고하였다.

반드시 사로잡아야 합니다.

춘추의 말에 유신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생각난 듯 덧붙였다.

이상한 것은 지난밤 명활성 남문의 성문이 잠겨있지 않았습니다.

춘추는 날카롭게 물었다.

대체 누가 성문을 열어놓았을까요? 명활성에 우리와 내통한 자는 없지 않습니까.

겁에 질려 도망가려던 병사들이 아닐까요?

알천의 물음에 유신이 대답했다.

도망가려면 동문을 열고 도망갔겠지. 남문은 우리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데.

춘추는 저녁무렵 남문 성벽에 모습을 잠시 보였던 비담을 떠올리며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저었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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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비담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오리비담이 된 데 대한 아쉬움도 컸지만

드라마 남주니까 여주를 사랑하는 캐릭으로 정형화될 수밖에 없었겠지 싶었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들을 보면서 역시 선덕여왕 작가들이 고민이 모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남주이면서도 여주와 대립하고 여주와 반대의 길을 가는 시나리오는 전에도 있었고

요즘도 심심치 않게 보여지고 있다.



신데렐라 언니를 보면 기훈(천정명)이 여주인 은조(문근영)를 사랑하면서도

집안간의 적대적 관계에서 오는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어쩔수 없이

그녀를 파멸시키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 꾸준히 그려지고 있다.

(물론 그래서 천정명이 욕을 먹고 있긴 하지만

내가보기엔 무리없이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고 극의 완성도도 높아지고 있다고 본다)


신데렐라 언니와 같은 다크비담이라면 어땠을까

덕만을 파멸시키려는 미실을 막으려고 거짓으로 미실을 위해 일하는 척 하던 비담이

미실의 계략에 넘어가서 오히려 천명 또는 진평왕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더욱 덕만에게 거짓을 말하게 되고

결국은 점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이었다면…

그랬다면 비덕분자들의 인기를 유지하면서도 무게있는 다크비담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적과흑을 모티브로 했다는 나쁜남자의 시놉을 보고나서

내가 원했던 다크비담이 이런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려졌다는 상처로 인해 권력에 대한 야망을 갖게 되고

그것을 위해 술수나 거짓말뿐 아니라 연모까지도 이용하고 결국은 파멸하는 나쁜 남자...


나쁜남자와 같은 다크비담이라면 어땠을까.

왕이 되고 싶다는 야망을 위해 덕만에게 접근하려 하지만

문노에 의해 좌절되자 반발하여 문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미실마저 파멸시키는데 앞장서며 덕만에게 가까이에 가고자 애쓴 끝에

덕만을 유혹하여 상대등에 오르고 국혼을 하고자 하지만 춘추가 방해를 한다.

결국은 덕만이 춘추에게 선위를 하고 비담에게 함께 낙향하자고 하자

비담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을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비담은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덕만에 대한 감정이 연모였음을 깨닫고는

권력에 대한 욕망보다 덕만에 대한 연모로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었다면

역시 비덕분자들의 비난을 피하면서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다크비담이 되지 않았을까.



526일에 나쁜남자가 편성되어 3주 후면 볼 수 있다니 설렌다.

선덕여왕처럼 후유증이 심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는데

마성의 남길이가 또 마구 라인을 만들어내면 또 밤새 팬픽을 쓰게 되는게 아닌가 모르겠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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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열기가 슬슬 달아오르고 있다

덕만과 미실의 지도자로서의 리더쉽에 대한 비교가 한참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작가들이 갈팡질팡하며 미실을 너무 미화한 탓에 덕만이 욕을 많이 먹기도 했었고 나도 어떤 면에서는 미실이 덕만보다 앞서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나는 정치에 있어서는 미실보다 덕만의 통치방식에 동의하는 편이다.

내가 느낀 덕만의 통치방식의 특징은 열린 토론, 자발적 참여, 적에 대한 포용, 변화지향성이었다. 그런것들이 미실의 효율성의 정치에 묻히기에는 아까운 덕만의 정치덕목들이라고 생각된다.

역사에서 유사한 리더쉽을 보여준 정치가들이 많이 있었다. 카이사르, 링컨, 간디 와 같은 정치가들이고 공교롭게도 모두 정적에 의해 암살당했다. 자신의 적들을 포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 현실속에서 좌절된 셈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현실에 꺾여도 그 덕목들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춘추의 입장에서 덕만의 통치방식을 바라보는 팬픽.(비담이 빠진 팬픽은 처음 써보는 듯..)



춘추는 타클라마칸에서 왔다는 이모님을 처음에는 우습게 보았다. 천하게 자라 정치나 외교를 알기는 커녕 글이나 제대로 읽을까 싶었다. 막상 만나보고 나서도 '생각처럼 무식한 촌부는 아니로군' 하는 정도였다.

미실과 대적하는 모습도 서투르기 짝이 없어보였다. 저렇게 자기 속을 다 보여가면서 자기가 가진 패를 다 보여주고 하는 정치라니, 또 자신의 세를 불려가는 정치가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버려가면서 하는 정치라니, 그런 것은 수나라에서도 어디서도 들어본적이 없었다. 첨성대를 만들어 천기의 정보를 모든 이가 알 수 있도록 한다는 것만 해도 그랬다. 무지한 백성들을 쉽게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을 조건없이 버린다는 것, 아무도 악용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 대체 무엇을 위해 손해만 보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뻔히 결렬될 것을 알면서 화백회의를 소집하고 안건을 토론에 붙이고, 대체 왜 그런 시간낭비와 인력낭비, 감정낭비를 하는지 알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서투른 패에 미실과 귀족들이 자충수를 두어 걸려들고 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미실이 모자른 탓이라고 쉽게 생각했지만, 자신이 직접 덕만과 붙어보고 나서야 미실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덕만이었다.

미실과 춘추를 비롯해 권력자들은 서로 더 적게 잃고 많이 갖기 위해 싸움을 해왔다. 간혹 육참골단처럼 더 많이 얻기 위해 작은 것을 내주는 경우도 있긴 했다. 그러나 덕만은 자신이 보다 많이 갖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많이 주기 위한 싸움을 했다. 내가 가진것을 백성들에게 내놓을테니 너도 네가 가진것을 백성들에게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얻기 위한 싸움에만 익숙했던 귀족들은 내놓는 싸움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방법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덕만의 공격은 늘 진실을 규명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여 상대적으로 미실의 이를 추구하는 본성이 명확히 보이도록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미실은 초조해 질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스스로 자충수를 두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은 도저히 상식적인 방법으로는 싸움이 안되겠다 싶어 난을 일으키고 말았던 것이었다. 미실이 난을 일으키던가 포기하던가 둘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극단적으로 압박한 것이 덕만이었고, 미실은 난을 일으켰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만둠으로써 덕만의 방식이 옳았음을 덕만이 이겼음을 인정했다.

덕만은 춘추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승부를 걸어왔다. 모든 세력과 기득권을 춘추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혈혈단신으로 미실이 장악한 궁에 들어감으로써 춘추에게 자신의 말을 듣던가 자신을 버리던가 둘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압박한 것이었다. 덕만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것은 자신의 이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공격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춘추는 별수없이 덕만을 따르기로 했지만, 자신이 덕만에게 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패배감에 쓰라렸다.

그런 삐딱한 마음에 춘추는 덕만을 업신여기고 조롱하기도 하고 상처도 주었지만, 덕만은 그런 개인적인 모욕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뿐만아니라 위협이 되는 적인 미실과 미실의 사람들도 번번이 용서하고 등용했다.

"자꾸 그렇게 용서해주시니까 버릇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춘추뿐 아니라 유신과 알천도 덕만에게 자주 충고했고 덕만도 달리 방법이 없을 때는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안강성에서 도주한 자들을 처단한 것도 미실이나 유신같은 주변 사람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인 결과였다. 그러나 덕만은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몇년이 지나도록 그자들을 잊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고지식함이 주위사람들에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안으로 덕만의 건강을 좀먹어들어가기도 했지만, 덕만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런 덕만의 태도에 춘추는 거슬림을 느끼며 심한 말까지 하기도 했다.

"이모님, 위선이 지나치신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거슬림의 정체는 놀랍게도 열등감이었다. 검귀와 같은 무술실력을 가진 비담에게도 열등감이라곤 느껴본 적이 없는데, 덕만처럼 허술한 여인에게 열등감을 느끼다니 춘추 자신도 믿을수가 없었다. 머리라면 춘추가 한수 위였지만 덕만은 머리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차원의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비담은 일찌감치 덕만의 그릇에 졌다 생각하고 따르는 모양이었지만 춘추는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이 열등감의 근원을 파헤치기 전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춘추에게 정치는 쳐내는 것이었다. 꿀에 달려드는 개미떼처럼 권력에 달려드는 사람들을 계속 쳐내고 쳐내는 것이 정치였다. 적어도 수나라와 신라에서 그가 겪고 보아온 정치는 그러하였다.

그러나 덕만에게 정치는 포용이었다. 분열하고 갈라서고 자신의 이를 쫒아 서로 다른 곳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계속 붙잡고 설득하고 하나로 묶어 포용하는 것이 정치였다. 발상이 다르고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는 것에서부터 춘추는 덕만을 이길 수 없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춘추에게 또한가지 이상하게 보였던 것은 덕만은 자신의 사람들을 챙겨주지 않았다. 몇번이나 위험한 고비마다 나서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비담에게도 별다른 보상을 해주지 않았고, 유신이나 알천에게도 개인적인 포상을 내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일부러 거리를 두는 듯 말한마디 따듯하게 해주지 않았다. 포상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여성적 매력을 한껏 이용하는 미실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어째서 주위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고 챙겨주시지 않습니까? 사람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재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사람들은 재물이 아니라 인정을 바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말도 있지않습니까."

"내 인정을 받기 위해서 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에 따랐으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떠나면요?"

"내 생각이 틀린거겠지."

춘추에게는 권력이 목적이었지만, 덕만에게 권력은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보상을 해주지 않고 인간적으로 친목을 도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덕만을 따르는 젊은 화랑들은 점점 늘었다. 물론 덕만이 자신의 헌신에 별다른 포상을 해주지 않음에 불만을 토로하며 미실에게로 돌아서는 자들도 종종 있었다. 유유상종이랄까 미실의 주위에는 이를 쫒는 자들이 모여들었고, 덕만의 주위에는 꿈과 이상을 쫒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렇다면 나의 주위에는?'

춘추는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춘추는 자신이 왜 덕만을 따르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마지못해 따르는 척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덕만에게는 진심으로 이사람을 도와주고 싶다, 이사람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미실이 덕만에게 "또 다 말해버릴 뻔 했습니다." 하고 말했듯이 춘추도 덕만을 보고 있으면 "한수 가르쳐 드릴까요?" 하고 끼어들어 거들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곤 했다. 덕만에게는 주위 사람들을 덕만이 하고 있는 일로 빨아들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덕만이 하는 일을 보고 있으면 그 꿈의 원대함과 덕만의 열정에 가슴이 벅차올라 나도 같이 참여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고, 그 황홀한 느낌에 홱 돌아버려서 현재 각자가 처한 현실 따위는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비담은 그 두근거리는 설레는 느낌을 연모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유신도 처음에는 연모라 여겼지만 지금은 덕만에게 느끼는 감정이 연모 이상의 것임을 깨달은 듯 했다. 하긴 춘추 자신도 잠시 자신이 덕만을 연모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덕만을 마주대하고 덕만의 일을 돕고 있노라면 자신이 뭔가 옳은 일,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고, 스스로가 썩 괜찮은 사람이라는 좋은 느낌이 들었고 그런 가슴떨리는 뿌듯한 느낌이 누군가를 연모할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일품철로 무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농기구를 생산하는 덕만을 보며 춘추는 한탄했다.

"그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삼한일통을 이루시렵니까?"

덕만은 웃으며 말했다.

"삼한일통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너도 삼한일통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 않느냐? 네가 왕이 되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건 무엇이냐?"

"신라의 영토를 넓히고 강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모님의 궁극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신라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성들에게 굶주림과 괴로움만 주는 삼한일통을 위한 전쟁따위는 하지 말아야겠군요."

비꼬는 듯한 춘추의 말에 덕만은 미소지었다.

"바로 보았다. 내 고민이 그것이다. 또 삼한일통을 반드시 신라가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고구려나 백제가 하면 안되는걸까?"

어이없어하는 춘추를 보며 덕만은 웃었다.

"내가 여왕이 아니라면 당장 반역죄로 목이 날아갈 소리겠지. 다른사람들에게는 내가 한 말 비밀로 해다오."

그리고 이어서 탄식하듯 말했다.

"삼한일통이 되면 신라는 지금보다 훨씬 강성한 나라가 될것이야. 그런데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희생해야할지... 그리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얼마나 더 행복해질지는 모르겠구나."

"전쟁중에는 힘들겠지만 전쟁이 끝나면 이전보다 풍족해 질 것입니다."

"먹고 입는 것이 더 풍족해진다하여 더 행복하다고 말할수는 없는 것이니 하는 말이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전보다 불행할지라도 백성들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게끔 만들면 됩니다."

춘추는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전에 미실이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백성들은 진실은 부담스러워하고 희망은 버거워하며 소통은 귀찮아하며 자유를 주면 망설인다. 더 많은 것을 주어도 더 더 달라고 떼를 쓸 것이다."

덕만은 그런 춘추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는 나보다는 미실과 생각이 비슷해."

"그래서 제가 왕이 되는 것이 걱정되십니까?"

"아니다. 네가 미실과 나의 어깨를 딛고 우리들보다 멀리 볼수 있는 왕이 되길 기대한다."

덕만의 말에 춘추는 다시한번 울컥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 정말 싫었다. 덕만을 제치고 왕이 되려는 자신을 아껴주는 덕만,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커다란 생각과 말을 하는 덕만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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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히 지켜주고 싶고 함께 꿈을 꾸고 싶어지는 덕만이 비담의 이상형이라면

괜히 틱틱거리게 되고 괴롭혀주고 싶어지는 춘추는 비담의 현실적인 인연일듯..

(나쁜남자가 시작되어야 비추에서 벗어날수 있을까
드라마 끝난지 4달인데 뭐하고 있는 짓인지...ㅠㅠ)

왜국에 사신으로 갔던 비담과 춘추가 배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갈때는 잔잔했던 바다가 올때는 파도가 일어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밤이 되자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담은 선실에서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비담이 문을 열어보니 춘추가 핼쑥한 얼굴로 서있었다.

"왜 그래?"

"배멀미가 나서... 멀미에 듣는 약 좀 있어?"

비담은 춘추를 방으로 들이고 약재가 든 상자를 뒤적이며 물었다.

"너 책봤냐?"

""

"이렇게 배가 흔들리는데 책을 보니까 멀미가 나지"

비담은 약재와 함께 침을 꺼내왔다.

"약은 효과가 느리니까... 일단 침부터 놔주께"

비담은 춘추를 침대에 앉히고 팔목을 걷고 손과 팔목에 침을 놓았다.

"아야..."

찡그리는 춘추를 보며 비담은 어이없는 듯 피식 웃었다.

"엄살은..."

그리고 약재를 몇가지 섞고 빻아서 약을 지어왔다.

"이 약도 먹어봐"

춘추는 약을 들이키고도 여전히 방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 좀 해줘"

"무슨 얘기?"

"아무거나... 어지러운 것 좀 잊어버리게"

"배가 흔들려서 겁나는구나? 하긴 수영을 못하니 겁나겠지."

비담은 놀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춘추의 옆에 앉았고 춘추는 대꾸할 기운도 없는지 흘겨보기만 했다. 비담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춘추는 수나라에서 온세상 이야기군들의 웬만한 이야기는 다 들어봐서 별로 신기할 것도 없을 텐데 생각하고 있는데 춘추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모님이 남자였어도 네가 주군으로 모시고 따랐을까?"

비담은 한번도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답은 쉬웠다.

"그럼. 폐하께서 하시는 일은 뭐든 같이 하고 싶으니까."

덕만에게는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큰 꿈을 제시하는 혜안이 있었다. 현실의 이득 보다는 이상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비담은 덕만과 닮아있었다. 그러나 춘추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덕만과 달리,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비담이 본질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종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춘추는 살짝 비꼬는 듯 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이모님이 남자였어도 네가 연모했을까?"

비담은 춘추의 황당한 질문에 픽 웃었다.

"갑자기 왜 말도 안되는 소리를 계속 하는거야?"

그러나 다음순간 오래전 낭도인줄 알았던 덕만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따지고보면 자신밖에 모르던 비담이 설원공으로부터 덕만을 구한 것도 덕만이 여자인줄 알기 이전에 한 행동이었다. 자결한 결심을 하고서도 병자들을 걱정하던 덕만, 자신을 팔아넘기던 비담에게 고맙다고 말하던 덕만, 설원공에게 넘겨져서도 끝까지 당당했던 덕만... 이후의 덕만의 모습도 늘 비담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첨성대를 짓고, 백성들에게 농기구를 나눠 땅을 개간하여 소유하게 하고, 자신을 죽이려한 미실파를 용서하는 덕만은 늘 비담에게 감탄을 자아냈다.

"멋있잖아... 남자였어도 연모했을거야."

비담은 자신도 모르게 혼자 꿈꾸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춘추는 그런 비담을 보며 마음이 쓰라렸다.

'이모님이 남자였어도 너를 내사람으로 만들수는 없었겠네'

덕만을 생각하며 혼자 실실 웃던 비담의 어깨에 춘추의 머리가 툭 떨어져 기대어 왔다.

"이제야 약효가 났나보네"

잠든 춘추를 보며 비담이 중얼거렸다.

"멀미날 땐 그냥 자는게 최고지"

멀미를 다스리는 약과 함께 잠이 오도록 하는 약을 섞어서 주었던 것이었다. 비담은 춘추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춘추는 잠이 깼다. 그새 바다가 잔잔해지고 따스한 아침햇살이 문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비담은 바닥에서 자고 있었고 자신은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잠이 들었던 걸 보면 약에 수면 성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춘추는 잠들 때 그대로 자신의 옷이 단정히 있는 것을 보고 약간 기분이 상했다. 비담이 자신을 안고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손끝하나 건드리지 않은걸 보니 약을 먹고 잠이 든 자신을 보고도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네가 나를 주군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연모하지 않는다면, 내 몸이라도 원했으면 좋겠어.'

시무룩해서 비담을 바라보고 있던 춘추는 비담이 눈을 깜박거리면 깨어나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너 약에 뭘 탄거야?"

상처받은 마음과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틱틱거리는 춘추에게 비담은 부스스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 ... 푹 자라고 잠오는 약 줬지."

"이상한 짓 하려고 그런건 아니구?"

일부러 심술을 부리며 의혹의 눈초리로 보는 춘추에게 비담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항의했다.

"참나... 뭔 이상한 짓? 약달라고 할땐 언제구... 물에 빠진거 건져놓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는거야?"

"아님 말구... 왜 화를 내고 그래"

춘추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

"어쨌든 고마웠어."

춘추의 뒷모습을 째려 보던 비담은 어젯밤을 떠올려보았다. 춘추가 너무 빨리 깊이 잠이 들어버려서 약효가 지나친것 아닌가 목과 손목의 맥을 짚어보았었다. 맥은 정상이었고 숨결도 고르고 체온도 정상이었다. 힐끔 춘추의 얼굴을 보니 늘 어딘가 조소를 띄고 있는 눈이 지금은 스르르 감겨있었고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독설을 내뱉을 것 같은 입술이 조용히 닫혀 있었다.

"이렇게 얌전히 있으니 이쁘구만"

비담은 춘추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춘추의 복숭아처럼 희고 붉은 뺨을 쓸던 비담은 묘하게 설레는 기분에 멈칫 했다. 오래 전 일이었지만 춘추의 유혹에 넘어갔던 밤이 어제 일인 듯 떠올랐다. 그날 밤의 입술과 매끄러운 속살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담은 신음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대로 있다가는 춘추를 덮치고 말 것 같았다. 색을 가까이 하지 말라, 특히 원하지 않는 상대는 절대로 안아서는 안된다고 문노에게 귀가 닳도록 들어서인지 잠든 춘추를 건드리는 것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안절부절하던 비담은 밖으로 나가려고 방문을 열었지만 열자마자 밖에서 비가 세차게 들이쳐서 도로 닫고 말았다.

'돌겠네...'

어떡해야 이 열망을 삭일수 있을까 두리번거리던 비담의 눈에 춘추에게 주고 남은 멀미약이 보였다. 비담은 남은 약을 모두 꿀꺽 들이켰다. 그리고 바닥에 벌렁 누워 눈을 감았지만 약효가 퍼지기 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 했다. 바닥을 이리저리 뒹굴거리던 비담은 다시 일어나서 침대에 앉아 쌕쌕거리며 잠이 든 춘추를 바라보았다. 춘추의 입술에 살짝 입만 맞출 생각이었는데 그러고나자욱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열이 화르르 오르는 듯 미칠듯한 느낌에 더 깊이 입을 맞추며 들어가던 비담은 흥분하는 바람에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면서 약효가 순식간에 확 퍼지는 것을 느꼈다. 어지럼증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던 비담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며 잠이 들었다. 춘추의 잠든 얼굴에 혼자 어쩔줄 몰라 엎치락뒤치락 했던 어젯밤의 전말이었다.

비담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하옇튼 저녀석... 요물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연모하는 여인이 있는 자신이 이렇게 춘추에게 빠져드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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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가 잘 안되서 대충 죽여버릴까도 생각했으나

새드엔딩은 마음이 아파서 생각하기도 싫었다

비담이에게 모든걸 주었다

이세민이라는 친구, 법민이라는 가족, 춘추라는 연인까지...

행복하게 잘 살아라~


8.

당나라가 백제왕자 융의 이름으로 백제부흥회를 결집시키자 춘추는 당황하여 장안성으로 직접 달려왔다. 이세민을 만나러 가기 전에 춘추는 먼저 비담의 집을 찾았다.

융을 백제로 보내라고 한 것이 너라며? 이젠 완전히 이세민의 편이 되기로 한거야?”

비담은 씩 웃으며 닦고 있던 칼을 들어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네가 나에게 이 길이 옳다는 믿음을 주지 못했으니까…

“넌 정말… 아이같아.”

춘추는 한숨을 쉬었다.

“널 품는 건 정말 힘들어.”

비담은 칼로 허공을 휙 베었. 바람을 가르는 칼울림 소리가 방안을 메웠다.

“그래… 난 손잡이 없는 칼이야. 날 잡으려고 하면 손만 베이게 되지.”

그러더니 춘추를 보고 비웃듯 말했다.

근데 난 누굴 베는 걸 좋아하지만, 너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베는걸 좋아하잖아. 언제나 네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모든걸 얻으려고 하다니 너무 비겁하고 치사하지 않아? 이번에도 당군을 앞세우고 나중에 뒤통수를 쳐서 고구려 영토를 빼앗을 셈이야? 신라의 피를 흘리지도 않고 남의 힘으로 이룬 삼한일통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비담은 춘추를 가늠하려는 듯 바라보며 칼을 휙 돌려 그를 가리켰다.

“고구려를 걸고 도박을 하려면 너도 뭔가 판돈을 걸어야 할거 아냐. 맨입으로 할건 아니지? 신라군사를 얼마나 내놓을거야?”

춘추는 화를 억누르며 싸늘하게 말했다.

백제지역의 치안도 유지해야하고, 왜의 습격에도 대비해야 하니 6만이 한계야.”

왜 이래? 좀 더 걸어봐.”

백성들 목숨을 놓고 숫자놀음을 하라는거야?”

춘추의 말에 비담은 킥킥 웃으며 칼을 탁자에 꽂았다.

너 오늘 되게 맘에 안든다. 왜 너답지 않게 위선을 떨고 그래?”

그러더니 다시 손가락을 들어 춘추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이세민에게 이야기 했어. 신라에 10만의 군사를 요구하라고. 각오하는게 좋을거야.”


이세민은 융을 다시 불러들이고 백제의 영토를 모두 신라에 주는 것에 동의하는 대신, 고구려와의 전쟁에 10만의 군사를 동원할 것을 요구했다. 신라의 인구와 재정을 생각하면 도저리 무리한 숫자였다. 그러나 춘추는 이를 받아들였고, 그대신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임진강 유역까지는 신라의 영토로 인정해주도록 요청했다. 이미 이세민도 춘추도 그것이 말뿐인 약속이고 이후에는 상황이 어떻게 될지 서로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양국의 갈등을 수습하고 다시 고구려와의 전쟁 체제로 돌입했다.

춘추는 10만 군사를 동원하기 위해 징집 명령을 내리고 군대 편재를 직접 지휘를 하였다. 신라와 백제 지역의 남자들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10만이라는 군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당나라의 요구사항을 맞추려면 최대한 군사를 늘려 고구려와의 국경지대로 배치해야 했다. 지금은 당나라의 요구 때문에 군사를 늘리고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와 치러야 할 전쟁에 쓰이게 될 군사들이었다.

춘추는 백제 지역의 백성과 농토를 정비하여 신라의 제도로 재편하는 작업과 함께 고구려와의 접경지대를 돌며 지역별 인구 수와 동원 가능한 군사의 수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또 그들을 먹이기 위한 군량미와 병장기를 사기 위한 자금 조달 계획도 마련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며칠 째 밤을 지새우던 춘추는 결국 회의를 하던 중 쓰러지고 말았다.

“폐하!”

춘추가 침상에서 눈을 떴을 때 유신이 걱정스러운 듯 지켜보고 있었다. 가슴이 욱신거리고 숨이 가쁜 것이 어떤 증세인지 춘추는 잘 알고 있었다. 진평왕과 덕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과 같은 병이었다. 이제 춘추도 그 증세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내 상태는 어떠한가?”

춘추의 물음에 어의는 대답했다.

“아직 병세가 심하지는 않으시니 무리하지 않고 푹 쉬시면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을 것이옵니다. 폐하. 부디 서라벌로 돌아가시기를 간청드리옵니다.”

춘추는 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춘추는 멍하니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유신은 망설이는 듯 하다 말을 꺼냈다.

“당태종을 부추켜 백제의 왕자 융을 불러들이라 하고 신라에 10만의 군사를 요구하도록 한 사람이 비형이라는 자라고 들었습니다. 그자는 신라에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춘추는 유신을 흘낏 보며 말했다.

“비형은 당태종의 오른팔과 같은 사람이다. 공연한 말을 입밖에 내어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비형이라는 자가 비담입니까?”

춘추는 유신의 말에 화들짝 놀랐지만 태연히 말했다.

“…아니다”

비담은 이미 선왕께서 신국의 적으로 선포하여 척살하라 명을 내리신 자입니다.”

춘추는 대답이 없었다.

“비담이든 비형이든… 그자가 폐하의 사람이라 믿으십니까? 신라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럼 어쩌란 말이냐? 자객을 보내 척살이라도 하란 말이냐?”

춘추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유신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소신이 요령이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정도 꽉 막힌 사람은 아닙니다. 또 그자가 자객을 보낸다고 척살될 자입니까. 다만 그자의 성품으로 보아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고구려를 무너뜨린 후에는 당태종의 칼이 되어 신라를 정벌하러 올 지도 모르는 자입니다.”

유신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비담이 춘추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는 날이 온다면 신라의 안위는 바람 앞의 등불일 것이었다. 춘추는 비담이 이렇게 폭주하고 있는 원인이 자신에 대한 불신 때문임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신라왕이 고구려와의 전쟁준비를 하다가 쓰러졌고 서라벌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당나라에도 전해졌다. 그런데 서라벌로 돌아간 신라 왕이 결국은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후 승하하였다는 소식이 다시 전해졌다. 비담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춘추… 이런식으로 내게 복수하는거야?’

비담은 눈물을 흘리며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이미 장례식이 끝났을 테지만 서라벌로 가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춘추가 없는 이상 당나라에 머물 이유도 없었다.

“언제쯤 돌아올 것이냐?”

이세민의 물음에 비담은 대답이 없었다. 머리속이 텅 비어 앞으로 어찌할 것인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세민은 말없이 그를 안아주었다.

“언제든 마음 내킬 때 돌아오라.”

이세민의 말에 비담은 속삭이듯 말했다.

“한번도 말한적 없었? 내가 무슨 짓을 하던 이해해주고 믿어주 노력했던 당신에게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었는지.”

폐하가 아닌 당신이라는 말에 이세민은 가슴이 찡했다. 비담이 영영 떠나버릴 것 같아 잡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아무도 몰래 춘추의 무덤에 도착한 비담은 비석에 새겨진 말들을 읽으면서 다시금 눈물이 뚝뚝 떨어졌. 쓰러질 것만 같아서 비석을 짚고 간신히 서 있는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왔어?”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지만 춘추의 목소리였다. 비담이 뒤돌아보자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평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비담은 다가가서 떨리는 손으로 베일을 걷었다.

“춘추?”

빙긋 웃고 있는 춘추를 보며 비담은 화가 치밀었다.

“너 이자식…!”

비담은 주먹을 들어올렸지만 마음과 다르게 손은 춘추를 때리기는커녕 그를 와락 끌어안고 있었다.

“너도 죽은 척 하고 나 속였잖아. 너도 당해보니 기분이 어때?”

춘추는 죽거리면서도 비담의 등을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왜 죽은척 한거야?”

“병으로 쓰러졌던 건 사실이야. 어의가 더 이상 무리하면 안된다고 해서 서라벌로 돌아왔어. 근데 일도 못할거면서 왕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 진행이 안되잖아. 그렇다고 내가 내몸 희생해가면서 일할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법민이한테 넘겨줘 버렸어.”

“너… 삼한의 주인이 되고 싶어했잖아.”

“법민이가 삼한의 주인이 되겠지. 네말대로 그애도 뭔가 걸고 노력해서 얻어야지, 내가 삼한일통을 해서 왕좌를 넘겨주면 그게 얼마나 소중한 건 줄 모를거 아냐.”

춘추는 비담의 허리를 껴안고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네가 나를 보살펴줘야 해. 나를 이렇게 아프게 만들었으니 네가 책임져.”

뭐야?”

널 이세민 곁에 계속 두면 신라에 위협이 되어서 안되겠어.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곁에서 날 돌봐줘.”

비담은 춘추를 바스라지도록 꽉 껴안으며 말했다.

“넌 정말 나한테 도움이 안되는구나. 싫컷 이용해먹고 이제와서 뭐라구?”

비담의 행복함을 감추기 위한 투덜거림에 춘추는 짖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린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에게 방해만 되는 사이잖아.”

서라벌의 밤하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떠 있었고, 두사람도 그 별들 사이로 걸어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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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음편이 마지막편이다

역사를 보면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킨 1년 후에 고구려와의 전쟁준비를 하다 병으로 죽고 실제 삼국통일은 그의 아들 문무왕(법민)이 고구려를 멸망시켜 이루게 된다. 하지만 역사에 태종무열왕이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으로 기록되는건, 태종무열왕이 나당연합을 성사시켜 삼국통일의 기본 방향을 정립했고, 문무왕은 그 설계도 대로 완성을 시켰을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백제는 의자왕이 자멸한 셈이고 고구려도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분열해서 자멸했으니, 그저 신라가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김춘추의 행적을 보면 고구려 수나라 당나라 뿐 아니라 일본까지 돌아다니며 정말 부지런히 외교전을 펼쳤던 것 같다.(후세에 미화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저 남의 뒤통수나 치고 다니는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라는 평과 외교감각과 정보전이 뛰어난 현대적 군주라는 양극단적인 평만 봐도 드라마에서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재해석될 여지가 많은 인물이 태종무열왕인 것 같다.


7.

신라는 백제지역의 백제부흥회를 정리해가고 있었다. 가능하면 설득하여 신라의 제도로 포용하며 대당투쟁에 나서도록 했고 그렇지 못한 세력들은 무력으로 굴복시키기도 했다. 결국 당군이 점령했던 백제영토마저 신라에게 복속되기 시작했다.

비담은 이세민의 부름에 입궐했다.

“신라가 당이 갖기로 한 백제의 영토를 복속했다. 맨 처음 약속대로 당에 반환하라고 할 생각이야.”

이세민은 비담의 생각이 궁금한 듯 물었다.

“춘추가 순순이 내놓을까?”

비담은 대답을 피하기 위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대소신료들은 그간 신라의 오만함을 참을만큼 참아왔으니 이번만큼은 신라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중론이다.”

이세민은 비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네가 사신단과 함께 신라로 가서 춘추를 설득해봐라.”

비담은 이세민의 말을 들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는 듯 되물었.

“지금 저보고 신라의 영토를 당에 내놓으라고 춘추를 설득하라는 말씀입니까?”

이세민은 비담에게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상황에서 신라와 외교를 단절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고구려와 전쟁을 계속 해야 하니까 신라가 필요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곳 대신들의 중론이 신라에 우호적이지 않으니 나로서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러니 적어도 신라가 나서서 외교를 단절할 구실은 주지 말라고 춘추에게 일러라.”

비담은 머리가 복잡해서 후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신라의 이익을 위해 영토를 내놓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당과의 신의를 지켜 영토를 내놓는 것이 옳은 것인가. 사신단을 통해 공식적으로는 신라를 압박하면서 뒤로는 비담을 통해 춘추와 타협점을 찾아보려는 이세민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 그만큼 자신을 믿어주는 이세민에게 고맙기도 했지만, 신라와 당을 모두 만족시키는 해결책을 찾기는 쉽지 않아보였다.

서라벌에 도착한 당의 사신단은 신라왕을 알현하여 영토를 반환하라는 당의 공식적인 요구사항을 전달한 후 숙소에서 신라의 답변을 기다렸다. 여러명의 사신단 속에 섞여 있었을 뿐이지만 춘추는 비담을 알아보고 따로 연락을 취했다. 비담은 정자에서 벚꽃이 달빛에 하얗게 떨어지는 것을 맞으며 춘추를 기다리고 있었다. 춘추는 뾰루퉁하게 말했다.

“어쩐 일이야? 통 오지도 않더니만...갑자기 당의 사신단에 껴서...”

비담은 그런 춘추가 귀여운 듯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갔.

“내가 안찾아와서 삐졌냐? 네가 오면 되잖아. 난 하던 전쟁도 때려치고 왔었는데.”

춘추는 여전히 퉁퉁거리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줄 알아? 난 왕이잖아.”

비담은 부드럽게 웃으며 새침한 춘추의 머리에 벚꽃 가지를 꽂아주었.

“시간이 흘러도 넌 여전히 아름답구나.”

비담의 말에 춘추는 그제야 마음이 좀 풀린듯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시간이 흘러서 아름다움이 시들면... 그땐 지금보다 더 안찾아오겠네?”

비담은 말없이 춘추를 끌어당겨안고 입을 맞추었다. 춘추는 몸을 비틀어 빼려는 척하다 마지못한 듯 비담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미 춘추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색한 기운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둘은 말없이 한동안 마주보고 웃기만 했다. 둘은 서로의 허리를 감싸안고 계림의 구불구불한 향나무 사이를 걸었다.

법민은 잘 있어?”

춘추의 물음에 비담은 기다렸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래. 실은 니 애 보느라고 바빠서 못온거다.”

이세민의 아들들과는 잘 알고 지내?”

. 다들 그앨 좋아해. 이세민 아들들중에 법민이 만큼 영특한 녀석 없어. 그리고 이젠 검술도 서라벌 화랑 아무하고나 비재 떠도 다 이길껄. 내가 특별 훈련을 시켜줬지.“

비담의 신나서 떠드는 것을 보고 춘추는 희미하게 웃었다.

법민이랑 정이 많이 들었나보네.”

비담은 춘추를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근데 어쩔거야? 백제영토를 내놓으라는데...”

이세민이 나를 설득하라고 널 보낸거구나?”

꼭 그렇다기보다… 잘 해결할 방안을 찾아보란 얘기지… 근데 나도 오면서 쭉 생각해 봤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더라. 넌 무슨 방법이 있어?”

비담의 말에 춘추는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거절할거야.”

“그러면... 법민에게 보복이 있지 않을까?”

“그래. 하지만 신라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으니 신라왕자를 죽이지는 못할거야. 아마 감옥에 가두었다 풀어주거나 유배를 보내겠지.”

춘추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냉정한 말에 비담은 얻어맞은 것처럼 그자리에 멈춰서서 춘추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네가 버려졌다고 해서 너도 법민을 버리려는거야?”

비담의 말에 춘추는 아픈 곳을 찔린 듯 잠시 멍하니 말이 없었지만 이내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애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야. 신라 왕족의 처지란 어떤 것인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려는거야.”

비담은 화가나서 춘추의 어깨를 꽉 잡고 말했다.

변명하지 마. 넌 네가 버려진 화풀이를 그애한테 하고 있는거야.”

그렇다고 백제영토를 당에 돌려줄 순 없어. 그리고 아직 얻지 못한 나머지 백제영토도 모두 신라가 가질거야.”

춘추의 싸늘한 말에 비담은 성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춘추도 비담의 말에 화가 난 듯 씩씩거리고 있었다. 춘추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자 비담은 춘추를 탁 놓아주며 말했다.

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하지만 절대로 법민이 너의 장기판의 말이 되어 이용되고 버려지지도록 놔두지는 않겠어.”

비담은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 희뿌연 밤안개 사이로 사라져갔고, 춘추는 순간 휘청이며 나무를 짚었다. 어려서 수나라에 처음 당도했을 때의 기억이 어제인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낯선 곳에서 낯모르는 어른들에게 휩쓸려다니며 이용당하고 놀림당하던 기억이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제 또 생각이 나는 것일까.


신라가 백제영토 반환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당나라의 중신들은 신라에 대한 물리적 외교적인 보복을 하라며 들고 일어났다. 이세민이 고민에 빠져 있는 중에 비담이 알현을 청했다.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이세민의 물음에 비담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나라로 데려 온 백제 왕자 융을 백제로 보내십시오. 융이 백제로 돌아 친당정권을 세운다고 공표하면 백제부흥회의 세력들은 대당투쟁의 명분을 잃게 됩니다. 융의 밑에 모인 백제부흥회는 신라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세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비담을 보았다.

“그대는 신라의 아군인가 적군인가?”

“전 그런거 신경 안씁니다.”

비담은 단호하게 덧붙였다.

신라왕자 법민은... 추방하십시오.”

비담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던 이세민은 그제서야 비담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추방령이 내려진 법민은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스승님도 함께 가요.”

법민이 비담의 손을 잡아끌었다. 비담은 고개를 저었다.

“난 신라에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서 말이야.”

그러나 말과는 달리 비담의 눈은 추억과 그리움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서라벌에 도착한 법민은 곧 부군으로 봉해졌다.

법민이 검술을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던 유신이 말했다.

“호국검법이 아닙니까? 당나라에서 어떻게 호국검법을 배우셨습니까?”

“당나라에서 스승이었던 비형공이 호국검법을 쓰셨어요.”

“신라인이었나 봅니다.”

“전에는 신라에 살았지만 지금은 당나라인이라더군요.”

유신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법민의 검법을 더 유심히 살펴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법민의 검법은 문노가 만든 정통 호국검법이라기보다는 비담이 즐겨쓰던 변형된 역검의 호국검법이었다. 비담은 제자를 두지 않았기에 비담 외에는 지금까지 누구도 그 검법을 쓰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비형이라…’

백제를 무너뜨릴 때 신라군의 합류가 늦어져 소정방이 진노하여 유신이 곤경에 쳐했을 때 그의 편을 들어주었던 당나라 장수의 이름이 비형이라는 것을 이후에 알게 되었다. 춘추가 당나라에 은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는 자 아마 그자일 것이라 추측되었다. 비담의 검법을 쓰는 그자는 누구일까. 유신은 어쩐지 식은 땀이 나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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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당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백제부흥회의 수장 복신에게 군자금을 대겠다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찾아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백제인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에게 당군과 싸울 군자금을 대는 이유가 뭔가?”

복신의 말에 얼굴을 면으로 가린 비담은 조용히 대답했다.

“알 필요 없어. 어쨌든 우리의 목적은 같은게 아냐? 백제지역에서 당군을 몰아내는 것.”

“고구려인일 리도 없고… 이렇게 많은 돈을 조건 없이 지원할 재력가가 흔하지 않은데…”

복신 미심쩍은 듯 의혹에 가득한 눈으로 비담을 뜯어보았다.

“뭐 조건은 아니고… 그대들에게 개인적으로 충고하고 싶은 것은 있지. 당군을 몰아내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할 셈이야? 무너진 다시 백제 왕가를 복원할 수도 없는 일이고…”

비담은 복신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신라는 이미 가야를 품었고 가야 출신들이 신라에 충성만 한다면 자신들의 풍습과 가문을 지키며 살아가도록 지원해주고 있다. 신라군을 이끄는 대장군 김유신이 가야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신라는 가야출신 백제출신이라고 해서 인재를 차별하지 않는다.”

“설마… 너의 배후에 있는 것이 신라인가?”

펄쩍 뛸듯이 놀라는 복신에게 비담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난 신라인 아니거든. 어떤 신라인을 붙잡고 물어봐도 나를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 뒤를 캘 시간에 너희들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어때?”

복신은 칼을 뽑아 비담의 목에 들이대며 말했다.

“네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베겠다.”

그러나 비담은 복신의 말을 듣는둥 마는 둥 하며 말을 이었다.

“신라에는 골품제라는 것이 있지. 골품제는 결국 폐지되어야 할 제도이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몇십년은 더 유지가 될 것이야. 그렇다면 골이 없는 백제인들이 신라에 편입될 때 어떤 골을 받게 되는지가 중요하겠지.”

그리고 복신의 어두운 눈을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군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공이 각자 어떤 골을 받게 되는가에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그러더니 하하 웃으며 돌아섰다.

“아.. 뭐 이건 그냥 내 생각이고… 아무튼 난 너네가 걱정되서 하는 말이야. 그럼 돈만 전달해주면 내 볼일은 끝이니 이만 가보겠어.”

도깨비에 홀린듯 서있는 복신 남겨둔 채 뒤돌아서서 가던 비담은 생각난 듯 뭔가를 툭 던졌다.

“이거... 필요하면 봐. 믿거나 말거나...”

비담이 나간 후 복신이 서둘러 펼쳐보자 그것은 당군의 군사배치도였다. 병력구성과 숫자, 진의 형태, 지휘하는 장수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적혀져 있었다.


이세민은 비담이 왔다는 말에 기가찬 듯 웃었다.

“돌아왔구나. 백제 함락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고 들었는데…”

비담은 대답이 없었다.

“넌 정말 네 멋대로구나. 춘추를 만나고 왔느냐?”

“예”

“백제지역에서 백제부흥회의 저항이 점점 격렬해지고 있다고 들었다. 그 뒤에 신라가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고…”

이세민은 날카롭게 추궁했다. 비담은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았다.

“백제부흥회에서 당군의 배치상황을 상세히 알고 있더군. 그 정보를 흘린자를 찾고 있다.”

이세민은 비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당시에 네가 사라졌었으니 의심받는게 당연하지 않겠나. 사실이 밝혀질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

이세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들은 비담을 감옥에 가두었다.


비담은 감옥에 갇혀 생각에 잠겼다. 뻔히 의심받을걸 알면서도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알면서도 왜 이세민에게 돌아왔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춘추에 대한 반발심, 그리고 이세민의 힘을 이용하겠다는 것이 하나의 동기는 될지언정 돌아올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고보면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늘 반복되었던 것 같았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하는 잘못과 거짓말. 문노가 육식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도 계속 했던것이나, 덕만의 편에 서서 미실을 압박했던 것도 마찬가지였고, 춘추에게 덕만을 연모하는 티를 내며 상처를 주었던 것도 그랬다.

‘난 왜 늘 이모양일까’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상대에게 그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고 그것이 뻔히 탄로날 줄 알면서 거짓말을 하고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세민을 배반하고 나서 그대로 도망쳐야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돌아와 거짓말을 하며 이세민의 인내심을 시험하였다. 비담이 그 알게모르게 속으로 좋아하고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었다. 타국의 볼모를 조건없이 등용하고 중요한 일마다 믿어주었던 이세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었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결국은 배신하고 돌아와서 거짓말을 하는 거라니... 비담은 푹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팔에 묻었다.


한달여 후 감옥에서 끌려나간 비담은 황제의 알현실 밖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알현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뜻밖에도 춘추의 목소리였다.

“백제부흥회는 신라와는 무관합니다.”

비담은 등줄기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자신을 말리던 춘추가 직접 이세민을 만나러 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춘추가 어째서 여기에...’

그때 문이 열렸다. 비담은 방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그럼 이자가 백제부흥회에 당의 군사정보를 흘린 것은 어떻게 설명할건가?”

이세민의 말에 춘추와 비담의 시선이 부딫쳤다. 춘추는 비담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제가 시킨 일이 아닙니다. 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세민은 못믿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춘추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신라의 볼모로서 그런 일을 벌였다면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저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이자 대신 신라의 왕족을 볼모로 두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신라가 점령한 백제지역의 저항을 마무리하는 대로 당군이 점령한 지역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세민은 팔짱을 끼고 춘추를 바라보았다. 춘추의 제안이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말에 불과하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신라와의 관계를 당장 끊을 수는 없었다. 신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고, 고구려와 전쟁을 하면서 바다건너 백제 땅에 당군을 언제까지 주둔시켜 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저런 상황을 고려하면 당장은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을 듯 했다. 비담은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듯 한 춘추의 밀고 당김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세민은 비담을 풀어주라 명했다.


풀려나 궁 밖을 나온 비담은 기다리고 있던 춘추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너야말로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돌아온거야? 네가 간자혐의로 잡혀있다고 이세민이 연락해주지 않았으면 죽을 뻔 했잖아.”

춘추는 조금 화가 난 듯 말없이 잠시 비담을 바라보더니 입을 뗐다.

“내 아들 법민을 같이 데려왔어. 여기 당나라에 두고 갈거야.”

“뭐? 어째서?”

“물론 볼모지. 백제부흥회의 일로 생긴 이세민과 당의 신료들의 의심을 풀기 위해서. 자리 잡을 때까지 잘 부탁해.”

비담은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박거렸다.

“잠깐잠깐… 나한테 네 애를 떠맡기고 가겠다고?”

“널 구하기 위해서 볼모로 데려왔으니까 당연하잖아”

“날 구하기 위해서 그 앨 데려왔다구? 그말을 믿을거 같아?”

비담은 춘추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춘추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난 그애보다 더 어릴 때부터 혼자 수나라에서 지냈어. 영리한 아이니까 잠잘 곳만 마련해주면 혼자 알아서 할꺼야.”

“난 전쟁하러 전선을 떠돌아 다녀야 하는 몸이야. 장안성에 붙어있을 시간 없다구.”

비담의 거절에도 춘추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

“알아. 잠잘 곳만 마련해 주라니까. 그리고 혹시 기회가 되면 이세민의 아들들에게도 소개를 시켜주면 고맙겠어.”

춘추는 황당해서 헤 입을 벌리고 있는 비담에게 한마디 덧붙이고 돌아서서 갔다.

“시간나면 무술수업도 시켜주면 좋고. 신라에서는 유신에게 배우던 중이었지.”

유신에게?”

비담은 앞서서 가버리는 춘추가 얄미운 듯 궁시렁거리며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갔다.

‘저녀석한테 또 당했군.’


법민은 쉽게 당나라 생활에 적응했다. 당나라 말도 금새 능숙해졌고 시종 하나만 데리고 장안성 여기저기를 활기차게 들쑤시고 다녔다. 비담은 틈틈이 그에게 서책과 무술을 가르쳤다. 법민은 가끔 꾀를 부리기도 했지만 대체로 열심히 비담이 시키는 대로 연습을 했다. 공중제비를 도는 연습을 하던 법민은 지쳤는지 숨을 몰아쉬며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근데요 스승님... 꼭 이런거 해야해요? 이런거 안해도 검술연습 할 수 있잖아요.”

비담은 시원한 그늘에서 빈둥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다가 법민을 힐끗 보며 말했다.

“힘들어?”

그러더니 일어서서 법민에게로 다가가서 몸을 굽히고 말했다.

“내가 시키는대로 잘 수련하면 유신을 이길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줄께.”

“유신 삼촌을요? 유신 삼촌이 신라에서 제일 쎈데.”

법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법민은 조용한 춘추와 달리 밝고 적극적이었다. 유신을 닮았는지 몸도 튼튼하고 무예의 감각도 있었다. 춘추 덕만 유신 그리운 얼굴들이 한 아이에게로 모여 있었다. 비담은 문득 지난 날의 추억에 마음 한편을 저며오는 것을 느끼며 법민을 번쩍 안아들고 눈코입에 닥치는대로 뽀뽀를 했다.

“무례하십니다.”

법민은 버둥거리며 비담을 밀어냈다.

“무례? 스승님한테 그런 말버릇이 어딨냐?”

비담은 법민의 코를 한번 꼬집고 놓아주었다. 법민은 그나이 또래 남자아이가 그렇듯 개구장이 짓으로 쉼없이 사건을 만들었고, 비담이 야단이라도 치려하면 아이들이 그렇듯 낙천적인 웃음으로 그의 마음이 풀리게 만들었다. 마지못해 떠맡게 된 아이였지만 비담은 생전 처음으로 가족을 갖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법민을 대할 때면 마음속에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다른 비담이 나타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법민을 보면서 미실과 문노가 그립기도 했지만, 반대로 자신을 버렸던 그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 미워지기도 했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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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속에서 춘추는 이미 30대라서 상관없지만 승호가 미성년자라 씬 쓰기 찜찜하다
심리변화를 나타내려면 더 자세히 써야할거 같고 승호를 생각하면 자세히 쓰면 안될거 같고..
비추분자는 이래저래 힘들다 ㅠㅠ
 

5.
이세민은 소정방에게 13만의 군사를 주어 배를 타고 고구려로 향하도록 했다. 비담도 소정방의 부관으로 함께 출전하였다. 고구려군은 당의 수군의 출항 소식에 황급히 당군의 진로로 예상되는 성에 군사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당군의 배는 성에 거의 도착할 무렵 갑자기 기수를 돌려 백강 하구로 향했다. 동시에 춘추는 유신에게 군사 5만을 주어 출병하게 하였고, 신라군 역시 고구려와의 접경지대로 향하는 듯 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백제의 영토인 백강 하구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백제는 고구려가 아닌 자신들이 표적인 것을 할고 허둥지둥 방어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당나라와 신라가 모두 고구려와 몇 년 째 전쟁중이라 방심하고 있었고, 의자왕도 정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있어서 빠른 시간에 군사를 제대로 동원할 수 없었다. 의자왕은 급한대로 계백에게 군사를 주어 백강하구에 도착한 당군과 합류하기 위해 진격하고 있는 신라군을 막도록 하였고, 동시에 고구려에 원군을 청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18만의 나당연합군이 언제 방향을 바꿔 고구려로 향할 지 모른다는 이유로 백제의 청을 거절하였다. 계백은 결사적으로 신라군의 전진을 막으며 그들이 당군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대로 며칠 더 시간을 끌면 군량미와 보급품이 없는 당군은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라군은 어째서 당도하지 않는 것인가?”

소정방은 초조하게 말했다.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이 탈영을 시작하고 있다. 이대로 언제 올지 모르는 신라군을 기다리는 것은 시간낭비다. 철수 준비를 하라.”

비담은 소정방을 달랬다.

“공을 세우러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시렵니까. 전투도 한번 못해보고 돌아간다면 폐하께 드릴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유신이 반드시 며칠 내로 당도할 것이니 기다려보시지요.”

며칠 후 유신이 계백의 저항을 뚫고 백강 하구에 보급품을 가지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굶주림에 지쳐 많은 병사들이 탈진한 후였다. 소정방은 불같이 노해서 김유신을 꾸짖었다.

“신라군의 보급이 늦어져 병사들이 굶주려 탈영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당군의 병력의 손실을 그대는 어찌 책임질 생각인가?”

유신은 고개숙여 사죄했다.

“소신의 책임입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사오나, 우선은 백제군과의 전투가 시급하니 전투가 끝난 후 책임을 물어주십시오.”

다른 장수들이 소정방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 나서서 유신의 편을 들어주는 당나라 장수가 있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입니다. 계백은 만만한 장수가 아닙니다. 어쨌든 보급품이 당도하지 않았습니까. 상벌은 추후에 논하시지요.”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유신은 어쩐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진격했다. 사비성은 쉽게 손에 넣었지만,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파천하였다. 연합군이 웅진성에 다다를 무렵에는 이미 백제 전역의 군사들이 웅진성을 지키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의자왕의 사신이 소정방을 비밀리에 만나고 갔다는 소식에 비담은 소정방을 찾아갔다.

“백제의 사신이 무엇을 제안했습니까?”

소정방은 그를 흘낏 보며 말했다.

“기밀 사항이라 말할 수 없다. 황제폐하께 직접 보고드려야 할 사안이다.”

비담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서 당할 백제가 아니었다. 뭔가 계책을 꾸미고 있을 것이 뻔했다. 십중팔구는 신라와 당을 이간시키기 위한 계책일 것이었다.

“그래서… 폐하께 보고를 드리실 건가요?”

“중대 사안이니 그래야 할 것이다.”

“폐하의 보고드리기 위해 장안성까지 다녀오는 시간이면 이미 백제는 완전히 방어태세를 갖출 것입니다. 장군께서 출병하면서 폐하께 받은 명은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의 술수에 넘어가 시간을 허비하고 시기를 놓친다면 폐하의 명을 실행하지 못한 이유를 뭐라 변명하실 것입니까?”

그제서야 소정방은 눈쌀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듯 했다.

“우선은 백제를 공격하면서 폐하께 보고를 드리더라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백제의 제안이 시간을 허비해도 좋을 정도의 것입니까?”

비담의 말에 소정방은 마침내 털어놓았다.

“의자왕의 제안은 고구려와의 외교를 끊고 백제에 친당정권을 세울 테니 공격을 멈춰달라는 것이었다.”

“공격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공격하면서 협상을 주도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합니다.”

비담의 말에 소정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담은 서둘러 전장의 후방에서 유신군을 지원하고 있는 춘추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군.”

춘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제안 받아들이라고 해.”

“뭐?”

놀란 비담의 물음에 춘추는 덧붙였다.

“단 당군을 웅진성에 받아들이도록 성문을 여는 조건으로.”

춘추는 바람처럼 선선히 웃으며 말했다.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께.”

비담은 역시 하는 듯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널 좋아하는지 알겠다. 나보다 나쁜 놈이라고 맘놓고 욕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가 너니까.”

춘추는 비담의 말에 샐쭉해서 그를 째려보았다.

넌 사랑고백 참 낭만적으로 하는구나.”


소정방은 백제를 유지시키는 대신 친당정권을 세우고 웅진성에 당군을 주둔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백제의 화친 제안을 받아들였다. 의자왕은 웅진성의 성문을 열어 당군을 무혈입성시켰다. 웅진성의 백제군이 무장해제 되고 의자왕은 당에 항복하였다. 그때 춘추가 유신과 함께 신라군을 이끌고 웅진성에 들이닥쳤다. 춘추는 소정방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백제 존속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백제의 영토는 최초의 맹약대로 신라와 당이 나누어 각자의 영토로 복속시켜야 합니다. 당의 황제께서 하신 약조를 장군께서 어기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소정방은 춘추의 말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았다. 결국 의자왕은 폐위되고 감옥에 갇혔다. 당군과 신라군은 백제의 영토를 나누어 각자의 군대를 주둔시켰고 백제는 그렇게 허무하게 멸망하였다.


“백제왕의 왕관에 박혀있던 단백석이야.”

비담은 손에 들고 있던 단백석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방안에는 반투명한 휘장이 늘어진 침대가 있었고, 보일 듯 말듯한 휘장 너머에 춘추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비담이 휘장을 걷고 들어가자 침대에는 알몸의 춘추가 허리만을 흰 깃털부채로 가린 채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춘추는 자신의 몸에 드리워진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에게 색공을 받는 사람은 세상에 너 하나일꺼야.”

비담은 관능적인 춘추의 모습에 희미하게 웃으며 침상에 앉아 춘추의 매끄러운 무릎을 쓰다듬었다.

“폐하의 옥체를 소신이 감히 함부로 다뤄도 되겠습니까”

비담은 장난스럽게 농을 걸었지만 목소리는 뜨거웠다. 춘추는 안개가 낀 듯 몽롱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오늘밤은 왕이 아니라 네가 꺾어주기를 기다리는 꽃일 뿐이야.”

비담의 손길이 춘추의 무릎을 떠나 허벅지로 올라갔다 부채 밑으로 사라지자 춘추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지며 해당화처럼 붉은 입술이 바튼 숨을 내쉬며 벌어졌다. 비담은 꽃잎을 헤치고 들어가며 거칠게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켰고 춘추는 유화라도 되는 것처럼 야한 몸짓으로 신음하며 반응했다.

쾌락으로 하얗게 지새운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고 있었다. 춘추는 오미자술을 따라 비담에게 주며 말했다.

“백제 지역에서 주둔하는 당군에 저항하는 백제부흥회라는 세력이 있어. 네가 백제부흥회를 지원해줬으면 해.”

춘추의 말에 비담은 고개를 갸웃했다.

“백제부흥회를 지원해? 왜 그런일을 해야하는데?”

“어차피 당군을 백제영토에서 몰아내야 신라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는데 신라가 전면에 나설수는 없잖아. 그러니 백제부흥회를 지원해서 당군을 몰아내는 이이제이 전술을 쓰려는거야.”

“너… 이세민의 뒤통수를 치려는거야?”

설마 하며 묻는 비담에게 춘추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당나라도 백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적국의 하나일 뿐이야. 너도 삼한일통에 당나라의 힘을 빌리면 빼앗은 영토를 나눠주게 될거라며 못마땅해했었잖아.”

“넌 정말…”

무서운 아이로구나 하는 말을 삼키며 비담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춘추가 이세민의 뒤에서 딴마음을 먹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한 춘추의 마음이 깊지 않은 것을 보고 기뻐해야 마땅한데도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혈육처럼 따르던 이세민을 백제를 공격하는데 이용하고 뒤에서 배반하면서도, 겉으로는 고분고분한 척 하며 고구려와의 전쟁을 다시 부추기는 춘추의 깜찍한 모습을 보며, 자신도 이세민과 마찬가지로 그저 춘추의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춘추는 비담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넌 내 신하가 아니잖아.”

“그럼 난 너의 뭐니?”

춘추는 말문이 막혔다. 말이 엇나가는 느낌이 계속되었지만 비담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 지 알수 없었다.

...하고싶지 않으면 하지 마. 다른 사람을 알아볼께.”

“하겠어.”

“그일을 하고나면 당나라에는 돌아가지 마”

“어째서?”

“너무 위험해. 증거는 없어도 내가 뒤에서 이런 일들을 조종하는 걸 짐작하고 있을텐데 이세민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잖아.”

“그럼 또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는거네.”

비담은 쓰게 웃었다.

‘결국 이런거였군. 너에게 쓰여지고 쓸모가 다하면 버려지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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