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만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춘추는 정계에 나서지 않고 여전히 한가로이 풍류에 젖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서라벌 세력가들의 여식들이나 부인들과 청유를 다니거나 잔치를 열어 사람들을 불러모아 구경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미 보량궁주와 혼인했지만 아름답고 다정하면서 예의바르고 말솜씨가 뛰어난 춘추에게 많은 서라벌 여인들이 반해있었다.
보량은 늘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춘추가 걱정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춘추가 그들의 마음을 얻을 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들리는 이야기는 보량으로서도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춘추가 유신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유신의 여동생 보희를 자주 만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여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보량은 신경이 쓰였다.
“공께서 유신공의 여동생 보희와 자주 어울리신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보량이 어렵게 꺼낸 말에 춘추는 아무일 아니라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보희는 유신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우연히 같이 본 것 뿐입니다. 우리가 혼인하던 날 내가 하던 말 기억하십니까.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믿고 따라주겠느냐 했지요. 부인께서는 그러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게는 부인 외에 다른 여인도 다른 아내도 없을 것입니다.”
보량은 춘추의 속을 알 수 없었지만 춘추가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유신의 골치를 썩이고 있는 것은 보희보다도 둘째 여동생 문희였다. 춘추가 유신을 보러 온다는 핑계로 뻔히 유신이 집에 없을 시간에 드나들며 여동생들을 만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희는 몸가짐이 바르고 수줍어서 춘추가 집에 찾아와도 인사만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지만, 문희는 춘추에게 떨어질 줄 몰랐다. 뿐만 아니라 춘추가 청유라도 간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가 있는 곳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여동생이 혼인을 한 남자와 가까이 지낸다는 소문이 나는 것은 자존심 강한 유신으로서는 부끄러운 수치였다. 아무리 문희를 혼내도 문희는 아랑곳 하지 않았고, 마침내 참다 못한 유신은 춘추에게 말했다.
“춘추공께서는 혼인을 하신 몸으로 어찌 문희를 가까이 하시는 것입니까. 남부끄러운 일이니 저희집에 찾아오시는 것을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춘추는 도리어 유신에게 부탁했다.
“문희가 나를 쫒아 다니는데 내가 피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유신공께서 문희를 잘 타일러 주시지요.”
유신은 부끄러움과 분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유신은 문희를 불러 진지하게 타일렀다.
“이미 혼인을 한 춘추공을 쫒아다니다니 네가 어찌 가문에 먹칠을 하려 드느냐.”
그러나 문희의 결심은 굳었다.
“춘추공은 왕위에 오르실 분입니다. 왕이 되시면 어차피 후궁들을 두시게 될텐데 한시라도 빨리 인연을 맺어 장자를 얻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유신은 화를 내며 문희를 꾸짖었다.
“폐하께서 계신데 어찌 그런 불경한 말을 하는 것이냐. 그리고 네 어찌 왕족의 피가 흐르는 몸으로 후처의 자리로 가려 하는 것이냐.”
문희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차 왕의 어미가 될 수도 있는 자리가 아닙니까. 그리고 오라버니, 춘추공께서도 우리 가문과 혼인을 하실 요량이시니 우리집에 자주 드나드시는 것입니다.”
“춘추공은 네게 관심이 없다고 하셨다. 소용없는 일이니 더 이상 공을 귀찮게 쫒아다니지 말거라.”
문희도 알고 있었다. 춘추가 유신의 가문과 혼인을 위해 관심을 두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언니 보희였다.
춘추는 유곽에서 기다리겠다는 보희의 서찰을 받고 염종의 유곽으로 향했다. 그러나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보희가 아니라 문희였다.
“보희언니가 아니라 실망하셨습니까.”
문희는 물음에 춘추는 대답없이 웃을 뿐이었다.
“공께서는 어째서 저보다 언니를 취하려 하시는지요. 제가 언니보다 미모나 지혜나 여인으로서의 성품이 떨어진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대처럼 총명하고 용기있는 여인은 내게는 과분하오.”
춘추는 다정하지만 뼈가 있는 말투였다.
“저를 공의 뜻대로 다스리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문희는 굴하지 않고 춘추에게 거듭 자신을 받아주기를 청했다.
“공께서는 사랑할 여인이 아니라 충성스런 신하를 원하고 계신 듯 합니다. 제가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면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결코 공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따를 것입니다. 보량궁주를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황후로 삼으신다 해도 따를 것입니다. 저희 가문과 유신 오라버니가 공을 주군으로 섬기도록 만들 것입니다.”
문희의 당돌한 말에 춘추는 제법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몇 달 후 유신은 문희가 춘추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어머니의 말에 펄쩍 뛸듯이 놀랐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어찌하겠느냐. 춘추공에게 후처로라도 문희를 시집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어머니의 성화에 유신은 하는 수 없이 춘추를 찾았다.
“문희가 춘추공의 아이를 가졌으니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춘추는 유신의 속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말했다.
“문희가 사정하여 하루밤 같이 보낸 것 뿐입니다. 게다가 난 이미 병부령 설원공의 가문과 혼인을 한 몸입니다. 보량궁주 외에 다른 여인을 맞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보량궁주는 제가 설득할 수 있지만 설원공과 한 가문간의 약조와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유신은 상처받은 자존심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비담은 춘추가 요즘 유신에게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을 아는 터라 춘추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랐다.
“어쩐 일이야? 하루걸러 하루씩 유신의 집에 드나든다더니만…”
“아무래도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왔어.“
춘추는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문희가 내 아이를 가졌어.”
“뭐?”
“문희와 혼인을 해야겠는데 설원공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꺼야.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유신과 설원공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비담은 어이가 없어서 킥킥 웃었다. 이미 혼인한 춘추였지만 그가 여인과 관계를 갖고 마음을 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아프게 느껴졌다.
“내가 왜 네 도둑결혼을 도와줘야 하는데?”
춘추는 삐딱하게 웃는 비담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내가 문희를 취해서 유신을 내 사람으로 만들면… 폐하의 곁에는 너만 남게 되잖아. 안그래?”
“그래서 네가 문희와 혼인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싫어?”
싫을 이유가 없었다. 없어야 했다. 그러나 비담의 마음은 생각과 달리 자꾸만 무겁게 가라앉아갔다.
춘추는 대답없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 비담을 바라보다 그에게 물었다.
“넌 폐하랑 잘 지내?”
“응 뭐… 폐하께서 워낙 바쁘시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야기하는 비담을 바라보는 춘추의 마음도 아려왔다. 비담이 덕만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비담이 덕만과 잘 되는 것도 싫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고 무엇 때문에 비담을 찾아왔는지도 잊어버렸다.
유신의 집에 비담과 염종이 찾아왔다. 유신은 그들을 위해 술상을 봐오도록 했다. 셋은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염종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유신공..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뭘 말인가?”
“이미 온 저자거리에 소문이 났습니다. 문희낭자께서… 춘추공의 아이를…”
유신은 수치심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염종은 유신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유신공께서 춘추공에게 문희를 받아달라고 사정사정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닥치시오!”
유신은 눈이 뒤집힐 듯 흥분하여 칼을 뽑아들었다.
“문희는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으니 죽어 마땅할 것이외다. 내 손으로 직접 벨 것이오.”
비담은 문희의 방으로 향하는 유신을 막아서고 칼을 뽑아든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진정하게, 유신. 자네가 문희를 벤다고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겠나.”
옆에서 염종도 거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화형을 시키시면 모를까… 뭐… 그러면 아무도 감히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못하겠지요.”
염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신은 하인을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당장 마당에 커다란 장작불을 피우거라! 그리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라!”
덕만은 병부령 설원공과 함께 신라군의 군사훈련 현황을 시찰하고 궁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덕만은 가마의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유신공의 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화재가 난 것이냐?”
놀란 덕만의 물음에 신하는 대답했다
“알아보고 오도록 하겠사옵니다.”
덕만은 가마를 멈추도록 하고 가마에서 내려 연기가 피어오르는 유신의 집을 바라보았다.
몰려든 사람들을 헤치고 덕만의 일행이 유신의 집 마당에 도착했을 때는 문희를 장작불에 던지려는 유신을 비담이 간신히 말리고 있었다. 유신은 덕만을 보고 흠칫 놀라 예를 갖추었다.
“대체 무슨 일이요. 공의 여동생인 문희를 불태워 죽이려 한다니.”
덕만의 물음에 유신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희가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기에 단죄하려 한 것이옵니다.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혀드려 송구하옵니다.”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덕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춘추를 바라보았지만 보량이와도 그런식으로 혼인한 춘추였기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덕만의 군사훈련에 춘추가 따라나선 것도 미리 계산된 일인 듯 했다. 덕만은 유신에게 말했다.
“유신공의 마음은 알겠으나 그런 일로 공의 여동생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은 가엾은 일이오. 춘추가 문희와 혼인을 하면 되지 않겠소.”
그말을 듣자 설원공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때까지 남의 일인 양 잠자코 있던 춘추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하오나 저는 이미 병부령의 여식인 보량궁주와 혼인한 몸입니다. 다른 가문과 혼인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설원공은 춘추의 말에 다소 안도하며 다시 덕만을 바라보았다. 덕만은 춘추의 마음을 읽기 위해 잠시 춘추의 눈을 바라보았지만 희미하게 웃고 있는 춘추를 보고 이내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병부령. 아무래도 그대가 양해를 해주어야 할 듯 하오. 춘추가 문희를 후처로 맞아들일 수 있도록 허락해주겠소? 내 친히 그대에게 부탁하리다. 문희의 뱃속에 있는 아기는 왕족이며 내 조카손주이기도 한데 이대로 불에 타죽도록 할 수는 없소.”
비담도 설원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문희는 후처일 뿐 황후의 자리는 보량궁주의 것이 될 테니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폐하의 명이니 받아들이시지요.”
설원은 하는 수 없이 춘추와 문희의 혼인을 허하였다.
“여왕폐하께서 문희와의 혼인을 명하시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구료.”
춘추의 말에 보량은 눈물을 글썽였다.
“저 이외의 여인은 없을 것이라 하셨는데 어찌 문희가 공의 아이를 가진 것입니까. 어찌하여 저를 속이신 것입니까. 처음부터 문희에게 마음이 있으니 후처로 들이고 싶다고 하셨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서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부인과의 약조를 지키고 싶었소. 비록 문희에게 잠시 끌렸다 하나 그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혼인을 할 마음은 없었기에 문희를 받아달라는 유신의 청을 거절했소. 폐하의 앞에서도 내가 혼인할 수 없다고 말씀드린 것을 그대도 알고 있을 거요. 내 비록 폐하의 명으로 문희와 혼인하지만 앞으로도 당신은 내게 가장 소중한 여인일 것이오.”
춘추의 말에 보량은 그제야 눈물을 닦고 춘추의 품에 안겼다.
설원공과 보량을 달래어 무사히 치르게 된 춘추와 문희의 혼례식은 간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춘추와 문희가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던 중 문희가 비담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비담공의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춘추공과 혼인까지 하게 되었으니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비담은 비릿하게 웃을 뿐이었다. 춘추도 그들에게 다가왔지만 비담도 춘추도 둘 다 굳은 얼굴로 말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느낀 염종이 헤헤 웃으며 춘추에게 말했다.
“비담공께서는 아직도 혼인을 못하고 있는데 춘추공께서는 두번이나 혼인을 하십니다그려. 비담공도 혼인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지요.”
대답이 없는 춘추 대신 문희가 웃으며 답했다.
“힘이 닿는 한 그리 할 것입니다.”
며칠 후 춘추는 비담의 집을 찾았다. 자신을 경멸하는 듯 한 비담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었다.
“고마워. 네 덕분에 유신의 가문과 혼인을 하게 되었어.”
비담은 무뚝뚝하게 춘추를 흘낏 볼 뿐 말이 없었다. 춘추는 다시 비담을 떠보았다.
”이제 이모님 곁에는 너뿐이니 잘해봐.”
비담은 여전히 냉랭하게 말이 없었고 춘추는 비담에게서 뭐든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슬쩍 찔러보았다.
“근데 넌 폐하와 맨날 일만하고 회의만 하면서… 그게 무슨 연모라고 할 수 있냐.”
그제야 비담은 불끈 하며 춘추를 돌아보았다.
“그럼 니가 하고 있는 건 연모냐? 보량이와 문희를 가문을 보고 꼬셔서 혼인하는 거… 그게 연모야?”
“… 말했잖아. 내가 연모하는 건 너뿐이야.”
“까불래? 니가 만나는 여자마다 그 말 하고 다니는 거 모를 줄 알아?”
“난 언제나 너한테만은 진심을 이야기했어. 네가 믿지 않는 것 뿐이야.”
춘추는 조용하면서도 슬픈 어조로 말했지만 비담은 여전히 비아냥거릴 뿐이었다.
“아 그래? 근데 어떻게 연모를 둘로 나눌 수가 있냐? 아니 넌 네가 편할대로 셋으로도 넷으로도 나누잖아.”
“나눈적 없어.”
“관두자.”
“비담.”
춘추는 비담의 손을 잡았지만 비담은 매정하게 뿌리쳤다.
“더러워.”
비담은 왜이렇게 가슴이 부글부글 끓는 것일까 생각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책상위에 있던 꽃병이 떨어져 산산조각 나며 깨졌다.
“정말로 내가 왜 문희와 혼인을 해야했는지 모르는거야? 가야계 세력을 안심시키고 가야계와 신라계로 분열된 나라를 통합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너는 왜 폐하가 국혼을 안하시는지, 왜 너를 가까이하지 않으시는지, 내가 왜 보량이와 문희와 혼인을 해야 했는지, 정말 아무것도 이해가 가지 않아?”
춘추의 눈에서는 차가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담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 잘난 대의니 뭐니 하는 말 하려거든 집어치워.”
“그래. 그 잘난 대의… 네가 한마디만 해주면… 나도 다 버릴 수 있어.”
춘추는 비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을 듯 손을 뻗었지만 비담이 또 뿌리칠까 차마 잡지 못하고 내렸다.
“너만 나를 좋아해준다면… 다 버릴 수 있어. 폐하를 연모해도 좋아. 하지만 나도… 좋아해줘.”
비담은 춘추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마음을 다잡고 비꼬았다.
“난 너처럼 연모를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그렇게까지 연극하지 않아도 너를 적으로 돌리지는 않을 테니 걱정마.”
“네가 날 믿지 않아도… 난 네가 좋아.”
춘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깨어진 꽃병조각을 집어들고 자신의 손목에 내리쳤다. 붉은 피가 춘추의 손목에서 솟구쳤고, 비담은 놀라서 춘추의 팔을 잡았다.
“무슨 짓이야?”
비담은 손목의 피가 멎도록 꽉 눌러 잡고 춘추를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피를 멎게 하는 약재를 찾아와 춘추의 손목에 바르고 천으로 단단히 감아주었다. 춘추는 창백해진 얼굴로 뭔가 말하려는 듯 자신을 치료해주는 비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도 내 진심을 못 믿겠어?’
비담은 그런 춘추를 기가 막힌 듯 보았지만, 힘없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그를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천천히 안아주었다.
‘그래. 진심이 아니더라도 또 속아 줄께.’
춘추는 비담이 자신을 안아주자 피곤한 듯 그의 어깨에 기대며 그제서야 편히 눈을 감았다.
‘정말 감당이 안되는 녀석이야.’
비담은 이렇게 생각하며 며칠째 가슴에 맺힌 답답한 응어리를 풀기 위해 다시 한번 깊이 숨을 내쉬었지만, 춘추를 가만히 안고 있노라니 무엇 때문에 춘추에게 화가 났었는지도 점차 잊어갔고 화가 났었다는 사실조차도 아득하게 멀어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