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축구부 아이들이 흥수를 대놓고 따돌리는 것은 좀 덜 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은근히 따돌리는 것은 여전했다. 흥수는 내가 축구부 주장을 위협한 것을 알고는 기분나빠했다.

축구에는 축구의 룰이 있어. 축구는 내가 알아서 해.”
나도 흥수가 좋아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똑 같은 상황에 처하면 또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그 사건으로 인해서 흥수는 나를 무척 신뢰하게 된 것 같았다. 흥수와 나는 특별히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것도 아니고, 가끔씩 같이 집에 가는 것 뿐인데도 점점 다른 애들과는 다른 특별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흥수 누나는 흥수에게 축구부 애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먹을 것 사주라며 용돈을 주곤 했다. 하지만 흥수는 그 돈으로 축구부 애들을 사주는게 아니라 내게 한 턱 쏘곤 했다. 나는 처음에는 모르고 얻어먹었지만, 사실을 알고 나니 영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나 말고 축구부 애들한테도 사주라고 했더니 흥수는 덤덤하게 말했다.

쟤네들은 내가 뭐 사줘도 좋아하지도 않아.”

축구부 애들은 아니지만, 학교에는 흥수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흥수는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몇 있었다. 나는 나대로 내게 줄서온 아이들과 어울려 다녔다. 하지만, 그애들은 일짱이 누가되던 쫒아다니는 똘마니들이었지 내 친구는 아니었다. 내게 친구는 흥수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흥수는 친구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나를 따라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흥수도 외로웠던 것 같다. 친하던 친구들은 학년이 높아져갈수록 공부한다고 점점 멀어지고, 공부 안하는 나 밖에 놀 친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항상 축구부의 눈총을 받는 존재였으니 행동과 말도 늘 조심해야했고, 인기는 많아도 정말 내편이다 믿을 수 있고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문제아 취급해도 흥수만은 나를 친구로 여겨줬던 것 처럼, 흥수도 다른 사람들은 다 그를 인기있는 축구유망주로만 쳐다봐도 자기를 그냥 평범한 친구로 여겨주는 사람이 하나쯤 필요했던 모양이다. 외로움은 그렇게 우리를 점점 뭉치게 만들었다.

 

니가 우리 애들 발랐다며? 축구부 애들도 건드렸다던데배짱좋네?”

집에 가던 나와 흥수를 가로막은 그들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싸움 깨나 할 것 같아 보였지만 나는 기죽지 않았다. 이미 고등학생들하고도 여러 번 붙어 봤다.

뭐 누가 일짱이 되든 상관 없는데, 이동네 초등학교 일짱들은 전부 자기네 학교 애들한테 돈 걷어서 이 형님들한테 셔틀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너도 계속 짱먹고 싶으면 우리한테 상납해라.”

지금껏 일짱이 애들 삥뜯어다가 이들에게 바쳤던 모양이었다.

내가 일짱인 줄 알면 여기가 내 구역이라는 것도 알겠네. 셋 셀 동안 도망가면 곱게 보내줄테니까 기회 줄 때 가라.”

형들은 내 말에 완전 열받은 듯 했다.

, 말로 해서 못알아먹는 놈이다. 완전 꼴통인데?”

한 녀석이 내 머리를 툭 치려고 손을 뻗었고 나는 그 팔을 꽉 잡았다.

어쭈? 잡았어?”

숫자에서 몰릴 때는 도망가거나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발로 걷어차고 나머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흥수도 옆에 있던 형에게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다른 하나를 향해 돌진 했다. 대부분은 나와 흥수가 일대일로 상대하면 당해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하나는 고등학교 일짱답게 노련했다. 나는 흥수까지 싸우다 다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둘이 일대일로 붙고 끝내지?”

내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깨달은 고등학교 일짱은 이렇게 된 이상 일대일로 자존심을 건 싸움을 해야 했다. 내 작전은 지지 않는 것이었다. 지지만 않아도 상대는 고등학생이니 내가 이긴 셈이다. 나는 쉽게 틈을 내주지 않고 수비하면서 섣불리 상대의 도발에 끌려들어가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잽을 날리며 주거니받거니 했다. 결국은 싸움도 비슷한 상대끼리는 집중력과 정신력으로 승부가 난다. 때려도 때려도 다시 일어나고 맞받아치는 내게 상대는 점점 지치고 짜증나는듯 했다. 한시간 가까이 싸움이 계속 되었을 때 나는 승부를 걸었다. 지금까지 수비적인 태도를 바꿔서 무차별 공격을 했다. 상대도 당황해서 서로 닥치는대로 마구 치고박는 난타전이 계속되었다. 피가 흐르고 계속 얻어맞는 와중에도 나는 치명타는 맞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몇번이나 넘어진 채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흥수에게 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일어나고 또 일어나서 다시 맞았다.

쟤 초등학생 맞냐? 완전 괴물인데?’ 하고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쯤이면 내가 지지는 않은 셈이었다. 마침내 고등학교 일짱도 완전히 탈진해버렸다.

, 오늘은 이만 가자. 너 앞으로 조심해라.”

결국은 이짱이 일짱을 말려서 부축해서 데리고 떠났고, 나에게 위협적인 멘트를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이긴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알았다. 흥수는 내게 달려와서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다친데 없냐?”

내가 이렇게 전력을 다해 싸우는 모습을 흥수가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다. 아닌척 했지만, 흥수도 내가 어떻게 될까봐 꽤나 놀란 듯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빙신아, 어차피 너 삥 뜯는거, 좀 더 뜯어서 주고 말지 몇시간을 쳐맞고 있냐?”

딴놈 밑에 들어갈거면 일짱은 뭐하러 해? 남한테 고개 안 숙일려고 일짱하는거지.”

나는 하도 맞아서 몸이 말이 아니었고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전에도 여러 번 싸울 때마다 그랬지만 신기하게도 하루밤 자면 다시 말짱해지곤 했다. 

 

그 날 이후로 말로 설명은 안되지만 나를 대하는 흥수의 태도가 좀 변한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흥수가 나를 어리게 보고 형처럼 돌봐줬다면, 그 이후로는 겉으로는 지가 형이니 내가 동생이니하고 장난을 치면서도, 내게서 무언가 감탄스러운 면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기는 축구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가족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많은 것을 타협하고 숙이고 지나가는데, 나는 쥐뿔도 없으면서 절대로 굽히지 않고 꼿꼿한 자존심이 좋다고 했다. 나야말로 침착하고 잘났으면서도 겸손한 흥수가 멋져 보였는데, 사람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 끌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특별히 사는게 재미있지도 않고, 가진 것도 없고 꿈도 없고 가족도 지켜야 할 것도 없으니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울 수 있었지만, 흥수와 친해지고부터는 내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흥수가 싸움에 휘말려 다치는 것은 싫었고, 내가 사건에 휘말려 강제전학 가게 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싸울 때는 될 수 있으면 흥수 몰래 다녔고, 강제전학 당할 일은 만들지 않으려고 학교 안에서는 될 수 있으면 사건을 만들지 않았다. 흥수가 없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학교 안의 애들을 손봐줘야 할 때는 똘마니들을 시켰다.

 

야 너 누구 좀 만나야겠다.”

전에 싸웠던 고등학교 일짱이 아직 그날의 상처가 낫지 않아 딱지가 앉은 얼굴로 내게 찾아왔다. 나는 그의 위에 또 누가 있구나 직감했고, 멀리 서있는 검은 고급 승용차를 보고는 그가 꽤 큰 조직에 속한 사람일거라고 짐작했다. 그정도면 정말 싸움의 고수일거라고 생각되어 나는 적지않이 긴장이 되었다.

사천파 회장님이시다.”

그런데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달리 차에서 내린 사람은 싸움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중년의 아저씨였다. 검은 양복을 입고 청회색 머플러를 두르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그는 나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으스스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대단하구나. 너보다 훨씬 나이 많은 형들을 그렇게 혼내주다니. 그런데 어쩔셈이니? 너 같은 아이 하나 아무도 몰래 데리고가서 바다에 빠뜨리는 것쯤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솔직히 겁이 났지만 일단은 배짱을 튕겨보기로 했다.

헤엄쳐 나와야죠. 안그럼 바다속에서 쭉 살던지

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넌 정말 겁이 없구나. 난 겁없는 녀석이 좋다. 나이를 먹으면 겁이 많아지거든.”

그는 내게 인사를 하고 천천히 다시 차에 올랐다.

나중에 더 크면 또 보자꾸나.”

우리는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흥수는 나에게도 권투나 킥복싱 같은 운동을 해보라고 했지만, 나는 하고 싶지 않았다. 흥수가 더러운 꼴을 당하는 것을 많이 본 터라 나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 없이 거의 혼자 살아오다시피 한 나는 누구에게 굽히고 배우고 머리를 숙이는 상황이 영 어색했다. 14살의 나는 세상은 나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고, 힘만 있으면 커서도 누구에게 머리숙이지 않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꿈을 통해서 점점 성장해가고 큰 무대로 나아가는 흥수를 보며 부럽기도 했다. 중학교 축구부에서 흥수는 더욱 대회에 자주 출전하게 되었고, MVP로 신문에까지 작게 이름이 실리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를 부러워 하거나 누구처럼 되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없었다. 엄마가 있는 아이들을 보면 부러웠지만, 그것 말고는 공부든 뭐든 잘하는 애나 집이 부자인 애나 선생님에게 귀여움받는 애를 부러워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것들이 내게는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흥수는 어쩐지 부럽기도 하고 닮고 싶기도 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고,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자신을 질투하는 동료마저 포용하는 그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흥수가 성취하고 한계단 한계단 밟아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뭔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성취하고 싶다는 마음이 꿈틀거렸다. 그런데 내가 잘하는 거라고는 싸움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덤벼오는 애들을 수동적으로 상대해왔다면 중학교부터는 이웃 중학교들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먼저 그 학교 일짱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흥수가 시 축구대회, 도 축구대회, 전국 축구대회로 토너먼트로 차근차근 올라가듯이, 나는 경기도 일대의 중고등학교의 일짱들을 하나하나 꺾고 다녔다. ‘쓰나미라는 별명도 그때 생겼고, 내 이름은 신문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그 별명은 중고등학교 일대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사천파 보스는 잊을 만 하면 한번씩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너 꽤 유명해졌던데 아직도 학교를 다니고 있니?”

학생이 학교를 다녀야죠 그럼

학교에서는 살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아. 나랑 같이 일해보는게 어떠냐?”

그는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돈보다는 흥수와 보내는 하루하루의 평범한 일상이 좋았다.

학교 계속 다닐건데요.”

그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너 축구부 박흥수라는 아이와 어울려 지낸다던데, 너희 둘은 갈 수 있는 길이 달라. 살다보면 인생에 선택권이란 건 별로 없다. 니가 먼저 걔를 떠날지, 걔가 먼저 너를 떠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각자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길이 갈리게 될거다. 헤어지게 될 수 밖에 없는 친구 때문에 니 앞길을 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흥수와 내가 헤어지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흘려버렸다. 흥수가 어디에 가든 나는 따라갈 테니까.

 

마침내 내가 중3 때 경기도의 모든 중고등학교 일짱들을 이기고 경기도 일짱이 되면서 사천파 뿐 아니라 여러 폭력조직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졌다. 흥수만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런 제의를 받는다는 것에 어깨도 으쓱하고 흥수에게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이런저런 조직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말을 들은 흥수누나의 경악하는 표정을 보고는, 그제서야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던 길이 내가 생각한 그런 명예롭고 인정받는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에 흥수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갔다. 유수의 축구명문 고등학교로부터 장학금을 줄 테니 자기네 학교로 오라는 제안이 왔고, 흥수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외국 에이전트의 눈에 띄면 장학금받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유럽 유소년 축구팀에 들어갈 수도 있대.”

흥수는 들떠서 말했지만, 그 말에 나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흥수가 제주도, 아니 독도에 가서 축구를 한대도 나는 따라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럽이라니, 나는 유럽에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중학생인 내게 유럽은 로켓을 타고 가야하는 달나라만큼이나 현실감이 없고 먼 곳이었다.

니가 먼저 걔를 떠날지, 걔가 먼저 너를 떠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각자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는 길이 갈리게 될거다.’ 라고 했던 사천파 보스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가 가기로 한 고등학교의 감독이 나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이 것이구나, 이런 것이었구나.’

나는 길이 갈리게 된 다는 것의 의미를 뼈아프게 깨달아갔다. 경기도 일짱인 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라 혐오스럽고 기피대상이고 흥수의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가 된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밉고 화가 났다. 우선 나 자신에게 화가 났고, 나를 이렇게 만든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몹시 화가 났다. 그러나 그게 누구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 자신 외에는 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고, 그 화를 흥수에게 돌리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흥수가 나를 떠나는 것 보다 더 나쁜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더 나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왜 그때 흥수를 그냥 떠나보내지 못했는지 수백번도 더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년 후 내가 검정고시 보고 고등학교 진학 준비를 할 때 사천파 보스가 나를 찾아 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초점없이 멍한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듣자하니 너 이젠 싸움 안 한다면서.”

관심없어요 이젠.”

나는 아무 의욕없이 대답했다. 그는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결국은 그 녀석이 너를 구했구나.”

그리고 그 이후로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당시에 나는 흥수 생각에 매일매일이 지옥처럼 괴로왔기 때문에 흥수가 나를 구했다는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은 흥수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나게 된 후였다.

너 아닌 척 하고 사니까 좋냐?”

그동안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그를 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어떻게든 과거를 떨쳐버리려고 죽을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흥수는 여전히 울분을 삼키며 과거에 갇혀있었다. 운명의 신은 흥수의 길을 끊어버림으로써 내 길을 돌려놓은 것이었다.

지금은 이게 나다.”

나는 속에 있는 말을 삼켰다. 감히 너 때문에 정신차렸다고 너무나 미안해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럼 난 모르는 놈이네.”

흥수의 눈은 아픔, 그리움, 외로움에 물기를 담고 있었지만 떨쳐버리려는 듯 냉담하게 말하고 뒤돌아서 걸어갔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이 마치 어린시절 그의 집에 놀러가기를 두려워해서 뒤돌아가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 흥수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라 옛날 생각에 괜히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나지막히 혼자 중얼거렸다.

학교에서 보자, 흥수야.”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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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순이 회상 시점으로 초딩중딩시절 남순 흥수 팬픽임(아청법에 걸릴 내용 없음)

둘이 어째서 절친이 되었을까 궁금해하다가 쓰게 되었다.

 

 

7월초인데 벌써 날이 몹시 더웠다. 집 안은 집 안대로 찜통이고 집 밖은 땡볕이었다. 시원한 아이스크림 생각이 간절했다. 낯선 동네에 이사 와서 아이스크림을 어디서 파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무작정 밖으로 나온 가게를 찾아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걸어내려갔다. 운이 없으면 학교앞까지 걸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미로 같은 동네를 헤매다가 겨우 가게를 찾아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뭐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더워서인지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던 골목에 마침내 누군가 걸어올라오고 있었다. 키로 봐서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같았지만 입고 있는 유니폼은 내가 다니는 학교의 축구부 유니폼이었다. 덥지도 않은지 등에 축구공을 매고 가볍게 오르막길을 오르는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 돈 좀 있냐.”

그 아이는 내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를 쓱 훑어보더니 말했다.

너 우리반이지?”

쫄기는커녕 심심하던 차에 재미있는 일 생긴 듯 나를 보는 그 애 반응이 어이가 없어서 나도 멀뚱멀뚱 마주 바라보았다.

“…”

며칠전에 전학온 애 맞지?”

“… .”

나 모르면 우리학교에서 간첩인데.”

그래? 니가 누군데.”

박흥수.”

그러고 보니, 전학오던 날 교실 맨 뒤에 멀대같이 큰 녀석이 하나 있었던 게 기억났다. 하지만, 나는 걔가 누구든 관심없었다. 빨리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을 뿐이었다.

됐고... 돈 없냐?”

흥수는 픽 웃으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있다, 쨔샤.”

돈을 잡으려고 뻗는 내 손을 피해 손을 위로 뻗는데, 나보다 키가 반뼘은 큰 것 같아 내 손이 닿지가 않았다.

뭐 할려구?”

아이스크림 사먹게.”

나랑 축구해서 이기면 사주지.”

이번에는 내가 픽 웃을 차례였다. 딱히 운동을 배워 본 적은 없지만, 운동 한다고 어깨 힘주고 까불고 다니는 애들하고 체력싸움에서 밀려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종목이든 내 순발력과 지구력을 따라올 만 한 녀석은 별로 없었다. 싸움 뿐 아니라 운동 좀 한다고 거들먹거리는 녀석들 발라주는 것도 내 취미 중에 하나였다.

우리는 공터로 가서 땡볕에 더위도 잊고 축구를 했다. 축구는 나도 자신 있었지만, 흥수의 발재간에는 당해낼 수 없었다. 공을 앞뒤로 굴리며 번번이 내가 헛발질을 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게 만들었고, 내 체력은 더위 앞에서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나는 지기 싫어서 더욱 악착같이 덤볐지만, 이미 5분 붙어보고 실력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땀이 비오듯 흘렀지만 이미 아이스크림 생각은 싹 달아난 지 오래였다. 물론 흥수도 나 때문에 꽤 진을 뺐는지 아까는 그 더위에 땀 한 방울 안 흘리던 놈이 헉헉거리며 연신 눈으로 떨어지는 땀을 닦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체력싸움이다 생각한 나는 어떻게든 녀석의 체력을 바닥까지 떨어뜨리고서 지더라도 지겠다는 마음이었다. 나도 있는 잔머리 없는 잔머리 굴려가며 훼이크도 써보고 뻥뻥 공을 날려서 녀석이 쫒아가게도 만들어보고 온갖 꼼수를 동원했다. 하지만 그렇게 지친 와중에도 녀석은 순간의 찬스에 정확히 골을 넣었고 나는 번번이 미스를 해서 스코어는 점점 벌어졌고 마침내 101이 되었다.

이제 그만 하지?”

흥수가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 질까봐 겁나냐?”

나는 마지막까지 오기를 부렸다. 흥수는 제법이라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너 뛰다 쓰러져 죽을까봐 겁난다,임마.”

죽어도 너 같은 새끼한텐 안진다.”

나는 다시 공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더 이상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쥐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려고 했지만 아파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리를 붙잡고 쓰러지는 내게 다가온 흥수는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다리를 주물러서 풀어주었다. 

너 축구 잘 한다?”

이게 약올리는 건가 101로 이겨놓고 잘 한다라니, 지 자랑을 그런식으로 하는건가, 나는 뱁새눈을 하고 녀석을 흘겨봤다.

내가 쥐만 안났으면 너 같은 건 한쪽 눈 감고도 이겨.”

퍽이나.”

흥수는 공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가자, 아이스크림 사줄께.”

“…너 이기면 사준다며.”

녀석은 더 약올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사주면 재미 없잖아.”

나는 재수없는 놈 하고 툴툴거리면서도 아픈 다리를 어기적거리면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땡볕에 뛰었더니 갈증에 죽을 것 같았다. 우리는 얼음빙과를 한꺼번에 두개씩이나 입에 물고 가게에서 나왔다. 그렇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은 생전 처음 먹는 것 같았다. 어느 새 해가 기울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우리는 골목길 계단에 앉아서 낡은 슬레이트 지붕사이로 보이는 붉은 빛이 점점 어두운 보랏빛이 되는 것을 보며 묵묵히 두번째 빙과를 해치웠다.

우리집 가서 놀다 갈래?”

흥수의 말에 나는 멈칫 했다. 집에 놀러오라는 말,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어렸을 적 멋모를때는 반친구들 따라서 우르르 다른 집에 놀러가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친구 엄마들이 내가 놀러 오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도 없는 아이가 허구한 날 남의 집에 와서 종일 놀다가 점심 저녁 먹고 가니 얼마나 성가셨을까. 하지만, 그나마 나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몇몇 엄마들의 눈빛마저 차갑게 달라진 것은 내가 3학년 때 우리 가족을 비하하며 놀리던 학교 일짱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린 다음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친하던 아이들마저도 엄마가 너랑 놀지 말라더라’, ‘너 집에 데려오지 말라더라하면서 나를 피했다. 그때부터 나는 외토리가 되었고, 그 외로움과 분노를 싸움 걸어오는 녀석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리고 그럴 때 마다 이리저리 자주 전학을 다니게 되어서 친구를 사귀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나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나 집에 가야 돼.”

그리고는 뒤돌아서서 빈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걔네 집에 놀러갔다가 오히려 영영 같이 놀지 못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일었다.

그래, 학교에서 보자.”

흥수는 내 등뒤에다 대고 그렇게 소리쳤다.

 

다음날, 나는 교실에서 흥수를 보긴 했지만, 흥수는 수업은 오전에만 듣고 축구부 연습을 하러 갔다. 나는 집에 가다가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는 축구부를 보았고, 혼자 야생마처럼 종횡으로 질주를 하는 녀석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그 자리에 서서 축구경기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구경하고 서있는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니었다. 정말로 흥수는 걔 말대로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교내 스타였다. 여자애들이고 남자애들이고 간에 축구 잘하고 키크고 성격까지 반듯하고 어른스러운 흥수를 영웅처럼 좋아했다. 흥수 책상에는 늘 여자애들이 놓고 간 편지며 사탕과자 봉지가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오늘도 흥수가 연습 끝나기를 기다리는 여자애들이 몇 명 서성거리고 있다가 걔가 연습을 마치고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둘러쌌다. 나는 굳이 흥수를 기다렸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가방을 메고 교문을 향했다. 그런데 흥수가 나를 불렀다.

, 고남순. 같이 가.”

그러더니 여자애들한테 손을 흔들고는 내게로 뛰어왔다. 나는 왠지 머쓱해서 말했다.

너 기다린 애들하고 같이 가지?”

너도 나 기다렸잖아.”

아냐. 그냥 축구 본 거야.”

너랑 같은 동네잖아. 쟤네들은 딴 데 살아.”

그러고보니 우리가 사는 동네는 학교에서 좀 떨어진 산동네 판자촌이었다. 그 동네에서 다니는 애들은 얼마 없었고, 대부분은 새로 지어진 아파트촌에 살고 있었다.

우리팀 이번 주말에 축구대회 나가. 심심하면 구경하러 와.”

“… 나 바쁜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말에 할 일이라고는 빈집에서 TV보는 것 뿐이었다. 아침을 먹고 방바닥에서 이리저리 구르던 나는 결국 축구대회가 열리는 이웃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다른 팀들 하는 걸 보니 흥수의 상대가 될 만한 녀석은 없어 보였다. 잠시 후 우리학교 축구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켜보고 있자니 뭔가 좀 이상했다. 흥수가 초반에 투입되지 않은 것이었다. 전반전 내내 흥수는 벤치를 지켜야 했다. 후반전이 되어서도 흥수는 나오지 못했다. 하루에 여러 경기가 있으니 코치가 흥수의 체력을 비축해두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다행히 첫 게임은 우리학교가 이겼다.

두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좀 강팀이었다. 전반전에 2:1로 뒤진 채 끝났다. 그런데도 코치는 후반전에 흥수를 투입하지 않았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데 후반전에도 한 골을 더 먹어서 3:1까지 벌어졌다. 그제서야 코치는 흥수를 교체투입했다.

니들 다 죽었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흥수의 활약을 기대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학교 선수들이 지들끼리만 패스를 하고 흥수에게는 좀처럼 공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설마 했는데, 다음에 온 찬스에서도, 그 다음에 온 찬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흥수에게 공을 주면 점수 따는 건 식은 죽 먹기일텐데 왜 공을 안 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흥수는 패스를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다. 적극적으로 상대편 공을 가로채서 수비수 3명을 제치고 투입된 지 5분만에 1골을 만회했다. 지금까지 벤치에 있다 나와서인지 더 펄펄 날았고, 기운 빠진 상대팀은 초조해하다가 다시 실점을 해서 동점 상황이 되었다. 후반전 종료 2분을 남겨 놓고 양쪽팀이 모두 느슨해 져서 연장전 가나 승부차기 하나 이러고 있을 때 흥수가 번개같이 다시 한골을 넣어 결국 4:3으로 이겼다. 

그날 다른 경기들도 똑 같은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우리학교는 시 대표로 다음달에 있을 경기도 축구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경기가 모두 끝나고 흥수는 누나에게 나를 소개시켜주었다.

니가 남순이구나. 흥수가 같은 동네 사는 친구가 전학 왔다고 좋아하더라.”

흥수 누나는 웃는 얼굴로 반갑게 내게 인사했다. 그리고 우리를 데리고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도 사줬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끼는 이런 가족 같은 느낌에 나는 어색하기도 하고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전학온 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왠 녀석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너 예전 학교에서 일짱이었다며?”

그래서?”

내가 이 학교 일짱이거든.”

애들 여럿 데리고 몰려다니는 거나, 말하는 거나, 척 보아하니 별 것도 아닌 녀석 같은데 어떻게 일짱이 되었을까 싶은 녀석이었다. 그런 경우에는 보통 뒷배를 봐주는 형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빨리도 왔다. 진작에 텨 와서 이 형님한테 인사했어야지.”

녀석은 내가 말하는 게 어이가 없는 듯 했지만 나는 여전히 무시하듯 약을 올렸다.

있다 수업끝나고 보자. 돈 좀 넉넉히 갖고 와라.”

학교 밖 공터에서 만났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짱은 싸움은 잘 못하는 것 같고, 나머지 녀석들을 시켜서 나와 붙게 했다. 6:1로 붙었는데 동네애들 싸움 하듯이 흙집어던지고 붙잡고 늘어지고 해서 피곤하긴 했지만 한방씩 제대로 먹여주니 금새 깨갱이었다. 혼자 남은 일짱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며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가 이렇게 맞은 거 알면 형들이 너 가만 안 놔둘껄.”

하지만 이미 잔뜩 쫄아서 내 눈도 못마주쳤다.

일러 봐 어디.”

!”

내 주먹 한방에 일짱은 코피를 주르륵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6명을 한줄로 쭉 무릎꿇려놓고 나는 이제부터 까불면 죽는다고 얼차려를 한따까리 주었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에 대한 정보나, 학교 안팎의 궁금한 정보들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축구부에 대해서도 지나가듯이 물었다.

근데 너네들, 축구부애들이 왜 박흥수한테 패스 안 하는지 아냐?”

“… 흥수가 너무 잘하니까….”

“… 그럼 코치는 왜 박흥수를 벤치에만 앉혀놓는데?”

엄마들이 자기 애 많이 뛰게 해달라고 돈다발 찔러주니까….”

….”

나는 그제서야 상황이 조금씩 이해가 갔다. 흥수가 인기가 많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고 있는 존재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그애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충격이었다. 나는 나처럼 하나도 잘하는 게 없는 아이나 미움을 받았지, 흥수처럼 월등하게 축구를 잘하고 가난하긴 해도 화목한 집안에 성격도 좋은 아이를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그것도 축구부 안에 있을 줄은 몰랐다.

다 꺼져라. 이제부터 내 눈에 띄면 죽는다.”

나는 갑자기 흥이 깨져서 녀석들을 다 돌려보냈다. 집에 갈까 하다가 마음은 답답하고 빈집에 들어가기는 싫고 걷다보니 다시 학교 운동장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다시 축구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 흥수는 자기편 10, 상대편 11명과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21명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누가 나보고 몇대 1까지 맞짱을 떠봤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몰라도 흥수는 21:1 로 맞짱을 떠서 이겼다고 말 할 수 있었다. 지들끼리만 공을 돌리던, 애들이 과격한 태클을 해오던, 결국 어떻게든 공을 가로채서 수비수들을 돌파해서 골을 넣고야 말았다.

골을 넣고도 흥수는 들뜨지 않았다. 다른 애들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돌아서는 흥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왠지 기분이 울컥 해서 외면하고 돌아섰다.

흥수는 나를 따라 나와서 싸운 흔적이 역력한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 누구랑 싸웠냐? 일짱?”

아니, 싸우긴... 그리고 이젠 내가 이 학교 일짱이다.”

흥수는 내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부상에 대비해 가방에 넣고 다니는 비상약을 꺼내왔다.

걔네 고등학생 형들한테 줄 있다던데.”

걱정스럽게 말하는 흥수에게 나는 흥수 눈치를 흘낏 보고 흘리듯 말했다.

걔네 하는 짓 보니까 걔네 형들도 별거 아니겠더라. 비겁한 새끼들. 쌈한다는 놈들이 흙뿌리고, 뒷통수 후려치고축구부애들은 지들끼리 편갈라 공돌리고  , 이 학교 원래 이렇게 물이 더럽고 야비하냐?”

흥수는 내 말에 잠깐 멈칫 했지만 이내 아무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어쩌겠냐, 그러려니 해야지.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싫은 일도 참아야 해.”

나는 흥수가 어째서 그렇게 나이에 비해서 어른스러운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주위의 견제와 온갖 더러운 꼴을 당하면서도, 축구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감수하고 인내하며 달려 온 것이었다. 나라면 치사해서 축구 안한다고 몇번을 뛰쳐 나왔을 텐데 흥수는 축구를 정말 삶 그 자체만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축구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축구부 주장이 집에 가는 것을 따라가다가 녀석이 혼자가 되었을 때 앞을 막아섰다. 녀석은 이미 내가 일짱 무리들을 쓸어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는지 겁먹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운동부 애들은 그냥 싸움만 하는 애들보다 다루기가 쉬었다. 부상이라도 입으면 당장 훈련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엄청 몸을 사리니까 무릎이나 어깨처럼 부상이 잦은 부위를 한방 먹이면 지레 겁을 먹고 얼굴이 허얘져서 도망가곤 했다.

너네 축구경기가 너무 재미가 없어서 못보겠더라. 좀 제대로 좀 뛰어봐.”

나는 발로 녀석의 정강이를 툭툭 걷어찼다.

넌 눈이 가자미 눈이냐? 패스를 제대로 해야지, 왜 빈 데 두고 엄한데다 공을 돌려?”

녀석도 내가 맨날 흥수와 축구 끝나고 집에 가는 것을 봤던 터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눈치 깐 듯 했다. 잘못한 게 있어서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었다.

미안….앞으로 잘 할께.”

나는 녀석에게 히죽 웃으며 마지막 쐐기를 박고는 뒤돌아섰다.

제대로 해라. 그러다 너 영영 축구 못하게 되는 수가 있어.”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흥수의 다리를 망가뜨기게 될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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