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축구부 아이들이 흥수를 대놓고 따돌리는 것은 좀 덜 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은근히 따돌리는 것은 여전했다. 흥수는 내가 축구부 주장을 위협한 것을 알고는 기분나빠했다.
“축구에는 축구의 룰이 있어. 축구는 내가 알아서 해.”
나도 흥수가 좋아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똑 같은 상황에 처하면 또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그 사건으로 인해서 흥수는 나를 무척 신뢰하게 된 것 같았다. 흥수와 나는 특별히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것도 아니고, 가끔씩 같이 집에 가는 것 뿐인데도 점점 다른 애들과는 다른 특별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흥수 누나는 흥수에게 축구부 애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먹을 것 사주라며 용돈을 주곤 했다. 하지만 흥수는 그 돈으로 축구부 애들을 사주는게 아니라 내게 한 턱 쏘곤 했다. 나는 처음에는 모르고 얻어먹었지만, 사실을 알고 나니 영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나 말고 축구부 애들한테도 사주라고 했더니 흥수는 덤덤하게 말했다.
“쟤네들은 내가 뭐 사줘도 좋아하지도 않아.”
축구부 애들은 아니지만, 학교에는 흥수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흥수는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몇 있었다. 나는 나대로 내게 줄서온 아이들과 어울려 다녔다. 하지만, 그애들은 일짱이 누가되던 쫒아다니는 똘마니들이었지 내 친구는 아니었다. 내게 친구는 흥수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흥수는 친구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나를 따라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흥수도 외로웠던 것 같다. 친하던 친구들은 학년이 높아져갈수록 공부한다고 점점 멀어지고, 공부 안하는 나 밖에 놀 친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항상 축구부의 눈총을 받는 존재였으니 행동과 말도 늘 조심해야했고, 인기는 많아도 정말 내편이다 믿을 수 있고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문제아 취급해도 흥수만은 나를 친구로 여겨줬던 것 처럼, 흥수도 다른 사람들은 다 그를 인기있는 축구유망주로만 쳐다봐도 자기를 그냥 평범한 친구로 여겨주는 사람이 하나쯤 필요했던 모양이다. 외로움은 그렇게 우리를 점점 뭉치게 만들었다.
“니가 우리 애들 발랐다며? 축구부 애들도 건드렸다던데… 배짱좋네?”
집에 가던 나와 흥수를 가로막은 그들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싸움 깨나 할 것 같아 보였지만 나는 기죽지 않았다. 이미 고등학생들하고도 여러 번 붙어 봤다.
“뭐 누가 일짱이 되든 상관 없는데, 이동네 초등학교 일짱들은 전부 자기네 학교 애들한테 돈 걷어서 이 형님들한테 셔틀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너도 계속 짱먹고 싶으면 우리한테 상납해라.”
지금껏 일짱이 애들 삥뜯어다가 이들에게 바쳤던 모양이었다.
“내가 일짱인 줄 알면 여기가 내 구역이라는 것도 알겠네. 셋 셀 동안 도망가면 곱게 보내줄테니까 기회 줄 때 가라.”
형들은 내 말에 완전 열받은 듯 했다.
“야, 말로 해서 못알아먹는 놈이다. 완전 꼴통인데?”
한 녀석이 내 머리를 툭 치려고 손을 뻗었고 나는 그 팔을 꽉 잡았다.
“어쭈? 잡았어?”
숫자에서 몰릴 때는 도망가거나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발로 걷어차고 나머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흥수도 옆에 있던 형에게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다른 하나를 향해 돌진 했다. 대부분은 나와 흥수가 일대일로 상대하면 당해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하나는 고등학교 일짱답게 노련했다. 나는 흥수까지 싸우다 다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둘이 일대일로 붙고 끝내지?”
내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깨달은 고등학교 일짱은 이렇게 된 이상 일대일로 자존심을 건 싸움을 해야 했다. 내 작전은 지지 않는 것이었다. 지지만 않아도 상대는 고등학생이니 내가 이긴 셈이다. 나는 쉽게 틈을 내주지 않고 수비하면서 섣불리 상대의 도발에 끌려들어가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잽을 날리며 주거니받거니 했다. 결국은 싸움도 비슷한 상대끼리는 집중력과 정신력으로 승부가 난다. 때려도 때려도 다시 일어나고 맞받아치는 내게 상대는 점점 지치고 짜증나는듯 했다. 한시간 가까이 싸움이 계속 되었을 때 나는 승부를 걸었다. 지금까지 수비적인 태도를 바꿔서 무차별 공격을 했다. 상대도 당황해서 서로 닥치는대로 마구 치고박는 난타전이 계속되었다. 피가 흐르고 계속 얻어맞는 와중에도 나는 치명타는 맞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몇번이나 넘어진 채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흥수에게 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일어나고 또 일어나서 다시 맞았다.
‘쟤 초등학생 맞냐? 완전 괴물인데?’ 하고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쯤이면 내가 지지는 않은 셈이었다. 마침내 고등학교 일짱도 완전히 탈진해버렸다.
“야, 오늘은 이만 가자. 너 앞으로 조심해라.”
결국은 이짱이 일짱을 말려서 부축해서 데리고 떠났고, 나에게 위협적인 멘트를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이긴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알았다. 흥수는 내게 달려와서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다친데 없냐?”
내가 이렇게 전력을 다해 싸우는 모습을 흥수가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다. 아닌척 했지만, 흥수도 내가 어떻게 될까봐 꽤나 놀란 듯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빙신아, 어차피 너 삥 뜯는거, 좀 더 뜯어서 주고 말지 몇시간을 쳐맞고 있냐?”
“딴놈 밑에 들어갈거면 일짱은 뭐하러 해? 남한테 고개 안 숙일려고 일짱하는거지.”
나는 하도 맞아서 몸이 말이 아니었고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전에도 여러 번 싸울 때마다 그랬지만 신기하게도 하루밤 자면 다시 말짱해지곤 했다.
그 날 이후로 말로 설명은 안되지만 나를 대하는 흥수의 태도가 좀 변한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흥수가 나를 어리게 보고 형처럼 돌봐줬다면, 그 이후로는 겉으로는 지가 형이니 내가 동생이니하고 장난을 치면서도, 내게서 무언가 감탄스러운 면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기는 축구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가족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많은 것을 타협하고 숙이고 지나가는데, 나는 쥐뿔도 없으면서 절대로 굽히지 않고 꼿꼿한 자존심이 좋다고 했다. 나야말로 침착하고 잘났으면서도 겸손한 흥수가 멋져 보였는데, 사람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 끌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특별히 사는게 재미있지도 않고, 가진 것도 없고 꿈도 없고 가족도 지켜야 할 것도 없으니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울 수 있었지만, 흥수와 친해지고부터는 내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흥수가 싸움에 휘말려 다치는 것은 싫었고, 내가 사건에 휘말려 강제전학 가게 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싸울 때는 될 수 있으면 흥수 몰래 다녔고, 강제전학 당할 일은 만들지 않으려고 학교 안에서는 될 수 있으면 사건을 만들지 않았다. 흥수가 없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학교 안의 애들을 손봐줘야 할 때는 똘마니들을 시켰다.
“야 너 누구 좀 만나야겠다.”
전에 싸웠던 고등학교 일짱이 아직 그날의 상처가 낫지 않아 딱지가 앉은 얼굴로 내게 찾아왔다. 나는 그의 위에 또 누가 있구나 직감했고, 멀리 서있는 검은 고급 승용차를 보고는 그가 꽤 큰 조직에 속한 사람일거라고 짐작했다. 그정도면 정말 싸움의 고수일거라고 생각되어 나는 적지않이 긴장이 되었다.
“사천파 회장님이시다.”
그런데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달리 차에서 내린 사람은 싸움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중년의 아저씨였다. 검은 양복을 입고 청회색 머플러를 두르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그는 나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으스스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대단하구나. 너보다 훨씬 나이 많은 형들을 그렇게 혼내주다니. 그런데 어쩔셈이니? 너 같은 아이 하나 아무도 몰래 데리고가서 바다에 빠뜨리는 것쯤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솔직히 겁이 났지만 일단은 배짱을 튕겨보기로 했다.
“헤엄쳐 나와야죠. 안그럼 바다속에서 쭉 살던지”
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넌 정말 겁이 없구나. 난 겁없는 녀석이 좋다. 나이를 먹으면 겁이 많아지거든.”
그는 내게 인사를 하고 천천히 다시 차에 올랐다.
“나중에 더 크면 또 보자꾸나.”
우리는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흥수는 나에게도 권투나 킥복싱 같은 운동을 해보라고 했지만, 나는 하고 싶지 않았다. 흥수가 더러운 꼴을 당하는 것을 많이 본 터라 나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 없이 거의 혼자 살아오다시피 한 나는 누구에게 굽히고 배우고 머리를 숙이는 상황이 영 어색했다. 14살의 나는 세상은 나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고, 힘만 있으면 커서도 누구에게 머리숙이지 않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꿈을 통해서 점점 성장해가고 큰 무대로 나아가는 흥수를 보며 부럽기도 했다. 중학교 축구부에서 흥수는 더욱 대회에 자주 출전하게 되었고, MVP로 신문에까지 작게 이름이 실리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를 부러워 하거나 누구처럼 되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없었다. 엄마가 있는 아이들을 보면 부러웠지만, 그것 말고는 공부든 뭐든 잘하는 애나 집이 부자인 애나 선생님에게 귀여움받는 애를 부러워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것들이 내게는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흥수는 어쩐지 부럽기도 하고 닮고 싶기도 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고,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자신을 질투하는 동료마저 포용하는 그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흥수가 성취하고 한계단 한계단 밟아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뭔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성취하고 싶다는 마음이 꿈틀거렸다. 그런데 내가 잘하는 거라고는 싸움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덤벼오는 애들을 수동적으로 상대해왔다면 중학교부터는 이웃 중학교들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먼저 그 학교 일짱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흥수가 시 축구대회, 도 축구대회, 전국 축구대회로 토너먼트로 차근차근 올라가듯이, 나는 경기도 일대의 중고등학교의 일짱들을 하나하나 꺾고 다녔다. ‘쓰나미’라는 별명도 그때 생겼고, 내 이름은 신문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그 별명은 중고등학교 일대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사천파 보스는 잊을 만 하면 한번씩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너 꽤 유명해졌던데 아직도 학교를 다니고 있니?”
“학생이 학교를 다녀야죠 그럼”
“학교에서는 살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아. 나랑 같이 일해보는게 어떠냐?”
그는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돈보다는 흥수와 보내는 하루하루의 평범한 일상이 좋았다.
“학교 계속 다닐건데요.”
그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너 축구부 박흥수라는 아이와 어울려 지낸다던데, 너희 둘은 갈 수 있는 길이 달라. 살다보면 인생에 선택권이란 건 별로 없다. 니가 먼저 걔를 떠날지, 걔가 먼저 너를 떠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각자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길이 갈리게 될거다. 헤어지게 될 수 밖에 없는 친구 때문에 니 앞길을 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흥수와 내가 헤어지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흘려버렸다. 흥수가 어디에 가든 나는 따라갈 테니까.
마침내 내가 중3 때 경기도의 모든 중고등학교 일짱들을 이기고 경기도 일짱이 되면서 사천파 뿐 아니라 여러 폭력조직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졌다. 흥수만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런 제의를 받는다는 것에 어깨도 으쓱하고 흥수에게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이런저런 조직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말을 들은 흥수누나의 경악하는 표정을 보고는, 그제서야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던 길이 내가 생각한 그런 명예롭고 인정받는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에 흥수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갔다. 유수의 축구명문 고등학교로부터 장학금을 줄 테니 자기네 학교로 오라는 제안이 왔고, 흥수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외국 에이전트의 눈에 띄면 장학금받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유럽 유소년 축구팀에 들어갈 수도 있대.”
흥수는 들떠서 말했지만, 그 말에 나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흥수가 제주도, 아니 독도에 가서 축구를 한대도 나는 따라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럽이라니, 나는 유럽에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중학생인 내게 유럽은 로켓을 타고 가야하는 달나라만큼이나 현실감이 없고 먼 곳이었다.
‘니가 먼저 걔를 떠날지, 걔가 먼저 너를 떠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각자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는 길이 갈리게 될거다.’ 라고 했던 사천파 보스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가 가기로 한 고등학교의 감독이 나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이 것이구나, 이런 것이었구나.’
나는 길이 갈리게 된 다는 것의 의미를 뼈아프게 깨달아갔다. 경기도 일짱인 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라 혐오스럽고 기피대상이고 흥수의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가 된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밉고 화가 났다. 우선 나 자신에게 화가 났고, 나를 이렇게 만든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몹시 화가 났다. 그러나 그게 누구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 자신 외에는 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고, 그 화를 흥수에게 돌리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흥수가 나를 떠나는 것 보다 더 나쁜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더 나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왜 그때 흥수를 그냥 떠나보내지 못했는지 수백번도 더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년 후 내가 검정고시 보고 고등학교 진학 준비를 할 때 사천파 보스가 나를 찾아 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초점없이 멍한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듣자하니 너 이젠 싸움 안 한다면서.”
“관심없어요 이젠.”
나는 아무 의욕없이 대답했다. 그는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결국은 그 녀석이 너를 구했구나.”
그리고 그 이후로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당시에 나는 흥수 생각에 매일매일이 지옥처럼 괴로왔기 때문에 흥수가 나를 구했다는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은 흥수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나게 된 후였다.
“너 아닌 척 하고 사니까 좋냐?”
그동안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그를 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어떻게든 과거를 떨쳐버리려고 죽을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흥수는 여전히 울분을 삼키며 과거에 갇혀있었다. 운명의 신은 흥수의 길을 끊어버림으로써 내 길을 돌려놓은 것이었다.
“지금은 이게 나다.”
나는 속에 있는 말을 삼켰다. 감히 너 때문에 정신차렸다고 너무나 미안해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럼 난 모르는 놈이네.”
흥수의 눈은 아픔, 그리움, 외로움에 물기를 담고 있었지만 떨쳐버리려는 듯 냉담하게 말하고 뒤돌아서 걸어갔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이 마치 어린시절 그의 집에 놀러가기를 두려워해서 뒤돌아가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 흥수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라 옛날 생각에 괜히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나지막히 혼자 중얼거렸다.
“학교에서 보자, 흥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