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12.28 계백 비담 춘추 3
  2. 2009.12.27 계백 비담 춘추 2
  3. 2009.12.26 계백 비담 춘추 1
 


“신라군이 퇴각준비를 하고 있다구?”

계백은 부하의 보고를 받고 피식 웃었다.

“싱거운 녀석들이군. 왕이라는 자가 겨우 그정도 배짱을 가지고 출정한거냐.”

“퇴각하는 신라군을 추격하여 습격한다면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입니다. 잘하면 왕을 잡을수도 있구요”

비담의 말에 계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비담을 바라보았다.

“퇴각로는 어디일까?”

“율재일 것입니다.”

계백은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듯이 비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장담하지?”

“율재는 매복하기 쉬운 곳이라 신라군은 이곳에서 매복 연습을 하곤 합니다. 당연히 이곳을 통해 퇴각하면서 중간중간 매복을 심어 추격을 차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매복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냐?”
제가 선봉으로 가겠습니다. 매복군이 저희 부대를 공격하면 뒤에서 따라오다가 매복군을 처리하시면 될 것입니다.”

“너... 신라군과 접촉하고 있는건 아니겠지?”

계백의 말에 비담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럴리가요. 신라영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제 목이 달아날텐데요.”

계백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제에 남는 것도 니 목을 걸어야 할 것이야. 니 말에 책임 질 수 있느냐?”

비담도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신라왕이 율재로 가지 않는다면 제 목을 내어놓겠습니다. 제가 신라왕을 잡는다면 어떤 상을 내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너를 내 부관으로 삼을 것이다.”

계백의 여유있으면서도 뭔가 캐내는 듯한 눈빛과 비담의 도발적인 눈빛이 부딫쳤다.

비담이 나가자 부하장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도 지귀가 밤에 사라졌다가 들어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함정일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다. 다른 퇴각로인 자미골로도 선발대를 보낼 것이다.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왕이 어느 길로 가는지 파악이 되면 그쪽으로 군대를 향할 것이다.”

계백은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다음날 비담은 군사를 이끌고 율재로 향했다. 계백은 비담이 떠난 후 다른 선봉대를 자미골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갈림길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율재로부터 전갈이 왔다.

“율재에 신라 왕의 군대와 마주쳐 싸우고 있습니다!”

계백은 고개를 갸웃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때 자미골로부터 전갈이 왔다.

“자미골에서 신라 왕과 시위부가 퇴각하는 것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계백은 눈쌀을 찌푸렸다.
어느 것이 진짜냐?’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판단을 해야 했다. 율재로부터 다시 전령이 도착했다.

“매복이 있었습니다. 지원군이 필요합니다.”

자미골로부터도 전령이 도착했다.

“신라군이 저항 없이 빠르게 퇴각하고 있습니다.”

장수들은 제각기 수근거리며 계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장수가 말했다.

“추격을 차단하도록 매복을 해놓은 율재 쪽이 진짜 신라왕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장수가 말했다.

“빠르게 퇴각하는 자미골이 진짜 신라왕일 것입니다.”

계백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자미골로 가자.”

계백의 본대가 신라군을 추격하는 선봉대와 합류한 곳은 자미골을 거의 빠져나간 끝부분이었다. 계백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골짜기 끝부분에서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이었다. 그 때, 신라군의 불화살이 백제군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제서야 계백은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다. 골짜기 끝의 강한 맞바람을 타고 불이 활활 타올랐고, 백제군은 좁은 골짜기에 갇혀 화살을 피하기는 커녕 퇴각조차 쉽게 할 수 없었다. 계백은 군사의 절반 가량을 잃고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계백은 자신의 실책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신라왕이 둘로 나뉘었다고 했을 때, 어느 쪽이 진짜인지 판단을 할 수 없었을 때 후퇴하고 돌아왔어야 했다. 애초에 자미골이든 율재든 좁은 곳으로 유인해 내려는 것이 신라군의 목적이었다. 신라의 왕을 잡자는 비담의 말에 말려들어간 것 부터가 잘못이었다. 언제나 냉정한 판단을 해 왔는데 자신도 모르게 비담에게 휘둘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본진으로 돌아와 밤 늦도록 다음날 퇴각준비를 하며 남은 병사들을 살피던 계백은 문득 어둠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계백은 잠시 망설이다 칼을 들고 어둠속을 향해 걸어갔다. 과연 비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얘기 했잖아. 난 신라군 첩자가 아니라고... 넌 내 속을 읽는데 골몰할게 아니라 유신과 싸웠어야지. 이 반푼아.”

킥킥거리며 웃는 비담의 조롱에 계백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를 얕본 것은 내 실책이었다. 진작에 죽였어야 하는데...”

비담도 희미하게 마주 웃었다.

“뭐... 나야말로 너를 얕보아서 내 주군을 위험에 빠뜨렸으니까...”

“너의 주군? 그 꼬맹이?”

계백은 비꼬듯이 말했지만 이미 자존심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은 듯 했다.

“넌 살려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자다.”

계백은 칼을 뽑았다.

“니 실력 한번 볼까?”

비담도 칼을 뽑았다. 비담은 평소에 계백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가볍게 몸을 놀리는 것을 보고 엄청난 힘을 가졌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과연 그의 칼의 느낌은 묵직하면서도 날렵한 호랑이와 같았다.

계백은 비담의 빠른 칼솜씨에 놀랐다. 백제에서는 손꼽히는 자신의 무술 실력을 믿었지만 비담의 실력은 예상 밖이었다. 속도를 가늠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다음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었다. 앞에 있었는가 하면 어느새 뒤로 가 있었고, 위에 있는가 하면 어느새 아래를 공격하고 있었다.

계백의 갑옷에 부딫치는 둔탁한 칼소리가 들렸다.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곳은 계백의 머리 뿐이었다. 비담이 공격할 수 있는 곳은 한계가 있었다. 비담은 칼을 고쳐잡고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힘으로 승부하겠다고?’

계백도 정면으로 뛰어가며 칼을 내리쳤다. 그때 계백의 칼을 받을 것처럼 달려오던 비담은 칼을 피하며 위로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돌더니 칼을 잡은 계백의 손을 발로 걷어차 칼을 멀리 날려버렸다. 계백은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눈 비담을 보고 말했다.

“죽기 전에 네 정체를 알고 싶다.”

살생을 쉽게 하는 비담이었지만, 적군으로서 당연히 죽여야 할 것이었지만 어쩐지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았다. 비담은 말없이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았다. 계백을 살려두면 언젠가는 유신의 군대와 다시 맞붙게 되고 춘추의 애를 먹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예감도 들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계백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왜 적인 나를 살려는거지?”

계백의 물음에 비담은 말했다.

“글쎄... 몰라.. 니가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나 비슷하겠지.”

계백을 잠시 바라보던 비담은 덧붙였다.

“유신이나 너나 왜이렇게 짊어진게 많냐. 장군은 전쟁하다 죽어야지.”

비담은 뒤돌아서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정에 약해서야… 난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재목은 못되는 모양이네’

비담은 한숨을 쉬고 머리를 긁적였다.

‘춘추가 알면 난리나겠군.’

어두워서 어느 길이 어느 방향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고구려로 가볼까…”


백제군이 퇴각함에 따라 춘추도 서라벌로 향했다. 춘추는 비담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백제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으니 이제 계백 밑에 있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걸 이용하는 거야. 계백이 날 믿지 못하는거. 내가 왕이 율재로 간다는 정보를 흘려 놓을께. 하지만 계백은 나를 믿지 못하니 자미골로 향할거야. 시위부에게 자미골로 가짜 왕을 호위하도록 하고 가면 분명히 백제군이 따라 붙을거야. 백제군을 깊이 끌어들이고 자미골의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곳에서 불화살로 공격을 하는거야.’

비담의 말에 춘추가 물었다.

‘그럼 나는 율재로 가라는 거야?’

‘넌 니가 알아서 가고 싶은 길로 가. 어차피 너 나 안믿을 거잖아.’

비담이 삐죽거리며 했던 말을 떠올리며 춘추는 미소지었다.

“니 눈을 보면 믿던 안믿던, 휘둘리지 않을 수가 없잖아.”





(에필로그)

몇 년 후 계백과 유신은 다시 황산벌 전투에서 만났다
. 계백은 이미 전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있었다. 오천명의 결사대와 진을 치고 유신군을 맞을 준비를 하던 계백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또 정탐하고 있는거냐?”

오랜만이야.”

비담은 싱긋 웃었다.

의미없는 저항은 그만둬. 오천명의 목숨이 아깝지 않아?”

계백은 여전히 여유있는 웃음을 띄며 대답했다.

유신이 나라면 항복할 거 같아?”

그러나 잠시 후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신라왕은 가야계 백성들을 잘 포용한다고 들었다. 백제의 백성들도 잘 대해주길 바랄 뿐이야.”

비담은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네 이름이 뭐지? 왜 알려주지 않는거야?”

계백의 물음에 비담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난 이미 아무도 기억할 수 없도록 지워진 이름이야.”

“…그래도 난 죽을때까지 네 이름을 기억하고 싶다.”

계백의 말에 비담은 계백의 귀에 자신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랬군…”

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이루고 싶다던 꿈… 삼한일통의 대업… 꼭 이루길 바래.”

비담은 계백의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신라군이다!”

다급한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백은 비담을 한번 바라보고 투구를 쓰고 말에 올랐다. 비담은 멀어져가는 계백과 오천명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계백의 마지막 말이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처음엔 스승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다음은 천년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그다음은 연모하는 여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삼한일통을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난을 일으켜서 숨어다니게 된 이후에는 자신이 살아있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 삼한일통을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이제 멀어져가는 계백을 보면서 비담은 처음으로 진심으로 삼한일통이 되어 전쟁이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랬다.


Posted by 에페르
,
 



백제군으로 돌아온 비담은 계백에게 보고하였다.

“신라군은 군량미는 넉넉한 듯 보이나, 왕이 서라벌을 오래 비워두어 빨리 전투를 끝내고 싶어하는 듯 조급해 보였습니다.”

“해서?”

“틈을 보여주면 쳐들어 올 것입니다. 슾지로 유인하여 움직임을 둔하게 만든 후 공격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유신은 신중한 장수이다. 웬만한 유인책에는 넘어오지 않을 것이야.”

“맞습니다. 하오나 유신을 도발하는 방법은 제가 아옵니다.”

비담의 자신만만한 말에 계백은 미심쩍은 눈으로 보았다.

“어떻게 네가 그런 것을 아느냐?”

“사량부의 일들이 그런 것이었지요. 제게 군사 천명만 주시면 유신군을 유인해도록 하겠습니다.”

비담의 야릇한 미소에 계백은 대답없이 그를 가늠하듯 보며 물었다.

“어째서 사량부에 들어가 첩자가 되었지? 출세를 위해서인가?”

“신라는 어차피 골품의 사회라 출세의 길은 막혀져 있습니다. 그보다는 삼한일통의 대업에 저도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남자로 태어나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계백이 크게 웃었다.

“마치 장수라도 되는 듯 말하는구나. 너 따위가 감히 대업을 논한단 말이냐? 너 같은 미천한 것들은 대업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저 따를 주군만 정하면 되는 거다.”

계백의 말에 비담은 난처한 듯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웃으며 비담을 보던 계백은 불현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네 정체가 뭐지?”

비담의 평소의 행동을 보면 천박한 떠돌이인 듯 싶지만, 간혹 스치듯 보이는 기품있는 행동거지나 말하는 것을 보면 무척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 같기도 했다.

“뭐든 상관없다. 내 사람이 되어라.”

계백의 은근한 말에 비담 역시 나긋나긋하게 받았다.

“이미 저는 장군의 사람이 아니옵니까?”

“아니지.. 아니야.. 군사를 내주기 전까진 아니지.”

계백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비담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날 속일 생각은 말라고 이미 경고했다.”

계백은 비담에게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쓸고 비담에게 입을 맞추었다. 비담은 계백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바라보았지만, 계백은 이번에는 비담의 옷 속에 손을 넣어 휘저었다.

“아… 장군…”

계백의 손길에 비담이 휘청하며 계백의 어깨에 매달리며 몸을 비틀었다.

“날 봐”

계백은 자신의 어깨에 기댄 비담의 살짝 찡그린 눈을 보며 말했다.

“누구를 생각하고 있지?”

계백의 손길이 빨라지고 깊은 곳에 도달할수록 비담은 점점 숨이 거칠어졌고 계백은 비담의 귀에 속삭였다.

“네 마음속에 있는 것이 누구냐?”

비담은 고개를 흔들며 생각했다.

‘누구지? 덕만? 춘추?’

계백은 색기로 희열로 물들어가는 비담의 표정을 보고 홀린 듯 말했다.

“누구든 상관없어.”

계백은 비담을 돌려 안고 그를 갖으며 말했다.

“넌 이제 내꺼니까.”



다음날 계백은 부하장수들을 불러 출정 명령을 내렸다.

“지귀에게 군사 천을 주어 적을 유인하게 하라. 공격 시간은 내일 새벽이다.”

비담 계백의 명을 받들고 나가자 계백은 부하장수에게 은밀히 지시했다.

“지귀에게 미행을 붙여 무슨 짓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감시하도록 해라. 가장 뛰어난 자를 붙여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뭐라? 백제군이 강에 독을 풀 것이다?”

유신은 부하의 보고에 놀라 소리쳤다. 그렇게 되면 이 부근 평야는 몇 년간 못쓰게 될 터였다. 백제군은 어차피 신라의 땅이니 못쓰게 만들어도 그만이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는 큰 손해였다.

유신은 서둘러 춘추에게 보고하러 갔다. 춘추는 서찰을 읽으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폐하. 백제군이 내일 새벽에 강에 독을 풀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이미 많은 양의독을 확보하여 모아놓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춘추는 서찰을 내려놓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유신은 춘추가 내려놓은 서찰을 내려다 보았다. 작게 접어서 화살에 묶어 보낸 듯 옆에 화살도 놓여 있었다.

[내일 새벽 강에 독을 풀려는 것처럼 위장하여 신라군을 습지 부근까지 유인하고 공격할 것이다. 습지 뒤쪽에 군사를 매복하여 백제군을 공격하라. 지귀.]

“지귀가 누구입니까?”

서찰을 읽은 유신이 물었다. 춘추는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폐하. 군을 통솔하고 있는 제게 말씀을 해주시지 않으시면 제가 작전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춘추는 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날이 밝기 전 비담은 군사 천을 이끌고 독이 든 항아리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강으로 향해갔다. 아니나 다를까 유신의 군대가 그들을 쫒아왔다. 비담은 천천히 퇴각하며 유신군을 습지로 유인했다. 그러나 유신군을 습격하기로 한 계백의 군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백제군 본진으로 퇴각하며 비담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때 신군의 본진이 있는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아차…”

유신의 군대 일부는 비담의 수레를 쫒고 있고 일부는 습지에 매복을 하고 있어서 본진에 군대가 많이 빠져나와 있었다. 군대가 서둘러 돌아가도 이미 본진이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었다. 비담은 자신의 실책으로 춘추가 위험에 빠진 것을 깨달았다. 비담은 홱 말머리를 돌려 달렸다.

비담이 신라군 본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밝고 치열한 전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백제군은 신라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히고 물러나고 있었다. 비담은 왕의 깃발이 있는 막사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백제군이 휩쓸고 지나간 듯 찢기고 무너져 있었다. 비담은 미친듯이 춘추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시위부가 호위하고 있는 춘추를 찾아냈다. 춘추가 살아 있는 것을 보자 비담은 한숨 돌렸다. 그러나 다가갈 수는 없었다. 알천이 옆에 있었다. 비담은 발길을 돌렸다.


“수고했다.”

계백은 비담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찌하여 습지로 공격하러 오지 않으신 것입니까? 유신군을 습지로 몰아넣었으면 쉽게 승리할 수 있었을 텐데요”

비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신 본진에 타격을 입히지 않았느냐.”

계백은 비담의 속을 들여다 보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또 그래야 널 완전히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계백은 비담의 턱을 받쳐들고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제 신라군에 연락하는 건 그만 둬. 더이상 신라군은 네 말 따윈 안 믿을 테니까.”

비담은 입술을 깨물었다. 백제군을 교란한 목적으로 계백에게 접근을 했는데 오히려 신라군을 교란한 꼴이 되었다. 춘추의 말이 사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밤이 되자 비담은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강으로 뛰어들었다. 강을 건너 반대편에 도착하여 숨겨둔 신라군의 옷을 입고 신라군의 본진에 접근했다. 왕의 막사 근처에 접근한 비담은 작은 돌을 주워 천막에 맞도록 툭 던졌다.

춘추는 밖으로 나와 근처 나무그늘에 숨어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비담을 발견했다.

“이젠 계백의 사람이 되기로 한거냐?”

춘추의 서글픈 물음에 비담은 미안한 듯 쭈뼛쭈뼛 말했다.

“계백이 이럴줄 몰랐지...”

“그나마 다행인건 니 말을 완전히 믿지 않고 본진에 군대를 많이 남겨놨다는거…”

춘추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문노의 말도 미실의 말도 여왕폐하의 말도 듣지 않고 그냥 멋대로인게 너니까.”

비담은 말없이 풀잎을 꺾어 자근자근 씹었다.

“부상자를 추스리고 나면 내일 퇴각할꺼야. 이 숫자로는 여기서 방어가 안돼.”

비담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춘추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너도 계백 밑에 있지 말고 떠나.”

춘추의 말에 비담은 그를 보았다.

“내가 백제군에 있는게 신경쓰여? 정말 백제편이 될거 같아?”

춘추는 비담의 팔을 잡고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계백, 그자와 니가 같이 있는게 싫어.”

딱딱한 춘추의 말에 비담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러자 춘추는 화가 난 듯 다시 비담을 확 끌어당겨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자가 널 사로잡을거 같아서 두려워.”

춘추의 말에 비담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계백이 적이긴 했지만 짧은 시간에 빠져들 정도로 사람을 잡아끄는 불꽃 같은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비담은 이제 신라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춘추가 불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춘추는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전쟁은 너를 더 믿는 자가 지게 되어 있어. 계백은 너를 믿지 않지만 나는 너를 믿어. 그래서 내가 불리해.”


Posted by 에페르
,





희귀라인 계백 비담 춘추에 관한 소설입니다
배경은 지난번 덕비추 엔딩 이후 비담이 떠돌아다니며 겪는 가벼운 모험이야기이고
선덕여왕 마지막회의 충격이 너무 커서
비담이 죽지않고 어디선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서 쓴 것임 ㅠㅠ



계백은 신라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새로 모집된 신병들의 훈련을 점검하였다. 신라와의 잦은전쟁으로 영토는 넓어져갔지만 백성들의 수는 줄어들고 군량미의 생산도 예전같지 못하였다. 병사들의 수도 줄어들어서 이제는 소년과 노인까지 가리지 않고 뽑아야 할 지경이었다.

계백은 훈련중인 신병의 무리속에서 키가 훤칠하고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자를 발견하였다. 다른 자들은 농기구 외에는 잡아본 적도 없어 어설프게 칼을 잡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 휘청거리는데, 이자는 대충 하는 듯 해도 칼을 숟가락처럼 가볍게 놀리고 있었다.

“저자는 누구인가?”

“지귀라는 자이옵니다. 나주에서 징병되었습니다.”

“나주라…”

계백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자를 내 막사로 보내라.”


비담은 계백의 막사로 들어갔다.

“이름이 지귀라 하였는가?”

계백은 부드럽게 물었다. 비담은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장군.”

멀리서 비담이 보기에도 계백은 출중한 장수로 보였다. 유신이 그다지 빛나지는 않지만 든든하고 믿음직한 신뢰감을 부하들에게 주는 장수라면 계백은 화려한 언술과 한발 앞서나간 지략으로 부하들을 휘어잡았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자신만만하게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이 더욱 얕볼 수 없는 상대라 느껴졌다.

“네 칼솜씨가 예사롭지 않구나. 누구에게 배웠느냐.”

“특별히 배운 적은 없사옵고…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다 보니 어느새 검을 잡게 되었습니다.”

“재주가 있는 자는 그것을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법이지.”

계백은 일어서서 비담에게 다가오며 비담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고향을 떠나온 지는 얼마나 되었나?”

계백은 여전히 입가의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비담은 어쩐지 점점 긴장하게 되었다. 사실 비담이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백제인인 척 하고 백제군영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신라인도 아닌 그였다. 하지만 계백의 여유있는 미소와는 다른 날카로운 눈빛에 말려들어가서는 안될 것 같았다.

“어려서 떠나와서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태연한 비담의 대답에 계백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런데 말이야… 자네의 고향이라는 나주.. 그곳에 너를 아는 사람이 없더군. 지귀라는 이름을 가진 자도 없고 말이야.”

“본시 떠돌이로 한곳에 반년 이상 머물지 않았는데 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비담은 침착하게 말했지만 계백은 갑자기 칼을 뽑아 비담의 목에 겨누었다.

“신라의 첩자인 것이냐?”

비담은 잠시 망설였다. 첩자가 아니라고 해봐야 믿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첩자라고 해도 역시 거짓말이었고 바로 고문당하거나 죽게 될 것이었다.

“…끈 떨어진 첩자라고 해두죠.”

비담은 싱긋 웃었다.

“무슨 소리지?”

“저를 이곳에 심어두었던 염종공께서 반역을 일으키고 참수되었습니다. 해서 저는 이제 오갈곳이 없어진 셈이죠. 그래서 이제 백제에서 살려고 합니다.”

계백은 씨익 웃으며 서늘한 칼날을 비담의 목에 더 바짝 들이댔다.

“그래서… 내가 신라첩자인 너를 백제에 살려둬야 할 이유라도 있나?”

“저는 신라인이고 신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정보를 수집하는 사량부에 있었습니다. 웬만한 백제첩자보다 나을 것입니다.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겠습니까?”

계백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칼을 거두었다. 계백의 창과 같이 공격적인 눈빛과 비담의 화살을 쏘는 듯 받아치는 눈빛이 부딫쳤다. 계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를 내 첩보부대편재하도록 대장군께 청을 드리겠다.”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비담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었다. 계백은 비담에게 다가가서 한쪽 어깨를 잡고 말했다.

“분명히 경고하는데 날 속일 생각은 마라. 이곳 백제에서는 내 정보가 네 정보보다 항상 우위에 있으니까. 너에 대해서 나주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지 않고도 너를 자백시킨 것처럼…”

비담은 그제서야 계백에게 당한 것을 알고 고개를 살레살레 저으며 큭 웃었다.

“듣던 대로 대단하시옵니다.”

비담이 물러간 후 계백의 부하장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저자를 믿으시옵니까?”

“그럴 리가 있는가?”

계백은 호탕하게 웃었다.

“재미있는 자를 건졌군.”


“첫번째 임무를 주겠다.”

며칠 후 계백은 비담을 불렀다.

“가서 신라의 애송이에게 이 서신을 전해라. 그리고 그들의 군량미와 사기, 계획을 염탐해오거라.”

비담은 계백의 서신을 받아들었다.

“네가 뭘 할 수 있는 지 볼 것이다.”

계백의 말에 비담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신라군을 흔들 방법을 반드시 찾아가지고 오겠습니다.”


“백제의 계백장군으로부터 사신이 왔습니다.”

유신과 함께 백제 전선에서 진을 치고 있던 춘추는 계백의 사신을 맞으러 막사 밖으로 나갔다. 계백의 서신에는 늘 그렇듯 춘추를 어린애 취급하면서 항복하고 물러가라는 거만하고 속을 뒤집어 놓는 달변의 글이 적혀져 있었다. 춘추는 눈에서 불이 날 것 같았지만 짐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계백은 이런 글재주를 갖고 있으면서 왕을 잘못 만나 칼을 잡고 진흙탕에서 구르고 있다니 아깝구나. 내 밑으로 오면 시 한 수를 지을 때마다 포석정에서 술을 따라주고 상을 내리련만...”

춘추는 계백의 사신에게 말하다가 투구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계백의 사신을 자세히 보고 번개에 맞은 듯 놀랐다.

“계백에게 긴히 전할 말이 있으니 따라오거라.”

막사로 들어간 춘추는 따라 들어온 비담에게 화가 나서 높아지려는 목소리를 억지로 잡아누르며 말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춘추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이제 나와 적이 되려는 거야?”

비담은 픽 웃으며 말했다.

“여왕폐하는 날 끝까지 믿으셨어. 근데 넌 날 못믿는구나? 니 목숨까지 구해줬는데도…”

“네 이런 행동은 결국 모두를 망칠 뿐이야. 백제를 망치면서 신라도 망치게 될꺼야.”

비담은 춘추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비담의 존재는 이 혼란한 전쟁의 판국에 불확실성을 하나 늘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백제군의 불확실성을 늘릴 뿐 아니라 신라군의 혼란도 가져오게 될 것이었다. 애초부터 계백의 휘하에 들어가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정탐 삼아 백제군에 들어갔던 것이었는데 이렇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백제군의 수장의 바로 밑에까지 접근했는데 이제와서 맨손으로 빠져나오기는 아쉬웠다.

“난 삼한일통을 위해 내 방식대로 내가 선택한 일을 할꺼야. 내 도움을 받아들이던 믿지 못하던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구.”

“백제군으로 돌아가지마, 비담.”

춘추의 에 비담은 입술을 삐죽하고 춘추를 보았다.

“그렇다고 여기에 있을 수도 없잖아”

비담은 어깨를 으쓱 하고 돌아나갔다.

“그리고 이제 내 이름은 지귀야.”



Posted by 에페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