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군이 퇴각준비를 하고 있다구?”
계백은 부하의 보고를 받고 피식 웃었다.
“싱거운 녀석들이군. 왕이라는 자가 겨우 그정도 배짱을 가지고 출정한거냐.”
“퇴각하는 신라군을 추격하여 습격한다면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입니다. 잘하면 왕을 잡을수도 있구요”
비담의 말에 계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비담을 바라보았다.
“퇴각로는 어디일까?”
“율재일 것입니다.”
계백은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듯이 비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장담하지?”
“율재는 매복하기 쉬운 곳이라 신라군은 이곳에서 매복 연습을 하곤 합니다. 당연히 이곳을 통해 퇴각하면서 중간중간 매복을 심어 추격을 차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매복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냐?”
“제가 선봉으로 가겠습니다. 매복군이 저희 부대를 공격하면 뒤에서 따라오다가 매복군을 처리하시면 될 것입니다.”
“너... 신라군과 접촉하고 있는건 아니겠지?”
계백의 말에 비담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럴리가요. 신라영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제 목이 달아날텐데요.”
계백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제에 남는 것도 니 목을 걸어야 할 것이야. 니 말에 책임 질 수 있느냐?”
비담도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신라왕이 율재로 가지 않는다면 제 목을 내어놓겠습니다. 제가 신라왕을 잡는다면 어떤 상을 내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너를 내 부관으로 삼을 것이다.”
계백의 여유있으면서도 뭔가 캐내는 듯한 눈빛과 비담의 도발적인 눈빛이 부딫쳤다.
비담이 나가자 부하장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도 지귀가 밤에 사라졌다가 들어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함정일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다. 다른 퇴각로인 자미골로도 선발대를 보낼 것이다.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왕이 어느 길로 가는지 파악이 되면 그쪽으로 군대를 향할 것이다.”
계백은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다음날 비담은 군사를 이끌고 율재로 향했다. 계백은 비담이 떠난 후 다른 선봉대를 자미골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갈림길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율재로부터 전갈이 왔다.
“율재에 신라 왕의 군대와 마주쳐 싸우고 있습니다!”
계백은 고개를 갸웃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때 자미골로부터 전갈이 왔다.
“자미골에서 신라 왕과 시위부가 퇴각하는 것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계백은 눈쌀을 찌푸렸다.
‘어느 것이 진짜냐?’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판단을 해야 했다. 율재로부터 다시 전령이 도착했다.
“매복이 있었습니다. 지원군이 필요합니다.”
자미골로부터도 전령이 도착했다.
“신라군이 저항 없이 빠르게 퇴각하고 있습니다.”
장수들은 제각기 수근거리며 계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장수가 말했다.
“추격을 차단하도록 매복을 해놓은 율재 쪽이 진짜 신라왕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장수가 말했다.
“빠르게 퇴각하는 자미골이 진짜 신라왕일 것입니다.”
계백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자미골로 가자.”
계백의 본대가 신라군을 추격하는 선봉대와 합류한 곳은 자미골을 거의 빠져나간 끝부분이었다. 계백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골짜기 끝부분에서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이었다. 그 때, 신라군의 불화살이 백제군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제서야 계백은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다. 골짜기 끝의 강한 맞바람을 타고 불이 활활 타올랐고, 백제군은 좁은 골짜기에 갇혀 화살을 피하기는 커녕 퇴각조차 쉽게 할 수 없었다. 계백은 군사의 절반 가량을 잃고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계백은 자신의 실책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신라왕이 둘로 나뉘었다고 했을 때, 어느 쪽이 진짜인지 판단을 할 수 없었을 때 후퇴하고 돌아왔어야 했다. 애초에 자미골이든 율재든 좁은 곳으로 유인해 내려는 것이 신라군의 목적이었다. 신라의 왕을 잡자는 비담의 말에 말려들어간 것 부터가 잘못이었다. 언제나 냉정한 판단을 해 왔는데 자신도 모르게 비담에게 휘둘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본진으로 돌아와 밤 늦도록 다음날 퇴각준비를 하며 남은 병사들을 살피던 계백은 문득 어둠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계백은 잠시 망설이다 칼을 들고 어둠속을 향해 걸어갔다. 과연 비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얘기 했잖아. 난 신라군 첩자가 아니라고... 넌 내 속을 읽는데 골몰할게 아니라 유신과 싸웠어야지. 이 반푼아.”
킥킥거리며 웃는 비담의 조롱에 계백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를 얕본 것은 내 실책이었다. 진작에 죽였어야 하는데...”
비담도 희미하게 마주 웃었다.
“뭐... 나야말로 너를 얕보아서 내 주군을 위험에 빠뜨렸으니까...”
“너의 주군? 그 꼬맹이?”
계백은 비꼬듯이 말했지만 이미 자존심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은 듯 했다.
“넌 살려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자다.”
계백은 칼을 뽑았다.
“니 실력 한번 볼까?”
비담도 칼을 뽑았다. 비담은 평소에 계백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가볍게 몸을 놀리는 것을 보고 엄청난 힘을 가졌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과연 그의 칼의 느낌은 묵직하면서도 날렵한 호랑이와 같았다.
계백은 비담의 빠른 칼솜씨에 놀랐다. 백제에서는 손꼽히는 자신의 무술 실력을 믿었지만 비담의 실력은 예상 밖이었다. 속도를 가늠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다음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었다. 앞에 있었는가 하면 어느새 뒤로 가 있었고, 위에 있는가 하면 어느새 아래를 공격하고 있었다.
계백의 갑옷에 부딫치는 둔탁한 칼소리가 들렸다.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곳은 계백의 머리 뿐이었다. 비담이 공격할 수 있는 곳은 한계가 있었다. 비담은 칼을 고쳐잡고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힘으로 승부하겠다고?’
계백도 정면으로 뛰어가며 칼을 내리쳤다. 그때 계백의 칼을 받을 것처럼 달려오던 비담은 칼을 피하며 위로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돌더니 칼을 잡은 계백의 손목을 발로 걷어차 칼을 멀리 날려버렸다. 계백은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눈 비담을 보고 말했다.
“죽기 전에 네 정체를 알고 싶다.”
살생을 쉽게 하는 비담이었지만, 적군으로서 당연히 죽여야 할 것이었지만 어쩐지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았다. 비담은 말없이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았다. 계백을 살려두면 언젠가는 유신의 군대와 다시 맞붙게 되고 춘추의 애를 먹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예감도 들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계백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왜 적인 나를 살려주는거지?”
계백의 물음에 비담은 말했다.
“글쎄... 몰라.. 니가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나 비슷하겠지.”
계백을 잠시 바라보던 비담은 덧붙였다.
“유신이나 너나 왜이렇게 짊어진게 많냐. 장군은 전쟁하다 죽어야지.”
비담은 뒤돌아서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정에 약해서야… 난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재목은 못되는 모양이네’
비담은 한숨을 쉬고 머리를 긁적였다.
‘춘추가 알면 난리나겠군.’
어두워서 어느 길이 어느 방향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고구려로 가볼까…”
백제군이 퇴각함에 따라 춘추도 서라벌로 향했다. 춘추는 비담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백제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으니 이제 계백 밑에 있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걸 이용하는 거야. 계백이 날 믿지 못하는거. 내가 왕이 율재로 간다는 정보를 흘려 놓을께. 하지만 계백은 나를 믿지 못하니 자미골로 향할거야. 시위부에게 자미골로 가짜 왕을 호위하도록 하고 가면 분명히 백제군이 따라 붙을거야. 백제군을 깊이 끌어들이고 자미골의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곳에서 불화살로 공격을 하는거야.’
비담의 말에 춘추가 물었다.
‘그럼 나는 율재로 가라는 거야?’
‘넌 니가 알아서 가고 싶은 길로 가. 어차피 너 나 안믿을 거잖아.’
비담이 삐죽거리며 했던 말을 떠올리며 춘추는 미소지었다.
“니 눈을 보면 믿던 안믿던, 휘둘리지 않을 수가 없잖아.”
(에필로그)
몇 년 후 계백과 유신은 다시 황산벌 전투에서 만났다. 계백은 이미 전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있었다. 오천명의 결사대와 진을 치고 유신군을 맞을 준비를 하던 계백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또 정탐하고 있는거냐?”
“오랜만이야.”
비담은 싱긋 웃었다.
“의미없는 저항은 그만둬. 오천명의 목숨이 아깝지 않아?”
계백은 여전히 여유있는 웃음을 띄며 대답했다.
“유신이 나라면 항복할 거 같아?”
그러나 잠시 후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신라왕은 가야계 백성들을 잘 포용한다고 들었다. 백제의 백성들도 잘 대해주길 바랄 뿐이야.”
비담은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네 이름이 뭐지? 왜 알려주지 않는거야?”
계백의 물음에 비담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난 이미 아무도 기억할 수 없도록 지워진 이름이야.”
“…그래도 난 죽을때까지 네 이름을 기억하고 싶다.”
계백의 말에 비담은 계백의 귀에 자신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랬군…”
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이루고 싶다던 꿈… 삼한일통의 대업… 꼭 이루길 바래.”
비담은 계백의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신라군이다!”
다급한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백은 비담을 한번 바라보고 투구를 쓰고 말에 올랐다. 비담은 멀어져가는 계백과 오천명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계백의 마지막 말이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처음엔 스승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다음은 천년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그다음은 연모하는 여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삼한일통을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난을 일으켜서 숨어다니게 된 이후에는 자신이 살아있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 삼한일통을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이제 멀어져가는 계백을 보면서 비담은 처음으로 진심으로 삼한일통이 되어 전쟁이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