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 팬픽은 특별히 떠오르는게 없어서 안쓰게 될 줄 알았는데 어쨌든 하나 썼다.
처음 떠오른 줄거리는 도서관에서 성스 책을 읽다가 책 속으로 빨려들어간 아인이가
여림과 걸오를 만나는 이야기, 그리고 아인이 읽던 책을 보고 뒤따라서 들어온 중기의 이야기를 생각했는데
다음 이야기를 풀어나갈 재주가 없어서 상상에 그치고 말았다.
이것은 정확히는 걸오 여림 팬픽이라기보다 걸오 중기 팬픽이다.
불성실한 심리묘사는 시간이 없어서.. 라기보다는 능력의 한계인것 같다 ㅠㅠ
12금 정도로 그런대로 건전함.
프롤로그
밝은 보름달이 어두운 하늘에 혼자 걸려있었다. 숲 속에 한 남자와 노인이 마주해 있었다.
재신은 한손에 든 부적을 보며 말했다.
“여기에 만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써서 보름날 불사르면 그사람의 환생과 만나게 되는 거고.”
노인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걸오는 다른 손에 든 부적을 보며 말했다.
“이 부적을 7일 후 밤에 불사르면 돌아오게 된단 말이지?”
노인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날 돌아오지 않으면 영영 그 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재신은 부적을 펼치고 지필묵을 꺼내어 망설이지 않고 이름을 적었다.
‘구용하’
그리고 부싯돌을 부딫쳐 부적에 불을 붙였다. 부적이 활활 타들어가며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부적이 모두 타들어가자 재신의 모습도 함께 희미해져 사라졌다.
1일차.
중기는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챙겨들고 나왔다. 기말고사가 거의 끝나가는 6월 중순이라 밤공기도 쌀쌀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공부하던 내용을 되새기며 오피스텔로 걸어가던 그는 어두운 나무그늘 아래서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소리없이 스르륵 나오자 화들짝 놀랬다.
“구용하”
검은 그림자는 중기를 부르며 천천히 다가왔다. 중기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자세히 보니 검은 그림자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산발한 긴 머리에, 치마인지 바지인지 모를 긴 검은 옷이 영락없는 노숙자였다.
“용하야. 나 문재신이다.”
다시 검은 그림자의 사내가 다가오자 중기는 모른척하고 뛰어갈까도 생각했지만 어쩐지 그래서는안될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는 구용하가 아닌데요.”
재신은 다시 찬찬히 중기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여림의 얼굴이 맞았지만, 분위기는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
“여기가 성균관이 맞나?”
“맞는데요.”
재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환생을 한다고 해도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게 당연했다. 아무리 용하의 환생이라고 해도 걸오를 반겨서 맞아줄 거라는 기대를 한 자신이 우스웠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용하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막막했다.
중기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냥 두고 가면 그만이었지만,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찾고 있는 구용하라는 사람이 성대 학생인가요?”
중기의 말에 재신은 대답했다.
“우리가 성균관에서 같이 지냈고 200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까 구용하도 성균관으로 왔을거야.”
중기는 재신의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진중한 말투나 행동으로 봐서는 정신이 돈 사람 같지는 않은데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구용하를 찾아줄 수 있을까? 7일후에는 돌아가야 하니까 그 전에 만나보고 싶다.”
재신은 다시 중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재신의 크고 검게 빛나는 눈을 보면서 중기는 왠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 기말고사 기간이라는 것도, 내야 할 레포트가 몇 개가 남았는지도, 토익시험 신청하러 가야한다는 사실도 모두 머릿속에서 사라져갔다.
중기는 재신을 자신의 원룸으로 데려갔다.
“그러니까 네가 찾는 구용하가 나랑 똑같이 생겼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구용하의 환생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지?”
중기의 말에 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아. 너는 용하하고 어딘가 다른 면이 있는 것 같다.”
“근데 왜 200년 후에 만나기로 했어? 바로 환생해서 만나면 되지?”
“그때쯤엔 좋은 세상이 왔을거 같아서.”
재신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성균관에 다니면서 잠시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정조가 승하하고 당쟁은 점점 심해졌고,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쫒겨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가장 친한 친구 구용하는 신분이 밝혀져 성균관에서 나간 후 병에 걸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게 되었다. 용하가 세상을 뜨기 며칠 전에 그의 집을 찾았을 때 용하는 파리한 얼굴로 재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를 연모하네.”
재신은 대답이 없었지만 이전부터 용하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재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안겨오는 용하에게 재신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무시하며 지냈고, 용하도 굳이 재신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 듯 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어. 자네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용하는 수척해진 손으로 재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200년 후에 만나자. 그땐 좋을 세상이 왔겠지. 당색이나 신분, 성별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남자가 남자를 연모해도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세상이.”
용하가 세상을 떠난 후, 재신은 더 이상 살아간다는 것이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외척세력의 세도정치에 백성들의 삶은 점점 어렵고 힘들어져 갔다. 가슴이 답답했다. 어서 환생을 해서 용하를 만나고 싶은 생각에 죽을 마음도 먹었다. 그런데, 재신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는 것을 본 한 노인이 그에게 시간을 뛰어넘어 용하를 다시 만날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재신은 200년후에 환생한 용하를 만나러 왔다.
“혹시 나 말고 정말 구용하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성대 학생중에 구용하가 있는지 내일같이 학교에 가서 찾아보자.”
중기는 재신에게 이불을 펴주었다. 그러나 재신은 불을 끄고 누워서도 여전히 빤히 중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 아래 하얀 얼굴, 작은 붉은 입술은 구용하가 분명했지만, 늘 흥미거리를 찾아다니며 놀기 좋아하고 농담이나 빈정거리기 좋아하던 용하와 달리, 중기는 진지하고 성실해보이고 빈말은 하지 않았다.
“왜 자꾸 쳐다보는거야? 잘 수가 없잖아.”
중기는 투덜거렸다. 그러다 문득 재신이 왜 이렇게까지 그 친구를 찾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너 구용하랑 무슨 사이였어? 그냥 친구였어? 아니면 친척? ... 아니면 애인?”
혹시 애인이라면 이렇게 한방에 자는 건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어 중기는 순간 움츠러들었다.
“… 친구”
재신의 말에 안심을 하는 중기였지만 다음 말을 듣고 또다시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다. 그녀석은 나를 좋아했는데 나는 잘 모르겠어. 그래서 녀석을 다시 한번 만나보려고 온거야. 내 마음이 뭔지 확인하고 싶다.”
“내가 그 녀석의 환생이 맞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난 구용하는 아냐.”
홱 돌아누으며 못박듯이 말하는 중기에게 재신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아.”
재신의 대답에 중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감았다. 늦은 시간에 피곤해서 졸려웠지만 중기는 여러가지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한 채로 천천히 잠이 들었다.
‘정말 저녀석은 200년 전으로부터 왔을까? 내가 정말 구용하의 환생이 맞을까? 그렇다면 내가 전생에 저 녀석을 좋아했다는 건가? 구용하는 어떻게 찾아야 하지? 아직 기말시험이랑 레포트 두 개 남았는데…’
2일차.
다음날 중기가 눈을 떴을 때 재신은 벌써 일어나서 중기의 책들을 이리저리 꺼내보고 있었다.
“네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책이냐? 고작 아녀자들이나 쓰는 언문을 가지고 뭘 가르치지? 이 이상한 글자들은 서학의 책에 쓰이는 문자들 같은데.”
중기는 부스스 일어나서 이불을 개며 말했다.
“영어라고 미국에서 쓰는 말이야. 요즘은 한문대신 다 이걸 배워. 그리고 너 그거 성차별적인 발언이야. 요즘은 그런 말 하면 여자들이 싫어해.”
중기는 세수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가다 말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너 한자는 많이 알겠다. 나 내일 시험인데 전공책에 있는 한자에 해석 좀 달아줄래? 쉬운 건 놔두고 어려운 것만 달아오 돼.”
그리고 전공 책을 찾아서 재신에게 내밀었다. 재신은 표지에 쓰인 글자를 읽으며 물었다.
“경영학? 이건 무엇을 배우는 학문인데?”
“쉽게 말하면… 어떻게 물건을 많이 팔고 장사를 잘 할 것인가 하는 학문이지.”
“하긴 넌 장사에 소질이 있긴 했지.”
“그래? 내가 전생에 장사를 잘 했단 말야?”
“응. 한양의 시전 상인 중에 가장 부자였지.”
“내가 전생에 그렇게 부자였어? 우오~ 왠지 기분 좋은데?”
중기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용하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중기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재신은 중기의 책에 주석을 달아 놓았다.
아침을 먹고 나서 중기는 상을 치우며 재신에게 말했다.
“아침은 내가 했으니까 설거지는 네가 해.”
중기의 말에 이상한 표정을 짓는 재신을 보고 한번도 설거지 같은 건 해보지 않았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한테 일주일 붙어 살려면 너도 일을 해야 할거 아냐.”
중기는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설거지 시범을 보여가며 재신에게 기어이 설거지를 시켰다. 뿌듯한 표정으로 재신이 책에 달아놓은 주석을 확인하면서 중기는 사전 찾는 시간 반나절은 줄었겠다 하고 좋아했다.
“내가 시전의 부자 상인이었으면 넌 직업이 뭐야?”
중기의 말에 재신은 무심히 대답했다.
“그냥 양반. 아버지는 대사헌이고.”
중기는 대사헌이 뭔지는 몰랐지만 재신의 옷차림이나 학식으로 보아 꽤 높은 집안의 아들인건 분명해 보였다. 중기는 재신을 흘깃 보며 말했다.
“근데 너 아무래도 그 옷은 안되겠다. 너무 튀잖아.”
중기는 자신의 옷장에서 재신이 입은 옷의 색깔을 보며 비슷해 보이는 어두운 색의 바지와 티셔츠를 꺼내보았다. 좀 큼직한 것들로 꺼내서 입혀보니 헐렁하니 잘 맞았다.
“음~ 머리가 기니까 락밴드 느낌이 나는데.”
자신의 코디에 뿌듯해하는 중기와 달리 재신은 툴툴거렸다.
“이렇게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어떻게 움직이라는 거냐. 불편하지도 않아?”
“니옷이 훨씬 불편하거든요?”
중기는 삐죽거리면서 가방을 챙겨들었다.
학교로 들어가자 벽에 줄줄이 붙은 대자보들을 보며 재신은 다시 투덜거렸다.
“벽서 수준하곤… 필체도 엉망이군.”
재신은 200년 후의 성균관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중기와 재신은 단과대학 사무실마다 돌아다니며 구용하라는 학생이 있는지 물었지만, 그런 학생은 어느 과에도 없었다.
“나 내일 시험이라 도서관에 가서 공부해야 하는데. 너도 도서관에서 책보고 있을래?”
중기의 말에 재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도서관에는 재신의 흥미를 끄는 책들이 많은 듯 재신은 몇시간이나 책을 보고 있었다.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재신이 물었다.
“이 많은 학생들이 전부 성균관 학생들인가?”
“응. 대부분은 우리학교 애들이고 다른 학교 애들도 공부하러 오긴 해. 요즘은 외국인들도 교환학생으로 와.”
재신은 옆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는 외국인 학생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성균관 말고 다른 학교도 있나?”
“대학교가 전국에 수백개인걸. 요즘은 국민의 80%, 아니 8할이 대학에 간다니까.”
“백성의 8할이 성균관을 다닌다? 그 많은 돈을 다 나라에서 어떻게 감당하지?”
“학비는 우리가 내지. 등록금 장난 아냐.”
“돈을 내고 성균관을 다녀야 한다고? 타락했군. 성균관에서 신성한 학문을 가지고 장사를 하다니.”
“좀 좋게 봐주면 안 돼? 돈만 내면 누구나 원하는 지식을 배울 수 있다고. 신분에 상관없이.”
“200년전 이나 달라진 게 없군. 출생이 아니라 돈으로 신분이 결정된다는 것 밖에는.”
자르듯 말하는 재신에게 중기는 어쩐지 발끈하는 기분이 들었다. 200년전 조선시대 인간에게 미개인취급을 당하다니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요즘은 누구나 공부만 잘하면 출세도 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어.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든 과거에 급제하면 출사를 할 수 있다구.”
재신의 못마땅한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듯 했다.
“더 좋은 건 투표를 해서 왕을 백성들이 직접 뽑는다는 거지.”
중기는 재신이 감탄할 것을 기대했지만 그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어려서부터 왕세자 교육을 받아도 어려운 통치를 아무나 뽑아서 한다고? 그게 말이 되나?”
중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관둬라. 천년쯤 후에 만나기로 하지 그랬니. 도대체 네가 말하는 좋은 세상이란 게 어떤 건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나도 한번 보고 싶네.”
“200년이라고 정한 건 너거든?”
“난 지금도 맘에 들거든?”
중기는 재신에게 눈을 한번 흘기고는 궁시렁거리며 밥을 뒤적였다.
3일차.
다음날도 둘은 성대 캠퍼스에서 도서관에서 혹은 잔디밭에서 각자 책을 보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혹은 지나가는 학생들을 이유없이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중기는 가끔 용하에 대해서 물었다. 재신은 용하에 대한 이런 저런 추억이 담긴 이야기들을 담담히 풀어놓았다.
“내가 그렇게 기생집에 드나들고 야한 책을 수집했단 말야? 너를 약올리기도 잘하고?”
중기는 어이없어했다.
“아무래도 나 아닌거 같은데.. 내가 용하의 환생이라면 왜 다른 거지?”
“유교에서도 불교에서도 영혼과 윤회를 이야기하지만 환생과 전생이 똑같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어.”
“그럼 환생의 의미가 없는 거 아냐?”
“똑같아야 의미가 있는거냐?”
뭔가 형이상학적으로 대화가 흐르면서 중기는 머리속이 뒤죽박죽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만약 너를 기억하고 여전히 사랑하는 구용하를 찾으면 어떡할거야? 돌아가지 않고 여기 남을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재신은 다시 중기에게서 용하를 보는 듯 그윽한 눈빛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중기는 왠지모르게 짜증이 나서 쏘아붙였다.
“난 남자 안 좋아해.”
재신은 중기의 말에 무안한 듯 고개를 돌렸다.
“지금 세상에도 남색은 금지되어 있나?”
“금지된 건 아니지만 권장되는 것도 아니지. 200년쯤 더 지나면 모를까.”
중기는 과거를 회상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어렸을 때랑 지금은 사회가 많이 변했으니까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
그랬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변해왔다. 모든 것들이 변하고 있는데 환생도 환경에 맞춰 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중기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