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1.18 비담 춘추 연개소문 팬픽 3
  2. 2010.01.17 비담 춘추 연개소문 팬픽 2
  3. 2010.01.16 비담 춘추 연개소문 팬픽 1

 


비담은 밖에서 지키고 있던 연개소문의 부하들을 조용히 한명씩 한명씩 처리하였다. 마침내 비담이 마지막 남은 자를 해치우고 춘추를 구하기 위해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방안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연개소문을 옷이 거의 벗겨지다시피 흘러내린 춘추가 올라타고 있었다. 비담은 머리가 아득해지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비담이 연개소문에게 칼을 내리치려 하자 춘추가 비담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안 돼. 인질로 삼아 데려가야 해.”

비담은 숨을 몰아쉬며 격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위험한 자다. 지금 죽여야 .”

“이자를 죽인다면 고구려 군대가 당장 신라로 쳐들어올꺼야.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이 자를 인질로 잡고 있어야 해.”

춘추의 속삭임에 비담은 할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연개소문의 손을 밧줄로 묶어 말에 태웠다.


하루를 꼬박 말을 달렸지만 인적이 드문 산길로 돌아서 가느라 아직도 신라의 국경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했다. 밤이 되어 더 이상 가다가는 길을 잃을 것이었다. 산 중턱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비담은 연개소문을 나무에 묶었고 춘추는 피곤했는지 곧 잠이 들었다. 복잡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비담에게 연개소문은 놀리듯 물었다.

“저 애가 너의 정인이냐?”

비담은 기분나쁘다는 듯 째려보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난 연모하는 여인이 있고 저 앤 처자식이 있어.”

“처자식이 있다는 자가 그렇게 남자를 탐하는거냐?”

연개소문은 빙긋 웃으며 비담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비담의 표정은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입술 놀리는 걸 보니 호기심에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던데...”

“닥쳐!”

비담은 벌떡 일어나 연개소문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연개소문은 비죽 웃으며 말했다.

“니마음도 제대로 모르는거냐? 그러면서 누구의 마음을 얻겠다는거야.”

“내 마음같은거 몰라도 돼. 지금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야.”

비담은 이빨을 으드득 깨물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건... 널 죽이는거...”

“네가 죽여야 할 자는 저녀석인것 같은데... 저애는 왕이 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아이야. 너도 저애가 어떤 앤지 알고 있잖아. 자기를 신라의 왕으로 만들어주면 고구려의 영토를 돌려주겠다고 했어. 네가 정말 신라 여왕의 충성스런 부하라면 저애부터 없애야 할거야.”

연개소문은 희미하게 웃으며 춘추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봤지만 저애가 날 유혹한거야.”

비담은 해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다가 칼을 거두었다. 연개소문이 자신과 춘추를 이간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춘추가 연개소문을 올라타고 야하게 엉켜있던 모습이 비담의 뇌리에 남아 잊혀지지 않았다. 지난 밤에 자신에게 애절하게 부벼오던 춘추의 조그만 입술이 떠올랐다. 그것도 거짓이었을까?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신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수곡성에 도착했지만, 국경을 수비하는 군대가 지키고 있어 지나는 자들을 일일이 조사하여 수색하고 있었다.

“이제 어쩔 셈이야?”

연개소문의 물음에 춘추는 비담을 보며 말했다.

“수곡성을 통하지 않고 산을 넘어 가자. 길이 있어.”

다시 한식경 가량 산을 오른 끝에 그들은 산 꼭대기에 다다랐다. 이제 절벽에 달린 좁은 외나무 줄 다리를 건너 산을 내려가면 신라의 영지였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다리를 향해 다가갔다. 비담이 춘추에게 말했다.

이제 이 자는 필요없으니 죽이고 가자.”

춘추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신라로 데려가서 고구려의 땅을 내놓으라고 협상을 하겠어”

“그게 가능해? 고구려가 땅을 내놓을 것 같아?”

일단 신라로 데려가서 원군을 보내달라던가 이런저런 협상의 패로 쓰면 돼.”

차라리 지금 놓아주자고 하지 그래? 살려두고 협상해서 다시 고구려로 보내면 신라편이 될 것 같아? 오히려 군사를 일으켜 보복하러 올거야.”

그렇다고 지금 죽이면 당장 고구려에 신라를 공격할 구실을 만들어주게 돼. 백제의 침공만으로도 힘든데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받으면 끝이야.”

비담은 마음속에 있던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 말이 비담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 연개소문과 내통한 거냐?”

춘추는 어이가 없다는 듯 비담을 보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 니 야망을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녀석이잖아.”

비담은 낮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했다.

넌 이 자를 죽이고 싶지 않은거 아냐? 이 자의 힘이 필요한거지? 그냥 솔직하게 말해.”

춘추는 비담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실은 비담 자신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알수 없는 분노와 의심과 질투의 회오리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그런데 비담과 춘추가 다투고 있는 사이에 한 무리의 고구려 군사들이 추격해 오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우리가 이 외진 길로 가는걸 알았지?”

연개소문이 은밀히 비밀표식을 남겨놓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 녀석을 살려놓으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거야.”

비담의 말에 춘추는 잘라 말했다.

“시간 없어. 어서 다리를 건너야 해.”

춘추는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지만 비담은 연개소문이 다리를 건너도록 칼로 위협하여 떠밀고는 자신은 건널 생각을 하지 않고 다리 앞에서 쫒아오는 고구려 군사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비담은 순식간에 따라붙은 고구려 군사들에게 둘러싸였다. 춘추는 다리를 건너다 말고 돌아서서 외쳤다.

“비담!”

“어서 가! 여긴 내가 처리하고 갈께. 다리를 건너면 추격하지 못하도록 줄을 끊어.”

비담은 다리 앞에서 군대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지만 가슴에 입은 부상 때문에 여러명을 혼자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더욱이 뒤에서 궁수들이 화살을 매기고 겨누기 시작했다.

“멈춰라!”

춘추는 칼로 다리의 밧줄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이 줄을 끊겠다. 너희들의 대막리지도 나와 운명을 같이 할 것이다.”

연개소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춘추를 보며 말했다.

“왕 될 자가 그렇게 쉽게 목숨을 버리는가? 신하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왕이 어디있나?”

“왕도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은건 있지”

춘추는 그렇게 말하고 외나무 다리를 묶고 있는 밧줄을 하나 끊었다. 외나무다리가 출렁 하며 옆으로 기울어지고 밑으로 쳐졌다. 춘추와 연개소문은 기울어진 다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남은 줄에 매달렸다.

대막리지!”

고구려 군사들이 술렁였다.

“나를 보내주면 저자를 무사히 보내주라고 하겠다.”

연개소문의 말에 춘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개소문은 다시 다리를 건너 돌아갔고 비담 다리를 건너왔다. 비담이 무사히 다리를 건넌 것을 확인한 춘추는 자신도 다리를 건넌 후 고구려군이 추격하지 못하도록 외나무 다리의 밧줄을 마저 잘랐다. 절벽을 사이에 두고 춘추와 연개소문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연개소문은 옅게 미소지으며 춘추에게 말했다.

네가 신라의 왕이 된다면 고구려에 큰 위협이 되겠구나.”

춘추는 연개소문을 보 입가를 올리며 비웃었다.

그대는 신하로서 감히 왕의 권력을 탐했으나 왕이 될 생각은 없으니, 고구려는 그대가 뿌린 씨로 인해 스스로 멸망할 것이다.”

연개소문의 후계 구도의 혼란을 꼬집는 말이었다. 춘추의 말에 연개소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서라벌을 향해 산길을 걸어내려오며 비담 물었다.

“너 정말 나 때문에 죽으려고 그런거야?”

춘추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식으로 비담을 보며 대답했.

“니가 먼저 나 때문에 죽으려고 했잖아.”

비담은 춘추의 부드러운 갈색 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대체 이녀석의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수가 없었다. 자신의 야망밖에 모르는 녀석인가 싶다가도 비담에게만은 자신을 보아달라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매달리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같은거 하지 않을거라면서...”

쑥스러운 듯 일부러 삐죽거리는 비담의 말에 춘추는 미소지으며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왕이 된다해도 네가 없으면 쓸쓸할거 같아.”

춘추의 말에 비담은 자신의 손 안에 든 작은 새와 같은 춘추의 손을 쥐고 쓰다듬었다. 어린 춘추가 감정적인 면에서는 자신보다 어른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네가 없으면 쓸쓸할거야.”

그들은 서라벌로 가는 길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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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은 3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이미 권력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왕도 자신의 손으로 폐하고 세우고 마음대로 고구려를 주무르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암흑과도 같이 깊 검은 눈을 하고 있었고 춘추를 보고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춘추는 그 깊은 심연과 같은 눈에 빨려들어가는 것 같아 가슴이 덜컹했다.

"수나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지금 신라와 손을 잡고 수나라를 공격하면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늘릴 수 있을 것입니다."

춘추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연개소문은 말없이 춘추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춘추의 속셈을 꿰뚫어 본듯 직설적으로 물었.

"원군을 청하는 것인가"

"신라에 원군을 보내 백제를 치는 것이 고구려의 이에도 맞습니다. 백제와 신라가 힘의 균형을 이루어야 고구려가 남방 국경의 걱정 없이 수나라와 전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연개소문은 막힘없이 시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춘추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러면 어떨까?"

연개소문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 없이 춘추를 바라보며 말했다.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선대에 빼앗은 영토를 돌려준다면 백제를 칠 원군을 보내주겠다."

신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수나라와의 오랜 전쟁으로 보잘것 없는 신라의 영토를 탐내실 정도로 고구려의 국력이 퇴하신 겁니까"

춘추는 여전히 예쁜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그제서야 연개소문은 미묘하게 표정의 변화를 보이며 말했다.

"넌 신라에 있기에는 아까운 아이 같구나. 내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춘추에게 말했다.

"여왕을 몰아내고 너를 신라의 왕으로 만들어주겠다."

춘추는 잔잔히 웃으며 받았다.

"저에게 반역자가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춘추의 말에 연개소문은 픽 웃으며 말했다.

"왕이 되고싶어하는 네 속마음이 뻔히 보인다."

춘추는 연개소문에게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등골이 서늘했다. 춘추는 겨우 다시 미소지으며 연개소문의 말에 대답을 회피했다.

“대막리지의 제안, 감사하게 받겠사오나, 제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춘추는 연개소문이 어떻게 나올지 입안이 바짝 마를 정도로 긴장했지만, 다행히 연개소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소로 돌아온 춘추는 긴장이 풀려 쓰러질 것 같았다. 혼자서 호랑이굴로 걸어들어갔다 살아 돌아온 느낌이었다.

"어땠어? 연개소문이 잘 해주던?"

비담은 태연한 척 했지만 목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칼같은거 들지 않아도 나 자신 정도는 지킬 수 있어"

춘추는 피로가 몰려왔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냉소적으로 말했다.

"난 이미 내 세력을 위해 보량이와 혼인했어. 더한것도 할 수 있어."

신을 비난하는 듯한 비담의 태도에 상처받수록 자꾸만 말이 더 삐딱하게 나왔다.

"그래.. 넌 그럴 수 있어."

비담은 춘추를 보며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어쩐지 그 비웃음이 춘추를 향한 것이 아니라 비담 자신을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니가 그렇게 강한척 하는거...다 보여."

비담은 춘추에게 다가가서 그렇게 말하고 그를 끌어안았다. 춘추의 몸은 낙엽처럼 가벼워서 쉽게 끌려왔다. 춘추는 비담이 자신의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을 알았다. 연개소문이 자신을 탐했는지 확인하려는 것일 터였다.

"이제 됐어?"

춘추의 눈은 촉촉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비담은 춘추를 놓아주었다.

"연개소문이 무슨 제안을 한거야?"

“신라와 화친할 생각이 없어.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돌려달래.”

춘추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수나라를 끌어들이는 수 밖에 없어."

"하지만 수나라는 지금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힘든 상황이잖아."

"난세가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을거야. 한명의 영웅이 가면 다른 영웅이 곧 나타나서 빈자리를 채우기 마련이니까. 넓은 나라니까 어디서든 영웅은 쉽게 나타나지."

춘추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문제는 신라가 그때까지 몇년간을 버텨낼 수 있느냐지."

"고구려를 물리치기 위해 수나라를 끌어들이는게 말이 돼? 늑대를 물리치기 위해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격이잖아."

비담은 말도 안된다는 식으로 반응했지만 춘추는 단호했다.

"어차피 신라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못해. 고구려를 끌어들일지 수나라를 끌어들일지 판단을 해야 하고 고구려가 어렵게 되었으니 수나라를 반드시 끌어들여야 해"

비담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지만 논쟁은 나중에 해도 충분했다. 비담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떡할건데?”

“신라로 돌아가야지.”

춘추와 비담은 짐을 꾸리고 탈출할 준비를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연개소문의 부하들이 처소에 들이닥쳤다.

"춘추공을 대막리지의 자택으로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자택이라고?”

비담과 춘추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도망쳐야 해. 지금."

춘추의 속삭임에 비담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칼을 뽑아서 앞을 막아선 자를 베었다.


춘추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연개소문은 서서히 일어서며 말했다.

"쫒아라. 내가 직접 갈 것이다."

"반항하면 어찌할까요?"

연개소문의 검게 일렁이는 그림자가 흔들리는 촛불에 비춰져 기괴하게 일그러졌.

"김춘추를 제외한 나머지는 죽여도 좋다."


춘추와 비담은 말을 달려 국내성을 빠져나갔지만 신라의 국경까지는 성의 관문을 여러 곳 통과해야했다. 두곡을 빠져나와 여달성을 통과하였지만 아직 연통이 닿지 않은 모양인지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한 무리의 검객들이 말을 타고 그들을 쫒아 오는 것이 보였다.

“먼저 가고 있어. 처리하고 쫒아갈께.”

비담의 말에 춘추는 불안한 듯 따라오는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춘추는 그들 가운데 연개소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저 자가 연개소문이야. 조심해.”
비담은 춘추를 먼저 보내고 말을 멈추고 그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도착한 검색들은 비담을 둘러쌌다. 비담은 말을 탈 수 없는 나무가 빽빽한 숲 속으로 그들을 유인했다. 비담은 나무 사이로 피해다니며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보다가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베어나갔다. 연개소문은 그런 비담의 검술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지막 부하가 쓰러지자 연개소문은 쓰러진 부하들의 시체를 보고 보일듯 말듯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구나."

그리고 한손으로 천천히 칼을 치켜들었다. 결코 서두르지 않았지만 비담은 그의 움직임에서 빈틈을 느낄수가 없었다. 연개소문의 칼은 휘익 바람을 가르며 거침없이 다가왔다. 비담은 지금까지 누군가와 검을 겨루면서 긴장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문노 이외에는 그의 상대가 될만한 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칼은 지금까지 상대한 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다지 움직임이 많지 않았지만 빈틈이 없고 엄청난 위력의 칼이었다. 비담은 빠르고 현란하게 움직이며 상대를 교란했지만 연개소문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래서는 움직임이 많은 비담이 시간이 갈수록 지쳐서 불리했다. 속전속결 해야했다.

“하앗!”

비담은 연개소문을 향해 돌진했고, 연개소문은 서둘러 달려오는 비담에게 보이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투툭..”

옷과 살이 베이는 소리가 들렸다. 비담은 가슴을 잡고 휘청거린 채 뒤로 물러섰다. 옷에서 피가 진하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육참골단인가?’

연개소문은 자신의 다리에 흐르는 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비담이 연개소문의 다리에 상처를 입히기 위해 일부러 빈틈을 보여주고 공격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씨익 웃었다.

‘하지만 내가 내어준 것이 살이고 네가 내어준 것이 뼈다.’

비담도 알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곧 부하들을 다시 증원할 것이며, 다리의 상처도 치료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부하들도 없었고 산속에서 제대로 치료도 할 수 없으니 자신이 더 손해였다. 하지만 일단은 연개소문이 다리에 상처를 입었으니 지금 당장 자신과 춘추를 쫒아오지는 못할 것이었다. 비담은 다시 말을 타고 사라졌다.


춘추는 비담이 말을 타고 자신을 쫒아오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말에 올라탄 비담은 어딘가 이상했다. 비담이 가까이 와서야 춘추는 비담의 옷을 물들인 피가 적군의 것이 아닌 비담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얼굴이 하애졌다.

"비담...!"

우선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춘추는 삼한지세의 기억을 더듬어 근처에 몸을 피할 만한 곳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길을 벗어나 산으로 접어들어 올라간 끝에 작은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담의 옷을 벗기고 가슴에 난 상처를 보는 순간 춘추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 하는 느낌이 들었다. 검귀라 불리는 비담이 이렇게 다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비담은 춘추의 눈물을 보며 놀랐다. 춘추가 이렇게 우는 것을 보는 것도 이렇게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는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왜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거야?"

춘추의 말에 비담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널 다치게 하면 폐하께서 날 가만두지 않으실테니까…"

춘추는 비담의 상처를 눌러 지혈하고 천을 감으며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넌 늘 폐하를 이유로 대는구나."

춘추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나를 걱정하시니까, 폐하께서 나를 보호하라고 하시니까, 폐하께서 하라시니까...

그냥 나 김춘추가 좋아서 그러는 거라고 하면 안되는거냐?"

비담은 손을 뻗어 춘추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비담의 손가락이 춘추의 뺨을 쓸다가 입술에 닿았고 망설이듯 잠시 거기서 멈추었다. 그러자 춘추는 참을 수 없는 듯 비담의 입에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비담은 춘추를 밀어내지 않았다. 아니, 밀어낼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달콤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꿀을 찾아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춘추는 비담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옷 속으로 가져갔다. 여리고 부드러운 속살에 비담의 손에 닿았고 춘추는 나지막하게 신음했다. 춘추의 거칠어진 숨결과 간절한 눈빛은 비담에게 어서 와서 자신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었고 비담은 그 부름을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춘추를 덮쳤.


춘추는 곁에서 잠든 비담을 바라보며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 쫒기는 상황만 아니라면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날이 며칠 없었던 것 같았다. 비담과 둘이 서라벌을 떠나 비담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에게만 온 마음을 주고 있는 이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하고 쓰다듬을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비담의 이마에서부터 콧날, 입술, , 목선, 가슴까지 비담이 깨지 않도록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손가락으로 선을 따라 내려가며 그려보았다. 춘추에게는 이렇게 완벽한 피조물은 수나라의 어떤 그림이나 공예품에서도 본적이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춘추는 비담의 풀어진 머리를 쓸어주며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물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춘추는 동굴에서 나와 물통을 들고 시냇가를 찾아 내려갔다. 그러나 채 시냇가에 다다르기도 전에 춘추는 그들을 추격해 온 연개소문과 부하들에게 둘러싸였다. 연개소문은 춘추에게 물었다.

"나를 벤 그자는 어디있나?"

"..."

연개소문은 잔뜩 움츠린 채 말없이 쌔근거리는 춘추를 보고 음울하게 웃었다.

“너보다 그자를 더 잡고 싶어졌어.”

연개소문의 눈은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끈적한 집착의 광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방법이 있지"

개소문은 춘추의 옷을 나무에 걸어놓고 나무에 글자를 칼로 새겨 남겼다.

‘여달성’

춘추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지 마, 비담’

그러나, 춘추도 비담이 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다친 몸으로 와봐야 연개소문부하들에게 죽게 될 뿐이겠지만, 차라리 죽을 지언정 자신을 버리고 덕만에게 빈손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여달성에 도착해서 비담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느덧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뭘할까?”

연개소문은 춘추를 묶어두지 않았다. 춘추 정도는 언제든 한손으로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의자에 앉은 연개소문은 느긋한 눈으로 춘추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죽여줄까? 그자 말이야.”

춘추는 비담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려 애썼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춘추는 책상위에 놓인 칼을 바라보았다. 춘추는 자신도 모르게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춘추가 들고 있는 것이 칼이 아니라 나뭇가지인 것처럼 아무 느낌이 없는 듯 했다.

“어린애가 그런 장난감 갖고 놀면 다쳐.”

연개소문은 씩 웃으며 말했다. 춘추는 자신이 연개소문을 벨 수 있을까 생각했고 베고 나면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맘만 먹으면 자신의 손에 들린 칼쯤은 쉽게 빼앗을 것 같았고, 혼자서 이곳을 탈출할 자신도 없었다.

옅은 한숨을 쉬며 칼을 다시 내려놓던 춘추는 창밖에서 춘추에게 눈짓을 하고 사라지는 비담의 얼굴을 보았다.

비담…?’

춘추는 긴장감에 어지러웠다. 비담이 온 것을 최대한 연개소문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했다.

어떻게 하지…’

춘추는 일부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힘과 권력이 좋습니다. 그래서 강한 사람이 좋습니다.”

춘추는 연개소문에게로 다가가서 나긋나긋목소리로 말했다.

“공께서는 지금까지 제가 본 사람 중에 가장 강하십니다. 어째서 직접 왕이 되지 않으십니까?"

연개소문은 흥미롭다는 듯 춘추에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미 권력을 얻었는데 왕이 될 필요가 있나? 그런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지."

"신하는 아무리 권력을 얻었다 해도 빈틈을 보이면 언제든 왕으로부터 내쳐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춘추는 연개소문의 마음을 휘저어보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시간은 왕의 편이라서 권력이 강한 신하라도 시간을 이기기는 어렵지요.”

춘추는 연개소문에게 다가가 속삭이며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팔을 쓸었다.

"제이름이 어째서 춘추인지 아십니까?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시간을 이길수는 없다는 뜻으로 어머님께서 지어주신 것입니다. 대막리지께서는 시간을 이기실 수 있으십니까?“

연개소문은 자신을 은근히 도발하는 춘추가 제법이라는 듯 웃으며 뜨거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왕이 되고 싶은 이유는 그것입니다. 시간을 이기고 싶어서요. 저를 신라의 왕으로 만들어주십시오.”

“내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냐?”

“예”

연개소문은 믿지 않는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춘추의 눈을 들여다 보았지만 춘추는 상관하지 않고 다시 손을 들어 올려 그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연개소문의 손을 잡고 자신의 뺨에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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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 춘추 연개소문에 대한 소설

자유롭게 사는 비담때문에 질투하는 춘추를 그린 계비추 팬픽과 반대로

자신의 야망을 위해 뭐든지 하는 춘추 때문에 질투하는 비담을 그려보고 싶었

연개소문 캐릭을 못잡아서 갈팡질팡 하던차에

승호가 지섭이횽을 사랑한다길래 연개소문은 소간지로 넣어봤




백제에게 십여개의 성을 빼앗긴 신라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서라벌에서 반나절이면 닿을 거리에 백제의 군대가 상주하게 된 것이었다. 춘추는 덕만에게 고하였다.

"제가 고구려에 가서 원군을 청해 보겠습니다."

"네가 어찌 그런 위험한 곳에 직접 가려 하느냐?"

"나라의 운명이 바람앞의 등불과 같은데 왕족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춘추의 말은 그러했지만 덕만은 춘추의 생각을 알 수 있을것 같았다.

'어차피 왕이 되려면 주변 국가의 실세를 직접 만나 살피고 친분을 쌓아 두는 것도 좋지만...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그러면 비담과 함께 가도록 하여라. 비담은 고구려에 수차례 가본 적이 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

덕만은 비담의 무술실력이라면 춘추가 위험한 곤경에 빠지더라도 헤쳐나올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권했지만 춘추는 살짝 웃으며 거절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외교적인 일이라 비담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덕만은 의외의 대답에 놀랐지만 다시 춘추에게 말했다.

"내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런다. 비담과 같이 간다면 고구려에 가는 것을 허하겠다."

춘추는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비담에게 고구려에서는 무조건 제 명을 따르라고 명해주십시오."

"물론이다. 네 명을 내 명같이 여기고 따르라고 이르겠다."

덕만의 말에 춘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담과 춘추는 말을 타고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출발했다. 비담은 춘추를 흘낏 보고 말했다.

"야 너 제법이다"

"뭐가?"

"앉아서 머리만 굴리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어떻게 고구려로 직접 갈 생각을 다했냐"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라는 뛰어난 장수가 있다고 들었어. 어떤 자인지 직접 만나보고 싶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호락호락 넘어올까? 신라가 수나라를 꼬드겨서 고구려를 공격하게 한걸 아는데 말야."

춘추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넘어오긴 커녕 신라한테 이를 갈고 있겠지."

"그런데 어쩔 셈이야?"

"어차피 고구려는 삼한일통을 위해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야. 되던 안되던 고구려에 가서 부딫쳐보고 겪어 봐야 이 산을 며칠만에 넘을 것인지 계획을 세울거 아냐."

비담은 이녀석 배짱이 대단하네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춘추에게 물었다.

"근데 너 폐하께서 나랑 같이 가라고 하니까 싫다고 했다며. 왜 그런거야?"

"..."

춘추는 말없이 비담을 보았다.

"왜 그랬냐구~"

비담이 다시 묻자 춘추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너랑 나랑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틀리잖아. 사사건건 부딫칠게 틀림없어. 게다가 넌 내말을 안듣잖아. 외교에서 같은 편끼리 손발이 안맞는 것 만큼 위험하고 손해가 막심한게 없어."

춘추는 비담을 보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말 나온 김에 확실히 해두자. 내 명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폐하의 말씀 들었지?"

"그래.. 알았다 알았어. 말 잘 들을께"

비담은 춘추가 무슨 속셈인지 알수 없었지만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며칠이 걸려 국내성에 도착한 비담과 춘추는 연개소문을 만나기 위해 궁의 접견실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나타나지 않고 저녁무렵이 되어서야 연개소문이 보낸 부하 고연수가 나타났다. 그는 춘추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거만하게 말했다.

"어쩐 일로 고구려까지 먼 길을 오셨습니까?"

"물론 고구려와 신라의 화친을 위해서지요."

"화친이라? 뒤로는 수나라와 내통하면서 겉으로는 화친이라니 이런 뻔뻔한 수에 속을 것 같습니까?"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몰아세우는 고연수에게 춘추는 웃음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대막리지 연개소문 장군은 수나라와 전쟁을 하면서도 수나라의 도교와 문물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국가의 이를 도모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앞에 앉아 있는 분은 국가의 이보다는 과거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뭐라?”

춘추의 말에 고연수는 입가를 씰룩씰룩하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지만 춘추는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수나라가 혼란에 빠져가고 있는 지금이 고구려에게는 기회입니다. 지금 신라와 손을 잡는 것만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공께서 저희의 제안을 고하지 않아 기회를 놓치신다면 그 책임이 공께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고연수는 여전히 불쾌한 기색이었지만 춘추의 말에 허를 찔린 듯 마지못해 대답했다.

"천하를 호령하고 수나라와 전쟁을 이끄시는 연개소문 장군께서 일개 신라의 사신을 만날 시간이 있으시겠습니까? 저희가 마련한 처소에서 기다리시면 대막리지께서 연통을 넣으실 것이니 기다리시지요. 공의 말씀은 분명히 대막리지께 전해드리겠습니다."

비담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준비된 처소에서 기다리라는 말이 결국은 그들을 감금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이 들렸다. 과연 그들이 안내받은 처소에는 군사들이 몇겹으로 에워싸고 있었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며칠동안 연개소문의 부름을 기다렸지만 연통은 오지 않았다. 바깥의 모든 소식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고 비담은 답답해서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이렇게 가둬두다가 언제 갑자기 죽이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춘추는 창가에 앉아 턱을 고인 채 밖의 한가로운 정원을 내다보며 무슨 생각인지 말이 없었.

"야 무슨 생각해?"

"...."

비담은 창가의 춘추 옆으로 다가가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려야 해?"

비담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탈출해야 하는거 아닐까?"

춘추도 이곳을 빠져나가 신라로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두렵고 마음이 복잡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비담에게 그런 티를 냈다가는 아이 취급받을 것 같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춘추는 대답없이 비담을 보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진지왕의 아들인데... 왕이 되고 싶은 적 없었어?"

입밖에 내는 것 만으로도 반역에 해당하는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는 비담뿐이었다. 비담은 이녀석 또 무슨 수작이야 싶은 표정이었지만 순순이 대답했다.

"내 출생을 알고나서 왕이 되고 싶은 생각이 한번도 안들었다면 거짓말이겠지."

비담은 설핏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스승님 말씀대로 왕보다 더 큰거, 천년의 이름, 그게 더 갖고 싶었어. 왕이 되는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아. 그건 수단에 불과해. 또 여왕폐하께서 나보다 훨씬 백성들을 사랑하는 훌륭한 왕이시고 말이야."

비담은 언제나 덕만의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춘추는 그런 비담을 보면 심술이 나서 흔들고 싶어지곤 했다.

삼한일통을 이루려면 여왕폐하보다는 너같이 난폭하고 무자비한 왕이 나을수도 있어.”

춘추의 말에 비담은 킥킥 웃었다.

칭찬이냐?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해서 삼한일통을 이룬들 얼마나 오래 가겠어? 내가 살아있는 동안 뿐이겠지. 하지만 폐하께서는 백년 후를 내다보고 계셔.“

그래... 니가 그렇지 뭐. 이 바보같은 오리새끼야.’

춘추는 시무룩해져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비담이 춘추에게 물었다.

"넌 왜 왕이 되고 싶어?"

"내 마음대로 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왕이 된다고 해서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니잖아. 여왕폐하를 봐."

속이 상해서 건성으로 대답하는 춘추에게 비담은 눈치없이 훈계를 하고 있었다. 춘추는 뾰루퉁해서 대답했다.

"알아. 하지만 나는 폐하와 같은 왕이 되지는 않을거야. 다른 사람을 위해 나자신을 희생하는 왕은 되지 않겠어."

비담은 훗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춘추라면 충분히 술수를 통해 자신의 이익과 나라의 이익을 맞춰 나갈 것이었다.

....”

춘추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뗐다.

"궁금한게 있어."

"뭔데?"

"너도 우리 어머니를 봤다지? 어머니는... 어떤 것 같았어?"

비담은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왜 천명공주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비담은 춘추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어떤 것 같냐니... 무슨 뜻이야?"

"불행해 보였어? 힘들어 보였어?"

"행복해 보이진 않았지만... 강인해 보였어. 폐하와 비슷하면서도... 달라."

"…네가 폐하와 어머니를 도왔다고 들었어."

춘추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고마워."

비담은 갑작스러운 춘추의 말에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자신은 전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고맙다는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비담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쭈뼛쭈뼛 말을 돌렸다.

"너도 고맙다는 말을 할줄 아네? 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너한테 당연히 잘해줘야 한다고 여기는 줄 알았는데"

춘추는 비꼬는 듯한 비담의 말에도 담담하게 말했다.

"내게 굽신거리며 잘해주는 자들은 모두 둘중에 하나야. 나를 두려워하거나, 내 권세를 이용하려고 하거나. 근데 넌 나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내 권세를 이용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잘해주니까... 그러니까 고마운거지"

비담은 오늘따라 지친듯한 춘추의 말에 가슴이 찌릿하게 아픈것 같기도 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춘추의 고독함과 외로움, 두려움, 왕재로서 짊어진 무게를 어떻게 덜어줘야 할지 알수 없었다. 비담은 손을 뻗어 춘추의 어깨를 잡고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춘추는 일어서서 비담에게 다가와 그에게 안겼다. 비담의 가슴 가득이 춘추의 향기가 채워졌고 비담은 자신도 모르게 두팔로 춘추를 꼭 끌어안아 당기며 등을 쓸어주고 있었다.

그때 문 밖에서 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막리지 연개소문 장군으로부터 사신이 왔습니다."

비담과 춘추는 뜻밖의 사신에 위기감을 느끼며 서로 마주보았다. 사신은 연개소문이 춘추를 만나고자 한다는 말을 전하였다.

"춘추공을 궁으로 뫼셔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수행하는 자 없이 혼자서 오시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혼자서 오라고?"

비담이 끼어들었다.

"그것은 가당치 않은 말입니다. 춘추공을 모시는 자로서 춘추공의 행차를 다른 자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춘추는 비담을 눈짓으로 말리며 말했.

".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신이 기다리는 동안 비담은 의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수행하는 자 없이 혼자 오라니 말이 돼? 염종 말이... 연개소문은 미소년들을 좋아한다던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거 아냐?"

춘추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게 무슨상관이야?"

비담은 설마 해서 다시 물었다.

"너 제정신이야?"

춘추는 냉랭한 눈으로 비담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널 데려오지 않으려고 한거야. 넌 외교를 몰라."

비담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고작 그 외교라는게...니 몸을 팔아서 하는거냐? 니가 그러고도 신라의 왕족이냐?"

"왕족?"

춘추는 자조적으로 픽 웃었다.

"그깟 신라의 왕족 따위... 수나라에서 변두리 소국의 왕족 따위 자기네 내시들 만큼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고구려라고 다를것 같아? 고구려에게도 신라의 왕족은 언제든 밟아도 되는 하인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그들이 그렇게 여긴다고 너 스스로를 그렇게 여겨도 되는거야?"

비담은 화가 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미친듯이 화가 나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누가 그렇게 여긴대? 아무렇게나 말하지 마."

춘추는 불꽃튀는 눈으로 비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내 명에 따르라고 했지."

그러나 비담은 춘추의 말을 듣기는 커녕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널 이렇게 혼자 보내고 나중에 폐하께 무슨 말을 들으라고?"

춘추는 차갑게 일렁이는 눈으로 비담을 보며 말했.

"내 명에 따르지 않을거라면 신라로 돌아가."

비담은 무서운 눈으로 춘추를 노려보았다. 춘추가 수나라에서도 그런 식으로 살아남았던 것인가 의심하기 시작하니 더욱 미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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