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담은 밖에서 지키고 있던 연개소문의 부하들을 조용히 한명씩 한명씩 처리하였다. 마침내 비담이 마지막 남은 자를 해치우고 춘추를 구하기 위해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방안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연개소문을 옷이 거의 벗겨지다시피 흘러내린 춘추가 올라타고 있었다. 비담은 머리가 아득해지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비담이 연개소문에게 칼을 내리치려 하자 춘추가 비담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안 돼. 인질로 삼아 데려가야 해.”
비담은 숨을 몰아쉬며 격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위험한 자다. 지금 죽여야 해.”
“이자를 죽인다면 고구려 군대가 당장 신라로 쳐들어올꺼야.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이 자를 인질로 잡고 있어야 해.”
춘추의 속삭임에 비담은 할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연개소문의 손을 밧줄로 묶어 말에 태웠다.
하루를 꼬박 말을 달렸지만 인적이 드문 산길로 돌아서 가느라 아직도 신라의 국경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했다. 밤이 되어 더 이상 가다가는 길을 잃을 것이었다. 산 중턱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비담은 연개소문을 나무에 묶었고 춘추는 피곤했는지 곧 잠이 들었다. 복잡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비담에게 연개소문은 놀리듯 물었다.
“저 애가 너의 정인이냐?”
비담은 기분나쁘다는 듯 째려보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난 연모하는 여인이 있고 저 앤 처자식이 있어.”
“처자식이 있다는 자가 그렇게 남자를 탐하는거냐?”
연개소문은 빙긋 웃으며 비담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비담의 표정은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입술 놀리는 걸 보니 호기심에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던데...”
“닥쳐!”
비담은 벌떡 일어나 연개소문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연개소문은 비죽 웃으며 말했다.
“니마음도 제대로 모르는거냐? 그러면서 누구의 마음을 얻겠다는거야.”
“내 마음같은거 몰라도 돼. 지금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야.”
비담은 이빨을 으드득 깨물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건... 널 죽이는거...”
“네가 죽여야 할 자는 저녀석인것 같은데... 저애는 왕이 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아이야. 너도 저애가 어떤 앤지 알고 있잖아. 자기를 신라의 왕으로 만들어주면 고구려의 영토를 돌려주겠다고 했어. 네가 정말 신라 여왕의 충성스런 부하라면 저애부터 없애야 할거야.”
연개소문은 희미하게 웃으며 춘추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봤지만 저애가 날 유혹한거야.”
비담은 해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다가 칼을 거두었다. 연개소문이 자신과 춘추를 이간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춘추가 연개소문을 올라타고 야하게 엉켜있던 모습이 비담의 뇌리에 남아 잊혀지지 않았다. 지난 밤에 자신에게 애절하게 부벼오던 춘추의 조그만 입술이 떠올랐다. 그것도 거짓이었을까?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신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수곡성에 도착했지만, 국경을 수비하는 군대가 지키고 있어 지나는 자들을 일일이 조사하여 수색하고 있었다.
“이제 어쩔 셈이야?”
연개소문의 물음에 춘추는 비담을 보며 말했다.
“수곡성을 통하지 않고 산을 넘어 가자. 길이 있어.”
다시 한식경 가량 산을 오른 끝에 그들은 산 꼭대기에 다다랐다. 이제 절벽에 달린 좁은 외나무 줄 다리를 건너 산을 내려가면 신라의 영지였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다리를 향해 다가갔다. 비담이 춘추에게 말했다.
“이제 이 자는 필요없으니 죽이고 가자.”
춘추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신라로 데려가서 고구려의 땅을 내놓으라고 협상을 하겠어”
“그게 가능해? 고구려가 땅을 내놓을 것 같아?”
“일단 신라로 데려가서 원군을 보내달라던가 이런저런 협상의 패로 쓰면 돼.”
“차라리 지금 놓아주자고 하지 그래? 살려두고 협상해서 다시 고구려로 보내면 신라편이 될 것 같아? 오히려 군사를 일으켜 보복하러 올거야.”
“그렇다고 지금 죽이면 당장 고구려에 신라를 공격할 구실을 만들어주게 돼. 백제의 침공만으로도 힘든데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받으면 끝이야.”
비담은 마음속에 있던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 말이 비담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 연개소문과 내통한 거냐?”
춘추는 어이가 없다는 듯 비담을 보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넌... 니 야망을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녀석이잖아.”
비담은 낮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했다.
“넌 이 자를 죽이고 싶지 않은거 아냐? 이 자의 힘이 필요한거지? 그냥 솔직하게 말해.”
춘추는 비담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실은 비담 자신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알수 없는 분노와 의심과 질투의 회오리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그런데 비담과 춘추가 다투고 있는 사이에 한 무리의 고구려 군사들이 추격해 오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우리가 이 외진 길로 가는걸 알았지?”
연개소문이 은밀히 비밀표식을 남겨놓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 녀석을 살려놓으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거야.”
비담의 말에 춘추는 잘라 말했다.
“시간 없어. 어서 다리를 건너야 해.”
춘추는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지만 비담은 연개소문이 다리를 건너도록 칼로 위협하여 떠밀고는 자신은 건널 생각을 하지 않고 다리 앞에서 쫒아오는 고구려 군사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비담은 순식간에 따라붙은 고구려 군사들에게 둘러싸였다. 춘추는 다리를 건너다 말고 돌아서서 외쳤다.
“비담!”
“어서 가! 여긴 내가 처리하고 갈께. 다리를 건너면 추격하지 못하도록 줄을 끊어.”
비담은 다리 앞에서 군대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지만 가슴에 입은 부상 때문에 여러명을 혼자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더욱이 뒤에서 궁수들이 화살을 매기고 겨누기 시작했다.
“멈춰라!”
춘추는 칼로 다리의 밧줄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이 줄을 끊겠다. 너희들의 대막리지도 나와 운명을 같이 할 것이다.”
연개소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춘추를 보며 말했다.
“왕 될 자가 그렇게 쉽게 목숨을 버리는가? 신하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왕이 어디있나?”
“왕도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은건 있지”
춘추는 그렇게 말하고 외나무 다리를 묶고 있는 밧줄을 하나 끊었다. 외나무다리가 출렁 하며 옆으로 기울어지고 밑으로 쳐졌다. 춘추와 연개소문은 기울어진 다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남은 줄에 매달렸다.
“대막리지!”
고구려 군사들이 술렁였다.
“나를 보내주면 저자를 무사히 보내주라고 하겠다.”
연개소문의 말에 춘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개소문은 다시 다리를 건너 돌아갔고 비담은 다리를 건너왔다. 비담이 무사히 다리를 건넌 것을 확인한 춘추는 자신도 다리를 건넌 후 고구려군이 추격하지 못하도록 외나무 다리의 밧줄을 마저 잘랐다. 절벽을 사이에 두고 춘추와 연개소문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연개소문은 옅게 미소지으며 춘추에게 말했다.
“네가 신라의 왕이 된다면 고구려에 큰 위협이 되겠구나.”
춘추는 연개소문을 보고 입가를 올리며 비웃었다.
“그대는 신하로서 감히 왕의 권력을 탐했으나 왕이 될 생각은 없으니, 고구려는 그대가 뿌린 씨로 인해 스스로 멸망할 것이다.”
연개소문의 후계 구도의 혼란을 꼬집는 말이었다. 춘추의 말에 연개소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서라벌을 향해 산길을 걸어내려오며 비담이 물었다.
“너 정말 나 때문에 죽으려고 그런거야?”
춘추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식으로 비담을 보며 대답했다.
“니가 먼저 나 때문에 죽으려고 했잖아.”
비담은 춘추의 부드러운 갈색 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대체 이녀석의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수가 없었다. 자신의 야망밖에 모르는 녀석인가 싶다가도 비담에게만은 자신을 보아달라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매달리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같은거 하지 않을거라면서...”
쑥스러운 듯 일부러 삐죽거리는 비담의 말에 춘추는 미소지으며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왕이 된다해도 네가 없으면 쓸쓸할거 같아.”
춘추의 말에 비담은 자신의 손 안에 든 작은 새와 같은 춘추의 손을 쥐고 쓰다듬었다. 어린 춘추가 감정적인 면에서는 자신보다 어른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네가 없으면 쓸쓸할거야.”
그들은 서라벌로 가는 길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