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660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군은 왜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나카노에는 덴지천황에 즉위해있었고, 왜는 고구려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와 당에 적대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백제부흥군을 지원하려는 생각이었지만, 백제왕조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백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왜군을 백제땅에 주군시켜 왜국의 영토를 늘리려는 속셈이었다.

"오오아마, 네가 백제를 지원하러 가줘야겠어."

오오아마는 나카노에의 딸들과 혼인한 후로 긴 머리를 자르고 이마를 밀어 상투를 틀고 성인 남자들이 입는 넓은 어깨의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오오아마는 나카노에의 딸들에게서 많은 자식들을 얻었고, 이제는 오오아마가 이전에 긴 머리에 아이같은 옷을 입고 다니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카노에는 불어나는 오오아마의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고, 그래서 오오아마를 황태제로 봉해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정해놓았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아들 오오토모를 황태자로 봉해 새로운 후계자로 세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백제는 이미 멸망했는데 저들의 싸움에 끼어들어서 뭐하게? 게다가 나는 수군을 지휘해 본 적이 없는데."

내키지 않는 듯한 오오아마의 말에 나카노에는 거듭 말했다.

"에치노 다쿠스를 선봉으로 세울거야. 너는 따라다니면서 조언을 해주면 돼. 사츠야마도 같이 보낼테니 너는 지켜보고만 있으면 돼.

보다가 신라와 당의 사이를 벌려 놓을 수 있는 계책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 혼란스러운 틈에 왜의 영토를 늘릴 수 있으면 좋겠지."

"당과 신라, 백제부흥군이 서로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먹을 땅이 있겠어? 저들끼리 싸우도록 두고 이틈에 우리는 군사를 비축하는 것이 낫지."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 틱틱거리는 오오아마를 나카노에 역시 못마땅한 듯 보며 말했다.

"당은 고구려와 전쟁하느라 바쁘니, 그냥두면 김춘추 그 애송이가 백제를 날로 먹을텐데 신라만 좋게 놔둘 수 없지."

그러나 오오아마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춘추는 절대 만만한 녀석이 아니야. 이 전쟁에 끼어들면 후회할거야, ."

그러나 오오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카노에는 딱잘라 말했다.

"몇십년에 한번 올 이런 기회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이건 명령이다, 오오아마. 에치노 다쿠스와 함께 가서 백제부흥군을 지원하도록 해."

 

"백제부흥군이 왜국에 지원을 요청했다는데 어쩔셈이야?"

비담의 물음에 춘추는 생각에 잠겼다.

겉으로는 백제부흥군과 왜국의 연합군이 나당연합군과 싸우는 모양이었지만, 사실은 4개 세력이 모두 백제땅을 두고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군이고 적군이고를 가릴 필요가 없는 셈이고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가가 문제였다.

"백제부흥군이 당군에 너무 맥없이 무너지면 곤란하니, 왜국이 지원하는 것은 나쁘지 않네."

"하지만 백제부흥군과 왜국이 이기면? 그것도 문제잖아."

"그러니까 세 나라가 싸우도록 하면서 신라는 어부지리를 취해야지."

"근데 다들 같은 생각하고 있는거 아냐? 싸움이 되겠어?"

비담의 궁시렁거리는 말을 무시하고 춘추는 생각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카노에가 오오아마를 보낸다고 하던데... 이기면 백제땅을 얻고, 지면 오오아마를 쳐낼 구실을 잡으려는 생각이군."

춘추는 백제의 지도를 들여다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어 비담을 보며 말했다.

"비담, 오오아마가 백제부흥군을 도우러 오면 네가 오오아마를 지원해줘."

"? 왜군을 도와? 그랬다가 백제부흥군이 이기면?"

"오오아마를 도우라고 했지, 왜군을 도우라곤 안했어. 오오아마가 나카노에를 몰아내고 왜국에 친신라정권을 세우도록 도와주라고."

비담은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가 도와준다고 걔가 친신라정권을 세울까? 너는 그 녀석을 믿어? 지 형의 뒷통수를 치려는 녀석인데?"

춘추는 잠시 오오아마를 떠올리며 말없이 생각끝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 오오아마는 믿지 않지만 그의 야망을 믿어."

비담은 마뜩치 않았지만 잠시 춘추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 하며 말했다.

"그래. 니가 그렇게 판단한다면."

춘추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비담이 계속 오오아마를 못믿겠다고 투덜거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이 받아들여준 것이 자신을 인정해준 것 같아서 기뻤다.

"나를 따라줘서 고마워."

춘추는 비담에게 다가가서 가만히 비담의 팔을 잡고 어깨에 기대었다.

"아 뭘 또... 나를 부려먹으려고 수작이야."

비담은 상기된 춘추의 표정이 싫지 않았지만 짐짓 툴툴거렸다. 그러나 다음순간 춘추를 확 끌어안았다. 춘추의 도발적인 눈빛을 보며 옷고름을 헤치던 비담은 멀리서 서서 돌아선 채 춘추를 수행하던 하인을 의식하며 멈추었다.

"괜찮아. 계속 해. 저 자는 귀머거리에 벙어리야."

춘추는 비담을 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리고 나카노에는 죽이지는 마... 그가 살아남아서 오오아마와 계속 대립하는 것이 신라에 유리하니까..."

춘추의 말에 비담은 고개를 들어 실눈을 뜨고 춘추를 보며 물었다.

"너 나카노에에게 미련이 남아있는건 아니겠지?"

춘추는 비담의 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너야말로 오오아마의 수작에 넘어가면 진짜로 내가 죽일거야."

비담은 칫 웃으며 춘추의 손을 밀쳐내고 다시 춘추를 안았다.

 

오오아마는 나카노에의 명에 따라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백제로 떠났다. 왜군은 백강을 향해 진격하며 당의 수군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담은 신라의 비밀 사신으로 오오아마를 만나러 갔다. 왜의 수군은 급하게 동원된 어부들이 대부분이라 무기도 부족했고 갑옷을 입고 있는 자도 얼마 없었다. 숫자만 많았지 훈련이 된 군사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비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오아마를 기다렸다.

비담을 보고 오오아마는 놀라서 작게 외쳤다.

"그대는 설마..."

"오랜만이야."

비담은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오오아마는 비담을 미심쩍은 듯이 보며 말했다.

"역모를 꾀하다가 죽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신라 사신의 표식을 가지고 여기 온 거지?"

비담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남걱정이나 할 때가 아닌것 같은데? 나카노에가 너한테 황태제 자리를 물러나게 할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여기서 노닥거려도 되는거야?"

오오아마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백제부흥군은 여러 호족세력들이 각자 군사를 이끌고 모인 것이라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어 있지 않았고, 왜의 군사와 협력도 잘 되지 않았다. 백제의 부여풍 왕자는 백제를 오래 떠나 있었던 터라 백제부흥군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했다.

왜와 백제부흥군의 군사들이 급하게 동원되어 훈련이 부족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오오아마가 잘 알고 있었다. 고구려를 상대로 오래 전쟁을 해서 실전을 쌓아 온 신라와 당의 군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백제부흥군이 나당연합군에 패하고 오오아마가 왜국으로 돌아가면, 나카노에는 그것을 꼬투리잡아서 오오아마를 강등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오오토모를 황태자로 추대하려는 속셈일 것이었다.

"이대로 앉아서 형에게 당할 생각이야? 나당연합군과 싸울게 아니라 왜국으로 잘 살아서 돌아가야하지 않겠어?"

"내게 역모를 부추키는건가?"

"쓸데없는데 기운빼지 말라고.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를 잘 생각하란 얘기지. 지휘관 에치노 다쿠스, 그자는 너의 아군일까 적군일까? 좋은 머리로 잘 생각해봐."

비담이 더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이 오오아마는 잘 알고 있었다. 에치노 다쿠스는 나카노에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비담, 너는 내 아군이야 적군이야?"

오오아마의 말에 비담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의 선택에 달려있지. 나카노에는 신라를 적군으로 선택했는데... 너는 나카노에와는 다른 선택을 하길 바래."

"신라를 아군으로 선택하면... 나한테 뭘 해줄건데? 또 내게서는 뭘 바라지?"

"백강에서 전투를 할 때 너는 네 이익을 위해서 신라는 신라의 이익을 위해서 각자 노력하다보면 좋을 결과가 있겠지."

비담은 백강전투의 전략에 대해서 오오아마의 귀에 속삭였다.

", 그리고 나는 에치노 다쿠스의 배에 배치해줘. 그자는 내가 처리할테니."

 

백강에서 나당연합수군은 선박을 정박한 채 백제와 왜의 수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휘관 에치노 다쿠스는 쳐들어갈 기회를 보고 있었다. 수적으로는 백제와 왜의 선박의 수가 1천척이나 되어 나당연합수군에 우월했지만, 왜의 선박은 전투용이라기보다는 어업용 선박이 많아서 전투가 벌어지면 불리할 수 있었다.

오오아마는 에치노를 도발하여 그가 전투에 나서도록 부추겼다. 그러나 에치노는 낯선 장소에 섣불리 전진하기를 꺼렸다.

"백강의 입구가 좁아서 한꺼번에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매복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3개 선단으로 나누어서 차례로 들어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랬다가는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습니다."

"3개 선단으로 나누어도 1개 선단이 나당연합군이 배보다 숫자가 많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겁니까?"

"당군과 신라군의 배는 무겁고 튼튼해서 함부로 부딫쳐서는 배만 잃고 말 것입니다."

"대신 우리 배들은 속도가 빠르지 않습니까? 문제가 생기면 빠르게 후퇴를 하면 될것입니다."

오오아마는 계속 에치노를 다그쳤다.

"1천척의 배를 가지고도 얼마 안되는 나당연합군이 무서워서 출정을 못하면서, 나카노에 형님께 충성을 한다 말할 수 있나요? 언제까지 여기서 덴지천황이 보내주시는 군량미만 축내고 있을 생각인가요?"

이 말에 에치노 다쿠스는 결심을 하고, 선박을 셋으로 나누어 백강입구로 진격을 시작했다.

 

1선단은 에치노 다쿠스, 2선단은 사츠야마, 3선단은 오오아마가 지휘를 하며 차례로 백강입구에 들어섰다.

그러나, 백제의 바다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에 썰물 때 진격하느라 애를 먹었고, 왜의 어선들은 신라와 당의 군함에 부딫치자 어이없이 부서지고 불탔다.

선봉에 섰던 1선단은 후퇴하려 했지만, 뒤에 2선단이 들어오고 있어서 빠르게 후퇴를 할 수 없었고, 게다가 밀물로 조수의 흐름이 바뀌어서 더욱 후퇴가 어려워졌다.

에치노 다쿠스는 뒤따르는 2선단과 부딫치지 않도록 2선단에 퇴각 명령을 전달하도록 깃발로 신호를 보낼 것을 명령했다.

"어서 2선단에 퇴각명령을 전달하라!"

그런데 깃발로 신호를 보내던 신호병사가 깃발을 잡자마자 한 병사가 다가와서 칼로 베어버렸고, 신호깃발을 바닷속에 던져버렸다.

"무슨 짓이냐!"

놀란 병사들이 덤벼들었지만, 비담은 병사들의 어깨를 밟고 뛰어올라 에치노 다쿠스에게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에치노 다쿠스는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들어 비담의 칼을 막았지만, 서너합만에 비담의 칼에 쓰러지고 말았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병사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고, 비담은 다시 눈깜짝할 사이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대장을 잃은 1선단은 우왕좌왕하며 서 있었고 그러는 동안 2선단은 계속 전진하며 1선단과 부딫쳐서 왜의 선박끼리 깨지고 불타기 시작했다. 결국 4백여척의 배가 불타고 깨어진 채 왜군은 패하였고, 나카노에의 왼팔이었던 사쓰야마도 당군에 사로잡혀 당으로 압송되었다.

백강의 물은 왜의 병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오오아마는 멀찍이 맨 뒤의 선단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불타는 자국의 배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헤엄을 쳐서 오오아마의 배에 올라탄 비담은 몸의 물을 닦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 나카노에의 오른팔 왼팔을 잘랐으니 나카노에에게 가볼까?"

비담의 말에 오오아마는 떨떠름하게 그를 보았다.

"너는 어째서 같이 가려는거야?"

비담은 칼에 묻은 물을 닦아 칼집에 휙 돌려 꽂으며 말했다.

"나카노에는 검술로 당할자가 없는 고수인데, 내가 필요하지 않겠어?"

 

 

나카노에는 패전하여 빈손으로 돌아온 오오아마를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오오아마, 네가 에치노 다쿠스를 부추켜서 무리한 전투를 하게 만들었다고 들었다. 에치노 다쿠스는 죽고 , 사츠야마는 포로가 되었다. 너는 무슨 낯으로 혼자 살아돌아온거냐?"

"애초에 그들을 무책임하게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형이야. 난 처음부터 이 전쟁에 반대했어. 난 형의 뜻을 그들에게 되풀이해서 상기시켰을 뿐이야."

오오아마도 지지않고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나카노에는 분노하여 옥좌에서 일어나 오오아마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네가 감히 네 세치 혀로 내 가신들을 패전시키고 나를 능멸해?"

오오아마는 숨이 막혀서 컥컥거리면서도 이죽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해? , 난 왜국의 신하야. 아무리 내가 왜국의 패전을 바랬을 리가 없잖아."

그러나 나카노에는 오오아마를 땅에 내동댕이 치며 말했다.

"네 간악한 속을 이제야 알겠구나. 이제껏 너를 아껴준 나에 대한 충성이 다 거짓이었구나."

오오아마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카노에를 보며 외쳤다.

"형이야말로 지금까지 내가 형이 왕이 되도록 계책을 알려주고 온갖 노력을 다 했는데, 나를 내칠 구실만 찾고 있었어. 그래, 형이 원한다면 황태제 자리에서 물러나겠어. 형이 원하지 않는데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 뭘하겠어."

 

나카노에는 오오아마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요시노에 귀양보냈다.

오오아마는 황태제 자리에서 강등되었고, 나카노에의 아들 오오토모가 황태자로 추대되어 후계자 구도가 재편되었다.

다른 나카노에의 딸들은 오오아마를 떠나 나카노에에게 돌아갔지만 우노노사라라는 오오아마를 따라 요시노로 갔다.

 

"오오아마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춘추는 비담에게 물었다.

"요시노에 틀어박혀서 꼼짝을 안하고 있네. 움직일 생각이 없나봐."

춘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명분을 줘야지. 형을 몰아낼 명분을."

춘추는 붓을 들어 글을 쓴 후 비담에게 주었다.

 

비담은 연못의 잉어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오오아마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형이 네게 자결하라는 칼을 내려보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냐?"

오오아마는 미소지었지만, 눈빛은 원한과 분함으로 들끓고 있었다.

비담은 말없이 춘추의 서신을 오오아마에게 내밀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자는 천황의 자격이 없다.

아스카를 버리고 오쓰로 수도를 옮긴 것은 아스카의 사람을 버린 것이다.

사람을 아끼고 나라를 부강하게 할 오오아마와 함께 조정을 바로잡을 자는 일어서라."

오오아마는 춘추의 서신을 읽고 뜻모를 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깊은 한숨을 쉬고 비담에게 물었다.

"너는 어째서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어서까지 김춘추를 돕는거지? 춘추를 연모해서 왕의 자리를 양보한거냐?"

오오아마의 말에 비담은 자신도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양보한건 아니고... 글쎄다... 왕은 나도 춘추도 할수 있겠지만, 천년의 신라를 만들기 위해 전장을 누비는 것은 나만 할수 있는 일이니까."

비담은 오오아마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오오토모가 왕이 되면 과연 왜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녀석이 신라와 당에 잘 대처할 수 있을거 같아? 네가 나서야 하지 않겠어? 왜국을 위해서.“

, 고양이 쥐생각 하는군.”

오오아마는 피식 웃었지만, 이내 뭔가 결심을 한 듯 자리를 떴다.

 

오오아마는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여 은밀히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나카노에의 오랜 폭정과 전쟁에 지친 호족들은 오오아마에게로 마음이 돌아섰다.

아스카의 귀족들도 나카노에가 수도를 아스카에서 오쓰로 옮긴 것에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오오아마를 지지했다. 우노노사라라 왕녀도 아버지인 나카노에의 가신들에게 오오아마의 편으로 돌아설 것을 설득했다.

오오아마는 미노로 옮겨간 후 본격적으로 군사를 동원했다. 그리고 미노에 모인 몇몇 호족들과 귀족들의 수만의 군사들을 이끌고 오쓰로 진격했다.

오오아마의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카노에 역시 군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제부흥군을 지원하며 백강전투에서 5만명의 병력을 잃은데다가, 전쟁을 통해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국고는 바닥나고 나라는 황폐화되어 있었다.

 

나카노에는 도고쿠 등에 병력동원 명령을 내리는 사자를 보냈지만, 가는 길목마다 오오아마와 비담이 보낸 군사들이 지키고 있다가 그들을 차단했다. 나카노에는 오쓰에 고립되었고, 비담은 병력을 재결집하여 오쓰로 진격했다.

한달여 전투만에 오쓰의 성이 함락되고 궁의 문이 부서지자, 오오아마와 비담은 빠르게 대전으로 달려들어갔다. 나카노에가 도주했을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러나 나카노에는 무장을 한 채 혼자 대전에서 왕좌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담을 본 나카노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동생을 부추켜 반란을 일으킨 것이 네놈이로군. 그때 진작에 김춘추와 같이 죽였어야 하는건데."

비담은 미소지으며 나카노에에게로 다가갔다.

"너는 신라의 전쟁에 끼어들지 말았어야했어."

"백제는 왜국과 피로 이어진 형제국이나 다름없다.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지."

"동생과 칼을 겨누고 있으면서, 피로 이어진 형제국 운운할 처지가 아닐텐데."

비담의 빈정거림에 나카노에는 오오아마를 보고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오오아마,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오오아마는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며 말했다.

"형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 나를 의심하고, 딸들을 내게 보내서 감시하고, 내 자리를 뺏어서 오오토모에게 주고, 나를 제거하기 위해 백제로 보내고..."

"그래? 그렇게 생각해?"

나카노에는 껄껄 웃었다.

"네가 저 신라놈과 붙어먹은게 아니고?"

"형이야말로 김춘추에게 빠져서 제정신이 아니었잖아."

"하긴... 그런게 지금 다 무슨 소용이겠니."

나카노에는 비담을 보고 칼을 뽑으며 말했다.

"어서 승부를 내자. 지난번에 보여준 형편없는 실력으로 내게 덤비는 건 아니겠지?"

비담도 씨익 웃으며 오른손으로 칼을 뽑았다.

"그땐 손님으로 갔으니 예의 상 겸손하게 굴었을 뿐이야."

그리고 다시 왼손으로 한자루의 칼을 더 뽑았다.

"그땐 한쪽 손만 썼었고."

비담은 양손으로 검을 잡고 나카노에게 달려갔다. 비담은 나카노에의 긴 칼을 오른손의 검으로 막으며 밑으로 번개같이 파고들어 왼손의 칼로 그의 허리를 공격했다.

옆구리에 상처를 입은 나카노에는 긴 칼에 의지하여 쓰러지지 않도록 버티며 오오아마를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너를 죽일 생각은 없었어."

오오아마는 차갑게 대꾸했다.

"나 역시 형을 죽일 생각은 없어. 순순이 항복하면 형의 목숨은 살려주겠어."

나카노에는 공허하게 말했다.

"글쎄... 그게 네 의지대로 될까? 왕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지지."

그리고 나카노에는 칼을 들어 자신의 목을 찔렀다.

"!"

오오아마는 파랗게 질려서 나카노에에게 달려가서 쓰러지는 나카노에를 부축했다.

"내 역사는 여기까지야... 이제부터는 너의 시대다..."

나카노에는 오오아마를 보고 비릿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오오아마는 덴무천황으로 즉위하고 나카노에의 가신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가신들로 친신라정권을 세웠다.

나카노에가 죽고 오오아마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춘추는 잠시 얼굴에 허무함이 스쳐갔지만 이내 냉정하게 말했다.

"왜국에 친신라정권이 들어섰으니 이제 안심하고 고구려와의 전투에 집중할 수 있겠어."

비담은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하는거야?"

춘추의 물음에 비담은 먼 바다를 보며 말했다.

"나카노에와 오오아마는 왜 서로 믿지 못했을까?"

"그러는 넌? 넌 왜 나 믿냐?"

춘추의 말에 비담은 코웃음치며 말했다.

"나도 너 안믿어. 너 제대로 왕노릇 안하면 언제든 나한테 쫒겨날 줄 알아. 내가 너 믿어서 왕 하라고 둔 줄 아냐? 여왕폐하께서 널 시키고 싶어하니까 그런거지."

춘추는 궁시렁거리며 삐죽거리는 비담의 어깨에 기대며 미소지었다.

"그래. 네가 믿은 건 내가 아니고 여왕폐하였고, 천년의 신라였지."

Posted by 에페르
,

 

당시 일본은 고토쿠천황이 즉위하였지만 실세는 나카노에였고, 나카노에는 이후에 덴지천황이 됩니다.

나카노에의 동생 오오아마는 형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오오토모를 몰아내고 덴무천황이 됩니다.

(역사와는 다른 팬픽이니 연도나 사실 따지지 말고)

 

1. 647

어이, 신라의 귀공자께서 도착했다는군.”

거리낌없이 다다미를 홱 열어젖히고 들어서는 나카노에를 향해서 오오아마는 고개를 들었다. 오오아마의 형인 나카노에는 황실의 외척세력이었던 소가 가문을 대전에서 참살하고, 삼촌인 고토쿠천황을 천황의 자리에 올려놓은 후, 실질적으로 일본의 정권을 잡고 있는 젊은 맹주였다.

오만함과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듯 한 위세의 형과 달리 오오아마는 나이가 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상투를 틀지 않고 긴 머리를 내려뜨린 채 아이과 같은 머리모양과 옷을 입고 있었다.

왕위계승자인 김춘추가 직접 일본까지 온 걸 보면, 백제의 칼끝이 신라여왕의 목 앞에 다다른 모양이군.”

나카노에의 혼잣말에 오오아마는 횟대에 홀로 앉아있는 새장 속의 새에게로 다시 눈을 돌리며 물었다.

듣자하니 꽤 예쁘다던데잡아먹을꺼야 아니면 갖고 놀꺼야?”

나카노에는 픽 웃으며 오오아마를 뒤에서 안았다.

보기도 전에 질투하는거냐?”

오오아마는 나카노에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보는 사람마다 홀리는 요물이라던데 조심하라구.”

나카노에는 크게 웃으며 오오아마를 놓고 벽에 걸린 칼을 잡아 뽑았다.

내가 관심있는 쪽은 상대등 비담이야. 신라, 아니 삼한에서 제일가는 검술가라던데 한번 시험해 볼까.”

 

백제와의 전쟁이 막 끝난 시점에, 춘추가 갑자기 왜나라를 가겠다고 하는지 비담은 알 수 없었다.

춘추는 왜국의 왕이 바뀌었으니 인사 차 놀러 간다고 말했지만, 왜국은 백제의 동맹국이었고, 백제의 요청에 따라 춘추를 잡아서 백제에 넘겨줄 가능성도 있었다.

춘추가 걱정되어 궁시렁거리는 비담에게 춘추는 혀를 차며 말했다.

왜국은 신라의 배후를 위협하는 세력이니 미리 손을 써두어야 해. 그렇다고 네가 가면 목숨이 위험할테니 내가 가는 수밖에.”

? 내 목숨이 위험해? 어째서?”

나케노에는 검술이 뛰어난 자를 보면 겨루고 싶어 안달이라더라. 네가 지면 목숨을 잃을 테고, 네가 이겨도 그자가 화가 나서 너를 죽이려고 들텐데, 쓸데없이 문제 만들지 말고 그냥 얌전히 신라에 있는게 어때?”

춘추의 말에 비담은 어깨를 으쓱 하며 돌아섰다.

그래. 니말대로 나는 가지 않는 게 좋겠어.”

 

춘추의 일행이 왜국의 궁에 들자, 궁녀들과 신하들이 춘추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목을 길게 빼고 몰려들었다. 신라에서 사신이 오는 것도 드물었지만, 이렇게 높은 직위의 사신이 오는 것은 몇십 년만의 일이었다. 더군다나 왕위계승자인 춘추의 모습에서는 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귀티와 기품이 흘러넘쳤다. 화려한 수가 놓인 비단옷을 입고 차분하면서도 당당하게 걸으며 대전으로 향하는 외국의 젊은 공자의 모습에 궁이 술렁거렸다.

대전에 든 춘추에게로 신하들의 시선이 쏠렸다. 고토쿠천황, 나카노에와 오오아마를 비롯해서 모두들 춘추의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숨을 멈추는 듯 했다. 그림에서 튀어 나온 듯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 보일듯 말 듯 미소를 머금은 입술, 보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 한 기름한 눈 속에서 빛나는 별처럼 또렷한 눈빛에 빨려들어가는 듯 했다.

왜국의 새로운 왕의 즉위에 신라여왕께서 축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마법에 걸린 듯 조용하던 좌중의 침묵 위로 춘추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빙긋이 미소지으며 춘추를 바라보던 나카노에는 앞으로 나서 춘추의 앞에 섰다.

갑옷을 입은 나카노에의 어깨는 더욱 넓어보였고, 걸을 때마다 쇠붙이가 부딫쳐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국의 왕은 이제부터 천황이라 칭하시오. 왕이 아니라 천황에 즉위하신 것이오.”

춘추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신라여왕의 신하로서 여왕폐하의 말씀을 들은 대로 고할 따름입니다. 여왕폐하께 황자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나카노에는 기가 죽지도 않고 거만하지도 않게 부드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춘추의 미소에 씩 웃으며 마주보며 웃었다.

오오아마가 그런 나카노에를 노려 보며 날카롭게 춘추에게 말했다.

상대등 비담공은 어디에 계신지요?”

상대등은 배멀미가 심하여 신라로 돌아갔습니다.”

"그것 참 아쉽게 되었습니다. 무예가 뛰어나시다고 들었는데 그깟 배멀미를 이기지 못해서야."

나카노에의 비꼬는 말에도 춘추는 대답없이 미소지을 뿐이었다.

 

신라 사절단을 환영하는 연회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무희들이 나와서 춤을 추었는데, 한참 연회가 무르익을 즈음에, 무희들이 물러가고, 칼을 든 여인들이 나와서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칼끝이 춘추를 향하며 무희들이 점점 춘추에게로 위협적으로 다가왔지만 춘추는 여전히 태도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춤을 감상했다.

나카노에는 재미있는 듯 싱글싱글 웃으며 오오아마에게 말했다.

"제법인데? 전혀 무서워하지 않잖아. 칼이라곤 잡아본 적이 없는 애송이 인것 같은데 말이야. 담력이 보통 아니네."

그러나 오오아마는 그런 형을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대답했다.

"눈치가 없거나 바보 아닐까? 시험해보면 알겠지. 바보인지 담력이 센건지."

그러더니 오오아마는 춤을 추는 무희 한명에게 찡긋 눈짓을 했다. 무희는 춤을 추는 척 빙빙돌며 춘추에게 다가가서 칼끝을 춘추의 코앞까지 홱 내밀었다.

무희의 도발에 좌중이 다들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춘추는 무희의 칼이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데도 태연히 앉아있었다.

칼이 거의 춘추의 하얀 목의 동정 깃에 닿을 지경이 되었을 때, 다른 칼이 그 칼을 가로막았다.

비담은 무희의 칼을 빙글 돌려 날려버렸고, 날아간 칼은 나카노에와 오오아마의 사이의 탁자에 제대로 꽂혔다. 음악은 멈추고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말았다.

왜국의 병사들이 수십개의 창으로 비담을 둘러싸며 겨누었지만 비담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며 비아냥거렸다.

"왜국은 사신 목에 칼을 겨누는 춤을 추는 것이 예의인겁니까?"

나카노에는 일어나서 큰 소리로 웃으며 무마하려했다.

"결례라고 느꼈다면 미안합니다. 사신을 다치게 할 리 없잖습니까? 왜국의 칼춤이 그만큼 정확하고 정교하다는 것을 보여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신라에는 이런 칼솜씨가 없는 모양입니다."

비담이 발끈하여 나서려는데 춘추가 비담의 옷깃을 잡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왜국의 검술이 무척 뛰어나다는 것을요."

하지만 나카노에는 불꽃이 번쩍번쩍 튀고 있는 비담의 눈을 보며 말했다.

"신라에도 검술이 무척 뛰어난 상대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어째서 오시지 않은 건지요?"

이번에는 춘추가 말리기도 전에 비담의 대답이 튀어나갔다.

"상대등 비담께서 이런 유치한 장난같은 검법을 구경하러 왜국까지 오시겠습니까?"

이번에는 나카노에게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대의 검법은 어느정도인지 보여주시게."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비담의 옷깃을 춘추가 잡은 것과 거의 동시에 나카노에의 옷깃을 오오아마가 잡았다.

오오아마는 술병을 들고 일어서서 춘추와 비담의 앞으로 가며 애교스럽게 웃었다.

"관습의 차이로 이해해주시기를 부탁드려요. 오오아마가 두분께 화해의 술잔을 올리겠어요."

오오아마가 비담에게 술잔을 따를 때 비담은 그에게서 이전에는 맡아 본 적이 없는 묘한 느낌의 향이 나는 것을 느꼈다.

 

숙소로 돌아온 비담과 춘추는 그들이 느낀 왜국의 정세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이전보다 점차 강성해지고 있고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서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나카노에와 오오아마에 대한 평은 서로 엇갈렸다.

"나카노에를 조심해야겠어. 신라를 우습게 알고 사신을 위협하잖아. 언제 쳐들어올 지 몰라."

비담의 말에 춘추는 픽 웃었다.

"진짜 조심해야 할 상대는 오오아마야."

"? 그 형의 뒤에만 숨어있는 겁쟁이 녀석을?"

"넌 그에게서 나는 향이 뭔지 알아?"

비담이 고개를 젓자 춘추는 약간 뜸을 들이다 말했다.

"나도 수나라에서 딱 한번 맡아봤는데... 가휘향이라고... 남자가 남자를 유혹할 때 쓰는 향이야."

"?"

"그러니까 넘어가지 말라고. 남자를 유혹해서라도 권력을 쥐려고 하는 무서운 아이니까. 나카노에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이 오오아마일거야."

춘추의 말에 비담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춘추의 말이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카노에와 오오아마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다면 왜국을 분열시킬 수 있을텐데."

춘추는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면서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왜 말린거야? 녀석의 콧대를 눌러놨어야 하는데."

으르렁거리는 나카노에에게 오오아마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그는 일개 호위무사이고, 형은 왜국의 일인자인데, 굳이 싸워서 득될게 없잖아."

"일개 호위무사? 그런 자가 다른 나라의 대전에서 겁도 없이 칼을 뽑아들겠어? 게다가 그 자가 날려버린 칼이 우리 식탁에 꽂혔잖아. 나를 도발한거라구."

오오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형말대로 분명 범상치 않은 자인데... 좀 더 알아보자구."

오오아마의 기억에도 지금까지 나카노에황자에게 감히 칼로 위협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보인건지 담력이 센건지."

오오아마는 새장속의 새에게 다시금 먹이를 주었다.

 

비담은 오오아마가 자신을 떠보기 위해 찾아올거라는 춘추의 예상이 맞아들자 놀랐지만, 태연한 척 그를 맞았다.

"저같은 미천한 자를 공께서 어찌 찾으신겁니까?"

오오아마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꺼냈다.

"저의 형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리려고요."

오오아마가 술병을 들고 술을 따르자 소매에서 지난번에 맡았던 가휘향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별 느낌이 없지만 계속 맡으면 그에게 덤벼들게 될껄.'

비담은 춘추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한번 오오아마를 차근히 훑어보았다.

하나하나 뜯어보니 그다지 눈에 띄게 예쁘지는 않았지만, 작고 귀여운 이목구비에 긴 머리와 화려한 옷과 화장에 가휘향이 더해서 여자에게도 남자에게도 느낄수 없는 독특한 느낌이 들었다.

춘추의 말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몽롱해지는 듯 하고 오오아마가 점점 야하게 보이는 듯 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듯 한 저 사람이 색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지고,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느낌이었다.

"저를 지켜 줄 호위무사를 찾고 있었는데... 신라에 이렇게 훌륭한 검사가 있었네요."

비담이 정신없이 자기 얼굴을 쳐다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오아마는 계속 생글생글 웃으며 술잔을 따랐다.

오오아마와 눈이 마주치자 비담은 저도모르게 당황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에취~에취~"

비담은 기침을 하며 소매로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여 고뿔에 걸린 모양입니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만 혼자 침소에 들까 합니다."

돌변한 비담의 태도에 오오아마는 뾰루퉁하여 술병을 들고 물러갔다.

비담은 소매 안쪽에 팔에 묶인 생강가루 주머니를 다시 한번 들이마셨다. 춘추가 가휘향의 해독에 필요할거라며 직접 팔에 묶어준 것이었다.

 

춘추는 오오아마의 행동은 예측했지만 자신의 처소에 기별도 없이 나카노에가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신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율령제도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나카노에는 빙글빙글 웃으며 춘추의 방에 허락도 없이 서슴없이 들어섰다.

춘추는 기분이 나빴지만 수나라에서도 자신의 권력만 믿고 무례한 행동을 했던 자들에게 익숙했던터라 표정없이 예의를 갖춰 안내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궁금하신 점이 무엇입니까?"

"신라는 백제와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율령을 반포하여 시행하고 있다고 들었소. 우리 왜국에도 율령을 반포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소.

헌데 문제는 율령을 반포한 후에 지키도록 하는 것이 문제요. 지켜지지 않을 율령을 반포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일단 율령을 전국에 널리 알리고, 각 고을의 막부들에게 율령을 지키도록 하는 책임을 주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경우에 그자에게 벌을 주면 됩니다. 왕이 일일이 나설 필요가 없지요."

춘추는 율령제의 시행 방안에 대해서 나카노에에게 조언을 했다.

"율령이 제대로 지켜지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오?"

춘추가 어떻게 대답하는지가 궁금해 죽겠다는 듯 턱을 고이고 춘추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집요하게 질문하는 나카노에에게 춘추는 오히려 눈을 마주보고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들을 감시하는 자를 파견해야지요. 그들이 공을 두려워한다면 제대로 보고를 할 것이고, 막부들을 더 두려워한다면 다른 말을 하겠지요."

나카노에는 허를 찔린듯 피식 웃었다.

"결국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거로군."

나카노에는 쩝 입맛을 다시며 춘추를 다시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예쁘장한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짱도 있는 듯 싶더니, 예의를 지키면서도 천연덕스럽게 할말은 다 하면서, 천하의 나카노에를 쥐었다 풀었다 하고 있었다.

나카노에는 춘추를 일단 적으로 돌리기보다는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아름답기에 곁에 두면 즐거울 뿐 아니라, 듣기 싫은 이야기도 듣기 좋게 해서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춘추를 잡아야겠다고 느낀 것은, 춘추가 신라의 다음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이었다. 춘추가 신라의 왕이 되면, 춘추의 마음에 따라 왜국의 동맹국이 하나 생길수도, 적국이 하나 생길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카노에는 춘추에게 다가오며 손을 잡았다.

"공의 조언이 도움이 되겠군요. 감사를 전하고 싶소."

춘추는 나카노에의 손길에 놀랐지만, 뿌리치지 않고 짐짓 무심한 듯 한마디를 던졌다.

저도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오오아마 황자는 왜 머리를 올리지 않았나요?”

뜬금없는 춘추의 말에 나카노에는 멈칫하며 눈쌀을 찌푸렸다.

"오오아마황자는 왜 혼인을 하지 않으시나요?”

춘추는 나카노에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것도 모르냐는 듯 놀리듯이 말했다.

"왜 아이를 갖지 않을까요? 황실의 후손을 늘려서 가신들에 대적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물어본 적 있으신가요?"

나카노에는 오오아마에 대해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사실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춘추를 놓아주고 자리를 떴다.

나카노에의 돌발행동에 당황하기는 춘추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손을 잡고 다가오는 바람에 놀라서 오오아마 이야기를 해버린 것이었다.

"이런, 패를 너무 일찍 알려줘버렸네. 더 아껴뒀어야 하는데."

춘추는 아까운 듯 쩝 입맛을 다셨다.

 

나카노에는 춘추가 이미 그와 오오아마의 사이를 눈치채고 있는 것에도 놀랐지만, 그보다 놀란 것은 춘추가 오오아마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에 놀랐다.

나카노에는 오오아마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오아아마는 어려서부터 나카노에를 졸졸 따랐고 나카노에가 소가 가문을 참살하고 실세가 되도록 지략을 짜서 그를 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오아마는 머리도 올리지 않고 여자에는 관심이 없고 나카노에하고만 잠자리를 했다. 나카노에에게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지만 오오아마는 늘 나카노에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오아마

?”

너는 혼인을 해서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

오오아마는 갑작스러운 나카노에의 질문에 의아해서 보았지만 이내 그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난 형만 있으면 돼. 형의 아이가 내 아이인걸.”

나카노에는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헌신한 오오아마를 의심하는 것이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춘추의 말이 머리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비담의 처소에 들어선 춘추는 방안에 진동하는 가휘향에 눈쌀을 찌푸렸다.

"오오아마가 뭐래?"

"뭐고 자시고... 가휘향때문에 정신이 어지럽던데?"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니가 가르쳐준대로 했지."

춘추는 오오아마의 행동을 예상은 했었지만 기분이 상해서 중얼거렸다.

"... 그형에 그동생이군."

"? 나카노에가 왔었어?"

비담의 날카로운 물음에 춘추는 아차 싶었지만 숨길건 없다 싶어서 이야기했다.

". 나한테 반했나봐. , 질투나?"

"아니, 질투는 무슨... 너가 뭐라고... 근데 그형에 그동생이라니..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

관심없는 척 하면서 꼬치꼬치 물어보는 비담에게 춘추는 약이 올라서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손을 잡던데."

"뭐야? 이자식이 감히 누굴 건드려?"

눈이 뒤집혀서 벌떡 일어나서 칼을 들고 나가려는 비담을 춘추가 당황해서 잡았지만 비담은 홱 뿌리쳤다.

춘추는 뒤에서 비담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아 그만해. 아무 일 없었어. 내가 그냥 당했을거 같아?"

그제서야 비담은 씩씩거리며 칼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놈들이 신라의 왕족을 뭘로보고... 감히 어디다 들이대?"

"어차피 그 둘을 갈라놓으려면 당분간 좀 더 들이대게 놔둬야 할것 같은데."

춘추는 비담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분간 너는 오오아마가 부르면 거절하지 말고 만나줘."

"너는 나카노에를 만나고? 그딴 수작 하려고 날 데리고 온거야?"

어이없어하는 비담에게 춘추는 냉정하게 말했다.

"목숨을 빼앗는 것만이 전쟁은 아냐. 마음을 빼앗는 것도 전쟁이지. 우리는 전쟁을 하고 있는거야. 정신 바짝 차려."

그때 신라로부터 타고 온 배의 선장이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항구에서 나카노에황자의 명 없이는 배에 오를수도 출항을 허가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춘추와 비담은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마주보았다.

"올때는 사신이었지만 이제는 볼모라는 말이군."

춘추가 쯧쯧 혀를 차며 말하자 비담이 말했다.

"밤에 몰래 배를 빼앗아서 돌아가면 되잖아."

"배를 하나 빼앗는다해도 신라의 배는 크고 속도가 느리니 다시 붙잡혀올껄."

"그럼 어쩌자는거야?"

"후일을 도모하고 방법을 찾아보자. 어차피 나카노에와 오오아마는 신라에 위협이 될 자들이니 미리 작업을 하고 돌아가는게 좋겠어."

춘추는 상 위에 놓인 백제산 찻잔에 차를 다시 채웠다.

 

비담은 내키지 않았지만 춘추가 하라는 대로 선물을 들고 오오아마를 찾아갔다.

"지난번에 몸이 좋지 않아 결례를 하였습니다."

오오아마는 뜻밖의 방문에 놀랐지만 환히 웃으며 비담을 맞았다.

"천만에요. 몸이 나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신라의 화랑이나 검술에 대해 궁금한게 많았는데 잘 오셨어요."

비담은 또다시 몸을 휘감는 가휘향에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면서도 짐짓 태연한 척 자리에 앉았다.

"저는 화랑도 아니고 검술도 보잘것 없는 일개 무사이옵니다."

슬쩍 물러서는 비담에게 오오아마는 생긋 웃으며 다시 매화주를 권했다.

"분명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었는데 계속 감추실건가요?"

"감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날 대전에서 오오아마 황자님이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나카노에 황자님에게 죽었을 것입니다."

비담의 칭찬에 오오아마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듯 웃으며 비담에게 더욱 바짝 다가 앉았다.

"정말로 제게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알려주실건가요?"

비담은 오오아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며 대답했다.

".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춘추는 나카노에를 찾아갔다.

"어찌해서 출항을 허락하지 않으신겁니까?"

"당연히 왜국의 영토를 떠날 때는 내 허락이 있어야 하오. 나는 그대와 함께 더 오래 있고 싶은데 공의 생각은 어떻소?"

춘추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카노에의 눈을 바라보았다.

"제게 마음이 있으신겁니까? 제가 여기 머무른다면 제게 뭘 해주실 수 있나요?"

춘추의 말에 나카노에는 다가가서 춘추의 어깨를 잡았다.

"그대가 왕위계승자라고는 하나 세력으로는 상대등 비담이 우위라고 들었소. 비담을 무찌를 군사를 내가 빌려주겠소."

"오오아마황자도 같은 생각일까요?"

"내 동생은 내 오른팔이나 다름 없으니 걱정할 것 없소."

그러나 춘추는 나카노에의 서선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오오아마황자는 제가 왕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아보이던데요. 오오아마황자에게 직접 제 뜻을 전하고 황자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오오아마는 비담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자 다가 앉아서 그의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몸이 정말 단단하시네요. 무사의 몸이군요. 저는 무예를 배운 적이 없어서 몸이 부드럽답니다."

그러면서 오오아마는 비담의 손을 자신의 몸으로 끌고 갔다.

비담은 어정쩡하게 몸을 뒤로 물렸지만 오오아마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며 비담의 손을 더욱 자신의 몸 안쪽으로 이끌었다.

오오아마의 숨결이 비담의 목에 느껴질 정도로 가까와졌을 때 갑자기 미닫이 문이 휙 열렸다.

나카노에는 방안으로 들어서서 비담의 무릎에 앉아서 그과 엉켜있는 오오아마를 보고 날카롭게 물었다.

"이자와 여기서 뭘하고 있는거지?"

오오아마는 당황해서 풀어진 옷매무새을 수습했다.

춘추는 뒤에서 그런 오오아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해하지 마, . 그자의 정체를 염탐하고 있었던 것 뿐이야. 분명히 그자는 실력이 뛰어난 단련된 무사이고, 왜국을 염탐하기 위한 비밀임무를 가지고 신분을 속이고 있는것 같아."

나카노에는 이마를 찡그렸다. 오오아마의 말을 믿었지만, 오오아마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안겨 있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고, 그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혜로운 혈육은 도움이 되면서도 불안한 존재이죠.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수 없으니까요."

춘추의 말이 다시금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나카노에는 어렸을 적부터 겁이 많고 자신에게 의지하던 오오아마를 떠올렸다.

"무서워 형... 소가가문이 우리를 반역죄로 몰아서 죽일거야. 어떡하지?"

소가가문의 대신들이 세를 과시하며 그들 형제를 위협할 때마다 울먹거리며 나카노에에게 매달리던 어린아이였다.

"걱정하지 말고 형만 믿어. 그자들을 모두 쓸어버릴테니."

나카노에가 안아주며 달랠때마다 안심한 듯 눈물을 닦으며 미소짓던 오오아마가 갑자기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너 아주 그녀석한테 푹 빠져있더라? 재미 좋았어?"

화를 억누르며 빈정거리는 춘추에게 비담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니가 시켰잖아. 난들 그녀석이 좋아서 그러고 있었겠냐?"

"받아주라고 했지 붙어먹으라곤 안했잖아."

"니가 빨리 왔어야지. 계속 달라붙는데 밀어낼수도 없고 어쩌라고. 그리고 내가 뭘하던 니가 무슨 상관인데?"

"여왕폐하를 연모한다면서 적국의 황자와 놀아나는게 신하의 도리야?"

"어쭈? 너는 혼인까지 하고 나카노에 녀석을 홀려보려고 꼬리치고 다니면서 뭐?"

비담과 춘추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서로 씩씩거리며 노려보았다.

"관두자. 우리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거니."

침묵을 깨고 춘추가 말했다.

"그래. 뭐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고. 니가 그런 녀석인거 하루이틀일도 아니고."

끝까지 빈정거리는 비담을 춘추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내 기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신라의 신하라는 것만 잊지 말자. 여왕폐하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만 기억해."

비담은 풀이 죽은 춘추를 보자 마음이 약해져서 괜히 다시 성질을 냈다.

"그니까 빨리 신라로 돌아가자니까. 여기서 뭐하는 짓이야. 고생만하고."

춘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나카노에와 오오아마 정도는 쉽게 요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담이 얽혀들어가니 춘추는 자신이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며칠 후 춘추는 나카노에의 사냥에 초대되었다.

"사냥과 같이 위험한 행사에 초대한다는 건 필시 함정이 있을거야. 조심해."

비담의 말에 춘추는 골똘히 생각끝에 말했다.

"함정에 빠뜨리려는 사람이 과연 너일까 나일까?"

"당연히 너 아니겠어? 나같은 일개 무사를 함정에 빠드려서 뭘하겠어."

그러나 춘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난번 일로 나카노에가 너를 벼르고 있을거야. 나는 걱정하지 말고 너나 조심해."

 

말에 오를 준비를 하는 춘추에게 나카노에가 다가왔다. 등에는 화살통을 메고 칼로 무장한 나카노에와 달리 춘추는 빈손이었다.

"사냥을 가면서 무기도 챙기지 않고 오다니요."

"어차피 다룰 줄 모르니 짐이 될 뿐입니다. 도망가려면 몸이라도 가벼워야죠."

춘추는 어깨를 으쓱 하며 농치듯이 대답했다. 나카노에는 껄껄 웃으며 춘추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요즘같은 이른 봄에는 멧돼지가 굶주려있어 흉폭하기로 유명하니 조심해야 합니다. 내게 바짝 붙어있는 것이 좋을거요, 춘추공."

나카노에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춘추는 말없이 목례로 답했다.

비담은 열이 확 받았지만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오오아마가 춘추와 나카노에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춘추는 나카노에와 함께 앞서나갔고, 비담은 자연스럽게 뒤로 처진 오오아마에게 다가갔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오오아마는 복잡한 표정이었지만, 비담이 말을 걸자 이내 표정이 밝아 졌다.

"지난번에는 결례를 하였네요. 갑자기 형이 오는 바람에 술자리를 급히 파하게 되었네요."

"아닙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제가 술을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담의 말에 오오아마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생긋 웃었다.

"불러만 주신다면 오오아마는 언제든 좋아요."

그때 풀숲에서 갑자기 산처럼 거대한 멧돼지가 뛰쳐나왔다. 멧돼지에게 놀란 말이 오오아마를 떨어뜨렸고, 멧돼지는 다시 흙먼지를 일으키며 난폭하게 오오아마를 향해 달려왔다.

오오아마가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순간, 비담이 쏜 화살이 날아와서 멧돼지에게 박혔다. 폭주한 멧돼지가 오오아마에게서 돌아서자, 비담이 다시 검을 빼들고 멧돼지에게 올라타서 급소를 찔렀다. 멧돼지는 비명을 지르며 큰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비담은 얼굴에 튄 멧돼지의 피를 쓱 닦고 오오아마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피묻은 손을 옷에 슥슥 닦고는 손을 내밀어 오오아마를 일으켜주었다.

오오아마는 놀라서 얼이 빠져 덜덜 떨면서 비담에게 기댔다. 비담이 오오아마의 등을 쓸어주며 안심을 시키고 있을 때, 나카노에와 춘추가 말을 달려 도착했다.

"무슨일인가."

나카노에의 날카로운 물음에 비담이 멧돼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멧돼지가 오오아마황자를 공격하여, 제가 잡았습니다."

나카노에는 말에서 내려 죽은 멧돼지를 살펴보았다.

"특이한 검법이로군. 신라 화랑이 쓰는 호국검법이 아닌데. 어디서 배운 검법인가?"

나카노에는 비담에게 다가갔다.

"칼자국이 이렇게 반대방향으로 나려면 검을 어떻게 잡는지 궁금하군."

나카노에는 칼을 뽑아 비담의 목을 겨누었다.

"그대가 바로 역검을 쓴다는 상대등 비담이었군. 그대의 검법을 보여주게."

오오아마는 놀라서 비담을 쳐다보았다.

"상대등 비담? 그대가?"

오오아마는 나카노에에게 말했다.

", 이분은 나를 구해주었으니 예를 갖춰줬으면 해."

그러나 나카노에는 오오마아의 말을 무시하고 기분나쁜 듯 비담에게 말했다.

"신분을 속이고 왜국에 온 것 부터가 첩자노릇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뭐겠는가? 어서 칼을 뽑으시게."

춘추가 입을 떼려는 순간, 비담이 손을 들어 막고 먼저 말했다.

"상대등 비담, 나카노에황자에게 인사드립니다. 어차피 저도 나카노에 황자의 무공을 보고 싶었습니다. 황자의 무공은 신라에까지 소문이 났으니까요."

비담은 말없이 자신에게 안겨있는 오오아마를 떼놓고 허리에서 칼을 뽑았다. 비담의 칼은 가볍고 길이가 짧았지만, 나카노에의 칼은 길이가 길고 무거웠다. 비담의 공격이 번번이 나카노에의 칼에 막힌 반면에 나카노에의 칼은 위협적으로 비담의 몸에 가까이 갔다. 나카노에의 칼이 움직일 때마다 칼끝에 비담의 옷에 칼자국이 났다. 마침내 십여합만에 나카노에의 무거운 칼에 비담의 칼이 부러지고 말았다.

나카노에는 비웃듯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까지가 한계로군. 신라의 검술이나 신라의 칼이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더니."

비담은 분한 듯 나카노에를 노려보았지만 춘추는 서둘러 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역시 나카노에 황자의 검술은 듣던대로 대단하십니다. 상대등이 나카노에 황자의 무공과 비견될 것을 걱정하여 신분을 속인 것이니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춘추의 말에 나카노에는 기분이 좋은 듯 웃었지만, 비담을 어찌 처리할지 잠시 고민했다. 꼬투리를 잡았는데 이대로 곱게 비담을 놓아주기에는 뭔가 아쉬운 면이 있었다.

그때 오오아마가 다시 나섰다.

"상대등이 다른 마음을 먹고 왜국에 왔다면 나를 구해줬을 리가 없잖아."

나카노에는 오오아마를 의미심장하게 보더니 말없이 뒤돌아서서 자신의 말에 올랐다.

 

"비담을 시험하려고 멧돼지를 풀어놓은거야?"

신경질적으로 묻는 오오아마의 질문에 나카노에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비담이 자신의 무술실력을 발휘하지 않았겠지."

오오아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는 나카노에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화를 참으며 다시 말했다.

"그의 실력이 보잘것 없었다면 내가 죽을수도 있었겠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했어?"

"그자가 실력을 감추고 있다는 건 네 생각이었잖아. 나는 부하들에게 비담에게 멧돼지를 몰아보내라고 했을 뿐이야. 네가 그자와 같이 있을 줄 몰랐지. 어째서 늘 둘이 붙어다니는거야?"

오오아마는 오히려 따지듯이 묻는 나카노에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자들을 언제까지 여기 잡아 놓을 생각이야? 신라에서 그들을 돌려보내라는 전갈이 계속 오고 있는데."

나카노에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서 비담과의 결투로 인해 생긴 검날의 상처들을 쓸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돌려보내지 않으면 이를 구실로 김유신이 쳐들어 올 수도 있으니 보내긴 해야겠지. 우선 한명만 보내주고... 상황을 지켜보자구."

오오아마는 나카노에가 춘추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고, 김춘추를 어서 나카노에와 떼어놓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생각엔 신라는 비담이 실세를 잡고 있으니 김춘추는 돌려보내서 비담이 없는 틈에 세력을 키우도록 하는게 좋을것 같아. 둘의 세력이 갈라져서 다투도록 해야 우리한테 좋을테니."

그러나 나카노에는 춘추를 계속 옆에 두고 싶었다.

"글쎄... 내 생각엔 김춘추를 잡아두고, 그 사이에 춘추를 후계자로 밀고 있는 여왕을 비담이 몰아내고, 왕이 되도록 비담을 부추켜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나서 김춘추가 다시 반란을 일으킨 비담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우리가 군대를 보내서 춘추를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서 신라를 먹는 것이 좋겠어."

오오아마는 나카노에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춘추에게 집착하는 것을 알게 되자,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손앞에 있던 꽃병을 집어서 벽에 던져 버렸고 꽃병은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나카노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오오아마를 바라보았고 밖에 있던 시종도 놀라서 달려왔다.

 

 

"오오아마황자님이 많이 놀라셨나봅니다. 저때문에 다투신건 아니겠지요?"

"그대의 귀에까지 들어간건가?"

나카노에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왜의 궁 한가운데서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정보를 입수하는지 춘추의 수완에 혀를 찼다.

"한번도 다툰 적 없는 의좋은 형제사이에 고성이 오간 것이 처음이니까요."

춘추는 나카노에를 위로하듯 다가가서 팔에 살풋이 손을 올렸다.

"결속을 위해서는 혼례만한 것이 없지요. 따님을 오오아마에게 시집보내서 그를 감시하고 그의 아이를 낳게 하면 공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듣자하니 우노노사라라 왕녀가 가장 영특하다고 하던데요."

"그 아이는 이제 겨우 13살인데... 아이나 낳을 수 있을까"

나카노에는 눈썹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빨리 2세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오아마의 지략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재원을 보내지 않으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노노사라라는 어렸지만 언니들보다 눈치도 빠르고 언변이 뛰어났다. 춘추의 말대로 그녀라면 오오아마를 잘 설득할 수도 있고, 오오아마의 심리를 빨리 파악하여 정보를 줄 수 있을것 같았다.

"내 딸 4명을 모두 오오아마에게 보내면 되겠군. 어느 딸이라도 빨리 후손을 낳으면 그만이니."

나카노에의 말에 춘추는 어이가 없어서 미소만 빙긋 짓고 말았다.

 

나카노에는 우노노사라라를 포함한 자신의 4명의 딸들과 혼인할 것을 오오아마에게 명했다.

"어째서 나를 혼인시키려는거야? 내겐 아내는 필요 없어. 내게 필요한 사람은 형 뿐이야."

오오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카노에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나카노에는 냉랭하게 말했다.

"너도 이젠 후사를 보아서 황실의 인원을 늘려야 하지 않겠니? 내 딸들과 결혼해서 내 자식들을 늘려주는 게, 네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이야."

나카노에의 뒷모습을 보며 오오아마는 분을 참지못해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고 춘추에게로 향했다.

"네가 감히 형과 내 혼사를 논해?"

춘추는 개의치 않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오지랍이 넓어 형제의 의를 돈독히 하기 위해 중매를 선 것 뿐입니다. 제게 고마와할 줄 알았는데... 형의 눈치를 보느라 혼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요?"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춘추는 오오아마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사실은 형을 죽이고 왕이 되고 싶지?”

춘추의 말에 오오아마는 차갑게 대꾸했다.

웃기지 마. 난 너같이 권력에 눈이 먼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춘추는 개의치 않고 오오아마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형의 노리개가 되는 것만이 너의 목숨을 지키는 방법이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형의 등에 칼을 꽂을 생각인거야."

"네가 아무리 우리를 이간질하려고 해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어. 우리 형제는 한배를 탄 운명이야."

"하지만 언제까지 형이 널 좋아해줄까. 형의 아들은 커서 왕이 될테고 너는 늙어가는데.”

분해서 쌕쌕거리는 오오아마에게 춘추는 한걸음 다가가서 그의 귀에 속삭였다.

"오오아마, 내가 너의 욕망에 날개를 달아줄께. 난 네 욕망이 마음에 들어."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오오아마에게 춘추는 다시 귓속말을 했다.

"다른 왕녀들은 몰라도 우노노사라라는 아버지를 버리고 네 편이 될거야. 그애 역시 너 못지 않게 권력을 탐하니까."

오오아마는 자신을 보며 웃는 춘추의 웃음에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문을 홱 닫고 나왔다.

"김춘추... 이대로 두면 안되겠어."

오오아마는 이를 으드득 갈며 다짐했다.

 

오오아마는 춘추를 공격할 약점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춘추의 정적인 비담을 이용하는 것이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오오아마가 지금까지 둘을 지켜본 바로는 춘추와 비담은 정적이라기에는 이상한 관계였다. 늘 서로 의견이 안맞아 노려보며 티격태격하는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둘이 서로 공을 다투거나 권력을 다투는 느낌은 아니었다. 서로의 뒷통수를 노리면서 발톱을 감추는 관계라기 보다는, 어린애들끼리 투닥거리며 싸우고 노는 느낌이었다.

춘추가 왕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해보였지만, 비담은 그런 춘추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꺾어버릴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것은 춘추를 후계자로 삼은 신라여왕을 비담이 연모하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얘기했지만, 오오아마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비담이 같이 있을 때 춘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나, 나카노에가 춘추와 함께 있는 것을 보는 비담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을 떠올린 오오아마는 손가락을 딱 울리며 킥킥거리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랬었군. 어디 너도 똑같이 당해봐라, 김춘추."

 

"형은 상대등과 김춘추를 대립시켜 신라를 분열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무슨말이냐는 듯 보는 나카노에에게 오오아마는 손을 뻗어 창밖의 복숭아나무 가지에 핀 도화꽃을 쓸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둘이 서로 죽고 못하는 사이 같은데?"

"무슨 소리야? 상대등 비담이 여왕을 연모하는 것이 여기 왜국까지 소문이 자자한데 "

의심스러워하는 나카노에에게 오오아마는 도화꽃 가지를 꺾어 빙글빙글 돌리며 향기를 맡았다.

"직접 알아보면 되잖아?"

 

춘추는 늘 자신을 따로 불러서 만나던 나카노에가 어째서 비담과 같이 자신을 불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술상이 차려진 방안에는 나카노에 뿐 아니라 오오아마가 와 있었다.

나카노에는 춘추에게 연거푸 술을 따랐고 비담은 그런 나카노에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도 말이 없는 가운데 방안에는 이유없이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술이 서너잔 돌고 나서 나카노에는 비담을 도발하듯이 보며 춘추에게 말했다.

"춘추공이 왕이 되면 상대등의 세력을 춘추공이 다스릴 수 있겠소이까? 나는 왕권에 대항하는 소가가문을 몰살시켰소. 상대등의 세력이 왕을 능가하는데, 상대등을 쳐내지 않으면 그대는 상대등의 허수아비가 될 뿐이오. 그럴 수 없다면 신라는 상대등에게 넘겨주고 여기서 나의 신하가 되어 지내는 것이 어떻겠소?"

노골적인 나카노에의 말에 비담이 어이없어하며 입을 열려는 순간, 춘추가 먼저 말했다.

"상대등은 신라의 충성스러운 신하이며, 권력에 대한 욕심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카노에는 춘추의 말을 듣지 않고 비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김춘추를 여기 남겨둔다면, 상대등은 신라로 돌려보내주겠소. 그것이 그대를 위해서도 신라를 위해서도 더 좋지 않겠소?"

나카노에는 춘추의 팔을 잡아 확 끌어당겼고 춘추는 바람에 날려가는 꽃잎서럼 나카노에의 품에 끌려들어갔다.

비담은 마치 금방이라도 화산이 폭발할 듯이 뛰쳐 일어나 나카노에의 멱살을 잡아 날릴 기세였지만, 춘추는 제발 참으라는 듯 애원하는 눈빛으로 비담을 보며 고개를 저었고, 오오아마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듯 가소로운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무거운 정적을 깨고 비담이 말했다.

"신라는 여왕께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일개 신하로서 답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희는 더이상 머물 계획이 없고 사신으로 왔으니, 이제 신라로 돌려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답할 수 없다.... 김춘추는 내 뜻대로 해도 상관 없다는 말인가?"

나카노에는 더욱 춘추를 품으로 바싹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카노에의 입술이 춘추의 귓볼을 지긋이 깨물었다. 후우 한숨을 몰아쉬며 분노를 삭이는 비담을 비릿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나카노에에게 춘추가 말했다.

"저는 황자님과 이곳에서 지내는 것도 좋습니다. 비담공이 신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출항허가증을 주시지요."

다들 놀라서 춘추를 보았지만 춘추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카노에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비담은 거칠게 의자를 콰당 밀치고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오오아마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두사람을 노려보다가 이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나카노에는 춘추를 보며 물었다.

"무슨 속셈이지? 그대가 왕좌를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비담을 연모하여 그를 살리기 위해서인가?"

"왕좌를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죠."

춘추는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춘추는 깨진 그릇이며 부서진 가구들로 난장판이 된 비담의 방안으로 들어서며 비담에게 나카노에가 써 준 출항허가증을 내밀었다.

"일단 이걸 가지고 먼저 배를 타고 있어. 난 오늘 밤에 알아서 뒤쫒아 갈께."

"나케노에가 널 보내줄 것 같아? 그 자식이 안아주니까 좋냐?"

화가 나서 죽일듯이 노려보는 비담에게 춘추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질투하는거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께."

춘추의 말에 비담은 기다렸다는 듯이 울분을 쏟아냈다.

"질투 좋아하네. , 너 신라의 왕이 되겠다면서 무식한 오랑캐녀석에게 아양이나 떨고, 신라의 국격을 그렇게 떨어뜨리고 다녀도 되는거야? 완전히 나라망신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 너 왕족이 그렇게 천박하게 행동하고 다닐 수가 있냐?"

춘추는 말없이 비담에게 다가가서 그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비담은 얼어붙은 듯 있다가 춘추의 손을 홱 뿌리치고 노려보았다.

하지만 비담은 이내 다시 춘추의 허리를 안고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뿐이야, 비담. 알잖아."

춘추의 숨가쁜 속삭임에 비담은 이를 갈며 말했다.

"뻥치지 마. 너같이 헤픈 녀석한테 속을 줄 알아?"

그러나 말과는 달리 비담은 춘추를 침대에 쓰러뜨렸다.

"너같은 녀석은 진짜 혼나야 돼."

옷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비담의 손길에 춘추는 신음을 흘렸다.

"어서 혼내줘. 빨리."

 

날이 어두워질 무렵 오오아마는 자신을 방문한 춘추에게 질투를 숨기고 비아냥거리며 약을 올렸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그렇게 잘난척 하더니만."

춘추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신라로 돌아가길 바라지?"

오오아마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말했다.

"휴전 제의인가?"

춘추는 오오아마를 보며 차갑게 미소지었다.

"나하고 전면전을 하고 싶지 않으면 내가 신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는게 좋을거야."

오오아마는 먼곳을 보며 딴전을 피웠다.

"글쎄... 형이 너를 보내주고 싶어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나서겠어."

춘추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보내주지 않으면, 나도 계속 네 형에게 눌러붙어서 왜국의 정치에 관여할 수 밖에 없어."

그제서야 오오아마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씰룩거렸지만 이내 마지못해 대답했다.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네 가마를 빌려줘."

오오아마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시종을 불러 가마를 대령하라고 일렀다. 춘추는 나가다 말고 뒤돌아서며 말했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 신라는 언제든 너와 손잡을 생각이 있어, 오오아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춘추는 오오아마의 가마를 타고 무사히 궁을 빠져나와 비담이 기다리고 있는 배에 올라탔다.

비담과 춘추가 신라로 돌아간 후, 오오아마는 나카노에의 4명의 딸과 차례로 결혼하였고 그중에는 우노노사라라 왕녀도 포함되었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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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춘추는 정계에 나서지 않고 여전히 한가로이 풍류에 젖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서라벌 세력가들의 여식들이나 부인들과 청유를 다니거나 잔치를 열어 사람들을 불러모아 구경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미 보량궁주와 혼인했지만 아름답고 다정하면서 예의바르고 말솜씨가 뛰어난 춘추에게 많은 서라벌 여인들이 반해있었다.

보량은 늘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춘추가 걱정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춘추가 그들의 마음을 얻을 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들리는 이야기는 보량으로서도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춘추가 유신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유신의 여동생 보희를 자주 만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여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보량은 신경이 쓰였다.

공께서 유신공의 여동생 보희와 자주 어울리신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보량이 어렵게 꺼낸 말에 춘추는 아무일 아니라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보희는 유신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우연히 같이 본 것 뿐입니다. 우리가 혼인하던 날 내가 하던 말 기억하십니까.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믿고 따라주겠느냐 했지요. 부인께서는 그러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게는 부인 외에 다른 여인도 다른 아내도 없을 것입니다.”

보량은 춘추의 속을 알 수 없었지만 춘추가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유신의 골치를 썩이고 있는 것은 보희보다도 둘째 여동생 문희였다. 춘추가 유신을 보러 온다는 핑계로 뻔히 유신이 집에 없을 시간에 드나들며 여동생들을 만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희는 몸가짐이 바르고 수줍어서 춘추가 집에 찾아와도 인사만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지만, 문희는 춘추에게 떨어질 줄 몰랐다. 뿐만 아니라 춘추가 청유라도 간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가 있는 곳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여동생이 혼인을 한 남자와 가까이 지낸다는 소문이 나는 것은 자존심 강한 유신으로서는 부끄러운 수치였다. 아무리 문희를 혼내도 문희는 아랑곳 하지 않았고, 마침내 참다 못한 유신은 춘추에게 말했다.

춘추공께서는 혼인을 하신 몸으로 어찌 문희를 가까이 하시는 것입니까. 남부끄러운 일이니 저희집에 찾아오시는 것을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춘추는 도리어 유신에게 부탁했다.

문희가 나를 쫒아 다니는데 내가 피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유신공께서 문희를 잘 타일러 주시지요.”

유신은 부끄러움과 분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유신은 문희를 불러 진지하게 타일렀다.

이미 혼인을 한 춘추공을 쫒아다니다니 네가 어찌 가문에 먹칠을 하려 드느냐.”

그러나 문희의 결심은 굳었다.

춘추공은 왕위에 오르실 분입니다. 왕이 되시면 어차피 후궁들을 두시게 될텐데 한시라도 빨리 인연을 맺어 장자를 얻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유신은 화를 내며 문희를 꾸짖었다.

폐하께서 계신데 어찌 그런 불경한 말을 하는 것이냐. 그리고 네 어찌 왕족의 피가 흐르는 몸으로 후처의 자리로 가려 하는 것이냐.”

문희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차 왕의 어미가 될 수도 있는 자리가 아닙니까. 그리고 오라버니, 춘추공께서도 우리 가문과 혼인을 하실 요량이시니 우리집에 자주 드나드시는 것입니다.”

춘추공은 네게 관심이 없다고 하셨다. 소용없는 일이니 더 이상 공을 귀찮게 쫒아다니지 말거라.”

문희도 알고 있었다. 춘추가 유신의 가문과 혼인을 위해 관심을 두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언니 보희였다.


춘추는 유곽에서 기다리겠다는 보희의 서찰을 받고 염종의 유곽으로 향했다. 그러나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보희가 아니라 문희였다.

보희언니가 아니라 실망하셨습니까.”

문희는 물음에 춘추는 대답없이 웃을 뿐이었다.

공께서는 어째서 저보다 언니를 취하려 하시는지요. 제가 언니보다 미모나 지혜나 여인으로서의 성품이 떨어진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대처럼 총명하고 용기있는 여인은 내게는 과분하오.”

춘추는 다정하지만 뼈가 있는 말투였다.

저를 공의 뜻대로 다스리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문희는 굴하지 않고 춘추에게 거듭 자신을 받아주기를 청했다.

공께서는 사랑할 여인이 아니라 충성스런 신하를 원하고 계신 듯 합니다. 제가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면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결코 공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따를 것입니다. 보량궁주를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황후로 삼으신다 해도 따를 것입니다. 저희 가문과 유신 오라버니가 공을 주군으로 섬기도록 만들 것입니다.”

문희의 당돌한 말에 춘추는 제법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몇 달 후 유신은 문희가 춘추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어머니의 말에 펄쩍 뛸듯이 놀랐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어찌하겠느냐. 춘추공에게 후처로라도 문희를 시집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어머니의 성화에 유신은 하는 수 없이 춘추를 찾았다.

문희가 춘추공의 아이를 가졌으니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춘추는 유신의 속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말했다.

문희가 사정하여 하루밤 같이 보낸 것 뿐입니다. 게다가 난 이미 병부령 설원공의 가문과 혼인을 한 몸입니다. 보량궁주 외에 다른 여인을 맞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보량궁주는 제가 설득할 수 있지만 설원공과 한 가문간의 약조와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유신은 상처받은 자존심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비담은 춘추가 요즘 유신에게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을 아는 터라 춘추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랐다.

어쩐 일이야? 하루걸러 하루씩 유신의 집에 드나든다더니만…”

아무래도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왔어.“

춘추는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문희가 내 아이를 가졌어.”

?”

문희와 혼인을 해야겠는데 설원공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꺼야.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유신과 설원공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비담은 어이가 없어서 킥킥 웃었다. 이미 혼인한 춘추였지만 그가 여인과 관계를 갖고 마음을 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아프게 느껴졌다.

내가 왜 네 도둑결혼을 도와줘야 하는데?”

춘추는 삐딱하게 웃는 비담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내가 문희를 취해서 유신을 내 사람으로 만들면… 폐하의 곁에는 너만 남게 되잖아. 안그래?”

그래서 네가 문희와 혼인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싫어?”

싫을 이유가 없었다. 없어야 했다. 그러나 비담의 마음은 생각과 달리 자꾸만 무겁게 가라앉아갔다.

춘추는 대답없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 비담을 바라보다 그에게 물었다.

넌 폐하랑 잘 지내?”

응 뭐… 폐하께서 워낙 바쁘시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야기하는 비담을 바라보는 춘추의 마음도 아려왔다. 비담이 덕만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비담이 덕만과 잘 되는 것도 싫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고 무엇 때문에 비담을 찾아왔는지도 잊어버렸다.


유신의 집에 비담과 염종이 찾아왔다. 유신은 그들을 위해 술상을 봐오도록 했다. 셋은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염종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유신공..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뭘 말인가?”

이미 온 저자거리에 소문이 났습니다. 문희낭자께서… 춘추공의 아이를…”

유신은 수치심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염종은 유신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유신공께서 춘추공에게 문희를 받아달라고 사정사정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닥치시오!”

유신은 눈이 뒤집힐 듯 흥분하여 칼을 뽑아들었다.

문희는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으니 죽어 마땅할 것이외다. 내 손으로 직접 벨 것이오.”

비담은 문희의 방으로 향하는 유신을 막아서고 칼을 뽑아든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진정하게, 유신. 자네가 문희를 벤다고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겠나.”

옆에서 염종도 거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화형을 시키시면 모를까… 뭐… 그러면 아무도 감히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못하겠지요.”

염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신은 하인을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당장 마당에 커다란 장작불을 피우거라! 그리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라!”


덕만은 병부령 설원공과 함께 신라군의 군사훈련 현황을 시찰하고 궁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덕만은 가마의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유신공의 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화재가 난 것이냐?”

놀란 덕만의 물음에 신하는 대답했다

알아보고 오도록 하겠사옵니다.”

덕만은 가마를 멈추도록 하고 가마에서 내려 연기가 피어오르는 유신의 집을 바라보았다.


몰려든 사람들을 헤치고 덕만의 일행이 유신의 집 마당에 도착했을 때는 문희를 장작불에 던지려는 유신을 비담이 간신히 말리고 있었다. 유신은 덕만을 보고 흠칫 놀라 예를 갖추었다.

대체 무슨 일이요. 공의 여동생인 문희를 불태워 죽이려 한다니.”

덕만의 물음에 유신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희가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기에 단죄하려 한 것이옵니다.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혀드려 송구하옵니다.”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덕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춘추를 바라보았지만 보량이와도 그런식으로 혼인한 춘추였기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덕만의 군사훈련에 춘추가 따라나선 것도 미리 계산된 일인 듯 했다. 덕만은 유신에게 말했다.

유신공의 마음은 알겠으나 그런 일로 공의 여동생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은 가엾은 일이오. 춘추가 문희와 혼인을 하면 되지 않겠소.”

그말을 듣자 설원공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때까지 남의 일인 양 잠자코 있던 춘추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하오나 저는 이미 병부령의 여식인 보량궁주와 혼인한 몸입니다. 다른 가문과 혼인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설원공은 춘추의 말에 다소 안도하며 다시 덕만을 바라보았다. 덕만은 춘추의 마음을 읽기 위해 잠시 춘추의 눈을 바라보았지만 희미하게 웃고 있는 춘추를 보고 이내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병부령. 아무래도 그대가 양해를 해주어야 할 듯 하오. 춘추가 문희를 후처로 맞아들일 수 있도록 허락해주겠소? 내 친히 그대에게 부탁하리다. 문희의 뱃속에 있는 아기는 왕족이며 내 조카손주이기도 한데 이대로 불에 타죽도록 할 수는 없소.”

비담도 설원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문희는 후처일 뿐 황후의 자리는 보량궁주의 것이 될 테니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폐하의 명이니 받아들이시지요.”

설원은 하는 수 없이 춘추와 문희의 혼인을 허하였다.


여왕폐하께서 문희와의 혼인을 명하시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구료.”

춘추의 말에 보량은 눈물을 글썽였다.

저 이외의 여인은 없을 것이라 하셨는데 어찌 문희가 공의 아이를 가진 것입니까. 어찌하여 저를 속이신 것입니까. 처음부터 문희에게 마음이 있으니 후처로 들이고 싶다고 하셨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서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부인과의 약조를 지키고 싶었소. 비록 문희에게 잠시 끌렸다 하나 그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혼인을 할 마음은 없었기에 문희를 받아달라는 유신의 청을 거절했소. 폐하의 앞에서도 내가 혼인할 수 없다고 말씀드린 것을 그대도 알고 있을 거요. 내 비록 폐하의 명으로 문희와 혼인하지만 앞으로도 당신은 내게 가장 소중한 여인일 것이오.”

춘추의 말에 보량은 그제야 눈물을 닦고 춘추의 품에 안겼다.


설원공과 보량을 달래어 무사히 치르게 된 춘추와 문희의 혼례식은 간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춘추와 문희가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던 중 문희가 비담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비담공의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춘추공과 혼인까지 하게 되었으니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비담은 비릿하게 웃을 뿐이었다. 춘추도 그들에게 다가왔지만 비담도 춘추도 둘 다 굳은 얼굴로 말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느낀 염종이 헤헤 웃으며 춘추에게 말했다.

비담공께서는 아직도 혼인을 못하고 있는데 춘추공께서는 두번이나 혼인을 하십니다그려. 비담공도 혼인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지요.”

대답이 없는 춘추 대신 문희가 웃으며 답했다.

힘이 닿는 한 그리 할 것입니다.”


며칠 후 춘추는 비담의 집을 찾았다. 자신을 경멸하는 듯 한 비담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었다.

고마워. 네 덕분에 유신의 가문과 혼인을 하게 되었어.”

비담은 무뚝뚝하게 춘추를 흘낏 볼 뿐 말이 없었다. 춘추는 다시 비담을 떠보았다.

이제 이모님 곁에는 너뿐이니 잘해봐.”

비담은 여전히 냉랭하게 말이 없었고 춘추는 비담에게서 뭐든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슬쩍 찔러보았다.

근데 넌 폐하와 맨날 일만하고 회의만 하면서… 그게 무슨 연모라고 할 수 있냐.”

그제야 비담은 불끈 하며 춘추를 돌아보았다.

그럼 니가 하고 있는 건 연모냐? 보량이와 문희를 가문을 보고 꼬셔서 혼인하는 거… 그게 연모야?”

“… 말했잖아. 내가 연모하는 건 너뿐이야.”

까불래? 니가 만나는 여자마다 그 말 하고 다니는 거 모를 줄 알아?”

난 언제나 너한테만은 진심을 이야기했어. 네가 믿지 않는 것 뿐이야.”

춘추는 조용하면서도 슬픈 어조로 말했지만 비담은 여전히 비아냥거릴 뿐이었다.

아 그래? 근데 어떻게 연모를 둘로 나눌 수가 있냐? 아니 넌 네가 편할대로 셋으로도 넷으로도 나누잖아.”

나눈적 없어.”

관두자.”

비담.”

춘추는 비담의 손을 잡았지만 비담은 매정하게 뿌리쳤다.

더러워.”

비담은 왜이렇게 가슴이 부글부글 끓는 것일까 생각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책상위에 있던 꽃병이 떨어져 산산조각 나며 깨졌다.

정말로 내가 왜 문희와 혼인을 해야했는지 모르는거야? 가야계 세력을 안심시키고 가야계와 신라계로 분열된 나라를 통합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너는 왜 폐하가 국혼을 안하시는지, 왜 너를 가까이하지 않으시는지, 내가 왜 보량이와 문희와 혼인을 해야 했는지, 정말 아무것도 이해가 가지 않아?”

춘추의 눈에서는 차가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담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 잘난 대의니 뭐니 하는 말 하려거든 집어치워.”

그래. 그 잘난 대의… 네가 한마디만 해주면… 나도 다 버릴 수 있어.”

춘추는 비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을 듯 손을 뻗었지만 비담이 또 뿌리칠까 차마 잡지 못하고 내렸다.

너만 나를 좋아해준다면… 다 버릴 수 있어. 폐하를 연모해도 좋아. 하지만 나도… 좋아해줘.”

비담은 춘추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마음을 다잡고 비꼬았다.

난 너처럼 연모를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그렇게까지 연극하지 않아도 너를 적으로 돌리지는 않을 테니 걱정마.”

네가 날 믿지 않아도… 난 네가 좋아.”

춘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깨어진 꽃병조각을 집어들고 자신의 손목에 내리쳤다. 붉은 피가 춘추의 손목에서 솟구쳤고, 비담은 놀라서 춘추의 팔을 잡았다.

무슨 짓이야?”

비담은 손목의 피가 멎도록 꽉 눌러 잡고 춘추를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피를 멎게 하는 약재를 찾아와 춘추의 손목에 바르고 천으로 단단히 감아주었다. 춘추는 창백해진 얼굴로 뭔가 말하려는 듯 자신을 치료해주는 비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도 내 진심을 못 믿겠어?’

비담은 그런 춘추를 기가 막힌 듯 보았지만, 힘없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그를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천천히 안아주었다.

그래. 진심이 아니더라도 또 속아 줄께.’

춘추는 비담이 자신을 안아주자 피곤한 듯 그의 어깨에 기대며 그제서야 편히 눈을 감았다.

정말 감당이 안되는 녀석이야.’

비담은 이렇게 생각하며 며칠째 가슴에 맺힌 답답한 응어리를 풀기 위해 다시 한번 깊이 숨을 내쉬었지만, 춘추를 가만히 안고 있노라니 무엇 때문에 춘추에게 화가 났었는지도 점차 잊어갔고 화가 났었다는 사실조차도 아득하게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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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르가 내일 입대하는군요

건강하게 잘 다녀오고 빨리 다음 작품을 시작했으면 좋겠네요


부모님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미모로 여인들을 유혹한다는 점에서 춘추는 서라벌 판 나쁜남자 인 듯...

선덕여왕 40회에서 춘추가 부군으로 나서기 위해 밤에 미실을 찾아가는 장면임


“어느게 먼저 생길까? 여자임금? 아니면 진골임금?”

춘추가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비담에게 노골적으로 털어놓은 후 비담은 더욱 머리가 복잡해졌다. 바로 내일이 덕만을 부군으로 추인할 것을 논의하는 화백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춘추가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 비담은 밤늦도록 춘추의 처소 밖에서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정이 지나도록 불이 꺼지지 않더니 춘추가 은밀히 처소를 나와 당도한 곳은 바로 미실의 집이었다.

“야심한 밤에 어쩐 일이십니까”

미실은 놀란 척 하고 있었지만 춘추를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비담은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갔지만 하인들이 지키고 있어서 지붕을 타넘어 미실의 처소로 간 후 창문을 통해 미실의 방 옆 복도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방 밖에 대기하던 하녀들이 자리를 비우도록 유인한 후 방 안으로 몰래 잠입해 들어갔다. 비담은 문갑 뒤에 몸을 숨긴 채 두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어느 정도 이야기가 오간 듯 했다.

“진골이신 춘추공께서 성골이신 덕만공주님을 이기실 수 있겠습니까.”

“당장은 승부를 가리기 어렵겠지만 시간을 끌 수 있겠죠. 그것만 해도 우리가 이득입니다.”

비담은 춘추가 속으로는 미실 일당을 해치우려고 마음 먹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태연하게 웃으며 적극적으로 미실에게 접근하는 춘추를 보자 오싹했다. 비담이 생각하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더 위험한 길을 가고 있는 듯 했다. 미실과 춘추가 손을 잡으면 덕만은 고립되고 말 것이었다. 또 춘추가 마음을 돌린다 해도 그렇게 되면 미실이 배신한 춘추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상황이 나쁘게 흘러갈 뿐이었다.

미실은 춘추와의 회담이 만족스러운 듯 깊이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럼 춘추공. 하나만 약조해주시겠습니까?”

“무엇을 약조해드리면 될까요?”

“춘추공께서 보량이와 친밀히 지내신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춘추공의 베필은 제가 정해드리는 여인으로 맞아주실 것을 약조해 주십시오.”

춘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새주께서 정해주시는 여인과 혼인할 것입니다. 새주를 어머니처럼 여기고 따를 터이니 잘 가르쳐 주십시오.”

춘추의 말에 미실도 자애로운 미소를 띄며 말했다.

“저 역시 춘추공을 아들처럼 여기고 성심을 다할 것입니다.”

두사람의 대화를 듣는 비담은 어이가 없어서 비웃음만 나왔다.

‘어머니를 죽인자를 어머니로 여기겠다고? 무서운 놈이군.’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춘추가 일어나려 하자 미실이 말했다.

“가시기 전에 만나보실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담이 있는 쪽을 보며 말했다.

“숨어있는 것 알고 있다. 어서 나오너라.”

비담은 놀랐지만 이미 들킨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비담이 문갑 뒤에서 나오는 것을 보자 춘추 역시 깜짝 놀랐다.

“비담? 네가 어째서 여기에…”

미실은 비담을 조롱하듯 말했다.

“덕만공주께 가서 네가 본 대로 고하거라. 춘추공께서는 이 미실과 한뜻이며, 덕만공주님을 부군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이다.”

비담은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내 미실을 보고 비죽 웃으며 말했다.

“춘추공. 조심하시지요. 새주님은 아들 따위는 언제든 버리실 수 있는 분이니까요.”

이번에는 미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미실의 집을 나오자마자 춘추가 따져물었다.

“나를 감시한거야?”

비담도 질새라 춘추를 몰아세웠다.

“겨우 이런 것이 네가 생각한 수냐? 미실을 등에 업고 왕이 되겠다? 넌 미실의 꼭두각시가 되고 말거야.”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누가 누구의 꼭두각시가 되는지.”

춘추는 교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모님보다 먼저 미실을 무너뜨리면 어떻게 할래? 그러면 나를 인정할거냐?”

“미실을 무너뜨려? 네가?”

비담은 말도 안된다는 듯 말했지만, 춘추의 대담한 행보를 보면 정말 미실을 무너뜨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가슴이 답답했다. 춘추가 천명공주가 당했듯이 미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까 걱정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춘추가 미실에게 당하는 것도 싫었다. 비담은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말을 돌렸다.

“아무튼 너 덕만공주님께 방해되는 행동을 가면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

춘추는 열이 확 오르는 것을 느끼며 덕만을 감싸는 이런 말이 나를 더욱 질투에 불타게 한다는 걸 비담은 아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생각했다.

“방해하면? 날 베기라도 할꺼야? 그랬다간 이모님이 널 가만두지 않을텐데.”

“누가 그랬는지 알게 뭐야. 나말고도 널 베어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잖아.”

비담의 냉정한 말에 춘추는 가슴이 찔린 듯 아파왔다.

‘그래.. 서라벌에 내편은 아무도 없지. 너도 나를 감시하기 위해 같이 다니는 것 뿐… 너한테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언제든 베어버리면 그만인 존재인거지.’

춘추는 말없이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비담은 의기양양하던 춘추가 갑자기 힘이 쭉 빠져서 가버리자 어쩔 줄 몰라 멀찍이 떨어져 따라갔다. 집 앞에 도착한 춘추는 비담을 돌아보고 말했다.

“언제까지 따라 다닐 거야?”

“내일까지 무슨 수를 꾸미는지 감시한다고 했잖아.”

비담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춘추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럼 들어와서 감시해”

비담은 춘추를 따라 들어갔다.

“심심한데 술이나 한잔 해.”

춘추는 매실주 한 병을 내왔다. 비담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았다.

“싫어.”

“그럼 나 혼자 마시지.”

춘추는 매실주를 한잔 따라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새콤한 매실향이 코끝을 스치자 종일 춘추를 미행했던 비담도 목이 말랐다.

“나도 한잔 줘봐.”

춘추는 피식 웃으며 비담에게 잔을 건넸다. 비담은 춘추의 잔을 받으며 물었다.

“정말로 미실이 정해준 여인과 혼인할꺼야?”

“글쎄… 어쨌든 상황을 봐서 필요하다 싶은 여인과 곧 혼인할꺼야.”

춘추의 말에 비담은 어쩐지 갑자기 술맛이 더욱 쓰게 느껴졌다.

“넌 혼인을 참 쉽게도 생각하는구나.”

비담의 비아냥거림에 춘추는 반박했다.

“쉽게 생각한다구? 내가 서라벌 세력가들의 수많은 여식들 중에 보량이를 가까이 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얼마나 많은 계산을 해봤는지 알기나 해?”

“네 감정은 생각하지 않아?”

비담과 춘추의 시선이 잠시 부딫쳤다.

‘내게 접근했던 건 뭐야… 그것 역시 나를 네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술수였던거냐…’

비담의 추궁하는 듯한 눈빛에 춘추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렇게 비난하는 눈으로 쳐다보지 마… 너무 아프잖아… 넌 내게 관심도 주지 않으면서…’

춘추는 비담의 눈길을 피하며 다시 비담의 잔에 술을 따랐다.

“혼인은 세력간의 결합이야. 유치한 감정 따위로 할 수 있는 게 아냐. 넌 정치의 기본이 안되어 있구나.”

비담은 자꾸 가슴이 답답해지는 듯하여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춘추가 누구와 혼인하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비담은 단호하게 말했다.

“난 내가 연모하는 사람과 혼인할거야. 그 사람이 반역자이든 왕이든…세력 따위는 상관없어.”

비담이 연거푸 두 잔을 들이키는 것을 보고 춘추가 말했다.

“내일 화백회의까지는 이모님께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야겠어.”

“뭐라구?”

비담은 점차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술에 뭘 탄거야?”

춘추는 소매에서 약을 꺼내 먹으며 말했다.

“술이 좀 독한가본데… 술깨는 약은 하나 밖에 없어서 말이야. 난 내일 화백회의에 가서 이모님께 반대표를 던져야 하니까 내가 먹을께.”

“춘추 너 이자식…”

비담은 춘추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죽여버리겠다구?”

춘추는 해사하게 웃었다.

“무서워서 내일 네가 깨어나기 전에 반드시 널 없애야겠는걸.”

비담은 불끈해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음 순간 주저앉으며 잠들어버렸다. 춘추는 그런 비담을 쓸쓸하게 바라보았다. 염종에게 내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반드시 죽여야 할 자라고 말했지만, 그리고 지금이 바로 아무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바보라고 혹은 비열하다고 손가락질해도… 너만은 나를 이해해줄거라는 느낌은… 그저 내 착각인걸까.’

하지만 춘추의 바램과 달리 비담은 만나기만 하면 춘추를 긁어대고 덕만을 따르지 않는 것을 비난할 뿐이었다.

‘나도 세상에 단 하나쯤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바로 너인데… 넌 어째서…’

춘추는 손을 꽉 쥐었다.

‘이미 내 길은 정해졌다. 아무도 내 뜻을 거스르지 못하게 할 것이다. 비담, 너 역시 언젠가는 내 것으로 만들고 말겠어. 네가 아무리 거부한다고 해도…’


비담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깨어났다. 이미 화백회의는 끝났을 것이고 결과가 어찌 되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비담은 한숨을 푹 쉬고 투덜거리며 일어나다가 자신의 옷이 온통 풀어헤쳐져 있는 것을 알았다.

‘무슨 짓을 한거야?’

비담은 자신의 몸을 살펴보다 곳곳에 춘추의 흔적을 발견하고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 자식이 정말… 미쳤나…’

비담은 옷을 추스르고 칼을 찾아 들고 화백회의 결과를 듣기 위해 염종의 유곽으로 향했다.


다음날 비담은 춘추가 훈육시간에 나타나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춘추는 제시간에 나타났다.

“너 부군으로 나섰다며? 게다가 골품제는 천박하다고 했다며?”

비담이 사납게 째려보며 다그쳤지만 춘추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응.”

“잘도 나를 속였겠다. 왜 나를 없애지 않았어?”

비담의 물음에 춘추는 대수롭지 않은 듯 흘낏 보며 말했다.

“너같이 속이기 쉬운 녀석은 언제든 해치울 수 있으니까.”

춘추의 말에 비담은 점점 더 약이 올랐고 하지 않으려던 말이 결국 입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너 그날 밤에 나한테 무슨 짓 한거야?”

춘추는 얄궂게 미소지으며 비담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네가 생각하는 그거…”

비담은 결국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야, 이게 좋게 좋게 봐주니까 정말…”

춘추는 칼을 뽑아들고 덤비는 비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너도 좋아했잖아…”

“뭐? 내가 언제…”

비담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춘추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 오늘 반쯤 죽을 줄 알아. 목검 들고 마당으로 나와.”

비담은 버럭 소리지르며 방문을 홱 밀치고 나갔다. 비담은 춘추가 핑계를 대며 도망갈거라 생각했지만 춘추는 순순이 목검을 들고 따라 나왔다. 비담은 사정없이 춘추를 공격했다. 춘추는 삼합도 받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미실을 무너뜨리겠다구? 앉아서 머리만 굴려서 그게 가능할 거 같아? 칼질 한번이면 모든게 끝이야. 네 목숨 하나 못 지키면서 누구를 치겠다는 거야?”

비담의 말에 춘추는 다시 검을 들고 일어섰다.

“내 목숨 걱정했다면 서라벌에 돌아오지도 않았어.”

“너 아직 뜨거운 맛을 덜 봤구나”

비담의 공격이 이번에는 춘추의 검이 아니라 몸을 향했고, 춘추는 가슴을 목검으로 얻어맞고 푹 쓰러졌다. 비담은 자신이 얻어맞은 듯 아팠지만 거칠게 말했다.

“너같이 약해 빠진 녀석이 뭘 하겠다는거야? 네가 진검으로 승부를 해봤어? 사람을 죽여봤어? 전쟁을 겪어봤어?”

춘추는 말없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일어섰다.

“네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나를 알려면 멀었구나.”

춘추는 씁쓸한 표정으로 비담을 보며 말했다.

“넌 네 목숨을 노리는 자들과 한 지붕 밑에서 살아 봤어? 부모가 죽임을 당해봤어? 네 손을쓰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계략에 빠뜨려 죽인 적 있어?”

비담은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춘추는 비담의 예상을 뛰어넘는 녀석이었다. 미실에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오히려 지금 가장 수세에 몰린 것은 춘추나 미실이 아니라 덕만인 듯 했다. 비담은 칼을 거두었다.

“이제 어쩔 셈이야?”

춘추는 어둡게 대답했다.

“미실과 이모님의 사람들을 빼내서 내 세력을 차근차근 늘려가야지.”

“어떻게?”

춘추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슬프게 들렸.

“보량이와 혼인한 후에는… 문희도 손에 넣을 꺼야.”

“유신을 네 사람으로 만들겠다?”

비담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지만 마음이 또다시 쓰려왔다. 이 아이는 대체 어디까지 달려가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런 춘추의 모습이 자꾸 안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또 비담의 가슴을 싸르르 아프게 만드는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네 세력을 키우는 가장 빠른 길은 네가 덕만공주님의 사람이 되는거야.”

비담의 말에 춘추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너를 연모하는데… 네가 연모하는 이모님에게 굴복하라구? 그것만은 내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

춘추는 검을 떨어뜨리고 돌아섰다.

‘보량이를 만나러 가는 것일까. 아니면 문희인가. 그게 아니면...’

비담은 머리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숨을 후 들이마쉬며 말했다.

경고하는데... 내손으로 너를 베고 싶지는 않으니 그럴 일은 만들지 마라.”

춘추는 희미하게 웃었다.

너야말로 이모님의 세력이 스스로 분열하기 시작할테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할껄.”

춘추가 떠난 텅 빈 연무장에 서있는 비담의 주위를 마른 모래바람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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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비추 엔딩(비담이 구귀족세력들을 제거하고 자폭하기 위해 거짓으로 난을 일으킴) 전날  장면에 해당하는 내용

나쁜남자가 3주째 결방을 하니 다시 비추가 그리워지네요

건욱태성라인도 기대되긴 하는데 태성이 건욱에 비해 캐릭터의 포스가 약하게 설정되어서 비추만큼 누가 이길지 흥미진진함은 덜할거 같아요


 

덕만은 병이 깊어가자 춘추에게 선위를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춘추를 지지하는 가야계와 신진세력들은 이를 환영했지만 비담을 지지하는 구귀족 세력들은 반발하였다. 춘추가 자신을 수나라로 쫒아보내고 천명공주를 죽게 만든 구귀족세력들을 그냥 두지 않을거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서라벌에는 조용한 가운데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덕만은 비담을 불러 말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구나.

비담은 이미 오래전부터 어의에게 덕만의 상태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덕만을 못보게 되는 날이 곧 올 거라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춘추를 잘 부탁한다.

덕만의 말에 비담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지만, 덕만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네가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의 사람들은 다르다.

폐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비담은 자신 때문에 덕만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폐하께 심려를 끼치지 않도록 제가 그들을 처리할 것입니다.

어찌할 생각이냐?

역심을 품은 자들을 제가 곧 모두 색출할 것입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내가 못다한 일을 네게 넘기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부디 조심하고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마라.

덕만은 비담이 어떤 과격한 행동을 할 것인지 걱정되었지만, 이미 판세는 얼마 남지 않은 덕만에게 주어진 시간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춘추는 비담의 전갈을 받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염종의 유곽도 있는데 한밤중에 집으로 부른 것을 보면 아무도 몰래 긴히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비담의 집은 상대등이라는 직위에 걸맞지 않게 한적하고 하인도 별로 없이 썰렁했다. 비담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밤중에 왜 불러낸거야?

비담은 대답없이 피식 웃으며 춘추의 잔에 술을 따랐다.

경하드립니다 춘추공

춘추는 잔을 받으며 말했다.

축하받기는 아직 이른 것 같은데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까.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거 같은데?

귀족들이 너한테 무슨 말 안해? 화백회의에서 반대를 하자던가…”

비담은 대답없이 도리어 춘추에게 물었다.

너야말로 염종과 귀족들을 어쩔셈이야?

춘추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당분간 끌어안고 가야겠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분명히 내 뒤통수를 물어뜯을 자들이야. 언젠가는 결국 한판 붙어야겠지. 나는 이모님같은 인내심이 없으니까. 또 내가 아무리 싸울 의도가 없다고 한들 그들이 나를 믿지 못할테고.

비담은 낮은 목소리로 소근거리듯 말했다.

내가 다 없애줄까?

이번에는 춘추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무슨 수로? 한두명도 아니고다 네 사람들인데 너를 다치지 않고 그들을 쳐낼 방법이 없잖아.

비담은 씨익 웃으며 잔을 비웠다.

내가 걸림돌이 되어서 미안한 걸

비담은 빈 잔을 다시 채우며 물었다.

진지왕의 아들인 나로 인해서 계속 분란이 생길꺼야. 네게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나를 왕으로 세운다는 명분을 들고 나올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존재 자체가 네겐 위협이지.

비담은 춘추의 마음을 읽으려는 듯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가 두렵지 않아? 폐하가 안계시면 나를 제어할 사람이 없으니, 결국 화근을 없애기 위해 나를 쳐내고 싶어질 거 같은데…”

춘추도 비담을 다루기 어려워 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비담의 우려가 말도 안된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널 두려워 한다구? 넌 나한테 상대가 안돼.

비담 역시 전혀 취하지 않은 듯 서늘한 눈으로 마주보며 말했다.

그럴까? 잊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미실의 아들이야.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불꽃튀는 눈으로 팽팽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윽고 춘추가 침묵을 깼다.

갑자기 왜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거야? 그 이야기 하려고 한밤중에 부른거야?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 듣고 싶은 말도 다 들었고.

춘추는 비담이 뭔가 말을 다 하지 않는 느낌이었지만 캐묻는다 해도 이야기해주지 않을 것 같아 굳이 묻지 않았다. 비담은 혼잣말처럼 딴소리를 했다.

난 이제 어쩐다 폐하를 얻고 천년의 이름을 얻겠다는 꿈은 이룰 수 없게 되었네…”

춘추는 비담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냉소적으로 말을 받았다.

나도 유혹해보지 그래? 내게 색공을 바치면 천년의 이름을 내가 줄 수도 있는데…”

춘추의 말에 비담은 킥킥 웃으며 의자에 뒤로 기대며 말했다.

내가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맹세한 건 여왕폐하 뿐이야. 네가 왕이 된다해도 나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춘추는 비담의 노골적인 거절에 상처받았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비죽 웃으며 말했다.

됐거든? 궁에 지금 내가 왕이 되기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유화들이 수백명이야.

춘추의 수습에도 비담은 개의치 않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춘추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춘추는 자꾸만 목이 타는 듯 하여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왜 비담에게 이야기 할 때면 마음과 달리 말이 비비꼬여서 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비담은 그런 춘추를 마치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뚫어지게 보았고 춘추는 기분이 어쩐지 이상했다. 비담은 춘추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춘추의 유혹에 비담이 몇번 넘어간 적은 있었지만, 비담이 먼저 춘추에게 접근해 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담의 손길이 옷속을 파고들자 춘추는 움찔거리며 신음했다. 비담은 색으로 물든 춘추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가 혹시 역모를 꾀하더라도 그게 너한테 색공을 바치기 싫어서 그러는게 아니라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무슨 소리야? 역모라니?

퍼득 정신이 들어 묻는 춘추에게 비담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 말이야…”

그리고는 춘추가 말을 하지 못하도록 더 거칠게 그를 안았다.

…”

춘추는 밀려오는 짜릿한 쾌감속에서도 비담의 말뜻을 헤아리려 애썼다.

설마무슨 짓을 하려는거야 비담…’

비담은 춘추가 지쳐서 잠들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다음날 춘추가 눈을 떴을 때 이미 비담은 떠나고 없었다. 춘추는 옷을 입다가 자신이 끼고 있던 자수정반지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비담이 가져간 것일 터였다.

내 반지는 왜 가져간거야. 보석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춘추는 고개를 갸웃했다. 춘추가 비담의 집을 막 나서려 할 때 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쳤다.

춘추공, 무사하셨군요. 상대등에게 납치되어 감금되셨다기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소립니까?

놀라서 묻는 춘추에게 유신이 말했다.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명활성에 염종과 귀족들과 함께 집결해 있습니다.

유신의 말에 춘추는 얼굴이 하얘졌다. 비담이 반란을 일으킨 이상 춘추와 비담 둘 중 한 사람은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럴거였으면 어째서 나를 잡아가거나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둔거지?

아무래도 앞뒤가 들어맞지 않았다. 지난 밤의 비담은 어딘지 예민하긴 했어도 살기를 띄고 있다거나 적대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역모나 뜻 모를 이야기들을 한 걸 보면 이미 결단을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춘추는 유신과 같이 서둘러 여왕이 있는 월성으로 향했다.

 

비담군은 명활성에서, 여왕과 춘추는 월성에서 전투없이 10일간 대치하였다. 여왕은 비담을 척살하라는 명을 내렸고, 춘추도 서둘러 난을 종결지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수비가 단단한 명활성을 섣불리 공격할 수는 없었다.

10일째 되던 날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 비담은 그것을 보고 군사들에게 선포하였다.

천신황녀 미실의 아들인 상대등 비담이 말한다. 월성이 떨어졌으니 이는 여왕이 몰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의 뜻이 비담에게 있다.

비담군의 사기는 높아졌고 반대로 유신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비담은 손에 끼고 있는 춘추의 자수정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미소지었다.

어떻게 할거냐 춘추 빨리 승부를 내야지.

 

큰일입니다. 여왕폐하의 환후도 심상치 않으신데 민심이 비담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어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유신의 말에 춘추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담 이자식.. 정말 제대로 한번 붙어 보자는 거야?

춘추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왕폐하께서 일식을 이용해 미실의 천신황녀 지위를 끌어내리지 않았습니까. 저도 같은 방법으로 비담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다음날 밤 서라벌의 밤하늘에 밝은 별이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월성이 다시 떠오른다! 여왕폐하의 별이 다시 떠오른다!

반란군은 크게 동요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도 술렁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별은 사실은 유신군이 날린 연에 달린 불빛이었다.

바로 그 때 유신의 군사들이 명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유신군이다!

유신군은 명활성의 서문과 남문에서 동시에 성문을 부수며 진입을 시도했고 당황한 귀족들은 동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어서 피하십시오, 상대등!

눈깜짝할 사이에 명활성 안으로 유신의 군사가 물밀 듯 몰려들어오고 있었다. 반란군은 방어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후퇴하기에 바빴다.

제법인데 춘추…’

비담은 하늘로 떠오르는 별을 잠시 바라보며 씩 웃고는 불타오르는 명활성을 빠져나갔다.

 

비담은 놓친듯 합니다만 추격중에 있으니 곧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은 전투결과를 춘추에게 보고하였다.

반드시 사로잡아야 합니다.

춘추의 말에 유신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생각난 듯 덧붙였다.

이상한 것은 지난밤 명활성 남문의 성문이 잠겨있지 않았습니다.

춘추는 날카롭게 물었다.

대체 누가 성문을 열어놓았을까요? 명활성에 우리와 내통한 자는 없지 않습니까.

겁에 질려 도망가려던 병사들이 아닐까요?

알천의 물음에 유신이 대답했다.

도망가려면 동문을 열고 도망갔겠지. 남문은 우리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데.

춘추는 저녁무렵 남문 성벽에 모습을 잠시 보였던 비담을 떠올리며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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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히 지켜주고 싶고 함께 꿈을 꾸고 싶어지는 덕만이 비담의 이상형이라면

괜히 틱틱거리게 되고 괴롭혀주고 싶어지는 춘추는 비담의 현실적인 인연일듯..

(나쁜남자가 시작되어야 비추에서 벗어날수 있을까
드라마 끝난지 4달인데 뭐하고 있는 짓인지...ㅠㅠ)

왜국에 사신으로 갔던 비담과 춘추가 배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갈때는 잔잔했던 바다가 올때는 파도가 일어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밤이 되자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담은 선실에서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비담이 문을 열어보니 춘추가 핼쑥한 얼굴로 서있었다.

"왜 그래?"

"배멀미가 나서... 멀미에 듣는 약 좀 있어?"

비담은 춘추를 방으로 들이고 약재가 든 상자를 뒤적이며 물었다.

"너 책봤냐?"

""

"이렇게 배가 흔들리는데 책을 보니까 멀미가 나지"

비담은 약재와 함께 침을 꺼내왔다.

"약은 효과가 느리니까... 일단 침부터 놔주께"

비담은 춘추를 침대에 앉히고 팔목을 걷고 손과 팔목에 침을 놓았다.

"아야..."

찡그리는 춘추를 보며 비담은 어이없는 듯 피식 웃었다.

"엄살은..."

그리고 약재를 몇가지 섞고 빻아서 약을 지어왔다.

"이 약도 먹어봐"

춘추는 약을 들이키고도 여전히 방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 좀 해줘"

"무슨 얘기?"

"아무거나... 어지러운 것 좀 잊어버리게"

"배가 흔들려서 겁나는구나? 하긴 수영을 못하니 겁나겠지."

비담은 놀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춘추의 옆에 앉았고 춘추는 대꾸할 기운도 없는지 흘겨보기만 했다. 비담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춘추는 수나라에서 온세상 이야기군들의 웬만한 이야기는 다 들어봐서 별로 신기할 것도 없을 텐데 생각하고 있는데 춘추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모님이 남자였어도 네가 주군으로 모시고 따랐을까?"

비담은 한번도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답은 쉬웠다.

"그럼. 폐하께서 하시는 일은 뭐든 같이 하고 싶으니까."

덕만에게는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큰 꿈을 제시하는 혜안이 있었다. 현실의 이득 보다는 이상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비담은 덕만과 닮아있었다. 그러나 춘추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덕만과 달리,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비담이 본질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종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춘추는 살짝 비꼬는 듯 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이모님이 남자였어도 네가 연모했을까?"

비담은 춘추의 황당한 질문에 픽 웃었다.

"갑자기 왜 말도 안되는 소리를 계속 하는거야?"

그러나 다음순간 오래전 낭도인줄 알았던 덕만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따지고보면 자신밖에 모르던 비담이 설원공으로부터 덕만을 구한 것도 덕만이 여자인줄 알기 이전에 한 행동이었다. 자결한 결심을 하고서도 병자들을 걱정하던 덕만, 자신을 팔아넘기던 비담에게 고맙다고 말하던 덕만, 설원공에게 넘겨져서도 끝까지 당당했던 덕만... 이후의 덕만의 모습도 늘 비담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첨성대를 짓고, 백성들에게 농기구를 나눠 땅을 개간하여 소유하게 하고, 자신을 죽이려한 미실파를 용서하는 덕만은 늘 비담에게 감탄을 자아냈다.

"멋있잖아... 남자였어도 연모했을거야."

비담은 자신도 모르게 혼자 꿈꾸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춘추는 그런 비담을 보며 마음이 쓰라렸다.

'이모님이 남자였어도 너를 내사람으로 만들수는 없었겠네'

덕만을 생각하며 혼자 실실 웃던 비담의 어깨에 춘추의 머리가 툭 떨어져 기대어 왔다.

"이제야 약효가 났나보네"

잠든 춘추를 보며 비담이 중얼거렸다.

"멀미날 땐 그냥 자는게 최고지"

멀미를 다스리는 약과 함께 잠이 오도록 하는 약을 섞어서 주었던 것이었다. 비담은 춘추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춘추는 잠이 깼다. 그새 바다가 잔잔해지고 따스한 아침햇살이 문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비담은 바닥에서 자고 있었고 자신은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잠이 들었던 걸 보면 약에 수면 성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춘추는 잠들 때 그대로 자신의 옷이 단정히 있는 것을 보고 약간 기분이 상했다. 비담이 자신을 안고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손끝하나 건드리지 않은걸 보니 약을 먹고 잠이 든 자신을 보고도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네가 나를 주군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연모하지 않는다면, 내 몸이라도 원했으면 좋겠어.'

시무룩해서 비담을 바라보고 있던 춘추는 비담이 눈을 깜박거리면 깨어나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너 약에 뭘 탄거야?"

상처받은 마음과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틱틱거리는 춘추에게 비담은 부스스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 ... 푹 자라고 잠오는 약 줬지."

"이상한 짓 하려고 그런건 아니구?"

일부러 심술을 부리며 의혹의 눈초리로 보는 춘추에게 비담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항의했다.

"참나... 뭔 이상한 짓? 약달라고 할땐 언제구... 물에 빠진거 건져놓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는거야?"

"아님 말구... 왜 화를 내고 그래"

춘추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

"어쨌든 고마웠어."

춘추의 뒷모습을 째려 보던 비담은 어젯밤을 떠올려보았다. 춘추가 너무 빨리 깊이 잠이 들어버려서 약효가 지나친것 아닌가 목과 손목의 맥을 짚어보았었다. 맥은 정상이었고 숨결도 고르고 체온도 정상이었다. 힐끔 춘추의 얼굴을 보니 늘 어딘가 조소를 띄고 있는 눈이 지금은 스르르 감겨있었고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독설을 내뱉을 것 같은 입술이 조용히 닫혀 있었다.

"이렇게 얌전히 있으니 이쁘구만"

비담은 춘추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춘추의 복숭아처럼 희고 붉은 뺨을 쓸던 비담은 묘하게 설레는 기분에 멈칫 했다. 오래 전 일이었지만 춘추의 유혹에 넘어갔던 밤이 어제 일인 듯 떠올랐다. 그날 밤의 입술과 매끄러운 속살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담은 신음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대로 있다가는 춘추를 덮치고 말 것 같았다. 색을 가까이 하지 말라, 특히 원하지 않는 상대는 절대로 안아서는 안된다고 문노에게 귀가 닳도록 들어서인지 잠든 춘추를 건드리는 것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안절부절하던 비담은 밖으로 나가려고 방문을 열었지만 열자마자 밖에서 비가 세차게 들이쳐서 도로 닫고 말았다.

'돌겠네...'

어떡해야 이 열망을 삭일수 있을까 두리번거리던 비담의 눈에 춘추에게 주고 남은 멀미약이 보였다. 비담은 남은 약을 모두 꿀꺽 들이켰다. 그리고 바닥에 벌렁 누워 눈을 감았지만 약효가 퍼지기 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 했다. 바닥을 이리저리 뒹굴거리던 비담은 다시 일어나서 침대에 앉아 쌕쌕거리며 잠이 든 춘추를 바라보았다. 춘추의 입술에 살짝 입만 맞출 생각이었는데 그러고나자욱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열이 화르르 오르는 듯 미칠듯한 느낌에 더 깊이 입을 맞추며 들어가던 비담은 흥분하는 바람에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면서 약효가 순식간에 확 퍼지는 것을 느꼈다. 어지럼증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던 비담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며 잠이 들었다. 춘추의 잠든 얼굴에 혼자 어쩔줄 몰라 엎치락뒤치락 했던 어젯밤의 전말이었다.

비담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하옇튼 저녀석... 요물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연모하는 여인이 있는 자신이 이렇게 춘추에게 빠져드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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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가 잘 안되서 대충 죽여버릴까도 생각했으나

새드엔딩은 마음이 아파서 생각하기도 싫었다

비담이에게 모든걸 주었다

이세민이라는 친구, 법민이라는 가족, 춘추라는 연인까지...

행복하게 잘 살아라~


8.

당나라가 백제왕자 융의 이름으로 백제부흥회를 결집시키자 춘추는 당황하여 장안성으로 직접 달려왔다. 이세민을 만나러 가기 전에 춘추는 먼저 비담의 집을 찾았다.

융을 백제로 보내라고 한 것이 너라며? 이젠 완전히 이세민의 편이 되기로 한거야?”

비담은 씩 웃으며 닦고 있던 칼을 들어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네가 나에게 이 길이 옳다는 믿음을 주지 못했으니까…

“넌 정말… 아이같아.”

춘추는 한숨을 쉬었다.

“널 품는 건 정말 힘들어.”

비담은 칼로 허공을 휙 베었. 바람을 가르는 칼울림 소리가 방안을 메웠다.

“그래… 난 손잡이 없는 칼이야. 날 잡으려고 하면 손만 베이게 되지.”

그러더니 춘추를 보고 비웃듯 말했다.

근데 난 누굴 베는 걸 좋아하지만, 너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베는걸 좋아하잖아. 언제나 네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모든걸 얻으려고 하다니 너무 비겁하고 치사하지 않아? 이번에도 당군을 앞세우고 나중에 뒤통수를 쳐서 고구려 영토를 빼앗을 셈이야? 신라의 피를 흘리지도 않고 남의 힘으로 이룬 삼한일통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비담은 춘추를 가늠하려는 듯 바라보며 칼을 휙 돌려 그를 가리켰다.

“고구려를 걸고 도박을 하려면 너도 뭔가 판돈을 걸어야 할거 아냐. 맨입으로 할건 아니지? 신라군사를 얼마나 내놓을거야?”

춘추는 화를 억누르며 싸늘하게 말했다.

백제지역의 치안도 유지해야하고, 왜의 습격에도 대비해야 하니 6만이 한계야.”

왜 이래? 좀 더 걸어봐.”

백성들 목숨을 놓고 숫자놀음을 하라는거야?”

춘추의 말에 비담은 킥킥 웃으며 칼을 탁자에 꽂았다.

너 오늘 되게 맘에 안든다. 왜 너답지 않게 위선을 떨고 그래?”

그러더니 다시 손가락을 들어 춘추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이세민에게 이야기 했어. 신라에 10만의 군사를 요구하라고. 각오하는게 좋을거야.”


이세민은 융을 다시 불러들이고 백제의 영토를 모두 신라에 주는 것에 동의하는 대신, 고구려와의 전쟁에 10만의 군사를 동원할 것을 요구했다. 신라의 인구와 재정을 생각하면 도저리 무리한 숫자였다. 그러나 춘추는 이를 받아들였고, 그대신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임진강 유역까지는 신라의 영토로 인정해주도록 요청했다. 이미 이세민도 춘추도 그것이 말뿐인 약속이고 이후에는 상황이 어떻게 될지 서로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양국의 갈등을 수습하고 다시 고구려와의 전쟁 체제로 돌입했다.

춘추는 10만 군사를 동원하기 위해 징집 명령을 내리고 군대 편재를 직접 지휘를 하였다. 신라와 백제 지역의 남자들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10만이라는 군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당나라의 요구사항을 맞추려면 최대한 군사를 늘려 고구려와의 국경지대로 배치해야 했다. 지금은 당나라의 요구 때문에 군사를 늘리고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와 치러야 할 전쟁에 쓰이게 될 군사들이었다.

춘추는 백제 지역의 백성과 농토를 정비하여 신라의 제도로 재편하는 작업과 함께 고구려와의 접경지대를 돌며 지역별 인구 수와 동원 가능한 군사의 수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또 그들을 먹이기 위한 군량미와 병장기를 사기 위한 자금 조달 계획도 마련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며칠 째 밤을 지새우던 춘추는 결국 회의를 하던 중 쓰러지고 말았다.

“폐하!”

춘추가 침상에서 눈을 떴을 때 유신이 걱정스러운 듯 지켜보고 있었다. 가슴이 욱신거리고 숨이 가쁜 것이 어떤 증세인지 춘추는 잘 알고 있었다. 진평왕과 덕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과 같은 병이었다. 이제 춘추도 그 증세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내 상태는 어떠한가?”

춘추의 물음에 어의는 대답했다.

“아직 병세가 심하지는 않으시니 무리하지 않고 푹 쉬시면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을 것이옵니다. 폐하. 부디 서라벌로 돌아가시기를 간청드리옵니다.”

춘추는 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춘추는 멍하니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유신은 망설이는 듯 하다 말을 꺼냈다.

“당태종을 부추켜 백제의 왕자 융을 불러들이라 하고 신라에 10만의 군사를 요구하도록 한 사람이 비형이라는 자라고 들었습니다. 그자는 신라에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춘추는 유신을 흘낏 보며 말했다.

“비형은 당태종의 오른팔과 같은 사람이다. 공연한 말을 입밖에 내어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비형이라는 자가 비담입니까?”

춘추는 유신의 말에 화들짝 놀랐지만 태연히 말했다.

“…아니다”

비담은 이미 선왕께서 신국의 적으로 선포하여 척살하라 명을 내리신 자입니다.”

춘추는 대답이 없었다.

“비담이든 비형이든… 그자가 폐하의 사람이라 믿으십니까? 신라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럼 어쩌란 말이냐? 자객을 보내 척살이라도 하란 말이냐?”

춘추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유신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소신이 요령이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정도 꽉 막힌 사람은 아닙니다. 또 그자가 자객을 보낸다고 척살될 자입니까. 다만 그자의 성품으로 보아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고구려를 무너뜨린 후에는 당태종의 칼이 되어 신라를 정벌하러 올 지도 모르는 자입니다.”

유신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비담이 춘추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는 날이 온다면 신라의 안위는 바람 앞의 등불일 것이었다. 춘추는 비담이 이렇게 폭주하고 있는 원인이 자신에 대한 불신 때문임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신라왕이 고구려와의 전쟁준비를 하다가 쓰러졌고 서라벌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당나라에도 전해졌다. 그런데 서라벌로 돌아간 신라 왕이 결국은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후 승하하였다는 소식이 다시 전해졌다. 비담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춘추… 이런식으로 내게 복수하는거야?’

비담은 눈물을 흘리며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이미 장례식이 끝났을 테지만 서라벌로 가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춘추가 없는 이상 당나라에 머물 이유도 없었다.

“언제쯤 돌아올 것이냐?”

이세민의 물음에 비담은 대답이 없었다. 머리속이 텅 비어 앞으로 어찌할 것인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세민은 말없이 그를 안아주었다.

“언제든 마음 내킬 때 돌아오라.”

이세민의 말에 비담은 속삭이듯 말했다.

“한번도 말한적 없었? 내가 무슨 짓을 하던 이해해주고 믿어주 노력했던 당신에게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었는지.”

폐하가 아닌 당신이라는 말에 이세민은 가슴이 찡했다. 비담이 영영 떠나버릴 것 같아 잡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아무도 몰래 춘추의 무덤에 도착한 비담은 비석에 새겨진 말들을 읽으면서 다시금 눈물이 뚝뚝 떨어졌. 쓰러질 것만 같아서 비석을 짚고 간신히 서 있는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왔어?”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지만 춘추의 목소리였다. 비담이 뒤돌아보자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평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비담은 다가가서 떨리는 손으로 베일을 걷었다.

“춘추?”

빙긋 웃고 있는 춘추를 보며 비담은 화가 치밀었다.

“너 이자식…!”

비담은 주먹을 들어올렸지만 마음과 다르게 손은 춘추를 때리기는커녕 그를 와락 끌어안고 있었다.

“너도 죽은 척 하고 나 속였잖아. 너도 당해보니 기분이 어때?”

춘추는 죽거리면서도 비담의 등을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왜 죽은척 한거야?”

“병으로 쓰러졌던 건 사실이야. 어의가 더 이상 무리하면 안된다고 해서 서라벌로 돌아왔어. 근데 일도 못할거면서 왕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 진행이 안되잖아. 그렇다고 내가 내몸 희생해가면서 일할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법민이한테 넘겨줘 버렸어.”

“너… 삼한의 주인이 되고 싶어했잖아.”

“법민이가 삼한의 주인이 되겠지. 네말대로 그애도 뭔가 걸고 노력해서 얻어야지, 내가 삼한일통을 해서 왕좌를 넘겨주면 그게 얼마나 소중한 건 줄 모를거 아냐.”

춘추는 비담의 허리를 껴안고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네가 나를 보살펴줘야 해. 나를 이렇게 아프게 만들었으니 네가 책임져.”

뭐야?”

널 이세민 곁에 계속 두면 신라에 위협이 되어서 안되겠어.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곁에서 날 돌봐줘.”

비담은 춘추를 바스라지도록 꽉 껴안으며 말했다.

“넌 정말 나한테 도움이 안되는구나. 싫컷 이용해먹고 이제와서 뭐라구?”

비담의 행복함을 감추기 위한 투덜거림에 춘추는 짖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린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에게 방해만 되는 사이잖아.”

서라벌의 밤하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떠 있었고, 두사람도 그 별들 사이로 걸어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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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음편이 마지막편이다

역사를 보면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킨 1년 후에 고구려와의 전쟁준비를 하다 병으로 죽고 실제 삼국통일은 그의 아들 문무왕(법민)이 고구려를 멸망시켜 이루게 된다. 하지만 역사에 태종무열왕이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으로 기록되는건, 태종무열왕이 나당연합을 성사시켜 삼국통일의 기본 방향을 정립했고, 문무왕은 그 설계도 대로 완성을 시켰을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백제는 의자왕이 자멸한 셈이고 고구려도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분열해서 자멸했으니, 그저 신라가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김춘추의 행적을 보면 고구려 수나라 당나라 뿐 아니라 일본까지 돌아다니며 정말 부지런히 외교전을 펼쳤던 것 같다.(후세에 미화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저 남의 뒤통수나 치고 다니는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라는 평과 외교감각과 정보전이 뛰어난 현대적 군주라는 양극단적인 평만 봐도 드라마에서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재해석될 여지가 많은 인물이 태종무열왕인 것 같다.


7.

신라는 백제지역의 백제부흥회를 정리해가고 있었다. 가능하면 설득하여 신라의 제도로 포용하며 대당투쟁에 나서도록 했고 그렇지 못한 세력들은 무력으로 굴복시키기도 했다. 결국 당군이 점령했던 백제영토마저 신라에게 복속되기 시작했다.

비담은 이세민의 부름에 입궐했다.

“신라가 당이 갖기로 한 백제의 영토를 복속했다. 맨 처음 약속대로 당에 반환하라고 할 생각이야.”

이세민은 비담의 생각이 궁금한 듯 물었다.

“춘추가 순순이 내놓을까?”

비담은 대답을 피하기 위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대소신료들은 그간 신라의 오만함을 참을만큼 참아왔으니 이번만큼은 신라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중론이다.”

이세민은 비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네가 사신단과 함께 신라로 가서 춘추를 설득해봐라.”

비담은 이세민의 말을 들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는 듯 되물었.

“지금 저보고 신라의 영토를 당에 내놓으라고 춘추를 설득하라는 말씀입니까?”

이세민은 비담에게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상황에서 신라와 외교를 단절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고구려와 전쟁을 계속 해야 하니까 신라가 필요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곳 대신들의 중론이 신라에 우호적이지 않으니 나로서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러니 적어도 신라가 나서서 외교를 단절할 구실은 주지 말라고 춘추에게 일러라.”

비담은 머리가 복잡해서 후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신라의 이익을 위해 영토를 내놓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당과의 신의를 지켜 영토를 내놓는 것이 옳은 것인가. 사신단을 통해 공식적으로는 신라를 압박하면서 뒤로는 비담을 통해 춘추와 타협점을 찾아보려는 이세민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 그만큼 자신을 믿어주는 이세민에게 고맙기도 했지만, 신라와 당을 모두 만족시키는 해결책을 찾기는 쉽지 않아보였다.

서라벌에 도착한 당의 사신단은 신라왕을 알현하여 영토를 반환하라는 당의 공식적인 요구사항을 전달한 후 숙소에서 신라의 답변을 기다렸다. 여러명의 사신단 속에 섞여 있었을 뿐이지만 춘추는 비담을 알아보고 따로 연락을 취했다. 비담은 정자에서 벚꽃이 달빛에 하얗게 떨어지는 것을 맞으며 춘추를 기다리고 있었다. 춘추는 뾰루퉁하게 말했다.

“어쩐 일이야? 통 오지도 않더니만...갑자기 당의 사신단에 껴서...”

비담은 그런 춘추가 귀여운 듯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갔.

“내가 안찾아와서 삐졌냐? 네가 오면 되잖아. 난 하던 전쟁도 때려치고 왔었는데.”

춘추는 여전히 퉁퉁거리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줄 알아? 난 왕이잖아.”

비담은 부드럽게 웃으며 새침한 춘추의 머리에 벚꽃 가지를 꽂아주었.

“시간이 흘러도 넌 여전히 아름답구나.”

비담의 말에 춘추는 그제야 마음이 좀 풀린듯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시간이 흘러서 아름다움이 시들면... 그땐 지금보다 더 안찾아오겠네?”

비담은 말없이 춘추를 끌어당겨안고 입을 맞추었다. 춘추는 몸을 비틀어 빼려는 척하다 마지못한 듯 비담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미 춘추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색한 기운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둘은 말없이 한동안 마주보고 웃기만 했다. 둘은 서로의 허리를 감싸안고 계림의 구불구불한 향나무 사이를 걸었다.

법민은 잘 있어?”

춘추의 물음에 비담은 기다렸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래. 실은 니 애 보느라고 바빠서 못온거다.”

이세민의 아들들과는 잘 알고 지내?”

. 다들 그앨 좋아해. 이세민 아들들중에 법민이 만큼 영특한 녀석 없어. 그리고 이젠 검술도 서라벌 화랑 아무하고나 비재 떠도 다 이길껄. 내가 특별 훈련을 시켜줬지.“

비담의 신나서 떠드는 것을 보고 춘추는 희미하게 웃었다.

법민이랑 정이 많이 들었나보네.”

비담은 춘추를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근데 어쩔거야? 백제영토를 내놓으라는데...”

이세민이 나를 설득하라고 널 보낸거구나?”

꼭 그렇다기보다… 잘 해결할 방안을 찾아보란 얘기지… 근데 나도 오면서 쭉 생각해 봤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더라. 넌 무슨 방법이 있어?”

비담의 말에 춘추는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거절할거야.”

“그러면... 법민에게 보복이 있지 않을까?”

“그래. 하지만 신라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으니 신라왕자를 죽이지는 못할거야. 아마 감옥에 가두었다 풀어주거나 유배를 보내겠지.”

춘추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냉정한 말에 비담은 얻어맞은 것처럼 그자리에 멈춰서서 춘추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네가 버려졌다고 해서 너도 법민을 버리려는거야?”

비담의 말에 춘추는 아픈 곳을 찔린 듯 잠시 멍하니 말이 없었지만 이내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애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야. 신라 왕족의 처지란 어떤 것인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려는거야.”

비담은 화가나서 춘추의 어깨를 꽉 잡고 말했다.

변명하지 마. 넌 네가 버려진 화풀이를 그애한테 하고 있는거야.”

그렇다고 백제영토를 당에 돌려줄 순 없어. 그리고 아직 얻지 못한 나머지 백제영토도 모두 신라가 가질거야.”

춘추의 싸늘한 말에 비담은 성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춘추도 비담의 말에 화가 난 듯 씩씩거리고 있었다. 춘추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자 비담은 춘추를 탁 놓아주며 말했다.

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하지만 절대로 법민이 너의 장기판의 말이 되어 이용되고 버려지지도록 놔두지는 않겠어.”

비담은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 희뿌연 밤안개 사이로 사라져갔고, 춘추는 순간 휘청이며 나무를 짚었다. 어려서 수나라에 처음 당도했을 때의 기억이 어제인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낯선 곳에서 낯모르는 어른들에게 휩쓸려다니며 이용당하고 놀림당하던 기억이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제 또 생각이 나는 것일까.


신라가 백제영토 반환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당나라의 중신들은 신라에 대한 물리적 외교적인 보복을 하라며 들고 일어났다. 이세민이 고민에 빠져 있는 중에 비담이 알현을 청했다.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이세민의 물음에 비담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나라로 데려 온 백제 왕자 융을 백제로 보내십시오. 융이 백제로 돌아 친당정권을 세운다고 공표하면 백제부흥회의 세력들은 대당투쟁의 명분을 잃게 됩니다. 융의 밑에 모인 백제부흥회는 신라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세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비담을 보았다.

“그대는 신라의 아군인가 적군인가?”

“전 그런거 신경 안씁니다.”

비담은 단호하게 덧붙였다.

신라왕자 법민은... 추방하십시오.”

비담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던 이세민은 그제서야 비담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추방령이 내려진 법민은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스승님도 함께 가요.”

법민이 비담의 손을 잡아끌었다. 비담은 고개를 저었다.

“난 신라에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서 말이야.”

그러나 말과는 달리 비담의 눈은 추억과 그리움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서라벌에 도착한 법민은 곧 부군으로 봉해졌다.

법민이 검술을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던 유신이 말했다.

“호국검법이 아닙니까? 당나라에서 어떻게 호국검법을 배우셨습니까?”

“당나라에서 스승이었던 비형공이 호국검법을 쓰셨어요.”

“신라인이었나 봅니다.”

“전에는 신라에 살았지만 지금은 당나라인이라더군요.”

유신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법민의 검법을 더 유심히 살펴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법민의 검법은 문노가 만든 정통 호국검법이라기보다는 비담이 즐겨쓰던 변형된 역검의 호국검법이었다. 비담은 제자를 두지 않았기에 비담 외에는 지금까지 누구도 그 검법을 쓰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비형이라…’

백제를 무너뜨릴 때 신라군의 합류가 늦어져 소정방이 진노하여 유신이 곤경에 쳐했을 때 그의 편을 들어주었던 당나라 장수의 이름이 비형이라는 것을 이후에 알게 되었다. 춘추가 당나라에 은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는 자 아마 그자일 것이라 추측되었다. 비담의 검법을 쓰는 그자는 누구일까. 유신은 어쩐지 식은 땀이 나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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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당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백제부흥회의 수장 복신에게 군자금을 대겠다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찾아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백제인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에게 당군과 싸울 군자금을 대는 이유가 뭔가?”

복신의 말에 얼굴을 면으로 가린 비담은 조용히 대답했다.

“알 필요 없어. 어쨌든 우리의 목적은 같은게 아냐? 백제지역에서 당군을 몰아내는 것.”

“고구려인일 리도 없고… 이렇게 많은 돈을 조건 없이 지원할 재력가가 흔하지 않은데…”

복신 미심쩍은 듯 의혹에 가득한 눈으로 비담을 뜯어보았다.

“뭐 조건은 아니고… 그대들에게 개인적으로 충고하고 싶은 것은 있지. 당군을 몰아내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할 셈이야? 무너진 다시 백제 왕가를 복원할 수도 없는 일이고…”

비담은 복신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신라는 이미 가야를 품었고 가야 출신들이 신라에 충성만 한다면 자신들의 풍습과 가문을 지키며 살아가도록 지원해주고 있다. 신라군을 이끄는 대장군 김유신이 가야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신라는 가야출신 백제출신이라고 해서 인재를 차별하지 않는다.”

“설마… 너의 배후에 있는 것이 신라인가?”

펄쩍 뛸듯이 놀라는 복신에게 비담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난 신라인 아니거든. 어떤 신라인을 붙잡고 물어봐도 나를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 뒤를 캘 시간에 너희들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어때?”

복신은 칼을 뽑아 비담의 목에 들이대며 말했다.

“네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베겠다.”

그러나 비담은 복신의 말을 듣는둥 마는 둥 하며 말을 이었다.

“신라에는 골품제라는 것이 있지. 골품제는 결국 폐지되어야 할 제도이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몇십년은 더 유지가 될 것이야. 그렇다면 골이 없는 백제인들이 신라에 편입될 때 어떤 골을 받게 되는지가 중요하겠지.”

그리고 복신의 어두운 눈을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군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공이 각자 어떤 골을 받게 되는가에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그러더니 하하 웃으며 돌아섰다.

“아.. 뭐 이건 그냥 내 생각이고… 아무튼 난 너네가 걱정되서 하는 말이야. 그럼 돈만 전달해주면 내 볼일은 끝이니 이만 가보겠어.”

도깨비에 홀린듯 서있는 복신 남겨둔 채 뒤돌아서서 가던 비담은 생각난 듯 뭔가를 툭 던졌다.

“이거... 필요하면 봐. 믿거나 말거나...”

비담이 나간 후 복신이 서둘러 펼쳐보자 그것은 당군의 군사배치도였다. 병력구성과 숫자, 진의 형태, 지휘하는 장수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적혀져 있었다.


이세민은 비담이 왔다는 말에 기가찬 듯 웃었다.

“돌아왔구나. 백제 함락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고 들었는데…”

비담은 대답이 없었다.

“넌 정말 네 멋대로구나. 춘추를 만나고 왔느냐?”

“예”

“백제지역에서 백제부흥회의 저항이 점점 격렬해지고 있다고 들었다. 그 뒤에 신라가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고…”

이세민은 날카롭게 추궁했다. 비담은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았다.

“백제부흥회에서 당군의 배치상황을 상세히 알고 있더군. 그 정보를 흘린자를 찾고 있다.”

이세민은 비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당시에 네가 사라졌었으니 의심받는게 당연하지 않겠나. 사실이 밝혀질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

이세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들은 비담을 감옥에 가두었다.


비담은 감옥에 갇혀 생각에 잠겼다. 뻔히 의심받을걸 알면서도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알면서도 왜 이세민에게 돌아왔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춘추에 대한 반발심, 그리고 이세민의 힘을 이용하겠다는 것이 하나의 동기는 될지언정 돌아올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고보면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늘 반복되었던 것 같았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하는 잘못과 거짓말. 문노가 육식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도 계속 했던것이나, 덕만의 편에 서서 미실을 압박했던 것도 마찬가지였고, 춘추에게 덕만을 연모하는 티를 내며 상처를 주었던 것도 그랬다.

‘난 왜 늘 이모양일까’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상대에게 그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고 그것이 뻔히 탄로날 줄 알면서 거짓말을 하고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세민을 배반하고 나서 그대로 도망쳐야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돌아와 거짓말을 하며 이세민의 인내심을 시험하였다. 비담이 그 알게모르게 속으로 좋아하고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었다. 타국의 볼모를 조건없이 등용하고 중요한 일마다 믿어주었던 이세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었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결국은 배신하고 돌아와서 거짓말을 하는 거라니... 비담은 푹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팔에 묻었다.


한달여 후 감옥에서 끌려나간 비담은 황제의 알현실 밖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알현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뜻밖에도 춘추의 목소리였다.

“백제부흥회는 신라와는 무관합니다.”

비담은 등줄기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자신을 말리던 춘추가 직접 이세민을 만나러 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춘추가 어째서 여기에...’

그때 문이 열렸다. 비담은 방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그럼 이자가 백제부흥회에 당의 군사정보를 흘린 것은 어떻게 설명할건가?”

이세민의 말에 춘추와 비담의 시선이 부딫쳤다. 춘추는 비담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제가 시킨 일이 아닙니다. 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세민은 못믿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춘추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신라의 볼모로서 그런 일을 벌였다면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저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이자 대신 신라의 왕족을 볼모로 두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신라가 점령한 백제지역의 저항을 마무리하는 대로 당군이 점령한 지역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세민은 팔짱을 끼고 춘추를 바라보았다. 춘추의 제안이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말에 불과하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신라와의 관계를 당장 끊을 수는 없었다. 신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고, 고구려와 전쟁을 하면서 바다건너 백제 땅에 당군을 언제까지 주둔시켜 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저런 상황을 고려하면 당장은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을 듯 했다. 비담은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듯 한 춘추의 밀고 당김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세민은 비담을 풀어주라 명했다.


풀려나 궁 밖을 나온 비담은 기다리고 있던 춘추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너야말로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돌아온거야? 네가 간자혐의로 잡혀있다고 이세민이 연락해주지 않았으면 죽을 뻔 했잖아.”

춘추는 조금 화가 난 듯 말없이 잠시 비담을 바라보더니 입을 뗐다.

“내 아들 법민을 같이 데려왔어. 여기 당나라에 두고 갈거야.”

“뭐? 어째서?”

“물론 볼모지. 백제부흥회의 일로 생긴 이세민과 당의 신료들의 의심을 풀기 위해서. 자리 잡을 때까지 잘 부탁해.”

비담은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박거렸다.

“잠깐잠깐… 나한테 네 애를 떠맡기고 가겠다고?”

“널 구하기 위해서 볼모로 데려왔으니까 당연하잖아”

“날 구하기 위해서 그 앨 데려왔다구? 그말을 믿을거 같아?”

비담은 춘추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춘추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난 그애보다 더 어릴 때부터 혼자 수나라에서 지냈어. 영리한 아이니까 잠잘 곳만 마련해주면 혼자 알아서 할꺼야.”

“난 전쟁하러 전선을 떠돌아 다녀야 하는 몸이야. 장안성에 붙어있을 시간 없다구.”

비담의 거절에도 춘추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

“알아. 잠잘 곳만 마련해 주라니까. 그리고 혹시 기회가 되면 이세민의 아들들에게도 소개를 시켜주면 고맙겠어.”

춘추는 황당해서 헤 입을 벌리고 있는 비담에게 한마디 덧붙이고 돌아서서 갔다.

“시간나면 무술수업도 시켜주면 좋고. 신라에서는 유신에게 배우던 중이었지.”

유신에게?”

비담은 앞서서 가버리는 춘추가 얄미운 듯 궁시렁거리며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갔다.

‘저녀석한테 또 당했군.’


법민은 쉽게 당나라 생활에 적응했다. 당나라 말도 금새 능숙해졌고 시종 하나만 데리고 장안성 여기저기를 활기차게 들쑤시고 다녔다. 비담은 틈틈이 그에게 서책과 무술을 가르쳤다. 법민은 가끔 꾀를 부리기도 했지만 대체로 열심히 비담이 시키는 대로 연습을 했다. 공중제비를 도는 연습을 하던 법민은 지쳤는지 숨을 몰아쉬며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근데요 스승님... 꼭 이런거 해야해요? 이런거 안해도 검술연습 할 수 있잖아요.”

비담은 시원한 그늘에서 빈둥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다가 법민을 힐끗 보며 말했다.

“힘들어?”

그러더니 일어서서 법민에게로 다가가서 몸을 굽히고 말했다.

“내가 시키는대로 잘 수련하면 유신을 이길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줄께.”

“유신 삼촌을요? 유신 삼촌이 신라에서 제일 쎈데.”

법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법민은 조용한 춘추와 달리 밝고 적극적이었다. 유신을 닮았는지 몸도 튼튼하고 무예의 감각도 있었다. 춘추 덕만 유신 그리운 얼굴들이 한 아이에게로 모여 있었다. 비담은 문득 지난 날의 추억에 마음 한편을 저며오는 것을 느끼며 법민을 번쩍 안아들고 눈코입에 닥치는대로 뽀뽀를 했다.

“무례하십니다.”

법민은 버둥거리며 비담을 밀어냈다.

“무례? 스승님한테 그런 말버릇이 어딨냐?”

비담은 법민의 코를 한번 꼬집고 놓아주었다. 법민은 그나이 또래 남자아이가 그렇듯 개구장이 짓으로 쉼없이 사건을 만들었고, 비담이 야단이라도 치려하면 아이들이 그렇듯 낙천적인 웃음으로 그의 마음이 풀리게 만들었다. 마지못해 떠맡게 된 아이였지만 비담은 생전 처음으로 가족을 갖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법민을 대할 때면 마음속에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다른 비담이 나타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법민을 보면서 미실과 문노가 그립기도 했지만, 반대로 자신을 버렸던 그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 미워지기도 했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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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속에서 춘추는 이미 30대라서 상관없지만 승호가 미성년자라 씬 쓰기 찜찜하다
심리변화를 나타내려면 더 자세히 써야할거 같고 승호를 생각하면 자세히 쓰면 안될거 같고..
비추분자는 이래저래 힘들다 ㅠㅠ
 

5.
이세민은 소정방에게 13만의 군사를 주어 배를 타고 고구려로 향하도록 했다. 비담도 소정방의 부관으로 함께 출전하였다. 고구려군은 당의 수군의 출항 소식에 황급히 당군의 진로로 예상되는 성에 군사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당군의 배는 성에 거의 도착할 무렵 갑자기 기수를 돌려 백강 하구로 향했다. 동시에 춘추는 유신에게 군사 5만을 주어 출병하게 하였고, 신라군 역시 고구려와의 접경지대로 향하는 듯 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백제의 영토인 백강 하구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백제는 고구려가 아닌 자신들이 표적인 것을 할고 허둥지둥 방어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당나라와 신라가 모두 고구려와 몇 년 째 전쟁중이라 방심하고 있었고, 의자왕도 정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있어서 빠른 시간에 군사를 제대로 동원할 수 없었다. 의자왕은 급한대로 계백에게 군사를 주어 백강하구에 도착한 당군과 합류하기 위해 진격하고 있는 신라군을 막도록 하였고, 동시에 고구려에 원군을 청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18만의 나당연합군이 언제 방향을 바꿔 고구려로 향할 지 모른다는 이유로 백제의 청을 거절하였다. 계백은 결사적으로 신라군의 전진을 막으며 그들이 당군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대로 며칠 더 시간을 끌면 군량미와 보급품이 없는 당군은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라군은 어째서 당도하지 않는 것인가?”

소정방은 초조하게 말했다.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이 탈영을 시작하고 있다. 이대로 언제 올지 모르는 신라군을 기다리는 것은 시간낭비다. 철수 준비를 하라.”

비담은 소정방을 달랬다.

“공을 세우러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시렵니까. 전투도 한번 못해보고 돌아간다면 폐하께 드릴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유신이 반드시 며칠 내로 당도할 것이니 기다려보시지요.”

며칠 후 유신이 계백의 저항을 뚫고 백강 하구에 보급품을 가지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굶주림에 지쳐 많은 병사들이 탈진한 후였다. 소정방은 불같이 노해서 김유신을 꾸짖었다.

“신라군의 보급이 늦어져 병사들이 굶주려 탈영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당군의 병력의 손실을 그대는 어찌 책임질 생각인가?”

유신은 고개숙여 사죄했다.

“소신의 책임입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사오나, 우선은 백제군과의 전투가 시급하니 전투가 끝난 후 책임을 물어주십시오.”

다른 장수들이 소정방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 나서서 유신의 편을 들어주는 당나라 장수가 있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입니다. 계백은 만만한 장수가 아닙니다. 어쨌든 보급품이 당도하지 않았습니까. 상벌은 추후에 논하시지요.”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유신은 어쩐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진격했다. 사비성은 쉽게 손에 넣었지만,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파천하였다. 연합군이 웅진성에 다다를 무렵에는 이미 백제 전역의 군사들이 웅진성을 지키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의자왕의 사신이 소정방을 비밀리에 만나고 갔다는 소식에 비담은 소정방을 찾아갔다.

“백제의 사신이 무엇을 제안했습니까?”

소정방은 그를 흘낏 보며 말했다.

“기밀 사항이라 말할 수 없다. 황제폐하께 직접 보고드려야 할 사안이다.”

비담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서 당할 백제가 아니었다. 뭔가 계책을 꾸미고 있을 것이 뻔했다. 십중팔구는 신라와 당을 이간시키기 위한 계책일 것이었다.

“그래서… 폐하께 보고를 드리실 건가요?”

“중대 사안이니 그래야 할 것이다.”

“폐하의 보고드리기 위해 장안성까지 다녀오는 시간이면 이미 백제는 완전히 방어태세를 갖출 것입니다. 장군께서 출병하면서 폐하께 받은 명은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의 술수에 넘어가 시간을 허비하고 시기를 놓친다면 폐하의 명을 실행하지 못한 이유를 뭐라 변명하실 것입니까?”

그제서야 소정방은 눈쌀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듯 했다.

“우선은 백제를 공격하면서 폐하께 보고를 드리더라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백제의 제안이 시간을 허비해도 좋을 정도의 것입니까?”

비담의 말에 소정방은 마침내 털어놓았다.

“의자왕의 제안은 고구려와의 외교를 끊고 백제에 친당정권을 세울 테니 공격을 멈춰달라는 것이었다.”

“공격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공격하면서 협상을 주도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합니다.”

비담의 말에 소정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담은 서둘러 전장의 후방에서 유신군을 지원하고 있는 춘추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군.”

춘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제안 받아들이라고 해.”

“뭐?”

놀란 비담의 물음에 춘추는 덧붙였다.

“단 당군을 웅진성에 받아들이도록 성문을 여는 조건으로.”

춘추는 바람처럼 선선히 웃으며 말했다.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께.”

비담은 역시 하는 듯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널 좋아하는지 알겠다. 나보다 나쁜 놈이라고 맘놓고 욕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가 너니까.”

춘추는 비담의 말에 샐쭉해서 그를 째려보았다.

넌 사랑고백 참 낭만적으로 하는구나.”


소정방은 백제를 유지시키는 대신 친당정권을 세우고 웅진성에 당군을 주둔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백제의 화친 제안을 받아들였다. 의자왕은 웅진성의 성문을 열어 당군을 무혈입성시켰다. 웅진성의 백제군이 무장해제 되고 의자왕은 당에 항복하였다. 그때 춘추가 유신과 함께 신라군을 이끌고 웅진성에 들이닥쳤다. 춘추는 소정방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백제 존속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백제의 영토는 최초의 맹약대로 신라와 당이 나누어 각자의 영토로 복속시켜야 합니다. 당의 황제께서 하신 약조를 장군께서 어기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소정방은 춘추의 말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았다. 결국 의자왕은 폐위되고 감옥에 갇혔다. 당군과 신라군은 백제의 영토를 나누어 각자의 군대를 주둔시켰고 백제는 그렇게 허무하게 멸망하였다.


“백제왕의 왕관에 박혀있던 단백석이야.”

비담은 손에 들고 있던 단백석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방안에는 반투명한 휘장이 늘어진 침대가 있었고, 보일 듯 말듯한 휘장 너머에 춘추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비담이 휘장을 걷고 들어가자 침대에는 알몸의 춘추가 허리만을 흰 깃털부채로 가린 채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춘추는 자신의 몸에 드리워진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에게 색공을 받는 사람은 세상에 너 하나일꺼야.”

비담은 관능적인 춘추의 모습에 희미하게 웃으며 침상에 앉아 춘추의 매끄러운 무릎을 쓰다듬었다.

“폐하의 옥체를 소신이 감히 함부로 다뤄도 되겠습니까”

비담은 장난스럽게 농을 걸었지만 목소리는 뜨거웠다. 춘추는 안개가 낀 듯 몽롱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오늘밤은 왕이 아니라 네가 꺾어주기를 기다리는 꽃일 뿐이야.”

비담의 손길이 춘추의 무릎을 떠나 허벅지로 올라갔다 부채 밑으로 사라지자 춘추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지며 해당화처럼 붉은 입술이 바튼 숨을 내쉬며 벌어졌다. 비담은 꽃잎을 헤치고 들어가며 거칠게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켰고 춘추는 유화라도 되는 것처럼 야한 몸짓으로 신음하며 반응했다.

쾌락으로 하얗게 지새운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고 있었다. 춘추는 오미자술을 따라 비담에게 주며 말했다.

“백제 지역에서 주둔하는 당군에 저항하는 백제부흥회라는 세력이 있어. 네가 백제부흥회를 지원해줬으면 해.”

춘추의 말에 비담은 고개를 갸웃했다.

“백제부흥회를 지원해? 왜 그런일을 해야하는데?”

“어차피 당군을 백제영토에서 몰아내야 신라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는데 신라가 전면에 나설수는 없잖아. 그러니 백제부흥회를 지원해서 당군을 몰아내는 이이제이 전술을 쓰려는거야.”

“너… 이세민의 뒤통수를 치려는거야?”

설마 하며 묻는 비담에게 춘추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당나라도 백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적국의 하나일 뿐이야. 너도 삼한일통에 당나라의 힘을 빌리면 빼앗은 영토를 나눠주게 될거라며 못마땅해했었잖아.”

“넌 정말…”

무서운 아이로구나 하는 말을 삼키며 비담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춘추가 이세민의 뒤에서 딴마음을 먹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한 춘추의 마음이 깊지 않은 것을 보고 기뻐해야 마땅한데도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혈육처럼 따르던 이세민을 백제를 공격하는데 이용하고 뒤에서 배반하면서도, 겉으로는 고분고분한 척 하며 고구려와의 전쟁을 다시 부추기는 춘추의 깜찍한 모습을 보며, 자신도 이세민과 마찬가지로 그저 춘추의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춘추는 비담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넌 내 신하가 아니잖아.”

“그럼 난 너의 뭐니?”

춘추는 말문이 막혔다. 말이 엇나가는 느낌이 계속되었지만 비담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 지 알수 없었다.

...하고싶지 않으면 하지 마. 다른 사람을 알아볼께.”

“하겠어.”

“그일을 하고나면 당나라에는 돌아가지 마”

“어째서?”

“너무 위험해. 증거는 없어도 내가 뒤에서 이런 일들을 조종하는 걸 짐작하고 있을텐데 이세민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잖아.”

“그럼 또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는거네.”

비담은 쓰게 웃었다.

‘결국 이런거였군. 너에게 쓰여지고 쓸모가 다하면 버려지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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