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열기가 슬슬 달아오르고 있다

덕만과 미실의 지도자로서의 리더쉽에 대한 비교가 한참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작가들이 갈팡질팡하며 미실을 너무 미화한 탓에 덕만이 욕을 많이 먹기도 했었고 나도 어떤 면에서는 미실이 덕만보다 앞서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나는 정치에 있어서는 미실보다 덕만의 통치방식에 동의하는 편이다.

내가 느낀 덕만의 통치방식의 특징은 열린 토론, 자발적 참여, 적에 대한 포용, 변화지향성이었다. 그런것들이 미실의 효율성의 정치에 묻히기에는 아까운 덕만의 정치덕목들이라고 생각된다.

역사에서 유사한 리더쉽을 보여준 정치가들이 많이 있었다. 카이사르, 링컨, 간디 와 같은 정치가들이고 공교롭게도 모두 정적에 의해 암살당했다. 자신의 적들을 포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 현실속에서 좌절된 셈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현실에 꺾여도 그 덕목들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춘추의 입장에서 덕만의 통치방식을 바라보는 팬픽.(비담이 빠진 팬픽은 처음 써보는 듯..)



춘추는 타클라마칸에서 왔다는 이모님을 처음에는 우습게 보았다. 천하게 자라 정치나 외교를 알기는 커녕 글이나 제대로 읽을까 싶었다. 막상 만나보고 나서도 '생각처럼 무식한 촌부는 아니로군' 하는 정도였다.

미실과 대적하는 모습도 서투르기 짝이 없어보였다. 저렇게 자기 속을 다 보여가면서 자기가 가진 패를 다 보여주고 하는 정치라니, 또 자신의 세를 불려가는 정치가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버려가면서 하는 정치라니, 그런 것은 수나라에서도 어디서도 들어본적이 없었다. 첨성대를 만들어 천기의 정보를 모든 이가 알 수 있도록 한다는 것만 해도 그랬다. 무지한 백성들을 쉽게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을 조건없이 버린다는 것, 아무도 악용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 대체 무엇을 위해 손해만 보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뻔히 결렬될 것을 알면서 화백회의를 소집하고 안건을 토론에 붙이고, 대체 왜 그런 시간낭비와 인력낭비, 감정낭비를 하는지 알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서투른 패에 미실과 귀족들이 자충수를 두어 걸려들고 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미실이 모자른 탓이라고 쉽게 생각했지만, 자신이 직접 덕만과 붙어보고 나서야 미실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덕만이었다.

미실과 춘추를 비롯해 권력자들은 서로 더 적게 잃고 많이 갖기 위해 싸움을 해왔다. 간혹 육참골단처럼 더 많이 얻기 위해 작은 것을 내주는 경우도 있긴 했다. 그러나 덕만은 자신이 보다 많이 갖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많이 주기 위한 싸움을 했다. 내가 가진것을 백성들에게 내놓을테니 너도 네가 가진것을 백성들에게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얻기 위한 싸움에만 익숙했던 귀족들은 내놓는 싸움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방법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덕만의 공격은 늘 진실을 규명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여 상대적으로 미실의 이를 추구하는 본성이 명확히 보이도록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미실은 초조해 질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스스로 자충수를 두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은 도저히 상식적인 방법으로는 싸움이 안되겠다 싶어 난을 일으키고 말았던 것이었다. 미실이 난을 일으키던가 포기하던가 둘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극단적으로 압박한 것이 덕만이었고, 미실은 난을 일으켰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만둠으로써 덕만의 방식이 옳았음을 덕만이 이겼음을 인정했다.

덕만은 춘추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승부를 걸어왔다. 모든 세력과 기득권을 춘추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혈혈단신으로 미실이 장악한 궁에 들어감으로써 춘추에게 자신의 말을 듣던가 자신을 버리던가 둘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압박한 것이었다. 덕만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것은 자신의 이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공격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춘추는 별수없이 덕만을 따르기로 했지만, 자신이 덕만에게 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패배감에 쓰라렸다.

그런 삐딱한 마음에 춘추는 덕만을 업신여기고 조롱하기도 하고 상처도 주었지만, 덕만은 그런 개인적인 모욕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뿐만아니라 위협이 되는 적인 미실과 미실의 사람들도 번번이 용서하고 등용했다.

"자꾸 그렇게 용서해주시니까 버릇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춘추뿐 아니라 유신과 알천도 덕만에게 자주 충고했고 덕만도 달리 방법이 없을 때는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안강성에서 도주한 자들을 처단한 것도 미실이나 유신같은 주변 사람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인 결과였다. 그러나 덕만은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몇년이 지나도록 그자들을 잊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고지식함이 주위사람들에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안으로 덕만의 건강을 좀먹어들어가기도 했지만, 덕만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런 덕만의 태도에 춘추는 거슬림을 느끼며 심한 말까지 하기도 했다.

"이모님, 위선이 지나치신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거슬림의 정체는 놀랍게도 열등감이었다. 검귀와 같은 무술실력을 가진 비담에게도 열등감이라곤 느껴본 적이 없는데, 덕만처럼 허술한 여인에게 열등감을 느끼다니 춘추 자신도 믿을수가 없었다. 머리라면 춘추가 한수 위였지만 덕만은 머리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차원의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비담은 일찌감치 덕만의 그릇에 졌다 생각하고 따르는 모양이었지만 춘추는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이 열등감의 근원을 파헤치기 전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춘추에게 정치는 쳐내는 것이었다. 꿀에 달려드는 개미떼처럼 권력에 달려드는 사람들을 계속 쳐내고 쳐내는 것이 정치였다. 적어도 수나라와 신라에서 그가 겪고 보아온 정치는 그러하였다.

그러나 덕만에게 정치는 포용이었다. 분열하고 갈라서고 자신의 이를 쫒아 서로 다른 곳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계속 붙잡고 설득하고 하나로 묶어 포용하는 것이 정치였다. 발상이 다르고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는 것에서부터 춘추는 덕만을 이길 수 없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춘추에게 또한가지 이상하게 보였던 것은 덕만은 자신의 사람들을 챙겨주지 않았다. 몇번이나 위험한 고비마다 나서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비담에게도 별다른 보상을 해주지 않았고, 유신이나 알천에게도 개인적인 포상을 내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일부러 거리를 두는 듯 말한마디 따듯하게 해주지 않았다. 포상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여성적 매력을 한껏 이용하는 미실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어째서 주위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고 챙겨주시지 않습니까? 사람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재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사람들은 재물이 아니라 인정을 바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말도 있지않습니까."

"내 인정을 받기 위해서 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에 따랐으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떠나면요?"

"내 생각이 틀린거겠지."

춘추에게는 권력이 목적이었지만, 덕만에게 권력은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보상을 해주지 않고 인간적으로 친목을 도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덕만을 따르는 젊은 화랑들은 점점 늘었다. 물론 덕만이 자신의 헌신에 별다른 포상을 해주지 않음에 불만을 토로하며 미실에게로 돌아서는 자들도 종종 있었다. 유유상종이랄까 미실의 주위에는 이를 쫒는 자들이 모여들었고, 덕만의 주위에는 꿈과 이상을 쫒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렇다면 나의 주위에는?'

춘추는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춘추는 자신이 왜 덕만을 따르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마지못해 따르는 척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덕만에게는 진심으로 이사람을 도와주고 싶다, 이사람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미실이 덕만에게 "또 다 말해버릴 뻔 했습니다." 하고 말했듯이 춘추도 덕만을 보고 있으면 "한수 가르쳐 드릴까요?" 하고 끼어들어 거들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곤 했다. 덕만에게는 주위 사람들을 덕만이 하고 있는 일로 빨아들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덕만이 하는 일을 보고 있으면 그 꿈의 원대함과 덕만의 열정에 가슴이 벅차올라 나도 같이 참여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고, 그 황홀한 느낌에 홱 돌아버려서 현재 각자가 처한 현실 따위는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비담은 그 두근거리는 설레는 느낌을 연모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유신도 처음에는 연모라 여겼지만 지금은 덕만에게 느끼는 감정이 연모 이상의 것임을 깨달은 듯 했다. 하긴 춘추 자신도 잠시 자신이 덕만을 연모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덕만을 마주대하고 덕만의 일을 돕고 있노라면 자신이 뭔가 옳은 일,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고, 스스로가 썩 괜찮은 사람이라는 좋은 느낌이 들었고 그런 가슴떨리는 뿌듯한 느낌이 누군가를 연모할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일품철로 무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농기구를 생산하는 덕만을 보며 춘추는 한탄했다.

"그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삼한일통을 이루시렵니까?"

덕만은 웃으며 말했다.

"삼한일통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너도 삼한일통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 않느냐? 네가 왕이 되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건 무엇이냐?"

"신라의 영토를 넓히고 강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모님의 궁극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신라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성들에게 굶주림과 괴로움만 주는 삼한일통을 위한 전쟁따위는 하지 말아야겠군요."

비꼬는 듯한 춘추의 말에 덕만은 미소지었다.

"바로 보았다. 내 고민이 그것이다. 또 삼한일통을 반드시 신라가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고구려나 백제가 하면 안되는걸까?"

어이없어하는 춘추를 보며 덕만은 웃었다.

"내가 여왕이 아니라면 당장 반역죄로 목이 날아갈 소리겠지. 다른사람들에게는 내가 한 말 비밀로 해다오."

그리고 이어서 탄식하듯 말했다.

"삼한일통이 되면 신라는 지금보다 훨씬 강성한 나라가 될것이야. 그런데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희생해야할지... 그리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얼마나 더 행복해질지는 모르겠구나."

"전쟁중에는 힘들겠지만 전쟁이 끝나면 이전보다 풍족해 질 것입니다."

"먹고 입는 것이 더 풍족해진다하여 더 행복하다고 말할수는 없는 것이니 하는 말이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전보다 불행할지라도 백성들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게끔 만들면 됩니다."

춘추는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전에 미실이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백성들은 진실은 부담스러워하고 희망은 버거워하며 소통은 귀찮아하며 자유를 주면 망설인다. 더 많은 것을 주어도 더 더 달라고 떼를 쓸 것이다."

덕만은 그런 춘추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는 나보다는 미실과 생각이 비슷해."

"그래서 제가 왕이 되는 것이 걱정되십니까?"

"아니다. 네가 미실과 나의 어깨를 딛고 우리들보다 멀리 볼수 있는 왕이 되길 기대한다."

덕만의 말에 춘추는 다시한번 울컥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 정말 싫었다. 덕만을 제치고 왕이 되려는 자신을 아껴주는 덕만,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커다란 생각과 말을 하는 덕만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것 같았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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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대상을 이렇게 가슴졸이며 보기는 또 처음인듯..
상이 하나 하나 발표날 때는 뭐 이런 어처구니 없는 병맛이.. 했는데
다 발표나고 보니 납득이 가더군요
남길은 준기에게 인기상을 양보하고 태웅에게서 베커상을 가져오고,
준기는 태웅에게 최우수상을 양보하고 남길에게서 인기상을 가져오고,
태웅은 남길에게 베커상을 양보하고 준기에게서 최우수상을 가져왔다 생각하면
나름 서로 윈윈한 결과라고 보여지네요
(상을 나눠먹기 한다는게 좋은건 아니지만 아무도 다치는 사람 없이 무난히 시상했다고 보여짐
뭐... 상이란게 그런거지 뭐...-_-)

새해에는 갤질을 끊으려고 했는데 참 쉽지 않다 
덕만의 석녀 탈출기임



유신이 혼인을 한 이후로 덕만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다. 복통과 두통이 점점 심해져서 나중에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진평왕과 마야황후는 어의로 하여금 공주를 진료하도록 하였다.

"공주님께서 복통이 있으신 이유는 복부에 어혈이 뭉쳐서 그러한 것이옵니다."

어의는 진평에게 고하였다.

"치료할 방법이 없겠는가?"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양기가 부족하여 그런듯 하옵니다."

"양기가 부족하다?"

". 과년하신 공주님께서 음양의 이치를 따르지 않으시니 넘치는 음기가 어혈이 되는 것이옵니다."

진평왕과 마야황후는 난처한 듯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허나.. 공주는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혼인을 하지 않더라도 색공을 받으시면 곧 쾌차하실 것이옵니다."

"색공?"

". 허하여 주신다면 제가 화랑들 가운데 공주님과 궁합이 맞는 자와 합궁일을 뽑아 보겠사옵니다."

"허나 덕만이 이를 받아들이겠는가?"

어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남녀간의 일을 제가 어찌 장담하겠사옵니까마는 공주님과 교합의 기운이 맞는 자가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이대로 두고 볼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마야황후의 말에 진평왕은 어의의 진언을 허락했다. 어의는 신중하게 화랑들의 체질과 사주를 공주의 것과 비교하여 화랑별로 합궁일을 뽑았다.


덕만은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최근 밤마다 2-3일이 멀다하고 화랑들이 차례로 덕만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뭔가 감추는 것이 있는 듯 바싹 얼어서 말을 더듬거리다가 싱겁게 가버리는 화랑도 있었고, 노골적으로 덕만에게 다가와 손을 잡다가 덕만의 호통에 물러가는 화랑도 있었다.

"공주와 궁합이 맞는 자가 이렇게 없단 말인가"

진평왕의 탄식에 어의는 머리를 조아렸다.

"아직 남은 자들이 있으니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알천랑 들었사옵니다"

덕만은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알천..? 오늘은 너냐?"

덕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살풋 웃음을 지었다. 알천은 얼굴이 확 붉어져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공주님... 방해가 되었다면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덕만은 그런 알천이 귀엽다는 듯 말했다.

"아니다. 이왕 왔으니 오랜만에 둘이 이야기나 하자꾸나. 앉거라."

알천은 덕만의 옆 의자에 앉았다. 늘 이렇게 공주의 옆에 앉아서 회의를 해왔지만, 야심한 밤에 가벼운 옷을 입은 공주와 단둘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기분은 사뭇 달랐다. 알천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덕만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공주님께 색공을 바쳐 어혈을 치료를 해드리는 것이 그대의 임무이네.'

어의의 말이 떠올랐다.

'공주님께서 경험이 없으시니 그대가 이끌어드려야 하네'

신녀의 말도 떠올랐다.

알천은 입이 바짝 말라오는 것 같아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도 그다지 경험이 많다고 할 수 없는데 난감했다.

"어려운 점은 없느냐?"

맑은 눈으로 자신을 보며 말하는 덕만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몸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알천의 말에 덕만은 함박웃음지었다.

"괜찮다"

"송구하오나... 제가 잠시 공주님의 손을 잡아도 되겠습니까?"

알천은 겨우 그말을 하고 귀까지 빨개졌다. 덕만은 의아스러운 듯이 알천을 보고 손을 내밀었다. 알천은 떨리는 손으로 덕만의 손을 잡았다. 덕만이 낭도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두드리고 다녔는데 지금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대체 왜들 그러는 것이냐?"

덕만의 물음에 알천은 대답없이 다시 말했다.

"공주님... 잠시 눈을 감아주시겠습니까"

덕만은 알천이 무슨 속셈인지 궁금한 듯 훗 웃더니 눈을 감았다. 알천은 용기를 내어 덕만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향긋한 여인의 향내와 부드러운 숨결이 느껴졌다. 덕만의 입술은 꽃잎보다도 부드럽고 촉촉했다. 알천은 아득한 느낌에 붕 떠오르는 듯 했다. 자신도 모르게 덕만의 허리를 안기 위해 손을 뻗던 알천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덕만과 눈이 마주쳤다.

"....뭐하는거야?"

아무 느낌이 없는 듯 피식 웃는 덕만을 보자 알천은 기운이 쑥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이어 부끄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송구하옵니다.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알천은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났다. 손발이 오그라들고 얼굴이 화끈화끈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

덕만은 황급히 자리를 뜨는 알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했다.


"다들 실패했단 말이냐?"

마야황후의 탄식에 어의는 황송한 듯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공주님의 음기가 예상보다 무척 강하신 듯 합니다. 어지간한 양기로는 부족할듯 합니다"


비담도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화랑들끼리 쑥덕쑥덕하면서 비담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것이었다. 알천에게도 물어봤지만 얼굴만 붉히고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덕만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듯 했다. 비담은 하는 수 없이 춘추를 붙잡고 물어봤다. 춘추는 빙글빙글 웃는 것이 뭔가 알고 있는 듯 했지만 말해줄까 말까 저울질을 하는것 같았다.

"뭔데~? 빨리 말해봐."

"됐어. 너 알아봐야 소용 없어."

"이게 정말...?"

비담은 때릴 듯이 들고 있던 칼을 확 치켜들었다. 하지만 춘추는 쯧쯧 혀를 차더니 먼 산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널 도와주면.. 나한테 뭘 해줄래?"


서고에서 책을 읽던 덕만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또다시 복통이 심해져오고 있었다. 머리도 쌀쌀 아파오는 것이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잠시 멍하니 쉬고 있는데 서고로 들어온 것은 춘추였다.

"춘추야"

덕만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도도하게 말없이 지나치곤 하던 춘추가 오늘은 왠일인지 미소로 인사를 받았다.

"무슨 책 보러 왔니"

덕만이 일어서서 다가가자 춘추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이모님을 뵈러 왔습니다."

"나를?"

덕만은 춘추가 자신을 찾았다니 기뻤다. 춘추는 덕만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춘추가 자신을 안아주다니... 그런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런데 춘추는 입술로 덕만의 귀를 간지르는가 싶더니 덕만의 목에 입을 맞췄다. 덕만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장난 그만해~"

덕만은 춘추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밀었다. 그러자 춘추는 덕만의 손목을 잡았다. 부드럽게 잡은 듯 했지만 역시 남자인지라 뺄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이모님은 그게 문제랍니다."

"뭐가?"

"남자를 남자로 보지 않는것 말입니다."

"무슨 소리야?"

"남자들은 다 똑같습니다."

춘추는 반쯤 감은 눈으로 덕만을 지긋이 보며 말했다.

"남자에게는 여자는 여자일 뿐입니다. 그게 공주님이든 누구든요."

덕만은 기가 막혀서 하 웃었다. 이걸 귀엽다고 해야하는지 철이 없다고 해야하는지...

""

하지만 춘추는 덕만의 다른 손목도 잡더니 덕만의 양팔을 뒤로 꺾으며 안았다.

"아야.."

덕만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몸을 비틀어 댈 수록 춘추의 몸과 부딫치며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덕만을 보며 춘추는 위험한 눈빛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소용 없습니다. 공주님"

춘추의 손이 덕만의 옷 속으로 들어왔고 덕만의 맨 가슴에 춘추의 손길이 닿았다. 덕만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럴 땐 그냥 남자가 하는 대로 따르시면 됩니다."

"네가 어떻게... 이런 짓을..."

덕만은 화난 눈빛으로 춘추를 보며 꾸짖으려 했지만 떨리기만 할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춘추는 아랑곳 없이 덕만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태연하게 덕만의 눈을 바라보며 웃을 뿐이었다. 덕만은 춘추의 행동에 화가 나다 못해 슬퍼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춘추는 덕만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자 덕만의 귀에 속삭였다.

"남자는 어디까지나 남자라는 걸 잊지 마세요."

춘추는 덕만을 풀어주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빙긋 웃으며 서고를 나갔다. 춘추가 나가자 덕만은 맥이 탁 풀리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담은 춘추가 일러준대로 어의를 찾아갔다. 지금까지 모든 화랑들이 공주의 침소를 드나드는 동안 자신만 몰랐다니 눈이 홱 돌 것 같았다. 비담은 다짜고짜 어의의 멱살을 잡았다.

", 이 돌팔이야! 공주님의 병을 치료한답시고 남자들을 공주님 침소에 들이밀어? 이게 확 뒤지고 싶냐?"

칼을 뽑아든 비담이 어의의 목에 칼을 들이대자 어의는 사색이 되어 빌었다.

".. 살려주시오. 비담랑. 공주님의 치료를 위해 어쩔수 없었소."

"이게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뭐가 어째?"

비담이 다시 칼을 내리치려고 하자 어의는 눈을 감고 비명을 질렀다.

"너 근데 왜 나는 합궁일을 주지 않은 거야? 이유가 뭐냐? 화랑들은 다 한번씩 들이밀었다며."

비담의 물음에 어의는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비담랑의 체질로 보아 양기가 지나쳐 공주님께 해가 될까 걱정하여 제외한 것이오."

비담은 어금니를 깨물고 실실 웃으며 칼등으로 어의의 목을 슥슥 긁었다.

".. 니가 정말 죽고싶은게로구나. 좋은 말로 할때 당장 내 합궁일로 처방전 써라."

어의는 비담의 눈치를 살피며 허둥지둥 종이를 펼치고 붓을 잡았다.

"공주님과 비담랑의 사주를 풀어보니 잘 맞아 특별히 날을 고를 필요는 없을것 같소이다."

"그럼 오늘 밤으로 써줘"

어의는 처방전을 내밀며 비담의 눈길을 피하며 머뭇머뭇 말했다.

"공주님께 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오."

"그딴건 내가 알아서 해"

비담은 씨익 웃으며 처방전을 홱 낚아채서 사라졌다.


춘추는 밤바람을 맞으며 걷다 하늘을 보았다. 별이 하나 둘 나타나고 있었고 북두칠성도 언제나처럼 그자리에서 하늘을 돌고 있었다. 덕만의 가슴의 부드러운 감촉이 아직도 손에 느껴졌다. 십여년간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가슴의 감촉이 왜 오늘 생각 나는 것일까. 수많은 여인들의 가슴을 만지면서도 한번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춘추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비담은 처방전을 들고 희희낙락하며 공주의 침소로 향하다 멍하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춘추를 보았다.

"뭐 해?"

춘추의 어깨를 툭 치자 춘추는 비담을 보았다.

"처방전은 받았어?"

비담은 처방전을 팔랑팔랑 흔들어보였다. 춘추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해봐. 나랑 약속한거 잊지 말고..."


비담이 공주의 침소를 지키는 나인에게 처방전을 보여주자 나인은 비담을 들여보내 주었다. 덕만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두통때문이기도 하지만 낮에 춘추의 행동에 상처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춘추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일까?'

'나에게 모욕감을 주려는 것일까?'

'나는 어찌 행동하면 좋은가?'

덕만은 한숨을 쉬며 아픈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때 비담이 뭐가 좋은지 혼자 시시덕거리며 들어왔다.

"비담?"

"공주님"

비담과 덕만의 눈빛이 마주쳤다. 비담의 밝은 표정을 보니 덕만도 어쩐지 무거운 생각은 사라지고 픽 웃음이 나왔다.

"뭐가 그리 좋으냐?"

"공주님을 뵈니까요"

비담은 덕만의 옆에 착 붙어앉아서 덕만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덕만은 문득 춘추의 말이 떠올랐다.

'남자에게는 여자는 여자일 뿐입니다. 그게 공주님이든 누구든요.'

'비담이 나를 여자로 보는 것인가?'

덕만은 문득 자신이 얇은 야장의 차림으로 있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졌다. 나비 날개처럼 가벼운 천 아래로 가슴이 훤히 들여다 보일 것이었다. 비담이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앉아서 자신을 핥듯이 보고 있는 것을 느끼자 비담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비담은 덕만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쓸었다. 비담의 손길이 덕만의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풀어주자 따듯한 기운이 몸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괜찮다."

덕만은 야릇한 느낌에 어색하게 웃으며 비담의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비담은 덕만의 어깨로부터 팔을 쓸어내려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덕만의 등을 쓸어주는가 싶더니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덕만은 놀라서 눈만 깜박 거릴 뿐 말도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비담의 뜨거운 목의 감촉이 덕만의 목에 느껴졌다. 이 느낌이 싫은 것인지 좋은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만.. 하라.."

덕만은 겨우 목소리를 냈지만 기어들어가는 듯 했고 양손으로 비담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비담은 덕만의 입술을 검지손가락으로 막더니 녹을 듯 열기를 띈 눈빛으로 말했다.

"공주님.. 지금은 아무 말씀 마시옵소서"

곧이어 비담의 입술이 덕만의 입술에 포개졌다. 덕만은 하늘이 핑 도는 것 같이 어지러웠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찌 해야하지?'

비담은 덕만을 번쩍 안아들고 침대로 향했다.

'이럴 땐 그냥 남자가 하는 대로 따르시면 됩니다.'

춘추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비담은 덕만을 침대에 내려놓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덕만은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꼭 감았다.


다음날 춘추는 환한 얼굴로 날듯이 걸어오는 비담과 마주쳤다.

"약속대로 이제 내 사람이 되는거지?"

춘추의 말에 비담은 가볍게 대답했다.

"좋아. 춘추, 너의 사람이 되겠어."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춘추에게 덧붙였다.

"근데 내가 장담하지만 한달 내로 넌 공주님의 사람이 되고 말꺼야. 공주님은 누구든 품을 수 있는 큰 그릇이시거든"

춘추는 훗 웃으며 덕만의 포근한 품을 떠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뭐 아주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닌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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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면 선덕여왕도 끝이네요
아 제발 이게 마지막 팬픽이 되어야 할텐데...(벗어나고파~)
비담이 거짓으로 난을 일으키고 덕만은 죽고 비담은 살아남는 엔딩임


비담은 폭포 위에 서서 낭떠러지를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푸른 물이 소용돌이치며 아래로 아래로 사라져갔다. 알천과 유신이 헐떡이며 비담을 쫒아 올라왔다.

비담! 이제 그만 항복해라. 네 수하들은 모두 죽거나 추포되었다.”

유신의 말에 비담은 뒤돌아보았다. 온몸이 피투성이에 화살을 맞았다 뽑은 흔적까지 있었지만 비담은 여전히 경계심을 늦출 수 없는 검귀였다. 비담은 말없이 냉랭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비담, 그대가 어찌 여왕폐하께 이럴수가 있는가. 폐하께서는 지금 병이 위중하시네.”

알천이 안타깝게 말했지만 비담은 듣고있지 않는 듯 했다.

“폐하에 대한 그대의 충심은 거짓이었단 말인가? 폐하께서 편찮으시니 딴마음을 먹은 것인가?”

알천의 거듭된 설득에도 비담은 마치 다른 세상에 가 있는 듯 반응이 없었다.

“둘이 같이 덤벼도 날 쓰러뜨릴 자신이 없냐? 말장난이나 하고 있게...잔말 말고 덤벼라.”

씨익 웃으며 비담이 칼을 겨눌 때 춘추가 군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비담!”

춘추는 유신과 알천을 제치고 앞으로 나갔다. 비담은 춘추를 보더니 빙긋 웃으며 칼을 내렸다.

“아...옛 친구들이 다 모였네.”

춘추는 성난 눈으로 비담을 보며 말했다.

“그대로 인해서 폐하께서 얼마나 충격을 받으셨는지 아는가?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비담은 그런 춘추를 보며 대답없이 딴말을 꺼냈다.

“너... 내가 죽었으면 하고 바라지?”

춘추는 어이없다는 듯 비담을 보고 대답했다.

내가?”

그래... 나같은건 너한테 방해만 되잖아.”

이죽거리며 딴전을 피우는 비담에게 춘추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너 정말.. 내 진심을 몰라서 이러는거야? 내가 너한테 그정도밖에 안되었던거야?”

몰라. 그러니까.. 말해봐.”

니가 죽는거... 싫다. 넌 쓸모가 있어.”

“...
정말?”

비담은 춘추의 진심을 가늠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춘추를 바라보았다.

이미 네 수하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넌 더이상 내게 위협이 되지 않아. 투항하면 폐하께서 네 목숨만은 살려주실거야. 나와 함께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자.”

춘추의 말에 비담은 킬킬 웃었다.

“눈물나게 고맙다. 내가 필요하다니...”

그러더니 돌연 눈빛을 바꿔 살기를 띄며 말했다.

“근데 어쩌지? 난 누구 밑에서 있을 사람은 아니어서 말이야. 왕이 못될 바에는 왕을 죽이는 자가 되겠어.”

그러더니 번개처럼 칼을 들고 춘추에게 달려들었다.

“춘추공!”

유신은 놀라서 달려들어 비담의 칼을 막아냈다. 동시에 춘추공 앞을 막는 알천의 칼에 비담은 허리를 찔렀다. 비담은 피가 흐르는 허리를 잡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모두 얼굴이 하얘져서 아무말도 없는 사이에 비담은 피를 흘리며 폭포 아래로 떨어졌다.

...!’

폭포는 우뢰와 같은 소리와 함께 비담을 삼켜버리고 아무일 없다는 듯 흘러갔다.


“비담은 시신은 찾지 못했사오나 깊은 상처를 입고 폭포로 떨어졌으니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춘추의 말에 병상에 누운 덕만은 대답없이 얕은 한숨만 쉬었다. 춘추는 그런 덕만을 보며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부르쥐었다.

“비담이 어찌 그럴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아직도 그자를 마음에 두고 계신 것입니까?”

덕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춘추를 보았다.

“춘추야. 비담을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나다...”

춘추는 덕만을 잠시 보며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미워하고 싶습니다... 근데 잘 안됩니다.’

춘추는 인강전을 돌아보며 다시 눈물을 삼켰다.


밤이 깊어가며 인강전은 조용한 어둠에 휩싸였다.

“덥구나. 창문을 열거라.”

덕만은 시녀에게 지시했다. 시녀가 창문을 열자 다시 말했다.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물러가 있거라.”

“하오나...”

시녀는 폐하의 병세가 혼자 두어서는 안될 상태라는 것을 알았지만 병자같지 않은 덕만의 단호한 눈빛에 방문을 닫고 물러갔다. 풀벌레소리도 잦아들어가는 한밤중이 될 무렵, 검은 그림자 하나가 스르르 열린 창문으로 들어섰다. 그림자는 발소리도 없이 조용히 여왕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여왕은 눈을 감은 채 자고 있는 것인지 깨어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림자는 침상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했다.

“상대등 비담, 폐하의 명을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덕만은 눈을 떴다. 그리고 비담을 보았다. 비담은 고개를 들어 덕만을 보았고,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에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이 고였다.

“왔구나.. 비담.. ”

덕만은 손을 내밀었고 비담은 가랑닢처럼 갸날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날 위해서 모든걸 버려주었구나... 네 지위 권력 사람 꿈... 천년의 이름까지도...”

덕만은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날 위해 모두 버렸어... 난 널 위해서 해준게 없는데.. 미안하다...”

비담은 덕만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줄 수 없는 것을 주셨습니다. 저를 가장... 믿어주셨습니다.”

덕만은 비담의 손을 꼭 잡았지만 남아있는 힘이 없었다.

“넌 죽음 따위 두렵지 않지? 난 조금 두렵구나... 그래도 너와 함께 있으니 마음이 놓여”

비담은 덕만의 약한 말에 참던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침상에 앉아 덕만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널 더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제와서 후회가 된다”

덕만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비담이 말을 막았다.

“폐하..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덕만은 쓸쓸히 미소지었다.

“난 잊어버리고.. 신라도 잊어버리고.. 새처럼 자유롭게 살아..”

덕만의 말에 비담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덕만의 입술을 막았다. 그리고 덕만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비담의 눈물이 덕만의 뺨에 떨어졌다. 비담은 자신의 손을 잡은 덕만의 손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비담은 덕만의 손목의 맥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그녀의 몸에 쓰러졌다. 그것은 소리없는 울음, 비명없는 절규였다.


춘추는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에 원군을 청해놓고 자신도 유신과 함께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백제군과의 전선에서 야영을 하던 춘추는 잠자리가 불편해서 뒤척거리고 있었다.

“백제군이다!”

“습격이다!”

밤을 틈탄 백제군의 야습이었다. 춘추는 갑옷도 갖춰입지 못한채 칼을 들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사방은 온통 불화살로 인한 불바다였고 어두워서 적과 아군을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적군을 막아선 아군의 병사가 있었다. 춤추듯이 날듯이 순식간에 적군을 베어버리는 그 병사를 보며 춘추는 어쩐지 그의 움직임이 낯익은 듯 느껴졌다. 그때 흐르는 화살을 맞은 춘추는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춘추는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사방은 조용하고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타닥타닥 작은 모닥불이 타는 소리가 나며 옆에는 누군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춘추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비담?!”

내가 죽은것인가 싶었지만 상처에 쑤시는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면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너...살아있었구나?”

비담은 춘추가 정신을 차린 것을 보자 안심한 듯 미소지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춘추의 말에 비담은 어제 만났다 다시 만난 것 처럼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저기.. 백제에도 갔다가 고구려에도 갔다가.. 네 옆에도 있다가..”

춘추는 비담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 어째서 무엇 때문에 여왕을 배신하고 난을 일으켰는지 물으려고 입을 뗐다. 그런데 바로 그때 여왕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나다...’

춘추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너... 여왕폐하의 명으로 난을 일으킨 거였어?”

비담은 춘추의 말에 가볍게 대답했다.

“어”

비록 여왕폐하의 명이었다지만 비담의 난 덕분에 춘추는 구귀족들의 세력을 정리하고 수월하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춘추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떠돌아다니는 비담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감정에 울컥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비담에 대한 고마움보다도 왜 나를 떠났냐 왜 나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느냐는 원망의 마음이 앞섰다.

“나와 같이 서라벌로 가자.”

비담은 고개를 저었다.

난 이미 죽은 사람이야.”

비담은 칼을 들고 일어섰다.

곧 병사들이 널 찾으러 올거야.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그러나 춘추의 눈물이 주르륵 떨어지는 것을 보자 마음이 약해져서 다시 앉아 춘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 날 필요로 할 땐 니 곁에 있을께.”

병사들이 춘추를 찾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비담은 일어서서 밝아오는 아침 햇살 속으로 사라졌다.





난 사실 비담이 여인에 대한 연모에만 목숨거는 오리가 되기보다는 대의나 권력에 야망이 있기를 바랬는데 말이죠
나쁜놈이라고 욕을 들어먹더라도 말이죠
춘추와 유신이 삼한일통을 이루는 과정에 비담도 나오는 소설이 있으면 재미있을거 같아요
(너무 억지설정이니 드라마로는 말고..)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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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덕라인에 별로 관심 없었다

새벽에 선갤의 낭도덕만 팬픽의 난을 보고 이런 터무니 없는 프로젝트가.. 싶었는데

30분후 낭도덕만 화랑비담 구상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더 어이가 없었다

남기르보다 선갤이 더 마성인듯...

이젠 갤과 팬픽의 세계를 떠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텐데.. 쩝..



밖에 나무에 기대어 서있던 것은 비담이었다. 덕만이 나올 때 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듯 했다.

너 계집이었냐?”

비담의 말에 덕만은 놀라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몇년간 다른 낭도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몸을 씻을 때마다 한밤중에 혼자 몰래 오며 조심했는데 비담한테 들켜버린 것이었다.

제발..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왜 숨기고 있는건데?”

...사정이 있어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비담은 뭔가 캐내려는 눈빛으로 덕만을 바라보았다. 덕만은 비담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에 대해서 들려오는 소문들은 별로 좋은 것들은 없었다. 걸리기만 하면 쉽게 베어버린 다는 둥, 윗사람들에게도 안하무인이라는 둥, 뭔가 미실새주가 시키는 비밀스런 나쁜 일들에 연루되어 있다는 둥 뒷말이 많았다. 비담은 기분나쁘게 빙글빙글 웃으며 말없이 덕만을 바라보았다. 덕만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오금이 저려드는 것 같았다.
비밀을 지켜주시기만 한다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뭐든지?”

비담은 여전히 나무에 기대 서서 픽 웃기만 했다. 비담도 덕만에 대해서 잘은 알지 못했다. 그저 덕만이라는 여인처럼 곱상하게 생긴 낭도가 용화향도에 있어서 화랑들이 껄덕댄다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보았을 뿐이지만 그냥 평범한 미소년이 아니라 어딘지 미천한 낭도들과는 다르게 기개가 있고 눈빛이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하긴 그러니 쟁쟁한 화랑들이 그를 정인을 삼고자 해도 거절하는 것일 터였다.

그럼 비밀을 지켜줄테니.. 내 정인이 되어라.”

?”

무슨 뜻인지 몰라?”

화랑들 사이에도 서로 정인 관계라고 하면 그냥 장난인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성적인 관계를 의미했다. 덕만은 저도 모르게 잠시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할꺼야 안할꺼야?”

잠시만.. 생각할 말미를 주십시오”

좋아. 3일 주지.”

겨우 꺼낸 덕만의 말에 비담은 의외로 순순이 씩 웃으며 돌아서서 갔다.


3일동안 고민을 해봤지만 답이 없었다. 비담에게 잘못 걸렸다 손발이 날아간 사람들도 허다했다. 덕만이 얕은 꾀를 낸다면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궁을 떠나거나 비담의 정인이 되거나 둘중에 하나였다. 고민하느라 눈이 퀭해진 덕만이 혼자 생각하느라 외진 곳을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뒤에서 덕만을 끌어안는 사람이 있었다. 계속 덕만에게 추근덕대던 화랑 석품이었다. 석품은 덕만의 귀에 속삭였다.

언제 내 처소로 올 것이냐. 벌써 여러번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이거.. 놓으십시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아니된다고...”

덕만은 석품의 손을 풀려고 했지만 덕만의 힘으로는 어림 없었다.

네발로 오지 않겠다면 억지로라도 끌고 가겠다.”
석품은 덕만의 옷 속으로 손을 넣으려고 했다. 이러다가는 석품에게도 들킬 판이었다. 덕만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놓으십시오. 지체높은 화랑이 이게 무슨 무도한 짓입니까.”

그때 석품의 손이 느슨해 지는 것을 느꼈다. 덕만이 뒤돌아보니 석품은 목덜미를 잡혀 저만치 나가떨어져 있었다. 비담이었다. 석품을 얼굴이 빨개져서 일어나서 비담에게 소리쳤다.

네놈이...가만두지 않겠다.”

석품은 홧김에 칼을 뽑아들고 비담에게 덤볐다. 하지만 비담의 실력을 알기에 감히 덤비지는 못하고 주춤거리고 서있었다. 비담은 칼도 뽑지 않고 비죽 웃으며 석품에게 한발 한발 다가갔다.

...가만안두면 뭐...”

석품은 입만 씰룩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비담은 웃음을 거두고 차갑게 말했다.

덕만인 내 정인이니까 건들지 마라.”

?”

석품과 덕만이 동시에 놀라 말했다.

내 정인이라고~”

비담은 다시 장난스럽게 웃으며 덕만의 팔을 잡고 끌어당겨 덕만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덕만은 기가 막혀서 비담을 바라보았다. 석품은 분해서 부들부들 떨더니 칼을 집어넣고 가버렸다. 비담은 그런 석품을 비웃듯이 바라보다가 덕만을 보고 다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제부터 너한테 치근덕 거리는 놈들 있으면 당하고 있지 말고 화랑비담하고 비재 뜨고 오라고 똑바로 말해. 알았어?”

...감사합니다”

덕만은 머뭇거리다 말했다. 비담은 덕만을 흘낏 보며 다시 말했다.

고마워할거 없어. 난 나 먹을거 남한테 절대 안 주거든.”

그러더니 덕만의 턱을 잡고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지금 좀 고픈데.. 먹으러 가야겠다. 따라와.”

아직.. 대답을 안드렸는데..”

아직까지 궁을 안떠나고 있는건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거 아냐?”

그리고 덕만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갔다. 덕만은 당황해서 말고 못하고 반항할 생각도 못하고 끌려갔다. 그런데 비담이 덕만을 끌고 간 곳은 국밥집이었다. 국밥을 먹으며 비담이 놀리듯이 말했다.

너 며칠사이에 왜 이렇게 비실비실해졌냐? 나 때문이냐?”

왜 매사에 그렇게 삐딱하고 빈정거리는 투로 이야기 하십니까? 세상 참 편하게 사십니다”

덕만은 어쩐지 비담에게 짜증이 나서 국그릇을 뒤적이며 먹는둥 마는둥 하며 말했다.

내가 편하게 사는거 같아?”

돌연 비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다 장난으로 하는거 같냐구.”

덕만은 움찔 해서 입을 다물었다.

역시 무섭다..’

나도 너에 대해서 아는게 없지만 넌 나에 대해서 뭘 알아?”

차가운 비담의 말에 덕만은 할말이 없어 고개를 숙인 채 다시 국밥을 뒤적였다. 비담은 말없이 먹다가 다시 한마디 툭 던졌다.

이제부터 목욕할 때 내 처소에 와서 해. 그래야 들키지 않을거아냐.”


덕만이 비담의 정인이 되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이제는 더이상 덕만에게 지분거리는 화랑이나 낭도들이 없어졌다. 다행이긴 했지만 반대로 골치거리도 생겼다. 비담을 좋아하던 궁의 유화들의 질시를 한몸에 받게 되면서 그것도 나름대로 피곤했다. 하지만 비담의 처소에 아무때나 드나들면서 편하게 씻거나 여인으로서의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면서 이전보다는 한결 생활이 편해졌다.

비담은 처소에 잘 붙어있지 않아서 마주친 적이 없었다. 어쩌다 궁에서 만나면 비담은 마치 정말 다정한 정인이라도 되는 듯 덕만에게 살갑게 대했지만, 그뿐이었다. 덕만도 차츰 비담이 정인이 되라는 말에 대한 긴장감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느날 처럼 덕만은 비담의 처소에서 몸을 씻고 천으로 몸을 가린 채 탕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번도 처소에 붙어있지 않았던 비담이 문에 기댄 채 덕만을 보고 있었다. 웃음기 없는 냉정한 표정이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덕만은 놀라서 나직하게 말했다. 비담은 말없이 덕만의 팔을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

... 이러십니까”

덕만은 일부러 어색한 느낌을 깨려는 듯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남자들 사이에서만 몇년을 지낸 덕만은 남자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남자들이라고 해도 그냥 다 친구들이고 전우들일 뿐 어깨동무를 하거나 얼싸안는다 해서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비담은 눈을 마주치는 것 만으로도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하게 되곤 했다. 그 뜨거운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부끄러운 느낌이 들어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비담랑이 부르기만 하면 어떤 유화든 비담의 처소로 달려갈 것이라던 소문도 전에는 웃어넘기고 잊었었는데 오늘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랐다.

넌 내 정인이잖아. 잊었어?”

비담은 덕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비담의 숨결이 닿았을 뿐인데 덕만은 몸이 뜨거워지는것 같았다. 비담은 덕만의 팔을 잡고 끌고가 침대에 던졌다.

“비.. 비담랑..”

덕만은 몸을 웅크리고 들고 있던 천으로 몸을 가리기에 급급했다.

“저는.. 아직..”

“아직 뭐?”

“그게.. 저는...아직.. 준비가...”

덕만의 울먹이는 눈을 본 비담은 갑자기 킥킥 웃으며 옆에 벗어놓은 덕만의 옷을 덕만에게 던졌다.

“그래.. 너도 곧 다른 여자들처럼 나한테 가져달라고 사정하게 될테니까..”

비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나가버렸다. 덕만은 긴장이 풀려 침대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ㅂㄷ씬 쓰기도 귀찮고 잘 쓸 자신도 없어서 이렇게 마무리~ ㅋㅋ


다 어디서 나온듯한 장면이라 쓰는데 그다지 오래걸리지는 않았다

독자성도 없는거 같아서 애착도 없고..

근데도 안쓰고 머리속에만 남겨놓으면 숙제 안한것 마냥 찜찜한 느낌이 드니.. 에휴~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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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회에서 비덕 진도가 꽤 나갔는데 더 원하는 시청자들이 많네요
전쟁같은 절박한 상황속에서 속 마음이 나올테니
동굴같은데 숨었다가 키스신 나오면 어떠냐고 하구요
근데 사극인데다 덕만이 석녀이미지가 강해서 키스신은 안나올거 같아요
그래도 둘이 애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달콤한 말을 주고받기만 해도 좋을거 같아요
키스신은 상상으로만 만족해야죠..ㅠㅠ


 

동굴을 찾아 피신한 덕만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겨우 백제군의 기습을 피해서 살아나오긴 했지만 적지에 고립되어 신라영지까지 빠져나가려면 백제군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야 했다.

비담은 밖에서 동굴이 보이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가져다 입구를 가렸다.  

“여기까지 쫒아오진 않겠지. 기다렸다 밤이 되면 도망치죠.”

덕만은 몸이 지치기도 했지만 그보다 군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쓰라림에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건 다 내 실수야... 백제를 얕잡아보지 말았어야 했어.”

비담은 어떻게 덕만을 위로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노련한 백제의 장수에게 전쟁 경험이 별로 없는 비담과 덕만이 완전히 당한 것이었다.

“아.. 백제 장군 녀석 생각보다 똘똘하네.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인줄 알았더니...”

비담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덕만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이번 전투의 패배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했다. 

“전쟁에 패배하고 여왕이 사로잡히면 백제는 신라에게 가야지역 땅을 요구할 것이다.”

덕만은 쓴웃음을 지었다.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쏟아부어야 하는 전쟁에 패배한 것만으로도 타격이 큰데 영토까지 빼앗기고 나면 신라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안 잡히면 되지 않습니까. 쉬십시오. 갈 길이 멉니다.”

비담은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덕만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밤이 깊어갈 무렵 백제군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백제군의 영토인 것을 감안하면 그들은 덕만이 도망 갈 곳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했다. 

백제군은 동굴 밖에서 포위를 하고 있었다. 밤이라 섣불리 공격하기보다는 회유책을 쓰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서 나오십시오. 여왕폐하. 왕으로서의 예를 갖춰드릴 것입니다.”

비담은 동굴 밖을 내다보며 적군의 수를 헤아리고 빠져나갈 길을 찾았다.

“제법 많은데... 그래도 가보죠. 날이 밝기 전에 빠져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덕만은 담담하게 말했다. 

“너 혼자라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겠지?”

“무슨 소립니까?”

덕만은 단호하게 말했다.

“난 백제군에게 사로잡힐 수는 없어. 나 한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고향을 떠나게 할 수는 없어. 지금까지 죽은 군사들로 충분해.”

“네?”

덕만은 조금 떨면서 비담을 바라보았다.

“니가.. 날 죽여줘... 그리고 돌아가서 내가 전쟁중에 백제군에게 죽었다고 전해줘.”

비담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화가 났다.

“그게.. 말이 됩니까?”

덕만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비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넌.. 쉽게 끝내 줄 수 있지?”

비담은 덕만의 표정을 보고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없어.”

덕만의 말을 들은 비담은 잠시 생각하다 눈빛이 차갑게 바뀌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좋아.. 눈감아.”

덕만은 갑자기 돌변한 비담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뭐?”

비담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태연하게 칼을 휙 한바퀴 돌렸다.

“죽여 달라며.”

비담이 살생을 쉽게 생각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쉽게 죽여주겠다고 하니 덕만은 야속한 느낌도 들었다.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지만 참을 생각은 없었다. 비담은 살기를 띤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덕만은 죽음이 무서웠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고 이제까지 살아 남은 것만 해도 행운이었다, 이젠 정말 가야할 때인가보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덕만은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눈을 감았다.

비담은 떨고 서있는 덕만에게로 다가갔다.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고 그의 앞에 서있는 덕만은 늘 단단한 장벽을 치고 있는 여왕의 모습이 아니라 죽음 앞에 떨고 있는 어린 소녀였다. 비담은 손을 들어 덕만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숨을 쉬는 갸날픈 목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천천히 덕만의 허리를 안으며 입을 맞췄다. 이곳이 전쟁터의 한가운데라는 것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렬하고 달콤한 느낌이었다. 비담은 그 느낌이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찾아서 안개 낀 숲 속으로 점점 더 짙은 안개속으로 계속 달려갔다.  

덕만은 처음에는 비담의 의도를 몰라서 눈을 감은 채 떨고만 있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죽이려고 하는지 몰라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처음에는 목을 조르려는 것인가 싶다가 그 다음에는 독을 먹이려고 하는 것일까 했지만 그것도 아닌 듯 했다. 그러다가 비담이 점점 더 세게 덕만을 안으며 그의 거친 숨소리와 입술을 한참 느끼고 나서야 덕만은 알 수 없는 수치심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덕만은 화가 나서 비담을 밀쳐내고 그의 뺨을 때렸다.

“뭐하는 것이냐!”

비담은 잠시 상처받은 듯 씁쓸하고 멍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웃으며 맞은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야~ 아퍼~”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네가... 네가 감히 여왕을 능멸하는 것이냐!”

파르르 떠는 덕만에게 비담은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기운이면 백제놈들 다섯은 해치우겠는데요. 나머진 제가 맡을 테니까 죽을 생각 말고 따라오십쇼.”

“뭐?”

“가시죠.”

비담은 덕만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덕만의 손에 칼을 쥐어주고 팔을 잡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덕만은 얼떨결에 따라나섰고, 동굴 밖을 나온 이후로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쉴새 없이 쏟아지는 칼을 받아치고, 어둠 속에서 날아다니며 적을 베는 비담의 뒤를 쫒아 뛰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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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34 35화에서 비담이 문노 미실 덕만 알천 등 이사람 저사람에게 구박받아서
시청자들이 비담이 불쌍하다고 게시판마다 원성이 자자하더군요
심지어 우울증에 걸릴것 같다고 한 사람도 있고...
나도 보고나면 외로운 애정결핍 비담이 마음이 아파서 잠을 못이루겠더군요
다행히 제작진이 시청자들의 이런 분위기를 고려해서인지
36화에서는 비담이 춘추를 처음 만나는 신에서 
오랜만에 진심으로 편하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나마라도 보고 나니 마음이 즐겁고 편해지네요
몇초 안되는 장면 하나에 기분이 우울했다 날아갈듯 밝아졌다 하다니
이 무슨 낚시에 걸린 물고기 꼴인지... 파닥파닥 ㅠㅠ 

그래서 비담과 덕만의 해피엔딩 에피소드를 써봤습니다.
이거로라도 마음을 달래야죠.
소화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비담과 덕만이 함께 수나라에서 문노의 손에 자랐겠죠.
그런 상황을 가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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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덕만의 16번째 생일이었다. 덕만은 침대에서 일어나 여느때처럼 사내아이 같이 머리를 대충 올려 묶고 바지를 입고 부엌으로 갔다. 생일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 먹는 것 외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오늘도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덕만아 잘잤니? 미역국 먹어야지”

소화가 끓인 미역국 냄새가 솔솔 퍼져나가고 있었다.

“헤헤~ 맛있겠다 엄마 고마워요”

덕만은 좋아서 뒤에서 소화를 끌어안았다. 덕만이 숟가락을 식탁에 놓고 밥을 푸는 동안 문노가 방에서 나왔다.

“비담이는 아직도 자는게냐?”

“제가 불러오겠습니다 스승님”

덕만이 얼른 나서서 2층 비담의 방으로 올라갔다.

“오빠 일어나.”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비담이 침대에 반쯤 굴러떨어질 듯 자고 있었다. 술냄새가 나는 것이 어제 밤에 또 몰래 마을에 나갔다 온 것이 뻔했다.

“비담 오빠”

덕만이 비담을 흔들었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번엔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스승님이 찾으셔”

“응… 뭐? 스승님이?”

비담은 스승님 소리 한마디에 비몽사몽중에도 벌떡 일어났다.

“빨리 내려와. 그리고 오빠 술냄새 나”

“술? 조금밖에 안먹었는데… 아.. 나 인제 죽었다”

비담이 내려오고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문노가 분명히 비담의 술냄새를 맡았을텐데 오늘은 한번 노려보았을 뿐 말이 없었다. 오히려 문노는 빙긋 웃으며 덕만을 쳐다보았다.

“덕만아. 오늘이 네 16번째 생일이로구나.”

“예.”

덕만이 씩 웃으면서 눈을 반짝였다.

“어? 너 생일이었냐? 축하해”

비담이 축하하는건지 놀리는건지 모를 표정으로 말했다. 소화도 뿌듯한 얼굴로 덕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16번째 생일 선물이니라”

문노가 덕만에게 꾸러미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풀어보거라”

덕만이 풀어보니 그것은 여인의 옷이었다. 값비싼 비단은 아니었지만 분명 귀한 집 규수나 입을 법한 격식을 갖춘 한벌의 옷이었다.

“이건.. 여인의 옷이 아닙니까?”

“그래. 너도 이제 16살이 되었으니 여인으로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언제까지 선머슴처럼 하고 다닐 것이냐.”

“하지만.. 저는 지금 이 옷이 더 좋습니다.”

지금까지 덕만은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며 지낸 적이 별로 없었고, 옷입는 것 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것도 남자처럼 여기며 지내왔기 때문에 갑자기 여인으로서 살아가라는 문노의 말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줄곧 남장을 시키고 무예를 가르치고 밭일을 시키고 남자들이나 읽는 병법서를 가르쳤으면서, 어째서 갑자기 여인이 되라고 하는 것일까.

“한번 입어보거라.”

문노의 말에 덕만은 하는 수 없이 옷을 들고 피식 비웃는 비담을 한번 째려봐 주고는 일어서서 방으로 갔다. 소화가 도와주어 옷을 입긴 했지만 맞게 입은 것인지 어떻게 걸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치마가 무겁기도 하고 소매도 길었다.

“예쁘다 덕만아…”

소화는 흐뭇한 듯이 연신 감탄을 하며 덕만의 옷태를 매만졌다. 다시 문노의 앞에 옷을 입고 나타나자 아니나 다를까 비담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푸하하 꼭 당나귀에게 치마를 입힌 것 같습니다 흐흐”

덕만은 비담에게 분하기도 하고 문노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저 원래 옷을 입고 싶습니다.”

“이제부터는 이 옷을 입고 다니거라. 알겠느냐?”

문노는 덕만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덕만의 옛 옷을 불속에 던져버렸다. 덕만은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스승님이 왜 이러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옷을 입고 어떻게 밭일을 하며 무예를 익히라는 말씀입니까?”

“이제 너는 밭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소화에게서 길쌈과 바느질을 배우거라. 무예도 더 이상 할 연마할 필요가 없느니라. 어차피 너는 무예에 그다지 재능이 없지 않느냐. 스스로 방어할 수 있을 정도면 되었다.”

냉정한 문노의 말에 덕만은 어쩐지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비담도 한대 때려주고 싶었다.


며칠동안 덕만은 소화를 따라다니면서 문노가 말한대로 길쌈과 바느질, 요리 같은 여인들의 일을 배우려고 애썼다. 하지만, 덕만은 무예뿐 아니라 길쌈과 요리에도 별로 재능은 없는 것 같았다. 무엇을 위해서 그런 것들을 배워야 하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일이니 호기심도 있고 열심히 소화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잘 할 수 있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히 문노는 덕만에게 정치와 병법에 관련된 책은 계속 읽으라고 했다. 이 시골마을에서 이런 책들을 읽어서 어디에 쓰라는 것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덕만은 책을 읽을 때면 손자나 오자가 살았던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면서 빠져들곤 했다.

어느 날 저녁식사 시간에 문노가 말했다.

“덕만아. 네게 청혼이 들어왔구나.”

“네?”

“읍내의 한 관리가 장터에서 너를 본 모양이다. 너와 혼인하고 싶다고 사람을 보내왔구나”

덕만은 어이가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청혼을 받은 것도 그렇지만, 남장을 하고 다닐 때는 아무도 관심이 없더니, 여인의 옷을 입었다고 금새 사람들이 나를 여자로 보는구나 싶었다.

“누가요? 혹시 장님 아닙니까? 아니면 뒷모습에 반했던지.. 얼굴을 봤으면 그런 말이 안 나왔을텐데”

비담이 키득거리며 또 놀려댔다.

“조세부에서 일하는 진대인이다. 소문으로 듣기에는 인품이 괜찮은 사람이더구나. 네 생각은 어떠하냐. 한번 만나보겠느냐?”

“네? .. 싫사옵니다.”

덕만은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연거푸 벌어지는 것에 두려움이 느껴졌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거라. 어차피 여인으로 살려면 혼인도 해야할 것이 아니냐. 반드시 진대인이 아니더라도 네가 어떤 사람과 혼인을 할 것인지 생각을 해 보거라.”

“…예”

문노의 말이 맞긴 맞았다. 일단 여인의 옷을 입은 이상 계속 구애해오는 남자들은 있을 테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은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덕만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때면 혼자 찾곤 하는 뒷산 중턱에서 몇시간을 생각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스승님은 내게 진대인의 아내가 되어 평범한 여인의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렇다면 왜 내게 그렇게 많은 것을 가르쳐 오셨겠어. 혹시 내가 무예에 재능이 없어 실망하신 것인가? 아니, 내가 무예에 재능이 없는 것은 이미 어렸을 적에 아셨을 터인데… 나도 비담오빠처럼 무예를 잘했으면 여인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처음에는 문노의 의도가 궁금했지만 나중에는 그냥 자신의 생각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 스승님이 내게 원하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보자.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것일까?’

사실 문노는 이전부터 언젠가는 세상에 나가서 큰 일을 할 것이라는 뜻의 말을 종종 하곤 했다. 덕만은 그 큰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책에 나오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대략 그런 일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을 하고 국가 영토를 넓히고 지도자가 되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쩐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영웅들은 어째서 전쟁을 하고 남의 영토를 빼앗고 자신이 왕이 되려고만 했을까. 덕만은 영웅들의 행동에는 열광했지만,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늘 의문이었다. 그런데 미처 그 답을 찾기도 전에 문노는 갑자기 덕만에게 평범한 여인의 삶을 사는 것을 생각해보라니, 당연히 덕만은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웅들과 같은 삶고 싶다고 열렬히 원하고 있지도 않았다. 또 스스로가 그런 영웅들이 가진 재주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런 재주도 없고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뭐해?”

장난치며 머리를 툭 건드리는 건 보나마나 비담이었다. 여인의 옷을 입었는데도 덕만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는 것은 비담 뿐인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형제처럼 같이 문노에게 무예와 글공부를 배우며 자랐고, 흙바닥에서 뒹굴며 장난치며 놀아서, 비담은 덕만이 친동생은 아니지만 늘 챙겨줘야 할 반푼이 남동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평소같으면 비담이 장난을 치면 같이 받아쳤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인생이 걸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오빠로서 도움은 못 줄 망정 방해나 하는 비담이 한심했다.

“유치해”

덕만은 말로 한방 날리고 일어서서 가버렸다.

“어? 유치해? 야 그게 오빠한테 할 소리야? 쪼그만게…”

툴툴거리던 비담은 이내 시무룩해졌다. 사실 덕만이 여인의 옷을 입기 전부터도 점점 말이뜸해지고 혼자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고 예전처럼 같이 장난도 잘 치려 하지 않게 된 것이 몇 달 된 것 같았다. 그러던 것이 여인의 옷을 입으면서부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 느껴졌다. 갑자기 동생을 빼앗긴 듯한 느낌에 기분이 초조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대체 스승님은 왜 그러시는 거야? 덕만이도 그렇고…”

문노에게 정말 진대인에게 덕만을 시집보내려는 것인지 물어 보았을 때 문노는 도리어 이렇게 물었다.

“네가 보기에는 덕만에게 어떤 베필이 어울릴 것 같으냐?”

“잘은 모르겠으나… 진대인은 아닌듯 합니다”

“어째서?”

“… 글쎄.. 너무 평범하지 않습니까. 덕만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럼 덕만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예? 그것은…”

사실 이 시골구석에는 덕만이만큼의 지혜와 학식을 갖춘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문노를 따라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돌아다녀봤지만, 만나본 사람들을 전부 되짚어봐도 덕만의 상대로 어울릴 만한 사람은 생각 나지 않았다. 누구와 견주어봐도 덕만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친한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덕만은 비담이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총명하고 생각이 넓었다. 비담이 하는 말에는 툭하면 호통을 치는 문노도 덕만의 말에는 미소를 띄며 끄덕이곤 했다. 그럴 때면 은근히 덕만에게 질투가 나곤 했지만, 애써 마음을 감추면서 태연한 척 하곤 했다. 그럴수록 비담은 무예를 연마하는데 빠져들었다. 그것은 덕만이 자신을 이길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진대인에게 답을 주기로 한 날이 내일이었다. 덕만은 거절을 하려고 마음을 굳혔지만, 여전히 문노의 질문에는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떠한 삶을 살려고 하는가. 또 나는 어떤 사람과 혼인을 할 것인가.

정처 없이 걷던 덕만은 문득 기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걷다가 비담과 함께 문노에게서 무예를 배우던 곳까지 걸어 온 것이었다. 비담이 혼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몇주 전만 해도 같이 칼을 휘두르며 연습을 했었는데 어쩐지 오래 전 일과 같이 느껴졌다.

덕만은 멍하니 비담을 바라보았다. 매일 실실거리며 장난만 치는 비담도 무술연습을 할 때만은 진지했다. 둘중에 어떤 것이 진짜 모습일까. 16년을 같이 지냈지만 덕만은 아직도 확신하지 못했다.

‘오빠는 남자니까 혼인으로 인해서 인생이 달라지지는 않겠구나.’

덕만은 처음으로 남자로 태어난 비담이 부러웠다. 춤추듯이 유려한 칼솜씨를 보면서 문득 비담은 어떤 여자와 혼인하게 될까 생각했다. 어떤 여자와 결혼하든 재미있게는 해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미소지었다. 문노에게 매일 혼나긴 해도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능력은 비담이 덕만보다 빨랐다. 반복해서 책이 닳도록 보는 덕만과 달리 비담은 왠만한 책은 한번 훑어보면 거의 쉽게 외어버려서 별로 반복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어울리는 학식과 교양을 갖춘 여자를 찾기는 쉽지 않을 듯 했고, 찾는다 해도 높은 신분일텐데 가진 것 없는 서라벌 남자에게 시집 와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오빠나 나나 베필 찾기 쉽지 않겠네’

덕만은 쓴웃음 지으며 가볍게 한숨지었다.

‘결혼을 하면 오빠하고 밤새 이야기하는 것도 끝이구나’

덕만이 책을 읽고 흥분해서 열변을 토하면 비담은 졸면서 건성으로 듣는 듯 해도 덕만이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나갈 때면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곤 했다.

‘책에 써있는 말이라고 다 사실은 아니잖아? 덕으로 다스리면 된다는 공자의 말은 다 뻥이야. 평생 떠돌아 다니면서 정치를 했지만 그래서 공자가 한 게 뭐야.’

덕만이 혼인을 한다면 남편과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을까? 어쨌든 한가지는 분명해진 것 같았다. 그냥 비담과 소화와 문노와 지금까지처럼 사는 것이 덕만이 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느니 비담 오빠와 결혼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칼을 휘두르는 비담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오늘따라 그가 더 믿음직하게 느껴지고 의지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평소에 깨방정 떠는 장난스런 얼굴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푹 하고 웃음이 터졌다. 비담이 더 나이가 많긴 했지만 덕만에게는 그가 아직도 어린애같이 느껴졌다.

“어? 언제 왔어?”

비담은 그제야 덕만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응 금방”

덕만은 저도 모르게 마음을 들켰을까 당황했다.

“너.. 진대인이랑 혼인할거냐? 안할거지?”

“왜?”

“… 뭐 그냥… 별로… 시시한 놈 같아서..“

“그래도 날 고른거 보면 사람 볼 줄 아는 눈은 있잖아”

“흥.. 그래. 사람보는 눈은 있는거 같은데.. 여자 보는 눈은 좀 특이한거 같다 큭큭”

이딴 농담이나 하고 정말 구제불능이야 하고 덕만은 생각했다.

“스승님이 별 말씀 없으셨어?”

“무슨 말씀?”

“전에 서라벌로 돌아갈 거라고 하셨는데… 혼인하면 나는 안 데려간다는 뜻이신 거잖아”

비담은 멈칫 했다. 혼인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동생을 뺏긴다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덕만을 놔둔채 서라벌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너보고 혼인하라고 하신 적 없잖아”

“그래도 누구랑 할지 생각해보라고 하셨잖아”

“안하면 되지 뭘. 쓸데 없이 머리 복잡하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고민하냐.”

하지만 비담도 어렴풋이 계속 덕만이에게 이런 저런 남자들이 청혼해 올 것임을 예감했다. 정말로 덕만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어느날 갑자기 지금까지 같이 나무에 오르고 칼싸움을 하며 약올려주던 동생 덕만이 사라진 것만 해도 상실감이 큰데, 반쯤 변해버린 동생마저도 사라진다니 억울했다.

“오빤 아직 철들려면 멀었어”

덕만은 계속 진지하지 않게 장난만 치는 비담에게 샐쭉하게 대꾸했다. 뭐가 이렇게 맘에 안드는지 덕만 자신도 잘 몰랐다. 그냥 비담에게 괜히 짜증이 났다.

‘내가 비담오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좀 더 진지해지기를 바라는 것일까? 비담과 혼인을 한다 해도 싫은 건 아니지만 어쩐지 남편으로서는 무언가 빠진 듯 아쉬움이 느껴졌다. 덕만은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덕만이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구나. 혹시 너한테 다른 이야기 한 것은 없느냐?”

문노가 비담에게 물었다.

“없습니다.”

문노는 말이 없이 다시 책을 넘겼다.

“저.. 스승님.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비담은 참다못해 말을 꺼냈다. 문노의 의도가 궁금했다.

“스승님은 덕만에게 어떤 베필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는 덕만이가 여인으로 평범한 삶을 살기엔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문노는 비담의 눈을 잠시 들여다 보았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덕만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

“덕만의 인생을 네가 책임질 수는 없지 않느냐“

말문이 막힌 비담은 머리를 긁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꾸 머리만 복잡해져 오고 생각은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그냥 지금처럼 지내면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인가.


잠자리에 들려고 누웠지만 오늘따라 술생각이 간절했다. 비담은 창문을 뛰어 내렸다. 그런데 뜻밖에 덕만이 마당에서 달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왜 아직 안 자?”

“오빠는? 또 술마시러 가?”

“아니. 그냥 잠이 안와서..”

어쩐지 갑자기 술 생각이 사라져버렸다. 비담은 덕만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16년동안 같이 지내고 덕만을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앞에 있는 덕만은 지금까지 알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낯선 여인같이 느껴졌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어떻게 쳐다봐야 할지도 낯설었다.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동무를 하고 장난을 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만과 같이 있고 싶고 눈 맞추고 싶고 계속 옆에 붙어있고 싶은 갈망은 요 며칠새에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나 자신이 한심해”

덕만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던 비담은 덕만의 말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뭘 원하는 지도 잘 모르는데”

또 골치아픈 얘기 시작이군 비담은 비죽 입을 내밀었다.

“난 그냥 이대로 살고 싶은데...”

“에이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냐. 잘 모르겠으면 나한테 시집와. 내가 데리고 살아줄께”

비담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던져 놓고 흠칫 놀랐다. 덕만의 표정을 보니 어이가 없고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데 그런 모욕에 가까운 말을 했으니 비담은 아차차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됐어. 오빠랑 말을 섞은 내가 잘못이지”

덕만은 냉랭하게 홱 떨치고 일어나서 가려고 했다.

“덕만아”

비담은 반사적으로 따라 일어나서 덕만의 팔을 잡았다. 입에 침이 말랐다.

“덕만아.. 나 정말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지만 뭔가 말을 해야 할것만 같았다.

“니가 이대로 그냥 살려면 그 방법이 제일 낫지 않겠냐?”

덕만은 홱 돌아서서 비담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남의 기분을 후벼 파는 말을 태연하게 잘도 하는 것일까.

“놔.”

덕만은 팔을 뿌리치고 걸어갔다. 비담은 어쩐지 이대로 덕만을 보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에야 서로 티격태격 싸우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하곤 했지만, 이제는 언제든 덕만이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다. 비담은 달려가서 덕만의 앞에 서서 어깨를 잡았다.

덕만은 뭔가 대답을 원하는 듯 그의 눈을 보았다. 하지만 어떤 말을 원하는지는 덕만 자신도 잘 몰랐다. 미안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이해한다는 말도 아니었다. 어떤 말을 듣고 싶은 것인가. 어떤 말을 해줄 것인가. 하지만 비담은 아무말없이 덕만을 끌어안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듯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꽉 끌어안는 바람에 덕만은 숨이 막히는 듯 했다. 어쩐지 며칠 사이에 비담이 훌쩍 커버린 듯 느껴졌다.

비담은 자신도 모르게 도망가는 덕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안았지만 안는 순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현기증이 느껴졌다. 다시는 덕만을 잡은 팔을 풀지 않으리라는 결심이 섰다.

“넌 내꺼야. 절대 아무데도 못 가.”

그말을 들은 순간 덕만은 비담에게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느낌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 이것인가’

비담은 덕만의 목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를 따라 얼굴을 묻었다. 다시 세상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니가 좋아”

비담의 거친 숨결을 느끼면서 덕만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비담에게 부족하게 느껴졌던 것,비담에게서 원했던 것이 사랑의 느낌, 진실한 갈망의 느낌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담이 자신을 여자로서 사랑한다는 느낌이 없었기 때문에 뭔가 아쉬웠던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슬프거나 눈물이 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 안겨 있는 것이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 듯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비담은 고개를 들어 덕만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결 따듯해 진 덕만의 눈빛에 비담도 쑥스러운 듯 웃음지었다.

“나한고 혼인해줄래?”

여전히 팔을 풀지 않은 채 비담이 물었다.

“대답할 때까지 안놔줄거야”

여전히 어린애 같은 면이 있지만, 어쩐지 그것이 이전처럼 한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정도면 평생을 함께 할 베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응”

비담과 덕만은 따듯한 물결과 같은 행복감이 온몸을 휩싸는 것 같았다. 함께라면 서라벌이든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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