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만과 미실의 지도자로서의 리더쉽에 대한 비교가 한참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작가들이 갈팡질팡하며 미실을 너무 미화한 탓에 덕만이 욕을 많이 먹기도 했었고 나도 어떤 면에서는 미실이 덕만보다 앞서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나는 정치에 있어서는 미실보다 덕만의 통치방식에 동의하는 편이다.
내가 느낀 덕만의 통치방식의 특징은 열린 토론, 자발적 참여, 적에 대한 포용, 변화지향성이었다. 그런것들이 미실의 효율성의 정치에 묻히기에는 아까운 덕만의 정치덕목들이라고 생각된다.
역사에서 유사한 리더쉽을 보여준 정치가들이 많이 있었다. 카이사르, 링컨, 간디 와 같은 정치가들이고 공교롭게도 모두 정적에 의해 암살당했다. 자신의 적들을 포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 현실속에서 좌절된 셈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현실에 꺾여도 그 덕목들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춘추의 입장에서 덕만의 통치방식을 바라보는 팬픽.(비담이 빠진 팬픽은 처음 써보는 듯..)
춘추는 타클라마칸에서 왔다는 이모님을 처음에는 우습게 보았다. 천하게 자라 정치나 외교를 알기는 커녕 글이나 제대로 읽을까 싶었다. 막상 만나보고 나서도 '생각처럼 무식한 촌부는 아니로군' 하는 정도였다.
미실과 대적하는 모습도 서투르기 짝이 없어보였다. 저렇게 자기 속을 다 보여가면서 자기가 가진 패를 다 보여주고 하는 정치라니, 또 자신의 세를 불려가는 정치가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버려가면서 하는 정치라니, 그런 것은 수나라에서도 어디서도 들어본적이 없었다. 첨성대를 만들어 천기의 정보를 모든 이가 알 수 있도록 한다는 것만 해도 그랬다. 무지한 백성들을 쉽게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을 조건없이 버린다는 것, 아무도 악용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 대체 무엇을 위해 손해만 보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뻔히 결렬될 것을 알면서 화백회의를 소집하고 안건을 토론에 붙이고, 대체 왜 그런 시간낭비와 인력낭비, 감정낭비를 하는지 알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서투른 패에 미실과 귀족들이 자충수를 두어 걸려들고 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미실이 모자른 탓이라고 쉽게 생각했지만, 자신이 직접 덕만과 붙어보고 나서야 미실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덕만이었다.
미실과 춘추를 비롯해 권력자들은 서로 더 적게 잃고 많이 갖기 위해 싸움을 해왔다. 간혹 육참골단처럼 더 많이 얻기 위해 작은 것을 내주는 경우도 있긴 했다. 그러나 덕만은 자신이 보다 많이 갖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많이 주기 위한 싸움을 했다. 내가 가진것을 백성들에게 내놓을테니 너도 네가 가진것을 백성들에게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얻기 위한 싸움에만 익숙했던 귀족들은 내놓는 싸움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방법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덕만의 공격은 늘 진실을 규명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여 상대적으로 미실의 이를 추구하는 본성이 명확히 보이도록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미실은 초조해 질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스스로 자충수를 두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은 도저히 상식적인 방법으로는 싸움이 안되겠다 싶어 난을 일으키고 말았던 것이었다. 미실이 난을 일으키던가 포기하던가 둘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극단적으로 압박한 것이 덕만이었고, 미실은 난을 일으켰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만둠으로써 덕만의 방식이 옳았음을 덕만이 이겼음을 인정했다.
덕만은 춘추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승부를 걸어왔다. 모든 세력과 기득권을 춘추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혈혈단신으로 미실이 장악한 궁에 들어감으로써 춘추에게 자신의 말을 듣던가 자신을 버리던가 둘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압박한 것이었다. 덕만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것은 자신의 이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공격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춘추는 별수없이 덕만을 따르기로 했지만, 자신이 덕만에게 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패배감에 쓰라렸다.
그런 삐딱한 마음에 춘추는 덕만을 업신여기고 조롱하기도 하고 상처도 주었지만, 덕만은 그런 개인적인 모욕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뿐만아니라 위협이 되는 적인 미실과 미실의 사람들도 번번이 용서하고 등용했다.
"자꾸 그렇게 용서해주시니까 버릇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춘추뿐 아니라 유신과 알천도 덕만에게 자주 충고했고 덕만도 달리 방법이 없을 때는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안강성에서 도주한 자들을 처단한 것도 미실이나 유신같은 주변 사람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인 결과였다. 그러나 덕만은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몇년이 지나도록 그자들을 잊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고지식함이 주위사람들에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안으로 덕만의 건강을 좀먹어들어가기도 했지만, 덕만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런 덕만의 태도에 춘추는 거슬림을 느끼며 심한 말까지 하기도 했다.
"이모님, 위선이 지나치신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거슬림의 정체는 놀랍게도 열등감이었다. 검귀와 같은 무술실력을 가진 비담에게도 열등감이라곤 느껴본 적이 없는데, 덕만처럼 허술한 여인에게 열등감을 느끼다니 춘추 자신도 믿을수가 없었다. 머리라면 춘추가 한수 위였지만 덕만은 머리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차원의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비담은 일찌감치 덕만의 그릇에 졌다 생각하고 따르는 모양이었지만 춘추는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이 열등감의 근원을 파헤치기 전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춘추에게 정치는 쳐내는 것이었다. 꿀에 달려드는 개미떼처럼 권력에 달려드는 사람들을 계속 쳐내고 쳐내는 것이 정치였다. 적어도 수나라와 신라에서 그가 겪고 보아온 정치는 그러하였다.
그러나 덕만에게 정치는 포용이었다. 분열하고 갈라서고 자신의 이를 쫒아 서로 다른 곳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계속 붙잡고 설득하고 하나로 묶어 포용하는 것이 정치였다. 발상이 다르고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는 것에서부터 춘추는 덕만을 이길 수 없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춘추에게 또한가지 이상하게 보였던 것은 덕만은 자신의 사람들을 챙겨주지 않았다. 몇번이나 위험한 고비마다 나서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비담에게도 별다른 보상을 해주지 않았고, 유신이나 알천에게도 개인적인 포상을 내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일부러 거리를 두는 듯 말한마디 따듯하게 해주지 않았다. 포상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여성적 매력을 한껏 이용하는 미실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어째서 주위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고 챙겨주시지 않습니까? 사람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재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사람들은 재물이 아니라 인정을 바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말도 있지않습니까."
"내 인정을 받기 위해서 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에 따랐으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떠나면요?"
"내 생각이 틀린거겠지."
춘추에게는 권력이 목적이었지만, 덕만에게 권력은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보상을 해주지 않고 인간적으로 친목을 도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덕만을 따르는 젊은 화랑들은 점점 늘었다. 물론 덕만이 자신의 헌신에 별다른 포상을 해주지 않음에 불만을 토로하며 미실에게로 돌아서는 자들도 종종 있었다. 유유상종이랄까 미실의 주위에는 이를 쫒는 자들이 모여들었고, 덕만의 주위에는 꿈과 이상을 쫒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렇다면 나의 주위에는?'
춘추는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춘추는 자신이 왜 덕만을 따르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마지못해 따르는 척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덕만에게는 진심으로 이사람을 도와주고 싶다, 이사람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미실이 덕만에게 "또 다 말해버릴 뻔 했습니다." 하고 말했듯이 춘추도 덕만을 보고 있으면 "한수 가르쳐 드릴까요?" 하고 끼어들어 거들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곤 했다. 덕만에게는 주위 사람들을 덕만이 하고 있는 일로 빨아들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덕만이 하는 일을 보고 있으면 그 꿈의 원대함과 덕만의 열정에 가슴이 벅차올라 나도 같이 참여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고, 그 황홀한 느낌에 홱 돌아버려서 현재 각자가 처한 현실 따위는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비담은 그 두근거리는 설레는 느낌을 연모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유신도 처음에는 연모라 여겼지만 지금은 덕만에게 느끼는 감정이 연모 이상의 것임을 깨달은 듯 했다. 하긴 춘추 자신도 잠시 자신이 덕만을 연모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덕만을 마주대하고 덕만의 일을 돕고 있노라면 자신이 뭔가 옳은 일,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고, 스스로가 썩 괜찮은 사람이라는 좋은 느낌이 들었고 그런 가슴떨리는 뿌듯한 느낌이 누군가를 연모할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일품철로 무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농기구를 생산하는 덕만을 보며 춘추는 한탄했다.
"그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삼한일통을 이루시렵니까?"
덕만은 웃으며 말했다.
"삼한일통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너도 삼한일통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 않느냐? 네가 왕이 되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건 무엇이냐?"
"신라의 영토를 넓히고 강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모님의 궁극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신라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성들에게 굶주림과 괴로움만 주는 삼한일통을 위한 전쟁따위는 하지 말아야겠군요."
비꼬는 듯한 춘추의 말에 덕만은 미소지었다.
"바로 보았다. 내 고민이 그것이다. 또 삼한일통을 반드시 신라가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고구려나 백제가 하면 안되는걸까?"
어이없어하는 춘추를 보며 덕만은 웃었다.
"내가 여왕이 아니라면 당장 반역죄로 목이 날아갈 소리겠지. 다른사람들에게는 내가 한 말 비밀로 해다오."
그리고 이어서 탄식하듯 말했다.
"삼한일통이 되면 신라는 지금보다 훨씬 강성한 나라가 될것이야. 그런데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희생해야할지... 그리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얼마나 더 행복해질지는 모르겠구나."
"전쟁중에는 힘들겠지만 전쟁이 끝나면 이전보다 풍족해 질 것입니다."
"먹고 입는 것이 더 풍족해진다하여 더 행복하다고 말할수는 없는 것이니 하는 말이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전보다 불행할지라도 백성들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게끔 만들면 됩니다."
춘추는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전에 미실이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백성들은 진실은 부담스러워하고 희망은 버거워하며 소통은 귀찮아하며 자유를 주면 망설인다. 더 많은 것을 주어도 더 더 달라고 떼를 쓸 것이다."
덕만은 그런 춘추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는 나보다는 미실과 생각이 비슷해."
"그래서 제가 왕이 되는 것이 걱정되십니까?"
"아니다. 네가 미실과 나의 어깨를 딛고 우리들보다 멀리 볼수 있는 왕이 되길 기대한다."
덕만의 말에 춘추는 다시한번 울컥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 정말 싫었다. 덕만을 제치고 왕이 되려는 자신을 아껴주는 덕만,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커다란 생각과 말을 하는 덕만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