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2013'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3.03.02 남순 흥수 초딩중딩시절 팬픽(下)
  2. 2013.03.01 남순 흥수 초딩중딩시절 팬픽 (上)
  3. 2013.01.29 학교2013 리뷰

 

그 후로 축구부 아이들이 흥수를 대놓고 따돌리는 것은 좀 덜 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은근히 따돌리는 것은 여전했다. 흥수는 내가 축구부 주장을 위협한 것을 알고는 기분나빠했다.

축구에는 축구의 룰이 있어. 축구는 내가 알아서 해.”
나도 흥수가 좋아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똑 같은 상황에 처하면 또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그 사건으로 인해서 흥수는 나를 무척 신뢰하게 된 것 같았다. 흥수와 나는 특별히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것도 아니고, 가끔씩 같이 집에 가는 것 뿐인데도 점점 다른 애들과는 다른 특별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흥수 누나는 흥수에게 축구부 애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먹을 것 사주라며 용돈을 주곤 했다. 하지만 흥수는 그 돈으로 축구부 애들을 사주는게 아니라 내게 한 턱 쏘곤 했다. 나는 처음에는 모르고 얻어먹었지만, 사실을 알고 나니 영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나 말고 축구부 애들한테도 사주라고 했더니 흥수는 덤덤하게 말했다.

쟤네들은 내가 뭐 사줘도 좋아하지도 않아.”

축구부 애들은 아니지만, 학교에는 흥수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흥수는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몇 있었다. 나는 나대로 내게 줄서온 아이들과 어울려 다녔다. 하지만, 그애들은 일짱이 누가되던 쫒아다니는 똘마니들이었지 내 친구는 아니었다. 내게 친구는 흥수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흥수는 친구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나를 따라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흥수도 외로웠던 것 같다. 친하던 친구들은 학년이 높아져갈수록 공부한다고 점점 멀어지고, 공부 안하는 나 밖에 놀 친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항상 축구부의 눈총을 받는 존재였으니 행동과 말도 늘 조심해야했고, 인기는 많아도 정말 내편이다 믿을 수 있고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문제아 취급해도 흥수만은 나를 친구로 여겨줬던 것 처럼, 흥수도 다른 사람들은 다 그를 인기있는 축구유망주로만 쳐다봐도 자기를 그냥 평범한 친구로 여겨주는 사람이 하나쯤 필요했던 모양이다. 외로움은 그렇게 우리를 점점 뭉치게 만들었다.

 

니가 우리 애들 발랐다며? 축구부 애들도 건드렸다던데배짱좋네?”

집에 가던 나와 흥수를 가로막은 그들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싸움 깨나 할 것 같아 보였지만 나는 기죽지 않았다. 이미 고등학생들하고도 여러 번 붙어 봤다.

뭐 누가 일짱이 되든 상관 없는데, 이동네 초등학교 일짱들은 전부 자기네 학교 애들한테 돈 걷어서 이 형님들한테 셔틀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너도 계속 짱먹고 싶으면 우리한테 상납해라.”

지금껏 일짱이 애들 삥뜯어다가 이들에게 바쳤던 모양이었다.

내가 일짱인 줄 알면 여기가 내 구역이라는 것도 알겠네. 셋 셀 동안 도망가면 곱게 보내줄테니까 기회 줄 때 가라.”

형들은 내 말에 완전 열받은 듯 했다.

, 말로 해서 못알아먹는 놈이다. 완전 꼴통인데?”

한 녀석이 내 머리를 툭 치려고 손을 뻗었고 나는 그 팔을 꽉 잡았다.

어쭈? 잡았어?”

숫자에서 몰릴 때는 도망가거나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발로 걷어차고 나머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흥수도 옆에 있던 형에게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다른 하나를 향해 돌진 했다. 대부분은 나와 흥수가 일대일로 상대하면 당해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하나는 고등학교 일짱답게 노련했다. 나는 흥수까지 싸우다 다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둘이 일대일로 붙고 끝내지?”

내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깨달은 고등학교 일짱은 이렇게 된 이상 일대일로 자존심을 건 싸움을 해야 했다. 내 작전은 지지 않는 것이었다. 지지만 않아도 상대는 고등학생이니 내가 이긴 셈이다. 나는 쉽게 틈을 내주지 않고 수비하면서 섣불리 상대의 도발에 끌려들어가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잽을 날리며 주거니받거니 했다. 결국은 싸움도 비슷한 상대끼리는 집중력과 정신력으로 승부가 난다. 때려도 때려도 다시 일어나고 맞받아치는 내게 상대는 점점 지치고 짜증나는듯 했다. 한시간 가까이 싸움이 계속 되었을 때 나는 승부를 걸었다. 지금까지 수비적인 태도를 바꿔서 무차별 공격을 했다. 상대도 당황해서 서로 닥치는대로 마구 치고박는 난타전이 계속되었다. 피가 흐르고 계속 얻어맞는 와중에도 나는 치명타는 맞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몇번이나 넘어진 채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흥수에게 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일어나고 또 일어나서 다시 맞았다.

쟤 초등학생 맞냐? 완전 괴물인데?’ 하고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쯤이면 내가 지지는 않은 셈이었다. 마침내 고등학교 일짱도 완전히 탈진해버렸다.

, 오늘은 이만 가자. 너 앞으로 조심해라.”

결국은 이짱이 일짱을 말려서 부축해서 데리고 떠났고, 나에게 위협적인 멘트를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이긴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알았다. 흥수는 내게 달려와서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다친데 없냐?”

내가 이렇게 전력을 다해 싸우는 모습을 흥수가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다. 아닌척 했지만, 흥수도 내가 어떻게 될까봐 꽤나 놀란 듯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빙신아, 어차피 너 삥 뜯는거, 좀 더 뜯어서 주고 말지 몇시간을 쳐맞고 있냐?”

딴놈 밑에 들어갈거면 일짱은 뭐하러 해? 남한테 고개 안 숙일려고 일짱하는거지.”

나는 하도 맞아서 몸이 말이 아니었고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전에도 여러 번 싸울 때마다 그랬지만 신기하게도 하루밤 자면 다시 말짱해지곤 했다. 

 

그 날 이후로 말로 설명은 안되지만 나를 대하는 흥수의 태도가 좀 변한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흥수가 나를 어리게 보고 형처럼 돌봐줬다면, 그 이후로는 겉으로는 지가 형이니 내가 동생이니하고 장난을 치면서도, 내게서 무언가 감탄스러운 면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기는 축구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가족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많은 것을 타협하고 숙이고 지나가는데, 나는 쥐뿔도 없으면서 절대로 굽히지 않고 꼿꼿한 자존심이 좋다고 했다. 나야말로 침착하고 잘났으면서도 겸손한 흥수가 멋져 보였는데, 사람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 끌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특별히 사는게 재미있지도 않고, 가진 것도 없고 꿈도 없고 가족도 지켜야 할 것도 없으니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울 수 있었지만, 흥수와 친해지고부터는 내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흥수가 싸움에 휘말려 다치는 것은 싫었고, 내가 사건에 휘말려 강제전학 가게 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싸울 때는 될 수 있으면 흥수 몰래 다녔고, 강제전학 당할 일은 만들지 않으려고 학교 안에서는 될 수 있으면 사건을 만들지 않았다. 흥수가 없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학교 안의 애들을 손봐줘야 할 때는 똘마니들을 시켰다.

 

야 너 누구 좀 만나야겠다.”

전에 싸웠던 고등학교 일짱이 아직 그날의 상처가 낫지 않아 딱지가 앉은 얼굴로 내게 찾아왔다. 나는 그의 위에 또 누가 있구나 직감했고, 멀리 서있는 검은 고급 승용차를 보고는 그가 꽤 큰 조직에 속한 사람일거라고 짐작했다. 그정도면 정말 싸움의 고수일거라고 생각되어 나는 적지않이 긴장이 되었다.

사천파 회장님이시다.”

그런데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달리 차에서 내린 사람은 싸움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중년의 아저씨였다. 검은 양복을 입고 청회색 머플러를 두르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그는 나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으스스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대단하구나. 너보다 훨씬 나이 많은 형들을 그렇게 혼내주다니. 그런데 어쩔셈이니? 너 같은 아이 하나 아무도 몰래 데리고가서 바다에 빠뜨리는 것쯤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솔직히 겁이 났지만 일단은 배짱을 튕겨보기로 했다.

헤엄쳐 나와야죠. 안그럼 바다속에서 쭉 살던지

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넌 정말 겁이 없구나. 난 겁없는 녀석이 좋다. 나이를 먹으면 겁이 많아지거든.”

그는 내게 인사를 하고 천천히 다시 차에 올랐다.

나중에 더 크면 또 보자꾸나.”

우리는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흥수는 나에게도 권투나 킥복싱 같은 운동을 해보라고 했지만, 나는 하고 싶지 않았다. 흥수가 더러운 꼴을 당하는 것을 많이 본 터라 나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 없이 거의 혼자 살아오다시피 한 나는 누구에게 굽히고 배우고 머리를 숙이는 상황이 영 어색했다. 14살의 나는 세상은 나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고, 힘만 있으면 커서도 누구에게 머리숙이지 않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꿈을 통해서 점점 성장해가고 큰 무대로 나아가는 흥수를 보며 부럽기도 했다. 중학교 축구부에서 흥수는 더욱 대회에 자주 출전하게 되었고, MVP로 신문에까지 작게 이름이 실리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를 부러워 하거나 누구처럼 되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없었다. 엄마가 있는 아이들을 보면 부러웠지만, 그것 말고는 공부든 뭐든 잘하는 애나 집이 부자인 애나 선생님에게 귀여움받는 애를 부러워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것들이 내게는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흥수는 어쩐지 부럽기도 하고 닮고 싶기도 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고,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자신을 질투하는 동료마저 포용하는 그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흥수가 성취하고 한계단 한계단 밟아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뭔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성취하고 싶다는 마음이 꿈틀거렸다. 그런데 내가 잘하는 거라고는 싸움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덤벼오는 애들을 수동적으로 상대해왔다면 중학교부터는 이웃 중학교들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먼저 그 학교 일짱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흥수가 시 축구대회, 도 축구대회, 전국 축구대회로 토너먼트로 차근차근 올라가듯이, 나는 경기도 일대의 중고등학교의 일짱들을 하나하나 꺾고 다녔다. ‘쓰나미라는 별명도 그때 생겼고, 내 이름은 신문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그 별명은 중고등학교 일대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사천파 보스는 잊을 만 하면 한번씩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너 꽤 유명해졌던데 아직도 학교를 다니고 있니?”

학생이 학교를 다녀야죠 그럼

학교에서는 살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아. 나랑 같이 일해보는게 어떠냐?”

그는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돈보다는 흥수와 보내는 하루하루의 평범한 일상이 좋았다.

학교 계속 다닐건데요.”

그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너 축구부 박흥수라는 아이와 어울려 지낸다던데, 너희 둘은 갈 수 있는 길이 달라. 살다보면 인생에 선택권이란 건 별로 없다. 니가 먼저 걔를 떠날지, 걔가 먼저 너를 떠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각자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길이 갈리게 될거다. 헤어지게 될 수 밖에 없는 친구 때문에 니 앞길을 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흥수와 내가 헤어지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흘려버렸다. 흥수가 어디에 가든 나는 따라갈 테니까.

 

마침내 내가 중3 때 경기도의 모든 중고등학교 일짱들을 이기고 경기도 일짱이 되면서 사천파 뿐 아니라 여러 폭력조직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졌다. 흥수만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런 제의를 받는다는 것에 어깨도 으쓱하고 흥수에게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이런저런 조직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말을 들은 흥수누나의 경악하는 표정을 보고는, 그제서야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던 길이 내가 생각한 그런 명예롭고 인정받는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에 흥수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갔다. 유수의 축구명문 고등학교로부터 장학금을 줄 테니 자기네 학교로 오라는 제안이 왔고, 흥수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외국 에이전트의 눈에 띄면 장학금받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유럽 유소년 축구팀에 들어갈 수도 있대.”

흥수는 들떠서 말했지만, 그 말에 나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흥수가 제주도, 아니 독도에 가서 축구를 한대도 나는 따라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럽이라니, 나는 유럽에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중학생인 내게 유럽은 로켓을 타고 가야하는 달나라만큼이나 현실감이 없고 먼 곳이었다.

니가 먼저 걔를 떠날지, 걔가 먼저 너를 떠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각자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는 길이 갈리게 될거다.’ 라고 했던 사천파 보스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가 가기로 한 고등학교의 감독이 나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이 것이구나, 이런 것이었구나.’

나는 길이 갈리게 된 다는 것의 의미를 뼈아프게 깨달아갔다. 경기도 일짱인 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라 혐오스럽고 기피대상이고 흥수의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가 된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밉고 화가 났다. 우선 나 자신에게 화가 났고, 나를 이렇게 만든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몹시 화가 났다. 그러나 그게 누구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 자신 외에는 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고, 그 화를 흥수에게 돌리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흥수가 나를 떠나는 것 보다 더 나쁜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더 나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왜 그때 흥수를 그냥 떠나보내지 못했는지 수백번도 더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년 후 내가 검정고시 보고 고등학교 진학 준비를 할 때 사천파 보스가 나를 찾아 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초점없이 멍한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듣자하니 너 이젠 싸움 안 한다면서.”

관심없어요 이젠.”

나는 아무 의욕없이 대답했다. 그는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결국은 그 녀석이 너를 구했구나.”

그리고 그 이후로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당시에 나는 흥수 생각에 매일매일이 지옥처럼 괴로왔기 때문에 흥수가 나를 구했다는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은 흥수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나게 된 후였다.

너 아닌 척 하고 사니까 좋냐?”

그동안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그를 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어떻게든 과거를 떨쳐버리려고 죽을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흥수는 여전히 울분을 삼키며 과거에 갇혀있었다. 운명의 신은 흥수의 길을 끊어버림으로써 내 길을 돌려놓은 것이었다.

지금은 이게 나다.”

나는 속에 있는 말을 삼켰다. 감히 너 때문에 정신차렸다고 너무나 미안해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럼 난 모르는 놈이네.”

흥수의 눈은 아픔, 그리움, 외로움에 물기를 담고 있었지만 떨쳐버리려는 듯 냉담하게 말하고 뒤돌아서 걸어갔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이 마치 어린시절 그의 집에 놀러가기를 두려워해서 뒤돌아가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 흥수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라 옛날 생각에 괜히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나지막히 혼자 중얼거렸다.

학교에서 보자, 흥수야.”

Posted by 에페르
,

남순이 회상 시점으로 초딩중딩시절 남순 흥수 팬픽임(아청법에 걸릴 내용 없음)

둘이 어째서 절친이 되었을까 궁금해하다가 쓰게 되었다.

 

 

7월초인데 벌써 날이 몹시 더웠다. 집 안은 집 안대로 찜통이고 집 밖은 땡볕이었다. 시원한 아이스크림 생각이 간절했다. 낯선 동네에 이사 와서 아이스크림을 어디서 파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무작정 밖으로 나온 가게를 찾아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걸어내려갔다. 운이 없으면 학교앞까지 걸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미로 같은 동네를 헤매다가 겨우 가게를 찾아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뭐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더워서인지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던 골목에 마침내 누군가 걸어올라오고 있었다. 키로 봐서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같았지만 입고 있는 유니폼은 내가 다니는 학교의 축구부 유니폼이었다. 덥지도 않은지 등에 축구공을 매고 가볍게 오르막길을 오르는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 돈 좀 있냐.”

그 아이는 내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를 쓱 훑어보더니 말했다.

너 우리반이지?”

쫄기는커녕 심심하던 차에 재미있는 일 생긴 듯 나를 보는 그 애 반응이 어이가 없어서 나도 멀뚱멀뚱 마주 바라보았다.

“…”

며칠전에 전학온 애 맞지?”

“… .”

나 모르면 우리학교에서 간첩인데.”

그래? 니가 누군데.”

박흥수.”

그러고 보니, 전학오던 날 교실 맨 뒤에 멀대같이 큰 녀석이 하나 있었던 게 기억났다. 하지만, 나는 걔가 누구든 관심없었다. 빨리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을 뿐이었다.

됐고... 돈 없냐?”

흥수는 픽 웃으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있다, 쨔샤.”

돈을 잡으려고 뻗는 내 손을 피해 손을 위로 뻗는데, 나보다 키가 반뼘은 큰 것 같아 내 손이 닿지가 않았다.

뭐 할려구?”

아이스크림 사먹게.”

나랑 축구해서 이기면 사주지.”

이번에는 내가 픽 웃을 차례였다. 딱히 운동을 배워 본 적은 없지만, 운동 한다고 어깨 힘주고 까불고 다니는 애들하고 체력싸움에서 밀려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종목이든 내 순발력과 지구력을 따라올 만 한 녀석은 별로 없었다. 싸움 뿐 아니라 운동 좀 한다고 거들먹거리는 녀석들 발라주는 것도 내 취미 중에 하나였다.

우리는 공터로 가서 땡볕에 더위도 잊고 축구를 했다. 축구는 나도 자신 있었지만, 흥수의 발재간에는 당해낼 수 없었다. 공을 앞뒤로 굴리며 번번이 내가 헛발질을 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게 만들었고, 내 체력은 더위 앞에서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나는 지기 싫어서 더욱 악착같이 덤볐지만, 이미 5분 붙어보고 실력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땀이 비오듯 흘렀지만 이미 아이스크림 생각은 싹 달아난 지 오래였다. 물론 흥수도 나 때문에 꽤 진을 뺐는지 아까는 그 더위에 땀 한 방울 안 흘리던 놈이 헉헉거리며 연신 눈으로 떨어지는 땀을 닦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체력싸움이다 생각한 나는 어떻게든 녀석의 체력을 바닥까지 떨어뜨리고서 지더라도 지겠다는 마음이었다. 나도 있는 잔머리 없는 잔머리 굴려가며 훼이크도 써보고 뻥뻥 공을 날려서 녀석이 쫒아가게도 만들어보고 온갖 꼼수를 동원했다. 하지만 그렇게 지친 와중에도 녀석은 순간의 찬스에 정확히 골을 넣었고 나는 번번이 미스를 해서 스코어는 점점 벌어졌고 마침내 101이 되었다.

이제 그만 하지?”

흥수가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 질까봐 겁나냐?”

나는 마지막까지 오기를 부렸다. 흥수는 제법이라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너 뛰다 쓰러져 죽을까봐 겁난다,임마.”

죽어도 너 같은 새끼한텐 안진다.”

나는 다시 공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더 이상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쥐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려고 했지만 아파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리를 붙잡고 쓰러지는 내게 다가온 흥수는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다리를 주물러서 풀어주었다. 

너 축구 잘 한다?”

이게 약올리는 건가 101로 이겨놓고 잘 한다라니, 지 자랑을 그런식으로 하는건가, 나는 뱁새눈을 하고 녀석을 흘겨봤다.

내가 쥐만 안났으면 너 같은 건 한쪽 눈 감고도 이겨.”

퍽이나.”

흥수는 공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가자, 아이스크림 사줄께.”

“…너 이기면 사준다며.”

녀석은 더 약올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사주면 재미 없잖아.”

나는 재수없는 놈 하고 툴툴거리면서도 아픈 다리를 어기적거리면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땡볕에 뛰었더니 갈증에 죽을 것 같았다. 우리는 얼음빙과를 한꺼번에 두개씩이나 입에 물고 가게에서 나왔다. 그렇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은 생전 처음 먹는 것 같았다. 어느 새 해가 기울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우리는 골목길 계단에 앉아서 낡은 슬레이트 지붕사이로 보이는 붉은 빛이 점점 어두운 보랏빛이 되는 것을 보며 묵묵히 두번째 빙과를 해치웠다.

우리집 가서 놀다 갈래?”

흥수의 말에 나는 멈칫 했다. 집에 놀러오라는 말,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어렸을 적 멋모를때는 반친구들 따라서 우르르 다른 집에 놀러가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친구 엄마들이 내가 놀러 오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도 없는 아이가 허구한 날 남의 집에 와서 종일 놀다가 점심 저녁 먹고 가니 얼마나 성가셨을까. 하지만, 그나마 나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몇몇 엄마들의 눈빛마저 차갑게 달라진 것은 내가 3학년 때 우리 가족을 비하하며 놀리던 학교 일짱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린 다음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친하던 아이들마저도 엄마가 너랑 놀지 말라더라’, ‘너 집에 데려오지 말라더라하면서 나를 피했다. 그때부터 나는 외토리가 되었고, 그 외로움과 분노를 싸움 걸어오는 녀석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리고 그럴 때 마다 이리저리 자주 전학을 다니게 되어서 친구를 사귀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나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나 집에 가야 돼.”

그리고는 뒤돌아서서 빈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걔네 집에 놀러갔다가 오히려 영영 같이 놀지 못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일었다.

그래, 학교에서 보자.”

흥수는 내 등뒤에다 대고 그렇게 소리쳤다.

 

다음날, 나는 교실에서 흥수를 보긴 했지만, 흥수는 수업은 오전에만 듣고 축구부 연습을 하러 갔다. 나는 집에 가다가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는 축구부를 보았고, 혼자 야생마처럼 종횡으로 질주를 하는 녀석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그 자리에 서서 축구경기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구경하고 서있는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니었다. 정말로 흥수는 걔 말대로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교내 스타였다. 여자애들이고 남자애들이고 간에 축구 잘하고 키크고 성격까지 반듯하고 어른스러운 흥수를 영웅처럼 좋아했다. 흥수 책상에는 늘 여자애들이 놓고 간 편지며 사탕과자 봉지가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오늘도 흥수가 연습 끝나기를 기다리는 여자애들이 몇 명 서성거리고 있다가 걔가 연습을 마치고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둘러쌌다. 나는 굳이 흥수를 기다렸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가방을 메고 교문을 향했다. 그런데 흥수가 나를 불렀다.

, 고남순. 같이 가.”

그러더니 여자애들한테 손을 흔들고는 내게로 뛰어왔다. 나는 왠지 머쓱해서 말했다.

너 기다린 애들하고 같이 가지?”

너도 나 기다렸잖아.”

아냐. 그냥 축구 본 거야.”

너랑 같은 동네잖아. 쟤네들은 딴 데 살아.”

그러고보니 우리가 사는 동네는 학교에서 좀 떨어진 산동네 판자촌이었다. 그 동네에서 다니는 애들은 얼마 없었고, 대부분은 새로 지어진 아파트촌에 살고 있었다.

우리팀 이번 주말에 축구대회 나가. 심심하면 구경하러 와.”

“… 나 바쁜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말에 할 일이라고는 빈집에서 TV보는 것 뿐이었다. 아침을 먹고 방바닥에서 이리저리 구르던 나는 결국 축구대회가 열리는 이웃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다른 팀들 하는 걸 보니 흥수의 상대가 될 만한 녀석은 없어 보였다. 잠시 후 우리학교 축구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켜보고 있자니 뭔가 좀 이상했다. 흥수가 초반에 투입되지 않은 것이었다. 전반전 내내 흥수는 벤치를 지켜야 했다. 후반전이 되어서도 흥수는 나오지 못했다. 하루에 여러 경기가 있으니 코치가 흥수의 체력을 비축해두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다행히 첫 게임은 우리학교가 이겼다.

두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좀 강팀이었다. 전반전에 2:1로 뒤진 채 끝났다. 그런데도 코치는 후반전에 흥수를 투입하지 않았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데 후반전에도 한 골을 더 먹어서 3:1까지 벌어졌다. 그제서야 코치는 흥수를 교체투입했다.

니들 다 죽었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흥수의 활약을 기대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학교 선수들이 지들끼리만 패스를 하고 흥수에게는 좀처럼 공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설마 했는데, 다음에 온 찬스에서도, 그 다음에 온 찬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흥수에게 공을 주면 점수 따는 건 식은 죽 먹기일텐데 왜 공을 안 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흥수는 패스를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다. 적극적으로 상대편 공을 가로채서 수비수 3명을 제치고 투입된 지 5분만에 1골을 만회했다. 지금까지 벤치에 있다 나와서인지 더 펄펄 날았고, 기운 빠진 상대팀은 초조해하다가 다시 실점을 해서 동점 상황이 되었다. 후반전 종료 2분을 남겨 놓고 양쪽팀이 모두 느슨해 져서 연장전 가나 승부차기 하나 이러고 있을 때 흥수가 번개같이 다시 한골을 넣어 결국 4:3으로 이겼다. 

그날 다른 경기들도 똑 같은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우리학교는 시 대표로 다음달에 있을 경기도 축구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경기가 모두 끝나고 흥수는 누나에게 나를 소개시켜주었다.

니가 남순이구나. 흥수가 같은 동네 사는 친구가 전학 왔다고 좋아하더라.”

흥수 누나는 웃는 얼굴로 반갑게 내게 인사했다. 그리고 우리를 데리고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도 사줬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끼는 이런 가족 같은 느낌에 나는 어색하기도 하고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전학온 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왠 녀석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너 예전 학교에서 일짱이었다며?”

그래서?”

내가 이 학교 일짱이거든.”

애들 여럿 데리고 몰려다니는 거나, 말하는 거나, 척 보아하니 별 것도 아닌 녀석 같은데 어떻게 일짱이 되었을까 싶은 녀석이었다. 그런 경우에는 보통 뒷배를 봐주는 형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빨리도 왔다. 진작에 텨 와서 이 형님한테 인사했어야지.”

녀석은 내가 말하는 게 어이가 없는 듯 했지만 나는 여전히 무시하듯 약을 올렸다.

있다 수업끝나고 보자. 돈 좀 넉넉히 갖고 와라.”

학교 밖 공터에서 만났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짱은 싸움은 잘 못하는 것 같고, 나머지 녀석들을 시켜서 나와 붙게 했다. 6:1로 붙었는데 동네애들 싸움 하듯이 흙집어던지고 붙잡고 늘어지고 해서 피곤하긴 했지만 한방씩 제대로 먹여주니 금새 깨갱이었다. 혼자 남은 일짱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며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가 이렇게 맞은 거 알면 형들이 너 가만 안 놔둘껄.”

하지만 이미 잔뜩 쫄아서 내 눈도 못마주쳤다.

일러 봐 어디.”

!”

내 주먹 한방에 일짱은 코피를 주르륵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6명을 한줄로 쭉 무릎꿇려놓고 나는 이제부터 까불면 죽는다고 얼차려를 한따까리 주었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에 대한 정보나, 학교 안팎의 궁금한 정보들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축구부에 대해서도 지나가듯이 물었다.

근데 너네들, 축구부애들이 왜 박흥수한테 패스 안 하는지 아냐?”

“… 흥수가 너무 잘하니까….”

“… 그럼 코치는 왜 박흥수를 벤치에만 앉혀놓는데?”

엄마들이 자기 애 많이 뛰게 해달라고 돈다발 찔러주니까….”

….”

나는 그제서야 상황이 조금씩 이해가 갔다. 흥수가 인기가 많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고 있는 존재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그애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충격이었다. 나는 나처럼 하나도 잘하는 게 없는 아이나 미움을 받았지, 흥수처럼 월등하게 축구를 잘하고 가난하긴 해도 화목한 집안에 성격도 좋은 아이를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그것도 축구부 안에 있을 줄은 몰랐다.

다 꺼져라. 이제부터 내 눈에 띄면 죽는다.”

나는 갑자기 흥이 깨져서 녀석들을 다 돌려보냈다. 집에 갈까 하다가 마음은 답답하고 빈집에 들어가기는 싫고 걷다보니 다시 학교 운동장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다시 축구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 흥수는 자기편 10, 상대편 11명과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21명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누가 나보고 몇대 1까지 맞짱을 떠봤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몰라도 흥수는 21:1 로 맞짱을 떠서 이겼다고 말 할 수 있었다. 지들끼리만 공을 돌리던, 애들이 과격한 태클을 해오던, 결국 어떻게든 공을 가로채서 수비수들을 돌파해서 골을 넣고야 말았다.

골을 넣고도 흥수는 들뜨지 않았다. 다른 애들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돌아서는 흥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왠지 기분이 울컥 해서 외면하고 돌아섰다.

흥수는 나를 따라 나와서 싸운 흔적이 역력한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 누구랑 싸웠냐? 일짱?”

아니, 싸우긴... 그리고 이젠 내가 이 학교 일짱이다.”

흥수는 내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부상에 대비해 가방에 넣고 다니는 비상약을 꺼내왔다.

걔네 고등학생 형들한테 줄 있다던데.”

걱정스럽게 말하는 흥수에게 나는 흥수 눈치를 흘낏 보고 흘리듯 말했다.

걔네 하는 짓 보니까 걔네 형들도 별거 아니겠더라. 비겁한 새끼들. 쌈한다는 놈들이 흙뿌리고, 뒷통수 후려치고축구부애들은 지들끼리 편갈라 공돌리고  , 이 학교 원래 이렇게 물이 더럽고 야비하냐?”

흥수는 내 말에 잠깐 멈칫 했지만 이내 아무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어쩌겠냐, 그러려니 해야지.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싫은 일도 참아야 해.”

나는 흥수가 어째서 그렇게 나이에 비해서 어른스러운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주위의 견제와 온갖 더러운 꼴을 당하면서도, 축구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감수하고 인내하며 달려 온 것이었다. 나라면 치사해서 축구 안한다고 몇번을 뛰쳐 나왔을 텐데 흥수는 축구를 정말 삶 그 자체만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축구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축구부 주장이 집에 가는 것을 따라가다가 녀석이 혼자가 되었을 때 앞을 막아섰다. 녀석은 이미 내가 일짱 무리들을 쓸어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는지 겁먹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운동부 애들은 그냥 싸움만 하는 애들보다 다루기가 쉬었다. 부상이라도 입으면 당장 훈련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엄청 몸을 사리니까 무릎이나 어깨처럼 부상이 잦은 부위를 한방 먹이면 지레 겁을 먹고 얼굴이 허얘져서 도망가곤 했다.

너네 축구경기가 너무 재미가 없어서 못보겠더라. 좀 제대로 좀 뛰어봐.”

나는 발로 녀석의 정강이를 툭툭 걷어찼다.

넌 눈이 가자미 눈이냐? 패스를 제대로 해야지, 왜 빈 데 두고 엄한데다 공을 돌려?”

녀석도 내가 맨날 흥수와 축구 끝나고 집에 가는 것을 봤던 터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눈치 깐 듯 했다. 잘못한 게 있어서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었다.

미안….앞으로 잘 할께.”

나는 녀석에게 히죽 웃으며 마지막 쐐기를 박고는 뒤돌아섰다.

제대로 해라. 그러다 너 영영 축구 못하게 되는 수가 있어.”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흥수의 다리를 망가뜨기게 될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Posted by 에페르
,

학교2013 리뷰

학교2013 2013. 1. 29. 00:16

학교2013이 끝났다.
학교2013을 처음 접한 것은 인터넷하면서 TV 틀어놓은 것을 소리만 들으면서였다.
소리만 듣는데도 상황이나 대사가 궁금증을 일으키고 확 끌리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정쌤과 강쌤의 의견대립이 다 맞는 말이고 촌철살인이라 대본이 짜임새있네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짤들을 봤을 때만 해도 굳이 챙겨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기사나 평이나 줄거리들을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되면서 궁금증이 생겨서 몰아서 봤다.

우선 촬영이나 편집 연출이 무척 공을 들인 티가 난다.
경험이 적은 신인배우들이 많은데 연기가 빠진다는 느낌이 드는 애들이 없는걸 보면
대충찍지 않고 장면장면 리허설과 연기지도도 섬세하게 하는것 같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학교에서 가장 좋은 것은 역시 대본인 것 같다.
캐릭터 상황 대사 사건구성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유기적으로 어울린다.
주제의식, 캐릭터, 사건구성이 모두 다 좋기가 쉽지 않은데
학교2013은 모두 균형을 이루며 닿기 힘든 목표에 가까이 가고 있다.
대사도 명대사를 꼽기가 어려울 정도로 하나하나가 함축적이고 가슴에 팍팍 와 꽂힌다.

 

1. 주제의식
누가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나.
학교폭력, 몇몇 대학가는 학생들과 우등생에게 맞춰진 학교교육 때문에
공부에 관심없거나 들러리 서며 시간낭비하다 졸업하는 대다수의 학생들,
친구는 경쟁자가 되고 사교육과 치맛바람 앞에 선생님들은 무력하고
왕따와 뒷다마로 교실은 느와르 영화나 다름없는 폭력의 장이 되어버렸다.
학교2013에서 그리고 있는 모습들은 새롭다기보다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신문지상에서 매일 접하는 이야기를 옮겨 놓은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파격적이다.
모두 알고는 있지만 드라마에서 외면하고 있던 것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역시 학교에서 수업하면 반은 자거나 다른 공부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눈으로 드라마에서 선생님들이 수업하고 있는데 널부러져 있는 장면을 직접 보니 기분이 묘했다.
선생이 불러도 대답도 안하고 가버리고 야단치면 비웃고 말대답은 기본이고 치려고 들거나
우등생이라고 해도 싸가지 없는 말로 선생님의 자존심을 박박 긁어 공격하기는 마찬가지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있는 듯 없는 듯 학교는 왔다갔다 할겁니다"
교과서도 없고 배울 의지도 없고 건드리지 말라는 흥수에 대해서 엄포스는 만족하여 이렇게 말했다.
학교는 배움의 전당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군대와 같은 곳일 뿐이다.
고등학교 졸업장은 지식과 학력을 증명한다기보다 경직된 조직시스템을 일정기간 버텨냈다는
일종의 사회순응 증명서를 주는 국가인증기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학교란 결국 사회의 축소판이고 사회가 변하지 않는 이상 학교가 변하기는 불가능하다.
학교가 밥먹으러 잠자러 왔다갔다 하는 곳이 아니라 어떤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졸업장으로 사람과 능력을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가 변해야 할 것이다.
독일에서는 중학교부터 이미 기술학교와 일반고교가 갈라진다고 한다.
처음에는 13살 아이에게 대학의 꿈을 접고 기술학교를 가라고 하는건 너무 심하다 생각했는데
학교2013을 보니 저렇게 자면서 시간때우러 다닐 바에는
그냥 기술학교에서 각자 배우고 싶은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이들을 위해서도 좋겠구나 싶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술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대학을 나온 사람과 임금격차나 사회적 차별이 지금보다는 훨씬 적어야 할 것이다.

 

2. 캐릭터
학교2013은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조연인지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각 캐릭터들이 모두 쉽지 않고 사연있고 다중적인 면을 그리고 있다.
(예를들어 불량학생 오정호가 집에서는 순종적으로 맞는 아들이라거나
우등생 김민기나 송하경이 집에서는 가족들로 인한 컴플렉스에 시달린다거나)
현실적으로 누구나 가진 모순적 다중성을 그대로 보여주다보니 그런것 같다.
캐릭들이 모두 개성있고 매력있어서 캐미라인 100개쯤은 너끈히 그려질 수 있을것 같다

 

정인재
   처음 강쌤과 티격태격하는 걸 대충 들었을 때는 정쌤이 주인공이겠거니 했다.
   인성과 감성 중심의 교육, 낙오하는 학생 없이 모두를 포기않는 엄마와 같은 모두를 품는
   이상적인 선생님인 정쌤이 드라마에서 차지할 자리는 단역아니면 주연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 볼 수록 정인재 캐릭설정이
   내가 처음에 생각한 것이나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그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정과 이상적인 교육을 실천하고자 하는 정쌤이 학교 현실에서는 무능력한 선생 취급을 받고
   학생과의 거리두기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학생들의 정확한 마음이나 실태 파악도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사건해결도 정쌤보다는 강쌤이 주도적으로 해결하곤 했다.
   정쌤이 담임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반대한 아이들은 남순 흥수 영우 지훈 뿐이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선생님이 학부모에 의해 쫒겨나도 아이들에게는 인정을 받았는데
   정쌤은 아이들에게조차 외면을 받는 것이었다.
   강쌤 말대로 잘못된 사회와 시스템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이지만
   어떻게 사회와 시스템을 바꿀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조차 냉대를 받는 정쌤이 싸워나갈 의지와 힘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정쌤의 노력과 진심과 빈자리는 결국 아이들의 마음에 전해지고
   비온 뒤에 땅이 굳듯이 아이들과의 신뢰관계는 더욱 돈독해진다.

 

   장나라가 나온 드라마는 처음 보는데 연기에 진심이 느껴지는 배우인 것 같다.
   아이들을 보거나 할 때 정말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 같고
   말할때도 아이들이 마음다칠까봐 조심스레 이야기 하는 것이 느껴진다.
   학교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창밖에서 지켜볼 때 가슴이 울렸다.
   성의있고 열심히 하는 배우라는 느낌이 든다.  

 

강세찬
   처음에는 주인공인 정쌤에 감화되어가는 악역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베바의 강마에 같은 위악적인 캐릭터였다.
   성적제일주의 능력제일주의에 학생에게는 늘 빈정거리는 투로 독설을 거침없이 내뱉고
   학생 사정은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곤 하니 악역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런 냉혈한이 정쌤에게 동화되어 간다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과거에 자신의 무관심으로 제자를 잃은 경험이 있고
   그래서 상처를 받아서 학원강사가 된거라면 설명이 된다.
   강쌤의 과거를 비밀에 싸인 채 진행을 하려는 의도였겠지만
   단순한 조연이나 악역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려면 그의 트라우마에 대한 힌트를 좀 더 줬다면
   그리고 그때문에 힘들어하는 내면 씬을 더 자주 줬더라면 더 캐릭터의 포텐이 터졌을 것 같다.
   아이들을 멀리하는 이유가 애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들과 감정적으로 엮이게 되면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없게 될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더 나타내줬으면 어떨까.
   15 16회에서나 그런 아련한 모습들이 많이 보여서 아쉬웠다.
   어쨌든 강쌤이 떠날 줄 알았는데 결국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학교에 남는다.
   몇십억 돈의 유혹은 쿨하게 뿌리친 강쌤도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마음 붙일 데 없이 외로운 아이들을 뿌리치고 떠나지는 못했다.

 

   최다니엘도 처음 본 배우인데 약간 만화적이고 허세 끼가 있고 바른 말인데도 얄밉게 말하고
   아이들과 정쌤을 좋아하면서도 안좋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사건을 해결해주는 츤데레 캐릭터를
   가끔은 코믹하게 가끔은 감성돋게 가끔은 멋있게 개성있게 잘 그려주고 있다.

 

고남순
   학교폭력을 드라마나 영화로 다루면서 어려운 점이 피해자 가해자 입장이다.
   다큐멘터리나 뉴스라면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다루게 되지만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에는 피해자 입장에 서서 그리기가 쉽지 않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약자보다는 강자에 자신을 동일시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피해자 관점에서 다루면 시청률 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많은 상업 영화나 드라마가 피해자가 복수에 나서면서
   약자에서 강자로 변화하는 모습을 그리는것도 그런 이유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학교2013은 가해자인 고남순을 주인공으로 하면서 피해자를 그의 절친으로 설정하고,
   또 다른 가해자 오정호를 함께 엮어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설정에 대해서 학교폭력 문제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왜곡까지는 아니고 관점의 문제인 것 같다.
   학교폭력에 있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나누는 사람들이 있지만
   작가 생각에는(그리고 내 생각에도) 학교폭력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은 애매하다.
   오정호도 빵셔틀부터 시작했듯이 오정호도 처음에는 피해자이다가 가해자가 되었다.
   학교2013이 아니라 학교2010을 찍었으면 오정호도 피해자였을 것이다.
   이경이나 지훈이도 처음부터 애들을 괴롭히고 다니지는 않았을것 같다.
   그러나 공부못한다고 집이 못산다고 경민 은혜같은 아이들에게 멸시를 받는 피해자였다가
   정호를 만나서 몰려다니며 싸움질도 하고 하니까
   아이들이 더이상 건드리거나 대놓고 무시하지 못하니
   그렇게 스스로를 방어하다가 고착화되어 가해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의 학교 현실에서는 가해자가 되어 쎈척하고 남을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만만하게 보여 먹잇감이 되고 피해자가 되는 상황이다.
   (꼭 때려야만 폭력이 아니다.
   길은혜같은 뒷다마 언어폭력과 의심 멸시 왕따도 폭력이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무형의 폭력을 가장 많이 당하는 아이는 오정호이다.)

 

   남순이도 처음에는 그를 무시하는 친구들을 때리다가 일짱이 되었을 것 같고 
   주위의 어른들이 아무도 그를 잡아주지 않고 피하거나 혼자 내버려둬서 점점 폭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하나뿐인 절친의 꿈을 자신의 손으로 산산조각 내게 되고
   친구도 잃고 희망도 잃고 살아갈 의미도 잃고 늘 가슴 한켠의 죄책감에 괴로와하는 유령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가 가한 폭력으로 인한 피해는 그 자신의 내면을 황폐화시키고 스스로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어 버렸다.

  

   단순히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 만으로는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애초에 가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폭력을 방지하기 위하여
   조그만 폭력에도 어른들의 큰 관심과 지속적 관찰과 큰 벌칙과 사전교육이 필요하다.
   (외국에서는 실수로 부딫치거나 장난으로 밀치기만 해도 민기엄마가 했듯이 난리가 난다)
   폭력이 발생하면 가해자가 스스로의 행동이 불러온 결과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상응하는 벌칙,
   피해자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관심과 정신적인 지지,
   그리고 가해자의 사과와 피해자의 용서가 필요할 것이다.
   오정호에게 법으로 처벌한다고 협박해야 겁먹지 않는다.
   감방갔다와서 당구장 형님들하고 지내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오정호가 변한 것은 반 아이들이 다같이 그에 대항하고
   정쌤이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가해자로만 살아왔고 사랑으로 대한다고 달라지지 않을 가해자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학교폭력 가해자의 열의 한둘이 그런 아이들이라면,
   이이경 이지훈처럼 별 생각없이 환경에 휩쓸려 나쁜 길을 걸어온 아이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만 휩쓸려 무리짓지 않도록 막기만 해도,
   한두명의 문제아들은 힘을 많이 잃을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단순가해가담자와 방관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가해와 피해의 정도는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이종석은 연극적인 표정연기보다는 눈빛만으로 연기를 하는데도 감정이 잘 전달되는 것 같다.
   고남순 캐릭이 철없는 중딩, 성적바닥인 맹한 고딩, 카리스마있는 일진,
   인생에 달관한 애늙은이, 죄책감에 괴로와하고 흥수에게 미안해서 쩔쩔매는 내면연기까지
   젊은 배우가 하기에는 무척 난이도있는 캐릭터인데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얼굴은 평범하고 눈빛도 강렬하지 않고 개성이 없는 듯 해서
   짤들을 봤을 때는 그닥 끌리지 않았는데 연기하는 모습을 보니 눈빛이 강렬하지 않은데도
   미묘하게 변하는 자연스러운 풋풋한 눈빛 연기를 잘하는 것 같다.
  
박흥수
   그를 통해서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우선 폭력의 일상성과 가벼움에 대한 일침일 것 같다.
   그는 그를 괴롭히는 일진에 의한 폭력이 아니라
   친한 친구사이에서 가볍게 취급되는 폭력에 의해 한순간에 인생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남순도 그냥 통과의례처럼 가볍게 생각했고 흥수도 그렇게 생각해서 맞은것인데
   그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던 가벼운 폭력에 의해서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지옥과 같은 현실로 떨어지게 된다.
   가해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행한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냥 툭 쳤다거나 장난이었다거나 농담이었다거나 기억도 잘 못한다.
   그러나 가벼운 폭력조차도 피해자 입장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아예 폭력은 사소한 것이라도 장난이라도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학교폭력에서도 유효한 말이다.

 

   남순 흥수 관계에서 주목해야할 또 한가지는 화해와 용서의 과정일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와 용서의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다.
   남순흥수 관계를 10여회나 질질 끌었다기 보다는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내용이
   결국은 학교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고
   틈틈이 다른 에피를 집어넣었던 것 같다.

   (더 크게 보자면 남순흥수 스토리와 정쌤의 스토리, 강쌤의 스토리가 삼각대처럼 축을 이루고

   오정호가 그 사이사이를 실처럼 연결해주고 있고 다른 학생들 에피가 장식을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흥수와 다시 만난 남순은 처음에는 죄책감에 차마 흥수를 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흥수는 자신의 꿈이 날아갔다는 사실보다도 친구가 사과하지 않고 도망간 것에 더 분노한다.
   남순은 사과를 하고 뒤늦게나마 흥수에게 다가가지만 그의 닫힌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겉으로는 남순을 무시하며 쿨한 척 하지만
   그동안 겨우 추스려왔던 분노의 회오리를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고 회피하려고 한다.
   남순은 책셔틀 빵셔틀 가방들어주기 뭐든 흥수를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려 하고
   흥수가 가해자로 몰리자 반아이들 모두의 앞에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밝힌다.
   흥수가 처음 남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도
   남순이 모두의 앞에서 사실을 밝혔던 그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의 인정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미 뒤틀려버린 흥수의 미래를 어떻게 보상을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했다.
   남순은 "내가 버린 건 학교가 아니라 너다"라는 말로 결국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친구라는 답을 내놓는다.
   흥수는 남순의 진심은 알게 되었지만 혼자 힘들어했던 시간이 긴 만큼 쉽게 용서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마음이 착한 흥수는 차마 화를 내지도 못하고 그저 계속 외면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오정호의 괴롭힘과 강쌤의 벌칙으로 인해
   두사람이 힘을 합쳐 시련을 극복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면서
   흥수는 결국 중요한 것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임을 깨닫는다.
   남순이 강제전학갈 상황에 처하면서 흥수는 "지금 화해하는 중입니다"라며 남순을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역시 다시 친구가 되는데는 과거도 털어야하고
   마음의 상처도 치료해야 하고 아픈 기억도 마주해야한다.
   이후로도 둘은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관계를 회복한다.
   용서와 화해라는 것이 한순간에 되는 것은 아니다.
   포도주가 익을 때 시간이 걸리듯이 시간과 정성이 많이 필요한 과정이다.
   그 상처를 보듬어 주고 함께 해 줄 사람이 선생님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필요하다.

 

   김우빈은 존재감이 대단하고 흡인력과 화면장악력도 있고 외모나 목소리나 개성이 넘친다.
   어느모로 보나 흰 종이와 같은 이종석과는 완전히 반대다.
   처음 등장부터 나쁜남자 포스 제대로 풍기면서 나타나서
   일부러 정호를 도발해서 남순을 주먹질시키고 악마처럼 웃는 등 악역을 맡았지만
   실은 남순이 사고치고 다닐 때마다 쫒아다니면서 구해주고 감방가는 걸 막아주던 친구였다.

 

오정호
   "내가 학교를 싫어하는게 아니라 학교가 나를 싫어한다"는 대사는
   정호가 그동안 학교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 말해준다.
   엄마도 없고 아빠는 학교에서 술취해서 행패를 부렸으니
   어려서부터 천덕꾸러기 취급 받았을 것이다.
   학교폭력 가해자이자 가정폭력 피해자이고
   이미 폭력에 중독되어버린 불안과 분노로 똘똘 뭉친 아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응석부리고 자라야 할 나이에 폭력에 시달리며 어린시절을 빼앗긴 채
   이제는 감정적으로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상태로 학교에서 내쫒겨 어른의 세계로 내몰리고 있다.
   2학년2반에서 제일 불쌍한 녀석은 오정호인 것 같다.
   다른 애들은 그래도 부모의 무관심에 방치되거나 과보호에 시달리긴 했어도
   맞을까 집에 들어가기 두려워하며 매일 불안하게 살지는 않았을테니까.
   그리고 이젠 도난사건이나 조금이라도 안좋은 일이 일어나면 무조건 모두 정호부터 의심하니
   주홍글씨를 달고 다니는 셈이고 인과응보라기에는 너무 잔인한 현실이다.
   결국은 쌤들의 노력으로 정호도 학교에 맘 붙이고 제대로 다녀보려고 하지만
   반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이나 교장선생님이나 아버지까지도
   그가 학교를 어떻게든 다니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만다.
   결말도 끝까지 오정호가 맘에 걸리게 잘 마무리 지은 것 같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가족과 학교에서 품어주지 못해서 밀려나는 무수한 오정호들이 있다.
  
   곽정욱이 그런 오정호를 무섭고 살벌하게 연기해줘서 소름끼쳤다.
   오정호도 처음에는 악역이지만 나중에는 정쌤으로인해 변화하는 캐릭터이고
   나중에 밝혀질 사연도 있어서 사이코같은 나쁜놈으로만 표현하면 안되는데
   때로는 살기를 띄었다가 때로는 쫄았다가 때로는 초딩스럽기도 하다가 하는 모습을
   곽정욱이 널뛰지 않게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잘 그려준 것 같다.
   학교를 떠나려는 정쌤을 "그냥 다녀요, 나도 다니는데" 하면서 츤츤대는 모습이나
   죽일듯 괴롭힐 땐 언제고 흥수에게 넉살좋게 남순에게는 삐죽거리며 고기반찬을 덜어주며
   "왜 밥맛이 없냐. 내가 공개적으로 짜져줬는데" 할 때는 아이다워서 우습다.

 

이 외에도 다른 캐릭터들도 모두 개성이 있다.
시간과 체력이 안되서 일일이 리뷰는 못하지만

이이경 이지훈 영우 김민기 변기덕 송하경 강주 남경순 길은혜 계나리 등 몇분 안나오는 조연마저도
캐미가 장난아니고 대사 몇줄로 캐릭터가 딱 감이 오게 잘 만들어졌다.


3. 사건구성
편집을 통한 반전이나 미스테리를 잘 살린 구성이 많다.
일진빵 장면을 넣어서 처음에 흥수가 악역으로 비치게 만든다는지
시험지나 휴대폰 도난사건의 범인이 누구일지 궁금하게 만드는 거나
남순이나 강쌤의 과거가 드러나는 것 등도 그렇지만
2반 학생들 하나하나의 에피가 진행될 때마다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메인 캐릭터들의 사건도 흥수가 학교에 안나오다 나오자 이번에는 남순이 학교를 안나오고
남순이 학교를 나오게 되자 강제전학 이야기가 나오고
흥수가 가해자 누명에서 벗어나게 되자 이번에는 남순이 가해자가 되고
이번에는 정쌤이 나가게 되는 등 사건이 긴장감을 잃지 않고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한 회에도 서너개의 에피가 한꺼번에 진행이 되고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인과관계에 영향을 준다.
여러 개의 에피가 얽히면서 하나로 풀어져 해결이 나는 것을 보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줄줄이 이어지는 에피들을 보면 작가에게는 역시 경험이 가장 큰 재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면의 큰 사건과 표면적인 사건을 중의적으로 짜맞추는 것도 좋다.
영우가 전학 위기에 처했을 때 직접적으로 반대하는게 아니라 지각벌칙인 풀꽃 시를 읊는다던지,
남순이 자신의 과거를 수업시간에 발표하는 형식으로 처리한다던지,
흥수가 퇴학위기에 처했다가 끝나고서야 왔을 때
"종례전에 왔으니까 박흥수 너 지각이야"하고 빈 교실에서 몇명이 종례를 하는 모습으로
어떻게든 그를 손내밀어 잡아주려는 정쌤과 친구들 마음을 보여준다던지,
흥수가 강제전학에서 남순을 구해주고 "대신 빽빽이 너 혼자 다 써라"는 조건을 제시한다던지,
"시 한줄 쓴다고 뭐가 달라지나"라는 시로 정호의 막막한 심정을 표현한다던지,
오글거릴 수 있는 장면들을 은유적으로 돌려서 표현하는 것도 좋았다.

 

꼭 사건이 아니더라도 장면장면도 맞어 그래 하는 느낌이 든다.
하경이와 강주가 킥킥거리며 이불덮고 화해하는 장면을 보면 여자애들이 정말 저렇지 싶고
니가 좀 깨우지 하며 서로 짜증내고 핀잔주는 남순과 흥수를 보면 남자애들이 저렇지 싶다.


매일 의미없이 학교 왔다갔다 하는 애들을 보면
의미없이 회사에 왔다갔다 하는 내 모습과 겹쳐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래전 학교다닐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불편하기도 했다.
나 역시 2학년2반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고 방관자이기도 했다.
남순이는 그래도 흥수를 다시 만나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일 것 같다.
학교에 대해서 드라마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더 이상은 아이들을 경쟁관계로 몰아넣어서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드는 일은 멈추었으면 한다.

 

Posted by 에페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