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황후는 함안성이 복야회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옅게 미소지었다.

‘성동격서였군.’

그때 형종이 뛰어들어왔다.

“비담이 인강전에까지 왔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미실은 말없이 빙긋 웃으며 형종을 보았다. 형종은 미실의 앞에 앉았다.

“비담을 어쩌실 생각입니까?”

“어쩌다니요? 대역죄인입니다. 내일 바로 처형하여 본보기를 보일 것입니다.”

형종은 미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비담은... 제 쌍동이 형제입니다.”

미실은 놀랐다는 듯 형종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 사량부령도 알고 있었습니까?”

... 그럼 어머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습니다. 사량부령과 꼭 닮지 않았습니까.”

형종은 미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처형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미실황후는 입술을 달싹달싹하다가 힘겹게 말했다.

“형종공께 해가 되니까요. 제게 아들은 형종공 하나뿐입니다.”

....!’

경악하는 형종에게 미실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모르시겠습니까? 비담은 공의 정적이 될 것입니다. 비담을 왕자로 인정하면 가야세력이 그의 뒤를 밀 것이고, 가야세력이 아니라도 그에게 줄을 댈 사람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폐하의 사후에 내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공께서는 비담을 이기실 수 있습니까?”

“죽이지 않아도 멀리 보내면 될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비담의 행동을 보아오시지 않았습니까. 보통 담대한 배짱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비담도 자신이 왕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인강전까지 쳐들어온 게 아니겠습니까? 멀리 보낸다 해도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

“그리고 복야회가 함안성을 취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비담이 스스로 왕국을 건설하겠다 왕이 되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미실황후는 비담의 생각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미실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형종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비담을 설득하여 어떻게든 미실에게 아들로서 살려달라 애원하도록 만드는 방법 밖에 길이 없었다.


비담은 독방에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얻어맞아 기절한 것인지 축 늘어져 있었다. 형종은 그런 비담의 모습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바보 같은 놈…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거야?”

형종의 낮게 뱉는 말에 비담은 눈을 떴다. 형종은 비담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제발 그만 하자”

형종은 비담의 피가 맺힌 입술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제발… 넌 내일 처형될지도 몰라”

비담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럼 죽여. 나보고 어쩌라는거야”

형종은 알고 있었다. 비담이 그동안 얼마나 신라를 증오하면 살아왔을지. 가야인들의 전쟁무기로 키워지면서 얼마나 외로왔을지. 자신을 이용한 가야인들에게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지.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하고 있을지. 그런 비담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방법이 없기에 자신의 무력함에 더 화가났다.

“네가 어머니께 떠나겠다 살려달라고 하면 살려주실거야.”

비담은 관심 없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럴까? ...이미 네가 있는데 난 필요 없잖아.”

형종은 미실의 차가운 태도를 떠올리며 말문이 막혔다.

“너도… 내가 죽는게 이롭잖아.”

비담의 냉소적인 말에 형종은 울컥 하는 느낌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연모한다… 너를…”

“연모라…”

비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넌 그런 감정을 가질 여유가 있구나.”

그리고 솟구치는 눈물을 억지로 참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난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지금까지의 내가 온 힘을 기울여 노력했던 삶이 거짓임을 알았는데… 근데 어머니도 가야인들도 다들 나한테 계속 그렇게 거짓으로 살라는데 어떡해…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 나가는 것 뿐이야. 다들 그걸 바라고 있잖아.”

형종은 마음이 아파서 비담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있기가 괴로웠다.

“난 아냐.. 난 니가.. 그냥 너였으면 좋겠어”

비담은 태연한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마지막으로… 날 안아줘.”

형종은 마지막이라는 비담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비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입을 맞추자 두 사람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며 섞였다. 형종은 비담을 껴안은 채 놓을 수 없었다. 잠시라도 놓으면 비담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시간이 없어... 어서 해줘”

비담의 말에 형종은 눈물을 삼켰다. 비담의 옷섶을 열어 그의 몸을 드러냈다. 목에서부터 쇄골을 거쳐 가슴과 배까지 모든 것을 기억하려는 듯 두손으로 천천히 어루만지며 내려갔다. 형종의 입술이 비담의 젖혀진 목 주위에서 맴돌며 빠르게 뛰는 맥박을 찾아냈다. 얇은 살결 아래의 움직이는 맥박의 감촉은 작은 새를 쥐었을 때 느껴지는 느낌 같이 갸날팠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비담의 몸은 강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모든 복잡한 생각과 두려움을 잊어버리고 그저 쾌락에 몸을 맡기고 싶다는 본능이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형종의 손길이 움직일 때마다 비담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은 더욱 간절하게 형종을 바라보았다.

형종의 손이 아래로 향해 비담의 허벅지 안쪽의 맨 살에 닿자 비담의 몸이 파도치며 숨이 거칠어졌다. 형종은 곧바로 비담의 은밀한 곳을 찾아 애무했고 형종이 긴 손가락으로 쓰다듬을 때마다 비담의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왔. 비담은 형종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이 느낌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는 듯 몰입했다.

“음....으응....”

형종은 비담을 두 팔로 가득 안고 그를 가졌다. 두사람의 몸은 부드럽게 흔들렸고 그때마다 비담은 뒷목에 화살처럼 빠르게 짜릿한 느낌이 연달아 지나가는 것 같았다. 비담은 형종이 주는 쾌감을 참을 수 없는 듯 발을 굴렀다.

“형종...”

비담은 자신도 모르게 형종의 이름을 불렀다. 내일이 아닌 지금, 가장 행복한 순간에 생을 마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절정의 시간이 지나가자 비담은 다시금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형종은 비담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난 이미 20년동안 어머니와 신국을 가졌으니까… 이젠 네가 가져라.”

뭐라구?”

형종은 대답없이 비담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입을 맞추고 돌아섰다.

“형종...!”

비담의 부름에 형종은 멈칫 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옥사를 나갔다.


다음날 비담은 옥사에서 끌려나왔다. 처형장으로 가는 것인가 생각했는데 의외로 병사들이 데려간 곳은 미실황후의 처소였다. 미실황후는 한동안 말없이 비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형종이 돌아올 때까지 네가 그 아이의 역할을 해야겠다.”

...형종은 어디 있습니까?”

“서라벌을 떠나 돌아오지 않을테니 너를 왕자로 인정해 달라는구나.”

비담은 책상위에 놓여있는 형종의 서찰을 후들거리는 손으로 집어들어 읽었다.

...싫다면요?”

비담의 대답에 미실은 비담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것이 비담을 향한 조소인지 형종을 향한 것인지 미실 자신을 조소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죽던지 왕이 되던지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데 싫다?”

그러나 미실은 더이상 말없이 점차 눈시울이 붉어졌다. 미실은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물러가라. 쉬어야겠다.”

병사들은 비담의 묶인 줄을 풀어주고 형종의 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시종들은 비담을 치료하고 사량부령의 옷을 입혔다.


비담은 형종의 방을 살펴보았다. 시녀가 비담 대신 형종을 납치했다면 자신이 살았을지도 모를 곳이었다. 그때 비담은 형종의 책상에 놓인 감람석 반지를 발견했다. 지난번에 운문산에서 형종이 미처 비담에게 건네주지 못했던 것이었다. 반지를 집어든 비담은 반지에 세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전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비담은 곧바로 말을 달려 궁을 빠져나갔다. 궁을 빠져나가자마자 사량부령의 옷은 벗어던져 버렸다.


수나라 광릉으로 가는 배에 올라 출발하기를 기다리던 형종은 무심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형종의 백성들이었지만 애정을 가져본 적도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비담은 고생을 많이 했으니 나보다는 좋은 왕이 되겠지.’

광릉에 자신이 심어둔 비밀 조직이 있으니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더이상 비담을 볼 수 없다는 것은 형종의 마음을 찢어질 듯 아프게 했다. 그래도 비담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 방법 뿐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천천히 배가 뭍을 떠나 강 어귀로 들어서는 순간 말을 타고 쫒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비담은 말을 탄 채 강으로 들어서 배를 쫒았고 배에 올라탔다. 형종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필로 자신이 가는 곳을 반지에 남겨놓기는 했지만, 비담이 이렇게 빨리 알아차릴 줄은, 이렇게 자신을 쫒아 올 줄은 몰랐다.

비담은 한눈에 형종을 찾아내고 그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형종을 확 끌어안았다.

“왜... 따라 온거야?”

형종의 말에 비담은 눈부시게 미소지으며 손가락에 낀 감람석반지를 내보였다.

“따라오라고 남긴거 아니었어?”

형종의 물기어린 눈이 계속 비담에게 머무르자 비담은 쑥스러운 듯 말했다.

“할말도 있고...”

비담은 머뭇거리며 비죽거리며 딴곳을 쳐다보았다.
나도 너.. 좋아한다구...”

그리고 이내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었다.

“왜 이렇게 쑥스럽지?”

형종은 그제서야 웃으며 비담의 손을 지긋이 잡고 쓰다듬으며 끌어당겨 그를 따듯하게 안았다. 비담은 포근한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형종의 에 얼굴을 묻었다.

배는 느린 물살을 타고 바다로 들어서서 광릉을 향해 점점 신라에서 멀어져갔다. 그 이후로 서라벌에서 둘을 본 사람은 없었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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