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순이 회상 시점으로 초딩중딩시절 남순 흥수 팬픽임(아청법에 걸릴 내용 없음)
둘이 어째서 절친이 되었을까 궁금해하다가 쓰게 되었다.
7월초인데 벌써 날이 몹시 더웠다. 집 안은 집 안대로 찜통이고 집 밖은 땡볕이었다. 시원한 아이스크림 생각이 간절했다. 낯선 동네에 이사 와서 아이스크림을 어디서 파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무작정 밖으로 나온 가게를 찾아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걸어내려갔다. 운이 없으면 학교앞까지 걸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미로 같은 동네를 헤매다가 겨우 가게를 찾아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뭐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더워서인지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던 골목에 마침내 누군가 걸어올라오고 있었다. 키로 봐서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같았지만 입고 있는 유니폼은 내가 다니는 학교의 축구부 유니폼이었다. 덥지도 않은지 등에 축구공을 매고 가볍게 오르막길을 오르는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야, 돈 좀 있냐.”
그 아이는 내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를 쓱 훑어보더니 말했다.
“너 우리반이지?”
쫄기는커녕 심심하던 차에 재미있는 일 생긴 듯 나를 보는 그 애 반응이 어이가 없어서 나도 멀뚱멀뚱 마주 바라보았다.
“…”
“며칠전에 전학온 애 맞지?”
“… 어.”
“나 모르면 우리학교에서 간첩인데.”
“그래? 니가 누군데.”
“박흥수.”
그러고 보니, 전학오던 날 교실 맨 뒤에 멀대같이 큰 녀석이 하나 있었던 게 기억났다. 하지만, 나는 걔가 누구든 관심없었다. 빨리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을 뿐이었다.
“됐고... 돈 없냐?”
흥수는 픽 웃으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있다, 쨔샤.”
돈을 잡으려고 뻗는 내 손을 피해 손을 위로 뻗는데, 나보다 키가 반뼘은 큰 것 같아 내 손이 닿지가 않았다.
“뭐 할려구?”
“아이스크림 사먹게.”
“나랑 축구해서 이기면 사주지.”
이번에는 내가 픽 웃을 차례였다. 딱히 운동을 배워 본 적은 없지만, 운동 한다고 어깨 힘주고 까불고 다니는 애들하고 체력싸움에서 밀려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종목이든 내 순발력과 지구력을 따라올 만 한 녀석은 별로 없었다. 싸움 뿐 아니라 운동 좀 한다고 거들먹거리는 녀석들 발라주는 것도 내 취미 중에 하나였다.
우리는 공터로 가서 땡볕에 더위도 잊고 축구를 했다. 축구는 나도 자신 있었지만, 흥수의 발재간에는 당해낼 수 없었다. 공을 앞뒤로 굴리며 번번이 내가 헛발질을 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게 만들었고, 내 체력은 더위 앞에서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나는 지기 싫어서 더욱 악착같이 덤볐지만, 이미 5분 붙어보고 실력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땀이 비오듯 흘렀지만 이미 아이스크림 생각은 싹 달아난 지 오래였다. 물론 흥수도 나 때문에 꽤 진을 뺐는지 아까는 그 더위에 땀 한 방울 안 흘리던 놈이 헉헉거리며 연신 눈으로 떨어지는 땀을 닦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체력싸움이다 생각한 나는 어떻게든 녀석의 체력을 바닥까지 떨어뜨리고서 지더라도 지겠다는 마음이었다. 나도 있는 잔머리 없는 잔머리 굴려가며 훼이크도 써보고 뻥뻥 공을 날려서 녀석이 쫒아가게도 만들어보고 온갖 꼼수를 동원했다. 하지만 그렇게 지친 와중에도 녀석은 순간의 찬스에 정확히 골을 넣었고 나는 번번이 미스를 해서 스코어는 점점 벌어졌고 마침내 10대1이 되었다.
“이제 그만 하지?”
흥수가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왜? 질까봐 겁나냐?”
나는 마지막까지 오기를 부렸다. 흥수는 제법이라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너 뛰다 쓰러져 죽을까봐 겁난다,임마.”
“죽어도 너 같은 새끼한텐 안진다.”
나는 다시 공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더 이상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쥐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려고 했지만 아파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리를 붙잡고 쓰러지는 내게 다가온 흥수는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다리를 주물러서 풀어주었다.
“너 축구 잘 한다?”
이게 약올리는 건가 10대1로 이겨놓고 잘 한다라니, 지 자랑을 그런식으로 하는건가, 나는 뱁새눈을 하고 녀석을 흘겨봤다.
“내가 쥐만 안났으면 너 같은 건 한쪽 눈 감고도 이겨.”
“퍽이나.”
흥수는 공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가자, 아이스크림 사줄께.”
“…너 이기면 사준다며.”
녀석은 더 약올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사주면 재미 없잖아.”
나는 재수없는 놈 하고 툴툴거리면서도 아픈 다리를 어기적거리면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땡볕에 뛰었더니 갈증에 죽을 것 같았다. 우리는 얼음빙과를 한꺼번에 두개씩이나 입에 물고 가게에서 나왔다. 그렇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은 생전 처음 먹는 것 같았다. 어느 새 해가 기울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우리는 골목길 계단에 앉아서 낡은 슬레이트 지붕사이로 보이는 붉은 빛이 점점 어두운 보랏빛이 되는 것을 보며 묵묵히 두번째 빙과를 해치웠다.
“우리집 가서 놀다 갈래?”
흥수의 말에 나는 멈칫 했다. 집에 놀러오라는 말,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어렸을 적 멋모를때는 반친구들 따라서 우르르 다른 집에 놀러가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친구 엄마들이 내가 놀러 오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도 없는 아이가 허구한 날 남의 집에 와서 종일 놀다가 점심 저녁 먹고 가니 얼마나 성가셨을까. 하지만, 그나마 나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몇몇 엄마들의 눈빛마저 차갑게 달라진 것은 내가 3학년 때 우리 가족을 비하하며 놀리던 학교 일짱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린 다음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친하던 아이들마저도 ‘엄마가 너랑 놀지 말라더라’, ‘너 집에 데려오지 말라더라’ 하면서 나를 피했다. 그때부터 나는 외토리가 되었고, 그 외로움과 분노를 싸움 걸어오는 녀석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리고 그럴 때 마다 이리저리 자주 전학을 다니게 되어서 친구를 사귀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나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나 집에 가야 돼.”
그리고는 뒤돌아서서 빈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걔네 집에 놀러갔다가 오히려 영영 같이 놀지 못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일었다.
“그래, 학교에서 보자.”
흥수는 내 등뒤에다 대고 그렇게 소리쳤다.
다음날, 나는 교실에서 흥수를 보긴 했지만, 흥수는 수업은 오전에만 듣고 축구부 연습을 하러 갔다. 나는 집에 가다가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는 축구부를 보았고, 혼자 야생마처럼 종횡으로 질주를 하는 녀석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그 자리에 서서 축구경기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구경하고 서있는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니었다. 정말로 흥수는 걔 말대로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교내 스타였다. 여자애들이고 남자애들이고 간에 축구 잘하고 키크고 성격까지 반듯하고 어른스러운 흥수를 영웅처럼 좋아했다. 흥수 책상에는 늘 여자애들이 놓고 간 편지며 사탕과자 봉지가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오늘도 흥수가 연습 끝나기를 기다리는 여자애들이 몇 명 서성거리고 있다가 걔가 연습을 마치고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둘러쌌다. 나는 굳이 흥수를 기다렸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가방을 메고 교문을 향했다. 그런데 흥수가 나를 불렀다.
“야, 고남순. 같이 가.”
그러더니 여자애들한테 손을 흔들고는 내게로 뛰어왔다. 나는 왠지 머쓱해서 말했다.
“너 기다린 애들하고 같이 가지?”
“너도 나 기다렸잖아.”
“아냐. 그냥 축구 본 거야.”
“너랑 같은 동네잖아. 쟤네들은 딴 데 살아.”
그러고보니 우리가 사는 동네는 학교에서 좀 떨어진 산동네 판자촌이었다. 그 동네에서 다니는 애들은 얼마 없었고, 대부분은 새로 지어진 아파트촌에 살고 있었다.
“우리팀 이번 주말에 축구대회 나가. 심심하면 구경하러 와.”
“… 나 바쁜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말에 할 일이라고는 빈집에서 TV보는 것 뿐이었다. 아침을 먹고 방바닥에서 이리저리 구르던 나는 결국 축구대회가 열리는 이웃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다른 팀들 하는 걸 보니 흥수의 상대가 될 만한 녀석은 없어 보였다. 잠시 후 우리학교 축구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켜보고 있자니 뭔가 좀 이상했다. 흥수가 초반에 투입되지 않은 것이었다. 전반전 내내 흥수는 벤치를 지켜야 했다. 후반전이 되어서도 흥수는 나오지 못했다. 하루에 여러 경기가 있으니 코치가 흥수의 체력을 비축해두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다행히 첫 게임은 우리학교가 이겼다.
두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좀 강팀이었다. 전반전에 2:1로 뒤진 채 끝났다. 그런데도 코치는 후반전에 흥수를 투입하지 않았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데 후반전에도 한 골을 더 먹어서 3:1까지 벌어졌다. 그제서야 코치는 흥수를 교체투입했다.
“니들 다 죽었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흥수의 활약을 기대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학교 선수들이 지들끼리만 패스를 하고 흥수에게는 좀처럼 공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설마 했는데, 다음에 온 찬스에서도, 그 다음에 온 찬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흥수에게 공을 주면 점수 따는 건 식은 죽 먹기일텐데 왜 공을 안 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흥수는 패스를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다. 적극적으로 상대편 공을 가로채서 수비수 3명을 제치고 투입된 지 5분만에 1골을 만회했다. 지금까지 벤치에 있다 나와서인지 더 펄펄 날았고, 기운 빠진 상대팀은 초조해하다가 다시 실점을 해서 동점 상황이 되었다. 후반전 종료 2분을 남겨 놓고 양쪽팀이 모두 느슨해 져서 연장전 가나 승부차기 하나 이러고 있을 때 흥수가 번개같이 다시 한골을 넣어 결국 4:3으로 이겼다.
그날 다른 경기들도 똑 같은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우리학교는 시 대표로 다음달에 있을 경기도 축구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경기가 모두 끝나고 흥수는 누나에게 나를 소개시켜주었다.
“니가 남순이구나. 흥수가 같은 동네 사는 친구가 전학 왔다고 좋아하더라.”
흥수 누나는 웃는 얼굴로 반갑게 내게 인사했다. 그리고 우리를 데리고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도 사줬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끼는 이런 가족 같은 느낌에 나는 어색하기도 하고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전학온 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왠 녀석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너 예전 학교에서 일짱이었다며?”
“그래서?”
“내가 이 학교 일짱이거든.”
애들 여럿 데리고 몰려다니는 거나, 말하는 거나, 척 보아하니 별 것도 아닌 녀석 같은데 어떻게 일짱이 되었을까 싶은 녀석이었다. 그런 경우에는 보통 뒷배를 봐주는 형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빨리도 왔다. 진작에 텨 와서 이 형님한테 인사했어야지.”
녀석은 내가 말하는 게 어이가 없는 듯 했지만 나는 여전히 무시하듯 약을 올렸다.
“있다 수업끝나고 보자. 돈 좀 넉넉히 갖고 와라.”
학교 밖 공터에서 만났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짱은 싸움은 잘 못하는 것 같고, 나머지 녀석들을 시켜서 나와 붙게 했다. 6:1로 붙었는데 동네애들 싸움 하듯이 흙집어던지고 붙잡고 늘어지고 해서 피곤하긴 했지만 한방씩 제대로 먹여주니 금새 깨갱이었다. 혼자 남은 일짱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며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가 이렇게 맞은 거 알면 형들이 너 가만 안 놔둘껄.”
하지만 이미 잔뜩 쫄아서 내 눈도 못마주쳤다.
“일러 봐 어디.”
“윽!”
내 주먹 한방에 일짱은 코피를 주르륵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6명을 한줄로 쭉 무릎꿇려놓고 나는 이제부터 까불면 죽는다고 얼차려를 한따까리 주었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에 대한 정보나, 학교 안팎의 궁금한 정보들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축구부에 대해서도 지나가듯이 물었다.
“근데 너네들, 축구부애들이 왜 박흥수한테 패스 안 하는지 아냐?”
“… 흥수가 너무 잘하니까….”
“… 그럼 코치는 왜 박흥수를 벤치에만 앉혀놓는데?”
“엄마들이 자기 애 많이 뛰게 해달라고 돈다발 찔러주니까….”
“아….”
나는 그제서야 상황이 조금씩 이해가 갔다. 흥수가 인기가 많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고 있는 존재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그애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충격이었다. 나는 나처럼 하나도 잘하는 게 없는 아이나 미움을 받았지, 흥수처럼 월등하게 축구를 잘하고 가난하긴 해도 화목한 집안에 성격도 좋은 아이를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그것도 축구부 안에 있을 줄은 몰랐다.
“다 꺼져라. 이제부터 내 눈에 띄면 죽는다.”
나는 갑자기 흥이 깨져서 녀석들을 다 돌려보냈다. 집에 갈까 하다가 마음은 답답하고 빈집에 들어가기는 싫고 걷다보니 다시 학교 운동장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다시 축구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 흥수는 자기편 10명, 상대편 11명과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21명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누가 나보고 몇대 1까지 맞짱을 떠봤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몰라도 흥수는 21:1 로 맞짱을 떠서 이겼다고 말 할 수 있었다. 지들끼리만 공을 돌리던, 애들이 과격한 태클을 해오던, 결국 어떻게든 공을 가로채서 수비수들을 돌파해서 골을 넣고야 말았다.
골을 넣고도 흥수는 들뜨지 않았다. 다른 애들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돌아서는 흥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왠지 기분이 울컥 해서 외면하고 돌아섰다.
흥수는 나를 따라 나와서 싸운 흔적이 역력한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왜? 누구랑 싸웠냐? 일짱?”
“아니, 싸우긴... 그리고 이젠 내가 이 학교 일짱이다.”
흥수는 내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부상에 대비해 가방에 넣고 다니는 비상약을 꺼내왔다.
“걔네 고등학생 형들한테 줄 있다던데.”
걱정스럽게 말하는 흥수에게 나는 흥수 눈치를 흘낏 보고 흘리듯 말했다.
“걔네 하는 짓 보니까 걔네 형들도 별거 아니겠더라. 비겁한 새끼들. 쌈한다는 놈들이 흙뿌리고, 뒷통수 후려치고… 축구부애들은 지들끼리 편갈라 공돌리고… 야, 이 학교 원래 이렇게 물이 더럽고 야비하냐?”
흥수는 내 말에 잠깐 멈칫 했지만 이내 아무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어쩌겠냐, 그러려니 해야지.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싫은 일도 참아야 해.”
나는 흥수가 어째서 그렇게 나이에 비해서 어른스러운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주위의 견제와 온갖 더러운 꼴을 당하면서도, 축구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감수하고 인내하며 달려 온 것이었다. 나라면 치사해서 축구 안한다고 몇번을 뛰쳐 나왔을 텐데 흥수는 축구를 정말 삶 그 자체만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축구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축구부 주장이 집에 가는 것을 따라가다가 녀석이 혼자가 되었을 때 앞을 막아섰다. 녀석은 이미 내가 일짱 무리들을 쓸어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는지 겁먹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운동부 애들은 그냥 싸움만 하는 애들보다 다루기가 쉬었다. 부상이라도 입으면 당장 훈련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엄청 몸을 사리니까 무릎이나 어깨처럼 부상이 잦은 부위를 한방 먹이면 지레 겁을 먹고 얼굴이 허얘져서 도망가곤 했다.
“너네 축구경기가 너무 재미가 없어서 못보겠더라. 좀 제대로 좀 뛰어봐.”
나는 발로 녀석의 정강이를 툭툭 걷어찼다.
“넌 눈이 가자미 눈이냐? 패스를 제대로 해야지, 왜 빈 데 두고 엄한데다 공을 돌려?”
녀석도 내가 맨날 흥수와 축구 끝나고 집에 가는 것을 봤던 터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눈치 깐 듯 했다. 잘못한 게 있어서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었다.
“미안….아…앞으로 잘 할께.”
나는 녀석에게 히죽 웃으며 마지막 쐐기를 박고는 뒤돌아섰다.
“제대로 해라. 그러다 너 영영 축구 못하게 되는 수가 있어.”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흥수의 다리를 망가뜨기게 될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