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차,
다음날 중기의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이제 레포트를 하나 제출하고 나면 방학이었다.
“시험 끝났으니 맥주나 한잔 하러 가자. 너 덕분에 시험 잘 봤으니까 내가 쏠께.”
중기와 재신은 호프집에 들어갔다. 차갑게 얼린 500cc 잔에 거품이 이는 생맥주 2잔이 앞에 놓였다. 재신은 차갑게 톡 쏘는 맥주의 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용하가 있다면 신이 나서 재신에게 이렇게 재잘거렸을 것이다.
“이걸 보게, 걸오. 초여름에 이렇게 차가운 술이라니. 게다가 입안에서 물방울들이 살아서 저절로 튀어다니는 군. 이런 신묘한 맛의 술이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재신은 맞은 편에 앉아 책을 찾아 방금 마친 시험문제의 정답을 확인하고 있는 중기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열심히 공부를 하는 구용하라니. 역시 중기는 용하가 아니었다. 재신의 시선을 느끼고 중기가 얼굴을 들었다. 이젠 왜 쳐다보냐고 묻지도 않았다. 재신이 자신의 얼굴에서 구용하를 찾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미니스커트를 입은 두명의 여자들이 그들의 옆을 지나가자 중기는 자동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재신은 자신도 모르게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중기의 물음에 재신이 말했다.
“여자들 좋아하는 건 여전하구나.”
“참 나, 여자들 지나가는데 고개 안돌아가는 남자도 있냐? 그건 모든 남자들의 본능이라구.”
중기는 괜히 민망해서 툴툴거렸다. 재신은 빙긋 웃으며 다시 용하를 떠올렸다. 용하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을 봤다면 부채를 살랑거리며 몽롱한 눈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역시 역사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네. 참으로 좋은 세상이 아닌가.”
‘넌 여기가 맘에 드니 용하야?’
재신은 속으로 물으며 다시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시험을 마친 학생들로 호프집은 매우 북적거리고 소란스러웠다. 중기는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맥주를 들고 있는 웨이터와 부딫치고 말았고 중기와 부딫친 웨이터는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에게 맥주를 쏟고 말았다. 웨이터는 쩔쩔매며 남자에게 사과했고, 중기도 같이 사과했다. 그런데 그 일어서는 그 남자가 심상치 않았다. 그 남자뿐 아니라 그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의 덩치나 분위기가 아마도 운동부 학생들인 것 같았다.
“뭐야 이거? 옷 어쩔거야?”
술도 꽤 마신 목소리였다. 오늘 완전히 잘못 걸렸다고 중기는 생각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옷 세탁비 물어 드릴께요.”
“이거 우리 형님한테 받은 중요한 옷이거든? 그리고 나 심장약한데 차가운 물 맞아서 심장마비 걸릴뻔 했는데.. 뭐? 죄송? 이것들이 사람 무시해?”
완전히 시비를 걸려고 작정했는지 사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호프집 안의 사람들이 놀라서 순간 조용해졌다. 남자는 양손으로 웨이터와 중기의 멱살을 잡았고 사람들이 모도 보고 있었지만, 그 남자와 같이 술을 마시던 한 무리의 남자들도 모두 그 못지 않은 키에 몸집이라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그는 멱살을 잡은 중기와 웨이터를 동시에 휙 밀쳐버렸고 그 바람에 웨이터는 다시 반대편 테이블에 부딫쳐 나뒹굴었다. 맥주와 안주가 공중에 날리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중기는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이 있어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중기가 돌아보니 어느 새 재신이 와서 그를 잡고 있었다.
“사과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 그리고 심장 약한 사람이 술을 그렇게 마시면 쓰나.”
재신의 말에 남자는 다짜고짜 주먹을 뻗었지만, 재신은 가볍게 한손으로 막으며 다른 손으로 복부를 가격했고 남자는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러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다른 남자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덤볐지만, 재신은 테이블 위로 올라서더니 덤벼드는 남자들을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그러자 한 남자가 유리병을 깨뜨려서 재신에게 휘둘렀다.
“위험해!”
중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달려갔지만, 중기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재신은 의자를 던져 시선을 흩뜨리고는 그 남자의 팔목을 잡고 꺾어서 병을 떨어뜨렸다. 그때 주인의 연락을 받고 경찰차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중기는 순간 확 정신이 들었다.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결과는 재신이 가해자이고 그들이 피해자였다. 지금 재신이 경찰서에 불려가면 주민등록번호도 없으니 조선족 불법체류자로 오인받을 테고 감옥에 갇히거나 강제출국될지도 몰랐다.
“경찰이야. 어서 도망가!”
중기는 서둘러 재신의 손을 잡고 달렸다. 다행히 건물에 다른쪽 입구가 있어서 그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미친듯이 달려서 집으로 왔지만, 중기는 혹시 호프집에서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경찰이 집으로 찾아올까 걱정이 되었다. 어두워서 몰랐는데 밝은 방에서 보니 재신의 입가와 손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중기는 약을 가지고와서 재신에게 발라주었다.
“너 싸움 좀 하는구나?”
피식 웃는 중기에게 재신은 어울리지 않게 멋적은 듯 말했다.
“용하도 내가 맨날 사고 치고 다니면 수습해주곤 했는데. 너한테까지… 미안하다.”
“무슨 소리야. 니가 나 때문에 싸운건데. 친구끼리 뭘.”
중기는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을 맺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내가 어느새 이 녀석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구나.
5일차.
다음날 재신은 중기를 따라 학교에 가지 않고 남아 있겠다고 했다. 중기는 혼자 재신이 집에서 뭘할까 궁금했지만 모레까지 레포트를 2개나 써야해서 그러라고 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레포트를 쓰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기는 문득 ‘구용하’라는 이름을 검색해보면 뭐가 나올까 궁금해졌다. 구용하의 검색결과는 대부분 중고등학생들 블로그였다. 그런데 웹서핑을 하다 보니 그 가운데 성대 앞에서 분식집을 하는 구용하 라는 26세의 청년의 이야기가 있었다. 사진은 없었지만, 이름도 같고 나이도 재신과 비슷하고 성균관 근처에서 장사를 한다는 점이 어쩐지 그가 구용하의 환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집으로 가서 재신에게 이야기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중기는 집에도 가지 못하고 레포트도 쓰지 못한 채 멍하니 저녁까지 몇시간을 이유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저녁에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간 중기는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재신이 화선지에 붓으로 쓴 한시들을 보고 놀라 입이 벌어졌다. 재신은 쑥스럽게 말했다.
“너한테 뭔가 주고 싶은데 내가 가진 재주는 이거 뿐이라서.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다 가져.”
중기는 재신을 보며 마음이 짠해지는 것을 느꼈다. 싸움도 잘하고 한시도 잘 쓰고 문무를 겸비한 잘 생긴 대사헌의 아들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 곳으로 왔을까.
“구용하의 환생일지 모르는 사람을 찾았어.”
중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식집을 하고 있대. 정문으로 나가서 100미터쯤 가면 있어. 가서 만나봐.”
재신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너는?”
“너 혼자 갔다 와. 난 집에서 기다릴께.”
재신은 잠시 중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결심한 듯 집을 나섰다.
재신은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돌아왔지만 중기에게는 그 시간이 한달이나 되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맞는거 같아?”
중기의 물음에 재신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글쎄.”
“무슨 대답이 그래?”
“전생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용하의 환생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없었어.”
“비슷하다는 느낌은 와?”
재신이 대답이 없자 중기는 답답했다.
“나보다 더 용하를 닮았어?”
“…그렇진 않은거 같아.”
재신의 말에 중기는 왠지 맥이 탁 풀리며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6일차.
레포트를 모두 내고 이제 방학이었다. 재신이 돌아갈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중기는 머리 속이 복잡해져 갔다. 재신이 떠난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재신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재신은 돌아가면 고관대작의 아들이니 잘 살아갈 수 있겠지만, 지금 시대에는 주민등록번호 조차 없는 불법 체류자였다. 게다가 재신은 자신의 시대보다 이 시대를 썩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재신이 돌아가면 잘 살수 있을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또 자살을 시도하거나 자신을 포기하고 사는 것이 아닐까.
“돌아갈꺼다.”
재신의 말에 중기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구용하는 이제 세상에 없어. 그걸 확실히 깨닫게 해줘서 고맙다.”
“너 혹시 딴생각 하는 거 아니지?”
걱정스런 중기의 물음에 재신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용하의 환생이 잘 살고 있는걸 확인했으니까, 나도 내 시대로 돌아가서 주어진 삶을 마저 살거다.”
재신은 중기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오길 잘한거 같다. 중기, 너를 만났으니까. 용하의 환생인 네가 행복해보여서 기뻐.”
중기는 입안에 맴도는 한마디를 끝내 물을 수 없었다.
‘용하에 대한 네 마음이 뭔지 확인했니?’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재신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뭔지도 알 수 없었기에 더욱 물을 수 없었다.
“사진찍자.”
“뭐?”
“같이 사진찍자구. 돌아가도 잊어버리지 않게.”
중기는 폰을 꺼내서 재신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셀카를 찍었다.
“근데 여기 계속 있으라는 말은 안하는 거 보니 내가 빨리 돌아갔으면 싶구나?”
재신이 싱긋 웃으며 농담을 하자 중기는 적반하장이라는 듯 재신에게 말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같이 가자고도 안하네? 너도 네가 사는 곳 구경시켜 줄 테니 같이 가자고 해야 하는거 아냐?”
재신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중인신분으로 평생 괴로와하다가 죽은 용하의 이야기를 중기에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중기가 200년전으로 돌아가봐야 용하보다 더 힘들게 살게 될 뿐이었다.
“너한테는 이곳이 어울려.”
“그냥 데려가기 싫으면 싫다고 해.”
중기는 삐죽삐죽거렸지만 재신은 말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7일차.
다음날 밤 자정에 재신과 중기는 그들이 처음 만났던 성대 캠퍼스의 장소로 갔다. 재신은 돌아가기 위한 부적을 꺼냈다.
“잘 있어라. 고마웠다.”
재신의 말에 중기는 코끝이 찡했지만 억지로 웃으며 재신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어제 폰으로 찍은 사진을 코팅한 것이었다.
“나 잊어버리지 말라구.”
재신은 사진을 보고는 빙긋 웃으며 중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중기는 말없이 재신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재신은 부적에 불을 붙였다. 부적이 활활타오르고 사라지자 재신의 모습도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에필로그
재신이 돌아간 후로도 시간은 잘 흘러갔다. 폰에 저장된 재신의 사진이 없다면 정말 문재신이라는 사람이 왔다 갔었는지도 그냥 잠시 꿈을 꾼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득하게 느껴졌다. 여름방학동안 학교에서 하는 토익강의을 듣고 나와서 캠퍼스를 터벅터벅 걷고 있던 중기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밝게 웃고 있는 한 학생에게로 시선이 갔다. 순간 중기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재신은 자기 시대로 돌아갔는데. 그러나 분명 문재신이었다. 아니, 아닐 수도 있었다. 머리도 짧았고 재신은 한번도 저렇게 밝게 웃는 적이 없었으니까. 그 학생은 중기의 시선을 느끼고 중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중기는 당황했지만 그래도 눈이 마주친 김에 확인을 하고 싶었다.
“문재신?”
“나 문재신 아닌데.”
그는 뭐가 재미있는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근데 너 어디서 본거 같다. 너 초등학교 어디 나왔어?”
“00초등학교”
“그럼 아닌데.”
그리곤 뭐가 좋은지 또 친구를 보며 킥킥 웃었다. 저런 거리낌없는 태도도 과묵한 재신과는 달랐다. 그러나 여유로운 듯 검게 빛나는 사나운 눈빛은 분명 재신이었다.
“난 한문학과 유아인. 너는?”
“나… 경영학과 송중기.”
중기의 대답에 아인은 씩 웃으며 친구들과 함께 뒤돌아서 떠들썩하게 웃으며 멀어져갔다. 중기는 그의 밝은 뒷모습을 보며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재신의 말이 중기의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용하의 환생인 네가 행복해보여서 기뻐.’
중기는 눈시울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문재신… 너의 환생이 행복해보여서 나도 기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