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차,

다음날 중기의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이제 레포트를 하나 제출하고 나면 방학이었다.

시험 끝났으니 맥주나 한잔 하러 가자. 너 덕분에 시험 잘 봤으니까 내가 쏠께.”

중기와 재신은 호프집에 들어갔다. 차갑게 얼린 500cc 잔에 거품이 이는 생맥주 2잔이 앞에 놓였다. 재신은 차갑게 톡 쏘는 맥주의 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용하가 있다면 신이 나서 재신에게 이렇게 재잘거렸을 것이다.

이걸 보게, 걸오. 초여름에 이렇게 차가운 술이라니. 게다가 입안에서 물방울들이 살아서 저절로 튀어다니는 군. 이런 신묘한 맛의 술이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재신은 맞은 편에 앉아 책을 찾아 방금 마친 시험문제의 정답을 확인하고 있는 중기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열심히 공부를 하는 구용하라니. 역시 중기는 용하가 아니었다. 재신의 시선을 느끼고 중기가 얼굴을 들었다. 이젠 왜 쳐다보냐고 묻지도 않았다. 재신이 자신의 얼굴에서 구용하를 찾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미니스커트를 입은 두명의 여자들이 그들의 옆을 지나가자 중기는 자동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재신은 자신도 모르게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중기의 물음에 재신이 말했다.

여자들 좋아하는 건 여전하구나.”

참 나, 여자들 지나가는데 고개 안돌아가는 남자도 있냐? 그건 모든 남자들의 본능이라구.”

중기는 괜히 민망해서 툴툴거렸다. 재신은 빙긋 웃으며 다시 용하를 떠올렸다. 용하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을 봤다면 부채를 살랑거리며 몽롱한 눈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역시 역사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네. 참으로 좋은 세상이 아닌가.”

넌 여기가 맘에 드니 용하야?’

재신은 속으로 물으며 다시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시험을 마친 학생들로 호프집은 매우 북적거리고 소란스러웠다. 중기는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맥주를 들고 있는 웨이터와 부딫치고 말았고 중기와 부딫친 웨이터는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에게 맥주를 쏟고 말았다. 웨이터는 쩔쩔매며 남자에게 사과했고, 중기도 같이 사과했다. 그런데 그 일어서는 그 남자가 심상치 않았다. 그 남자뿐 아니라 그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의 덩치나 분위기가 아마도 운동부 학생들인 것 같았다.

뭐야 이거? 옷 어쩔거야?”

술도 꽤 마신 목소리였다. 오늘 완전히 잘못 걸렸다고 중기는 생각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옷 세탁비 물어 드릴께요.”

이거 우리 형님한테 받은 중요한 옷이거든? 그리고 나 심장약한데 차가운 물 맞아서 심장마비 걸릴뻔 했는데.. ? 죄송? 이것들이 사람 무시해?”

완전히 시비를 걸려고 작정했는지 사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호프집 안의 사람들이 놀라서 순간 조용해졌다. 남자는 양손으로 웨이터와 중기의 멱살을 잡았고 사람들이 모도 보고 있었지만, 그 남자와 같이 술을 마시던 한 무리의 남자들도 모두 그 못지 않은 키에 몸집이라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그는 멱살을 잡은 중기와 웨이터를 동시에 휙 밀쳐버렸고 그 바람에 웨이터는 다시 반대편 테이블에 부딫쳐 나뒹굴었다. 맥주와 안주가 공중에 날리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중기는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이 있어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중기가 돌아보니 어느 새 재신이 와서 그를 잡고 있었다.

사과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 그리고 심장 약한 사람이 술을 그렇게 마시면 쓰나.”

재신의 말에 남자는 다짜고짜 주먹을 뻗었지만, 재신은 가볍게 한손으로 막으며 다른 손으로 복부를 가격했고 남자는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러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다른 남자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덤볐지만, 재신은 테이블 위로 올라서더니 덤벼드는 남자들을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그러자 한 남자가 유리병을 깨뜨려서 재신에게 휘둘렀다.

위험해!”

중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달려갔지만, 중기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재신은 의자를 던져 시선을 흩뜨리고는 그 남자의 팔목을 잡고 꺾어서 병을 떨어뜨렸다. 그때 주인의 연락을 받고 경찰차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중기는 순간 확 정신이 들었다.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결과는 재신이 가해자이고 그들이 피해자였다. 지금 재신이 경찰서에 불려가면 주민등록번호도 없으니 조선족 불법체류자로 오인받을 테고 감옥에 갇히거나 강제출국될지도 몰랐다.

경찰이야. 어서 도망가!”

중기는 서둘러 재신의 손을 잡고 달렸다. 다행히 건물에 다른쪽 입구가 있어서 그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미친듯이 달려서 집으로 왔지만, 중기는 혹시 호프집에서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경찰이 집으로 찾아올까 걱정이 되었다. 어두워서 몰랐는데 밝은 방에서 보니 재신의 입가와 손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중기는 약을 가지고와서 재신에게 발라주었다. 

너 싸움 좀 하는구나?”

피식 웃는 중기에게 재신은 어울리지 않게 멋적은 듯 말했다.

용하도 내가 맨날 사고 치고 다니면 수습해주곤 했는데. 너한테까지미안하다.”

무슨 소리야. 니가 나 때문에 싸운건데. 친구끼리 뭘.”

중기는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을 맺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내가 어느새 이 녀석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구나.

 

5일차.

다음날 재신은 중기를 따라 학교에 가지 않고 남아 있겠다고 했다. 중기는 혼자 재신이 집에서 뭘할까 궁금했지만 모레까지 레포트를 2개나 써야해서 그러라고 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레포트를 쓰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기는 문득 구용하라는 이름을 검색해보면 뭐가 나올까 궁금해졌다. 구용하의 검색결과는 대부분 중고등학생들 블로그였다. 그런데 웹서핑을 하다 보니 그 가운데 성대 앞에서 분식집을 하는 구용하 라는 26세의 청년의 이야기가 있었다. 사진은 없었지만, 이름도 같고 나이도 재신과 비슷하고 성균관 근처에서 장사를 한다는 점이 어쩐지 그가 구용하의 환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집으로 가서 재신에게 이야기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중기는 집에도 가지 못하고 레포트도 쓰지 못한 채 멍하니 저녁까지 몇시간을 이유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저녁에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간 중기는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재신이 화선지에 붓으로 쓴 한시들을 보고 놀라 입이 벌어졌다. 재신은 쑥스럽게 말했다.

너한테 뭔가 주고 싶은데 내가 가진 재주는 이거 뿐이라서.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다 가져.”

중기는 재신을 보며 마음이 짠해지는 것을 느꼈다. 싸움도 잘하고 한시도 잘 쓰고 문무를 겸비한 잘 생긴 대사헌의 아들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 곳으로 왔을까.

구용하의 환생일지 모르는 사람을 찾았어.”

중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식집을 하고 있대. 정문으로 나가서 100미터쯤 가면 있어. 가서 만나봐.”

재신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너는?”

너 혼자 갔다 와. 난 집에서 기다릴께.”
재신은 잠시 중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결심한 듯 집을 나섰다. 

재신은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돌아왔지만 중기에게는 그 시간이 한달이나 되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맞는거 같아?”

중기의 물음에 재신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글쎄.”

무슨 대답이 그래?”

전생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용하의 환생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없었어.”

비슷하다는 느낌은 와?”

재신이 대답이 없자 중기는 답답했다.

나보다 더 용하를 닮았어?”

“…그렇진 않은거 같아.”

재신의 말에 중기는 왠지 맥이 탁 풀리며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6일차.

레포트를 모두 내고 이제 방학이었다. 재신이 돌아갈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중기는 머리 속이 복잡해져 갔다. 재신이 떠난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재신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재신은 돌아가면 고관대작의 아들이니 잘 살아갈 수 있겠지만, 지금 시대에는 주민등록번호 조차 없는 불법 체류자였다. 게다가 재신은 자신의 시대보다 이 시대를 썩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재신이 돌아가면 잘 살수 있을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또 자살을 시도하거나 자신을 포기하고 사는 것이 아닐까.

돌아갈꺼다.”

재신의 말에 중기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구용하는 이제 세상에 없어. 그걸 확실히 깨닫게 해줘서 고맙다.”

너 혹시 딴생각 하는 거 아니지?”

걱정스런 중기의 물음에 재신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용하의 환생이 잘 살고 있는걸 확인했으니까, 나도 내 시대로 돌아가서 주어진 삶을 마저 살거다.”

재신은 중기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오길 잘한거 같다. 중기, 너를 만났으니까. 용하의 환생인 네가 행복해보여서 기뻐.”

중기는 입안에 맴도는 한마디를 끝내 물을 수 없었다.

용하에 대한 네 마음이 뭔지 확인했니?’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재신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뭔지도 알 수 없었기에 더욱 물을 수 없었다.

사진찍자.”

?”

같이 사진찍자구. 돌아가도 잊어버리지 않게.”

중기는 폰을 꺼내서 재신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셀카를 찍었다.

근데 여기 계속 있으라는 말은 안하는 거 보니 내가 빨리 돌아갔으면 싶구나?”

재신이 싱긋 웃으며 농담을 하자 중기는 적반하장이라는 듯 재신에게 말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같이 가자고도 안하네? 너도 네가 사는 곳 구경시켜 줄 테니 같이 가자고 해야 하는거 아냐?”

재신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중인신분으로 평생 괴로와하다가 죽은 용하의 이야기를 중기에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중기가 200년전으로 돌아가봐야 용하보다 더 힘들게 살게 될 뿐이었다.

너한테는 이곳이 어울려.”

그냥 데려가기 싫으면 싫다고 해.”

중기는 삐죽삐죽거렸지만 재신은 말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7일차.

다음날 밤 자정에 재신과 중기는 그들이 처음 만났던 성대 캠퍼스의 장소로 갔다. 재신은 돌아가기 위한 부적을 꺼냈다.

잘 있어라. 고마웠다.”

재신의 말에 중기는 코끝이 찡했지만 억지로 웃으며 재신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어제 폰으로 찍은 사진을 코팅한 것이었다.

나 잊어버리지 말라구.”

재신은 사진을 보고는 빙긋 웃으며 중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중기는 말없이 재신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재신은 부적에 불을 붙였다. 부적이 활활타오르고 사라지자 재신의 모습도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에필로그

재신이 돌아간 후로도 시간은 잘 흘러갔다. 폰에 저장된 재신의 사진이 없다면 정말 문재신이라는 사람이 왔다 갔었는지도 그냥 잠시 꿈을 꾼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득하게 느껴졌다. 여름방학동안 학교에서 하는 토익강의을 듣고 나와서 캠퍼스를 터벅터벅 걷고 있던 중기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밝게 웃고 있는 한 학생에게로 시선이 갔다. 순간 중기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재신은 자기 시대로 돌아갔는데. 그러나 분명 문재신이었다. 아니, 아닐 수도 있었다. 머리도 짧았고 재신은 한번도 저렇게 밝게 웃는 적이 없었으니까. 그 학생은 중기의 시선을 느끼고 중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중기는 당황했지만 그래도 눈이 마주친 김에 확인을 하고 싶었다.

문재신?”

나 문재신 아닌데.”

그는 뭐가 재미있는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근데 너 어디서 본거 같다. 너 초등학교 어디 나왔어?”

“00초등학교

그럼 아닌데.”

그리곤 뭐가 좋은지 또 친구를 보며 킥킥 웃었다. 저런 거리낌없는 태도도 과묵한 재신과는 달랐다. 그러나 여유로운 듯 검게 빛나는 사나운 눈빛은 분명 재신이었다.

난 한문학과 유아인. 너는?”

경영학과 송중기.”

중기의 대답에 아인은 씩 웃으며 친구들과 함께 뒤돌아서 떠들썩하게 웃으며 멀어져갔다. 중기는 그의 밝은 뒷모습을 보며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재신의 말이 중기의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용하의 환생인 네가 행복해보여서 기뻐.’

중기는 눈시울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문재신너의 환생이 행복해보여서 나도 기뻐.”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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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 팬픽은 특별히 떠오르는게 없어서 안쓰게 될 줄 알았는데 어쨌든 하나 썼다.
처음 떠오른 줄거리는 도서관에서 성스 책을 읽다가 책 속으로 빨려들어간 아인이가
여림과 걸오를 만나는 이야기, 그리고 아인이 읽던 책을 보고 뒤따라서 들어온 중기의 이야기를 생각했는데
다음 이야기를 풀어나갈 재주가 없어서 상상에 그치고 말았다.

이것은 정확히는 걸오 여림 팬픽이라기보다 걸오 중기 팬픽이다.
불성실한 심리묘사는 시간이 없어서.. 라기보다는 능력의 한계인것 같다 ㅠㅠ
12금 정도로 그런대로 건전함.


프롤로그

밝은 보름달이 어두운 하늘에 혼자 걸려있었다. 숲 속에 한 남자와 노인이 마주해 있었다.

재신은 한손에 든 부적을 보며 말했다.

여기에 만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써서 보름날 불사르면 그사람의 환생과 만나게 되는 거고.”

노인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걸오는 다른 손에 든 부적을 보며 말했다.

이 부적을 7일 후 밤에 불사르면 돌아오게 된단 말이지?”

노인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날 돌아오지 않으면 영영 그 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재신은 부적을 펼치고 지필묵을 꺼내어 망설이지 않고 이름을 적었다.

구용하

그리고 부싯돌을 부딫쳐 부적에 불을 붙였다. 부적이 활활 타들어가며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부적이 모두 타들어가자 재신의 모습도 함께 희미해져 사라졌다.

 

1일차.

중기는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챙겨들고 나왔다. 기말고사가 거의 끝나가는 6월 중순이라 밤공기도 쌀쌀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공부하던 내용을 되새기며 오피스텔로 걸어가던 그는 어두운 나무그늘 아래서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소리없이 스르륵 나오자 화들짝 놀랬다.

구용하

검은 그림자는 중기를 부르며 천천히 다가왔다. 중기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자세히 보니 검은 그림자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산발한 긴 머리에, 치마인지 바지인지 모를 긴 검은 옷이 영락없는 노숙자였다.

용하야. 나 문재신이다.”

다시 검은 그림자의 사내가 다가오자 중기는 모른척하고 뛰어갈까도 생각했지만 어쩐지 그래서는안될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는 구용하가 아닌데요.”

재신은 다시 찬찬히 중기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여림의 얼굴이 맞았지만, 분위기는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

여기가 성균관이 맞나?”

맞는데요.”

재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환생을 한다고 해도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게 당연했다. 아무리 용하의 환생이라고 해도 걸오를 반겨서 맞아줄 거라는 기대를 한 자신이 우스웠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용하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막막했다.

중기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냥 두고 가면 그만이었지만,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찾고 있는 구용하라는 사람이 성대 학생인가요?”

중기의 말에 재신은 대답했다.

우리가 성균관에서 같이 지냈고 200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까 구용하도 성균관으로 왔을거야.”

중기는 재신의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진중한 말투나 행동으로 봐서는 정신이 돈 사람 같지는 않은데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구용하를 찾아줄 수 있을까? 7일후에는 돌아가야 하니까 그 전에 만나보고 싶다.”

재신은 다시 중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재신의 크고 검게 빛나는 눈을 보면서 중기는 왠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 기말고사 기간이라는 것도, 내야 할 레포트가 몇 개가 남았는지도, 토익시험 신청하러 가야한다는 사실도 모두 머릿속에서 사라져갔다.

 

중기는 재신을 자신의 원룸으로 데려갔다.

그러니까 네가 찾는 구용하가 나랑 똑같이 생겼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구용하의 환생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지?”

중기의 말에 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아. 너는 용하하고 어딘가 다른 면이 있는 것 같다.”

근데 왜 200년 후에 만나기로 했어? 바로 환생해서 만나면 되지?”

그때쯤엔 좋은 세상이 왔을거 같아서.”

재신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성균관에 다니면서 잠시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정조가 승하하고 당쟁은 점점 심해졌고,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쫒겨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가장 친한 친구 구용하는 신분이 밝혀져 성균관에서 나간 후 병에 걸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게 되었다. 용하가 세상을 뜨기 며칠 전에 그의 집을 찾았을 때 용하는 파리한 얼굴로 재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를 연모하네.”
재신은 대답이 없었지만 이전부터 용하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재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안겨오는 용하에게 재신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무시하며 지냈고, 용하도 굳이 재신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 듯 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어. 자네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용하는 수척해진 손으로 재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200년 후에 만나자. 그땐 좋을 세상이 왔겠지. 당색이나 신분, 성별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남자가 남자를 연모해도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세상이.”

용하가 세상을 떠난 후, 재신은 더 이상 살아간다는 것이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외척세력의 세도정치에 백성들의 삶은 점점 어렵고 힘들어져 갔다. 가슴이 답답했다. 어서 환생을 해서 용하를 만나고 싶은 생각에 죽을 마음도 먹었다. 그런데, 재신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는 것을 본 한 노인이 그에게 시간을 뛰어넘어 용하를 다시 만날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재신은 200년후에 환생한 용하를 만나러 왔다.

혹시 나 말고 정말 구용하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성대 학생중에 구용하가 있는지 내일같이 학교에 가서 찾아보자.”

중기는 재신에게 이불을 펴주었다. 그러나 재신은 불을 끄고 누워서도 여전히 빤히 중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 아래 하얀 얼굴, 작은 붉은 입술은 구용하가 분명했지만, 늘 흥미거리를 찾아다니며 놀기 좋아하고 농담이나 빈정거리기 좋아하던 용하와 달리, 중기는 진지하고 성실해보이고 빈말은 하지 않았다.  

왜 자꾸 쳐다보는거야? 잘 수가 없잖아.”

중기는 투덜거렸다. 그러다 문득 재신이 왜 이렇게까지 그 친구를 찾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너 구용하랑 무슨 사이였어? 그냥 친구였어? 아니면 친척? ... 아니면 애인?”

혹시 애인이라면 이렇게 한방에 자는 건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어 중기는 순간 움츠러들었다.

“… 친구

재신의 말에 안심을 하는 중기였지만 다음 말을 듣고 또다시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다. 그녀석은 나를 좋아했는데 나는 잘 모르겠어. 그래서 녀석을 다시 한번 만나보려고 온거야. 내 마음이 뭔지 확인하고 싶다.”

내가 그 녀석의 환생이 맞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난 구용하는 아냐.”

홱 돌아누으며 못박듯이 말하는 중기에게 재신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아.”

재신의 대답에 중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감았다. 늦은 시간에 피곤해서 졸려웠지만 중기는 여러가지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한 채로 천천히 잠이 들었다.

정말 저녀석은 200년 전으로부터 왔을까? 내가 정말 구용하의 환생이 맞을까? 그렇다면 내가 전생에 저 녀석을 좋아했다는 건가? 구용하는 어떻게 찾아야 하지? 아직 기말시험이랑 레포트 두 개 남았는데…’

 

2일차.

다음날 중기가 눈을 떴을 때 재신은 벌써 일어나서 중기의 책들을 이리저리 꺼내보고 있었다.

네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책이냐? 고작 아녀자들이나 쓰는 언문을 가지고 뭘 가르치지? 이 이상한 글자들은 서학의 책에 쓰이는 문자들 같은데.”

중기는 부스스 일어나서 이불을 개며 말했다.

영어라고 미국에서 쓰는 말이야. 요즘은 한문대신 다 이걸 배워. 그리고 너 그거 성차별적인 발언이야. 요즘은 그런 말 하면 여자들이 싫어해.”

중기는 세수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가다 말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너 한자는 많이 알겠다. 나 내일 시험인데 전공책에 있는 한자에 해석 좀 달아줄래? 쉬운 건 놔두고 어려운 것만 달아오 돼.”

그리고 전공 책을 찾아서 재신에게 내밀었다. 재신은 표지에 쓰인 글자를 읽으며 물었다.

경영학? 이건 무엇을 배우는 학문인데?”

쉽게 말하면어떻게 물건을 많이 팔고 장사를 잘 할 것인가 하는 학문이지.”

하긴 넌 장사에 소질이 있긴 했지.”

그래? 내가 전생에 장사를 잘 했단 말야?”

. 한양의 시전 상인 중에 가장 부자였지.”

내가 전생에 그렇게 부자였어? 우오~ 왠지 기분 좋은데?”

중기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용하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중기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재신은 중기의 책에 주석을 달아 놓았다.

아침을 먹고 나서 중기는 상을 치우며 재신에게 말했다.

아침은 내가 했으니까 설거지는 네가 해.”

중기의 말에 이상한 표정을 짓는 재신을 보고 한번도 설거지 같은 건 해보지 않았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한테 일주일 붙어 살려면 너도 일을 해야 할거 아냐.”

중기는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설거지 시범을 보여가며 재신에게 기어이 설거지를 시켰다. 뿌듯한 표정으로 재신이 책에 달아놓은 주석을 확인하면서 중기는 사전 찾는 시간 반나절은 줄었겠다 하고 좋아했다.

내가 시전의 부자 상인이었으면 넌 직업이 뭐야?”

중기의 말에 재신은 무심히 대답했다.

그냥 양반. 아버지는 대사헌이고.”

중기는 대사헌이 뭔지는 몰랐지만 재신의 옷차림이나 학식으로 보아 꽤 높은 집안의 아들인건 분명해 보였다. 중기는 재신을 흘깃 보며 말했다.

근데 너 아무래도 그 옷은 안되겠다. 너무 튀잖아.”

중기는 자신의 옷장에서 재신이 입은 옷의 색깔을 보며 비슷해 보이는 어두운 색의 바지와 티셔츠를 꺼내보았다. 좀 큼직한 것들로 꺼내서 입혀보니 헐렁하니 잘 맞았다.

~ 머리가 기니까 락밴드 느낌이 나는데.”

자신의 코디에 뿌듯해하는 중기와 달리 재신은 툴툴거렸다.

이렇게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어떻게 움직이라는 거냐. 불편하지도 않아?”

니옷이 훨씬 불편하거든요?”

중기는 삐죽거리면서 가방을 챙겨들었다.

학교로 들어가자 벽에 줄줄이 붙은 대자보들을 보며 재신은 다시 투덜거렸다.  

벽서 수준하곤필체도 엉망이군.”

재신은 200년 후의 성균관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중기와 재신은 단과대학 사무실마다 돌아다니며 구용하라는 학생이 있는지 물었지만, 그런 학생은 어느 과에도 없었다.

나 내일 시험이라 도서관에 가서 공부해야 하는데. 너도 도서관에서 책보고 있을래?”

중기의 말에 재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도서관에는 재신의 흥미를 끄는 책들이 많은 듯 재신은 몇시간이나 책을 보고 있었다.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재신이 물었다.

이 많은 학생들이 전부 성균관 학생들인가?”

. 대부분은 우리학교 애들이고 다른 학교 애들도 공부하러 오긴 해. 요즘은 외국인들도 교환학생으로 와.”

재신은 옆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는 외국인 학생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성균관 말고 다른 학교도 있나?”

대학교가 전국에 수백개인걸. 요즘은 국민의 80%, 아니 8할이 대학에 간다니까.”

백성의 8할이 성균관을 다닌다? 그 많은 돈을 다 나라에서 어떻게 감당하지?”

학비는 우리가 내지. 등록금 장난 아냐.”

돈을 내고 성균관을 다녀야 한다고? 타락했군. 성균관에서 신성한 학문을 가지고 장사를 하다니.”

좀 좋게 봐주면 안 돼? 돈만 내면 누구나 원하는 지식을 배울 수 있다고. 신분에 상관없이.”

“200년전 이나 달라진 게 없군. 출생이 아니라 돈으로 신분이 결정된다는 것 밖에는.”

자르듯 말하는 재신에게 중기는 어쩐지 발끈하는 기분이 들었다. 200년전 조선시대 인간에게 미개인취급을 당하다니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요즘은 누구나 공부만 잘하면 출세도 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어.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든 과거에 급제하면 출사를 할 수 있다구.”

재신의 못마땅한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듯 했다.

더 좋은 건 투표를 해서 왕을 백성들이 직접 뽑는다는 거지.”

중기는 재신이 감탄할 것을 기대했지만 그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어려서부터 왕세자 교육을 받아도 어려운 통치를 아무나 뽑아서 한다고? 그게 말이 되나?”

중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관둬라. 천년쯤 후에 만나기로 하지 그랬니. 도대체 네가 말하는 좋은 세상이란 게 어떤 건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나도 한번 보고 싶네.”

“200년이라고 정한 건 너거든?”

난 지금도 맘에 들거든?”

중기는 재신에게 눈을 한번 흘기고는 궁시렁거리며 밥을 뒤적였다.

 

3일차.

다음날도 둘은 성대 캠퍼스에서 도서관에서 혹은 잔디밭에서 각자 책을 보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혹은 지나가는 학생들을 이유없이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중기는 가끔 용하에 대해서 물었다. 재신은 용하에 대한 이런 저런 추억이 담긴 이야기들을 담담히 풀어놓았다.

내가 그렇게 기생집에 드나들고 야한 책을 수집했단 말야? 너를 약올리기도 잘하고?”

중기는 어이없어했다.

아무래도 나 아닌거 같은데.. 내가 용하의 환생이라면 왜 다른 거지?”

유교에서도 불교에서도 영혼과 윤회를 이야기하지만 환생과 전생이 똑같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어.”

그럼 환생의 의미가 없는 거 아냐?”

똑같아야 의미가 있는거냐?”

뭔가 형이상학적으로 대화가 흐르면서 중기는 머리속이 뒤죽박죽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만약 너를 기억하고 여전히 사랑하는 구용하를 찾으면 어떡할거야? 돌아가지 않고 여기 남을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재신은 다시 중기에게서 용하를 보는 듯 그윽한 눈빛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중기는 왠지모르게 짜증이 나서 쏘아붙였다.

난 남자 안 좋아해.”

재신은 중기의 말에 무안한 듯 고개를 돌렸다.

지금 세상에도 남색은 금지되어 있나?”

금지된 건 아니지만 권장되는 것도 아니지. 200년쯤 더 지나면 모를까.”

중기는 과거를 회상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어렸을 때랑 지금은 사회가 많이 변했으니까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

그랬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변해왔다. 모든 것들이 변하고 있는데 환생도 환경에 맞춰 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중기는 생각했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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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이와 중기의 1인칭 시점에서의 걸오와 여림 리뷰이다. 배우들 인터뷰에서 나왔던 이야기나 촬영 에피소드에 관한 내용도 섞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픽션이니까 진짜 배우들 생각과는 다를 수 있다는 걸 잊지마시길. 중기는 연예 프로그램에서 말하는걸 많이 봤고 무난하게 말하는 편이라 그냥 썼는데, 아인이의 3차원 말투 영 흉내낼수가 없. 어휘선택부터 워낙 독특해서.


첫 만남

중기

오늘 성균관스캔들 첫 미팅이 있는 날이다. 여림이 분량이 많지 않을 거라고 주위에서 말렸지만, 워낙 독특한 캐릭이라 꼭 해보고 싶었다. 여림이 같이 화려한 남자 캐릭터는 사극에는 희귀해서 잘못하면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만, 여림에 대해서 그동안 연구도 많이 했고 잘할 자신 있다. 책속의 여림보다는 상처가 많고 결점이 많은 여림이 될 것 같다. 머리는 좋고 눈치는 빠르지만 신분에 대한 컴플렉스와 함께 은근히 겁도 많기 때문에 자신의 약점에 민감하고 그 약점을 감추기 위해 더 많이 웃고 더 능글거리는 여림.

하지만 드라마는 나혼자 하는게 아니니까 그만큼 다른 연기자들, 대본, 연출도 중요하다. 그래서 오늘 첫 만남이 기대되기도 하고 두근거린다. 상견례가 끝나고 연기자들끼리 친해지기 위해서 회식을 하러 갔다. 유천이는 아이돌이라 깐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보다 더 넉살좋고 농담잘하고 붙임성 있네. 민영이도 성격 좋고 털털하고. 아인이는 말을 많이 안해서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강한 눈빛에 살짝 긴장된다. 그래도 내가 형이니까 나이로 눌러야지.


아인

성균관스캔들 첫 미팅 회식이 있었다. 같이 연기할 연기자들하고 인사도 하고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책속의 걸오가 저돌적이고 행동파인 동키호테형 걸오라면,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걸오는 생각이 많고 마음 속에 많은 것을 꾹꾹 눌러담고 있는 햄릿형 걸오다. 너무 난폭하고 무서워서 부담스러운 걸오보다는 우리 주변의 사람같고 좀더 편안하고 기름기빠진 그런 야생마 걸오를 만들기 위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다.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 단지 겉모습과 행동으로만 보이는 건 아니다. 걸오의 내면의 생각과 사상이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눈빛으로 보여주고 싶다.

같이 호흡을 맞출 연기자들이 처음에는 솔직히 맘에 들지는 않았다. 주인공 박유천은 아이돌 출신이고 지금도 가수활동을 병행하고 있고, 송중기는 예능출연에 MC에 연기보다 딴일에 더 바빠보였다. 그래도 막상 만나보니 내 생각과는 다른것 같다. 연기를 고민 안하는게 아니라, 다른 일도 같이 하면서 2배로 노력하는 거였다.


첫 촬영

중기

여림이 캐릭을 위해 화장에도 소품에도 손끝에도 걸음걸이에도 디테일하게 신경썼다. 처음에는 주로 하인수와 같이 붙어다닌다. 무당파 여림이는 왜 인수와 같이 다녔을까? 재미로 다녔다곤 하지만, 인수와 같이 다니면서 재미보다는 그 속물근성에 짜증만 났을텐데. 인수 같은 찔러도 피한방울 안나올 것 같은 노론 양반 녀석이 초선이에게 빠져서 쩔쩔매는게 재미있어서 같이 다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은근 초선이를 이용해서 인수의 약점을 자극하면서 희열을 느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곧 자신의 인생에 불쑥 나타난 윤희와 선준에게 더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재미로 그들을 골려주기도 하고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그건 사내아이가 호감을 느끼는 여자아이에게 친해지고 싶어서 골탕먹이는 거나 비슷한 심리일 것이다. 인수와는 그저 같이 다닐 뿐이지만 잘금이들에게는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표정으로 보여줘야 한다.

여림이 연기를 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간지럽게 애교부리듯이 하는건데 경상도 남자인 내 성격하고 진짜 안맞는거 같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성격인건 사실이지만, 여림이처럼 감정적으로 치대고 약올렸다 당겼다 풀었다 하면서 뻔뻔스럽게 밀당하는건 정말 못하겠다. 그래도 다행인건 유천이가 애교가 많아서 유천이를 옆에서 보면서 많이 배운다.

유천이가 처음 대본 연습할때는 발성이 별로었는데 몇주 사이에 확 늘은 것 같다. 가수를 오래 해서인지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쓰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카메라에 자기 얼굴에 어떻게 나오는지도 잘 알고 있어서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도 금새 적응하는 것 같다. 아이돌이 연기자보다 연기를 잘 못할거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연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신인 연기자보다는 오히려 오래 방송 활동을 한 아이돌이 발성이나 카메라에 더 빨리 적응해서 잘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3

아인

성균관에서 선준이 윤희와 첫 대면하는 씬이다.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을 두 사람을 만나는 장면이니 임팩트 있게 찍고 싶다. 노론 영수의 아들 선준을 본 걸오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의 형을 죽인 원수의 아들. 그런데 죽이고 싶도록 미운 그 자가 소론밖에 없는 동재로 와서 원칙을 따랐을 뿐이라니 얼마나 짜증나고 어이가 없었을까. 그래도 걸오는 그냥 충동적인 녀석이 아니라 깊은 녀석이다. 그 열받고 황당한 순간에도 이선준에 대한 감정적 판단을 유보하고 방에서 내치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가진 놈이다. 걸오도 도덕적인 기준에 대해서는 이선준 못지않은 원칙주의자에 결벽주의자이고, 그래서 힘으로 밀어붙이는 자신에게 원칙을 말하며 굽히지 않는 이선준을 내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과 같은 종자임을 직감한 거겠지.

나온 화면을 보니 맘에 든다. 선준이 윤희와 합도 좋았고 방 밖에 상황과 교차 편집도 재미있게 된 것 같다. 유천이도 걸오에게 맞서면서도 내심 약간 쫄아있는 선준이를 눈빛과 차분한 목소리로 잘 그렸고, 민영이가 코믹한 화들짝 놀라는 연기를 잘해줬다.


4

중기

여림과 걸오가 처음 같이 찍는 씬이다. 여림이가 걸오한테 달라붙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첫 촬영부터 이렇게 들러붙어 스킨쉽을 하려니 웃음이 안나고 NG가 안나올리가 없다. 다행히 걸오가 된 아인이를 보니 충분히 여림이 절친으로 인정할 만큼 멋진 녀석이라는 느낌이 왔다. 그리고 아인이도 처음 볼때보다 많이 편해졌다. 보기보다 웃음이 많고 막내라서 그런지 은근히 애교도 많은 녀석인거 같다. 짜식.

대본을 보면 여림이와 걸오의 관계에 대해서 십년지기라는 설정이긴 하지만, 죽마고우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여림이와 걸오는 그야말로 친구가 아니라 십년동안 알고만 지낸 사이일수도 있다는… (쿨럭) 그래도 걸오가 여림이 말에 수업을 들어가는거나 여림이 방에 들락거리는거나 여림이가 걸오에게 달라붙는걸로 봐서 분명 친구는 친구인데,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다른 것 같다. 여림이가 걸오를 둘도없는 친구로 여기는데 비해 걸오는 여림이가 별로 안중에 없고 때론 귀찮아하는 것 같다. 아인이에게 걸오는 왜 여림이를 귀찮아하는거 같냐고 했더니 “걸오는 자기문제에 빠져서 친구를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는 녀석이에요. 사실 여림이 말고는 친구도 없잖아. 여림이니까 그정도 친한거지.” 했다. 하긴, 걸오 녀석 표정을 보면 만사가 다 귀찮은거 같긴 하다. 세상만사가 다 재미로만 보이는 여림이와 반대로.


아인

걸오와 여림은 오랜 친구고 사회 문제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는 같은 생각을 갖고있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괴로와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걸오는 싸우고 여림은 도피한다. 서로 걷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홍벽서를 눈치빠른 여림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걸오는 여림에게 점점 비밀이 많아졌을 것이다.(투전해서 모은 돈으로 화살사고 홍벽서 종이사고 밤마다 나가서 벽서쓰고 날리고) 그럴수록 여림은 서운하고 걸오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아 깐죽거리며 감정적으로 들러붙으려고 했을테고 그런 여림이 걸오는 더 귀찮을 수밖에 없었겠지. 홍벽서를 하면서 무수히 다쳤을텐데 한번도 여림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늘 혼자 치료해왔던 것도 걸오에겐 여림이 기댈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 자기 때문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존재에 더 가깝다는 걸 뜻하는 것일게다. 그래도 마지막회로 갈수록 둘이 공유할 수 있는 비밀이 많아지면서 친해지지 않을까 싶다.

선준이에 대한 탐색을 시작한 걸오. 선준에게 성균관의 현실을 알려주면서 넌 니가 그렇게 엮이기 싫어하는 노론놈의 자식들과 똑같다고 말하지만, 선준이처럼 당색을 없애자고 말하고 직접 실천하는 노론은 처음이어서 자신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막연하게 선준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있다. 노론처럼 굴던지 사람처럼 굴던지 하나만 하라고 화두를 던지는데, 걸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아버지와의 관계, 당쟁의 현실)를 선준은 어떻게 해결할까 지켜보려고 하는 것이다. 여림도 다가가지 못하도록 굳게 잠겨있던 걸오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한 선준이다. 겉으로는 선준이에게 틱틱거려도 내심 선준이에게 흔들리고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는 걸오를 대사없이도 눈빛만으로 표현해야 한다.


6

아인

걸오가 윤희에게 빠지기 시작한다. 딸국질을 하지 않나, 깍지를 만들어서 끼워주고, 손아플때 치료해주고 챙겨준다. 윤희에 대한 걸오의 마음이 나중에는 결국 사랑이지만, 아직 여자인걸 모르는 지금에도 윤희는 깊은 잠에 빠져있던 걸오를 깨우는 빛과 같은 특별한 사람이다. “버텨내질 않습니까. 다른사람들보다 한참 뒤쳐져있는 한심하고 무능하고 초라한 제자신을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말입니다. 사람에게 그보다 더 큰 재능이 필요합니까.” 하는 유박사의 말이 결국 걸오가 윤희에게 빠진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소론에게 팔을 다치고도 대사례를 포기하지 않는 선준이에 대한 마음도 함께 깊어져 간다. 여전히 선준이를 노론이라고 부르지만, 그건 애칭 같은 거다. 한편으로는 선준이가 혹시 노론의 편으로 변심을 하더라도 그동안 선준이에게 기대하고 애정했던 자신의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한 자기방어기제일수도 있겠지. 소심한 걸오녀석.


중기

걸오가 윤희에게 사과를 주다니, 여림이한테는 뭐하나 챙겨줘 본 적이 없는 걸오가 윤희한테 저렇게 정성이라니.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걸오는 늘 약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는 이유없이 친절을 베풀곤 한다. 여림이 혼자 알아서 잘살고 별로 부족한게 없어보여서 걸오가 챙겨줄 필요성을 못느껴서 안챙겨주는 것일수도 있다. 사실 윤희가 여림이보다 더 당차고, 여림이가 윤희보다 더 섬세하고 여린 녀석인데 말이지.


7

아인

잘금4인방이 같이 촬영을 하는 대사례다. 촬영이 끝나고 시간이 나서 중기형 유천이와 함께 술한잔 하러 갔다. 술마시다가 중기형이 유천이 연기에 대해서 이런저런 조언을 한다. 연기지적은 민감한 거라 고깝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 유천이가 기분나쁘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착한 유천이. , 그런데 이번에는 중기형이 나한테 연기조언을 하기 시작한다. 난 연기 8년차인데 이제 데뷔한지 3년차면서 나한테 조언을 하다니 형의 오지랍에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예전같이 연기입문 순으로 선후배 따지던 시절이면 한참 후배였을텐데 그래도 중기형이 좋은 의도에서 하는 말이고 도움되는 말이니까 진지하게 들었다. 사실 남한테 조언을 해준다는 것, 그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힘든 일이다. 처음에는 중기형이 약싹빠른 여우 이미지라서 별로였는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게 아니라 연기를 잘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 자기 혼자 연기를 잘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는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려고 머리를 굴린다.


8

중기

윤희가 목욕을 하는 향관청에서 걸오 선준과 만나는 씬이다. 걸오가 윤희가 여자임을 알게 되고 딸국질을 하며 선준을 막아서는데 떨면서 말더듬는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우면서 웃기다. “~ 연기였어 진짜였어?” 했더니 “저도 연기자에요”하면서 웃는 아인이. 짐승남 걸오에게 저런 귀여운 코믹연기가 가능하다니. 역시 잘하는 상대하고 같이 연기를 하면 긴장되면서 집중도 잘되고 좋다.

근데 여림이는 왜 이렇게 얄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걸까. 선준이 윤희를 여러 번 곤경에 밀어넣기도 했고, 이젠 윤희가 여자인걸 캐내기 위해 향관청으로 보내놓고 몰래 보려고 하질 않나, 걸오 딸국질까지 집요하게 추궁하고, 여림이 한 행동만 보면 악역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하지만 여림이 대사를 보면 중간중간 여림의 본심이 보이는 말들이 있다. 그 짧은 한마디가 실은 여림의 본심인데 그래놓고는 바로 농담으로 마무리하는 여림이라, 본심 한마디를 어떻게 임팩트 있게 잘 전달할지 늘 고민이다.


10

아인

반촌아이들에게 형의 이야기를 하는 걸오. 형은 걸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항상 바르고 완벽하고 아버지보다 자상하게 걸오를 보살펴주던 형. 그런데 어느날 억울하게 허무하게 걸오를 남겨두고 죽어버린 형. 그 이후로 형의 이야기는 가족 앞에서조차 꺼낼수 없도록 묻혀진 형.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할까. 걸오의 형이 죽었을 때 걸오는 10살정도였을테고 어린아이들이 그렇듯이 형의 죽음에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죄책감을 떨치기 위해 홍벽서를 하면서 다치고 자신을 벌주며 살아가고 있었겠지. 걸오는 정신적으로 트라우마가 있는 가엾은 아이다. 선준, 윤희, 여림이 앓고 있는 것이 성장통이라면, 걸오가 앓고 있는 것은 생사를 넘나드는 깊은 우울증이다.


11

아인

걸오가 직접 표현하는 씬은 안나오지만, 선준이 노론의 비리가 적힌 장부를 정조에게 바치는 것은 걸오가 선준을 완전히 인정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걸오는 아버지에게 반항은 할지언정 아버지를 저버리거나 넘어서지는 못했는데, 선준은 결국 아버지를 저버리고 넘어선다. 자신은 포기하고 원망하던 아버지의 벽을 무너뜨리고 한발한발 앞으로 나가는 선준을 보며 대단한 놈이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12

중기

윤희를 사이에 두고 선준과 걸오의 러브라인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선준 윤희를 섬에 보내고 걸오와 부용화를 물먹이는 등 여림이 사건을 만들고 있긴 하지만, 여림이만 러브라인이 없어서 허전하긴 하다. 여림이도 누군가를 마음에 애틋하게 품고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런 상대가 없어서 아쉽다. 역시 여림이에겐 그런 소중한 상대는 걸오뿐인걸까. 가까이가고 싶고 만지고 싶고 남색이 아닌가 고민이 깊게 만들었던 상대. 하지만 걸오는 여림이 마음도 모르고 매사가 장난질이냐며 여림이를 때리기나 한다. 하지만 바로 복수하는 여림이. 대물이 없어졌다고 걸오를 혼비백산해 달려가게 만들곤 메롱 하고 뽀뽀를 날리고 시크하게 가버린다. 그렇지, 나 구용하야.

내가 걸오 너무한거 아니냐고 투덜거렸더니 그래도 아인이는 걸오편을 든다. 여림이가 말로는 걸오 자네편일세 하지만 걸오 속을 얼마나 바득바득 긁고 있는지 아냐고. 비밀을 만들고 속여서 여림이를 그렇게 삐뚤어지게 만든게 누군데. .

하지만 걸오와 여림이 10년동안 평행선을 달려온 건 자신의 문제에만 빠져있던 걸오 탓만이 아니라, 걸오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여림이 탓도 있을 것이다. 걸오가 감정표현을 안하고 속으로 눌러둔다면, 여림이는 감정표현을 삐딱하게 반대로 한다. 슬프면 웃고, 화나면 빈정거린다. 상처받는게 두려워서 걸오 앞에서조차 일부러 웃음으로 가장하고 솔직한 감정을 보이지 않으니 걸오도 여림이에게 솔직해 질 이유가 없었겠지. 이런 때 보면 구용하도 헛똑똑이다. 바부팅이.


13

중기

여림이 걸오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는 씬이다.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여림과 걸오의 관계에 돌파구가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극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여림은 자기 본심을 말한다. 하지만, 그래도 여림이 걸오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걸오를 보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마음을 털어놓고 여림이의 표정은 오랜 짐을 내려놓은 듯 한결 홀가분해진다.

아인이를 보니 완전히 걸오의 비장한 느낌에 빙의한 분위기다. 녀석은 느낌을 싣기 위해서라면 대사를 입안으로 삼키거나 뭉개버리기도 한다. 발음이 잘 안된다고 스스로 얘기하기도 하지만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 한글자라도 더 정확히 발음하려고 노력하는 나와는 다른 스타일인 것 같다. 내가 정확히 발음하면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연습한다면, 아인이는 먼저 느낌을 살리면서 그 안에서 필요한 정도까지 발음이 되도록 만들어 가는 것 같다.


아인

걸오가 여림의 진심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는 씬이다. 홍벽서의 정체를 알면서 걱정되었을 텐데도 그동안 말리지도 않고 한마디도 아는체하지도 않은 여림에 대한 고마움, ‘니 옆에 있는 난 뭐냐’ 라는 말에 그동안 여림의 존재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데 대한 미안함, 한번도 주먹 따위 써본적 없는 여림이 자기를 때릴 때 그 때 여림의 슬픔과 절망에 대한 자책, 여러가지로 걸오가 여림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는 순간이다. 장난만 치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긴 시간 걱정되고 두려웠을 텐데도 말없이 비밀을 지키며 자신을 지켜봐 온 여림을 믿어도 좋다는 느낌이 들었을테고, 한편으로는 사는게 재미없고 언제든 죽어도 그만이라던 걸오가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가 진심으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준다는 것을 느끼고,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다.

중기형은 그렇게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언제나 철저하게 준비해온다. 시선처리, 목소리의 높낮이, 손짓까지 흠잡을데 없이 계산해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기할 때는 그런 계산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형의 연기에 빠져들어서 같이 연기를 하곤 한다. 이젠 여림이를 보면 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 것 같다. 형도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가슴속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15

아인

윤희에 대한 걸오의 마음이 점점 무르익어가면서 정리가 되는 시점이다. 감정은 깊어가지만, 한편으로는 윤희의 선준에 대한 마음의 깊이를 확인하면서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더 확실히 알게 된다. ‘윤희 이 눈치없는 계집애, 나쁜 계집애’ 하고 투덜댔더니 민영이가 깔깔거리고 웃는다.

“윤희는 자기가 여잔거 걸오사형이 모를거라고 생각하잖아. 그러니 설마 사형이 남자인 자기를 좋아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하는거지.”

게다가 다음 회 대본을 보니 여림이는 불난데 부채질하고 있다. 윤희를 선준이한테 데려다 주고는 걸오 약을 올리고 있다. 중기형도 “여림이 얘 왜이러냐, 미치겠다.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계속 까불거리고 다니기만 하네.” 하고 큭큭거린다.

, 걸오의 편은 진정 하나도 없는건가요.


17

중기

여림의 신분이 처음으로 언급되고 여림의 아버지가 여림이에게 처세술을 가르치는 장면도 나온다. 그러고 보면 여림이 하인수와 같이 다녔던 것도 아버지의 강요 때문인지도 모른. 여림이 아버지를 싫어한다는 것도 나오는데,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여림에게 스스로의 신분을 부끄러워하도록 가르친 것이 아버지니까. 여림이에게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족보를 사주고 족쇄를 채운 것이나 다름 없다. 여림이도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 양반의 신분을 뒤집어쓴 채 복종하며 살고 있지만, 여림이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을 숨막히게 하는 잘못된 사랑이다. 여림은 아버지로 인해 자신은 양반이 아니고 그래서 가치없는 사람이라는 자존감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채 자라게 되었을테니까. ‘나 구용하야’ 라는 말을 늘 달고 사는것도 신분보다는 나 자신에게 가치를 두려는 여림의 필사적인 노력이 아니었을까.


아인

걸오가 정약용박사와 독대하는 씬이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선을 권장하고 악을 경계하는 뜻이 없으면 그 또한 시가 아니다.”

젊은 정약용이 쓴 시를 어떻게 말할까 자면서도 생각했다. 걸오처럼 젊은 시절의 패기와 강직함이 느껴지는 시. 지금은 노론에 의해 성균관에 좌천되어 세상이 자신의 뜻 같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괴로와하는 정약용. 또 그런 자신의 과거의 시를 제자가 읽고 따라가는 것에 대한 따듯함과 함께 느껴지는 걱정. 안내상선배가 그런 정약용의 씁쓸한 느낌을 서글프게 연기한다. 나는 그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시를 쓴 것은 스승이지만, 시에서 말한 내용을 지금 실천하는 것은 제자의 선택이다. 그러니까 스승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19

중기

걸오가 선준을 홍벽서로 몰아서 죽이려는 아버지에게 ‘그녀석하고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해봤단 말입니다.’ 하고 눈물흘리는 장면을 아인이가 너무나 비통하게 연기해서 놀랐다. 좀 뜬금없이 느껴지는건 아닌지 아인이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아인이는 걸오가 선준이를 그정도로 좋아하는게 당연하다는 거였다.

“걸오의 트라우마를 어루만져줄 수 있는 사람은 선준이 뿐인걸. 그건 여림이도 할수 없는 일이죠. 걸오가 배후를 찾는 일은 그만두자고 할 때 ‘제가 용서를 구해야 할 이는 김윤식 혼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는 말로 걸오의 트라우마를 건드린거에요. 선준이가 죄책감을 갖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나쁜 건 나다. 네가 아니야.’ 하고 말해 줘서, 걸오가 형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구원해 준 거에요. 그래서 걸오는 선준이한테 약할 수밖에 없. 걸오는 선준이 여림이가 물에 빠지면 선준이를 먼저 구할껄.”

내가 너무한다고 투덜거리자 아인이가 웃으며 말했다.

“형이랑 유천이가 물에 빠지면 내가 형 먼저 구해줄께. 근데 걸오는 여림이보다 선준이를 더 좋아할 수밖에 없어.”

아인이가 나를 먼저 구해준다고 했지만 그래도 서운함이 풀리지 않는다. 우씨, 아무래도 내가 여림이한테 너무 닥빙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인

여림이의 중인신분이 밝혀진다. 여림은 뻔히 하인수가 자신의 신분을 밝힐거라는 걸 알면서도 명륜당에 나가 장의의 탄핵을 소집한다. 자신의 감추고자 했던 신분을 스스로 모두의 앞에서 밝히고 이젠 나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거라고 이야기한다. 여림이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중기형이 너무 차분히 연기해서 놀랐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글썽글썽 할 뿐이고, 목소리 톤도 기운을 쫙 빼고 전혀 흥분함이 없이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조용히 말한다. 내가 왜 그렇게 의지나 격한 감정을 담지 않고 연기했냐고 묻자 중기형은 이렇게 말했다.

“그 이야기가 하인수에게 하는 거라면 강하게 의지를 담아서 이야기했겠지. 하지만 여림은 자기자신에게 말하는 거였거든. 그러니까 자기성찰을 하듯 이야기한거지. 자신의 신분을 폭로한 하인수에 대한 미움같은건 없어. 이젠 인간성의 밑바닥을 보인 하인수 따위한테 관심도 없고. 외부상황보다는 모두가 여림이의 내면 감정에 집중하도록 하고 싶었어.“

여림이가 가장 걸오를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아쉽지만, 결국 여림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냈다. 내가 봐도 멋지다, 구용하.


종방연

중기

드디어 막방 촬영을 마쳤다. 드라마가 끝나면 늘 아쉬움이 남지만, 여림이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데 못한 것처럼 아쉽다. 여림이가 너무 안스럽고 오래 마음에 남는 녀석이 될 것 같다.

여림이는 결국 그가 보고 싶던 새로운 세상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림이가 완전히 절망한 채 자포자기로 살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조정에 출사해야 한다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신분의 문제에서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거라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녀석은 구용하니까.


아인

걸오를 잊을 수 있을까. 내가 맡은 캐릭들이 대부분 상처가 있고 슬픈 애들이 많지만, 걸오는 특히 더 그 아픔을 깊이 오래 느끼는 민감한 녀석이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형을 이해하고 과거와 화해하는 모습이 있어서 좋았다. 결국 걸오가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세상이 앞으로 가기보다 뒤로 후퇴하는 것을 보게 될지라도, 걸오 개인은 이제 과거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될테니까. 세상에 힘겨워하더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으로 고민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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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사진을 성스갤에서 보고 놀라서

아니 이런 사진에 훌게주의 표시도 안하고 올리다니 했는데

알고보니 KBS 공홈의 메이킹TV 영상이었다

공홈에다 고나리를 할수도 없고.. -_-;;;

중기 아인이 니들이 아주 대놓고 조련질을 하는구나. 쩝..


중기 인터뷰중에 아인이 입술이 부럽다는 얘기 때문에 뒤집어 진 적 있었지만

사실 나는 아인이 인터뷰때문에 더 두근두근했다.

중기 말이야 연예프로그램에서 누구나 할수 있는 말이지만

아인이가 중기와의 연기호흡을 묻는 질문에

“이젠 서로 가슴속까지 들어가서 연기를 하게 된것 같다”

"연기자로서 박수치게 만든다. 많이 배우고 많이 느낀다" 는 대답에

아인이는 빈말은 잘 안하는데 저런 표현을 쓰다니 중기가 맘에 들긴 하는가보구나 싶었다.

That’s what friends are for...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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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갤의 원작 짤을 패러디 한 것임
원작짤 링크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3jong&no=28047

성스 좋아했는데 리뷰도 팬픽도 별로 쓴게 없어서 짤이라도 만들어서 기념하려고 한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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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스캔들이 20회로 막을 내렸다.
성스를 보면서 걸오 여림에 푹 빠져서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고 성스갤 조공 이벵에도 참여했다.
걸림 뿐 아니라 인수 여림, 인수 걸오, 걸오 선준, 인수 선준, 인수 초선, 걸오 초선
누구든 갖다 붙이기만 해도 그림이 되고 상상되는데 성스 팬픽은 쓰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원작 소설이 있고 내가 생각해낸 모티브들이 원작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굳이 팬픽을 쓴다는게 의미도 없고 원작자에게도 별로 예의가 아닌것 같았다.
성스를 보면서 내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것 같다.
처음에는 맘에 드는 드라마를 보면서 좋아하는 캐릭에 내 상상을 입혀서
가볍게 팬픽이나 끄적거리며 놀자라는 생각에 블로그를 만들었는데
성스를 보면서 팬픽보다는 내가 캐릭을 만들어서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게 낫지 않나 싶었다.

성스를 보면서는 그닥 리뷰를 읽지도 쓰지도 않았는데
워낙 김작가가 대사나 상황을 명확하게 써서 무엇을 말하고자하는지 별로 해석이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4인방이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다 현실에 부딫치고 좌절하고 변화하고
다시 힘을 합쳐서 기성세대를 바꾼다는 이야기가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그려졌던것 같다.
나는 차분한 원작소설보다는 아버지 세대와 엮인 정치적이고 극적인 드라마쪽이 더 내 취향이라고 느껴졌다.
캐릭들도 원작에서의 조신하고 완벽한 캐릭들보다는 결함있고 좌충우돌하는 드라마 캐릭들이 맘에 들었다.

나는 드라마나 소설에서 결말에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는 편이다.
예를들어 결말부분에서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장면까지만 보면
그 이후에 나가고 끝났는지, 나가지 않고 끝났는지는 두번째고
이전에 왜 그사람이 고민을 하는지, 왜 그 문앞에까지 오게 되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결론은 작가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부분일 뿐
보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 그냥 안에 있는 것이 더 말이 되는 결말일 수 있다.
(물론 결말의 설득력에 따라 작가에게 실망하게 되기도 하고 찬사를 보내게 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맘에드는 결말은 사람에 따라 다양해서 하나의 정답의 결말이 나올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나는 완전히 뒤집어지는 반전보다는 열린 결말에 관대한 편이다.)
성스도 19강까지 줄곧 말해왔던 내용들이 훌륭했으니
지금까지 내용을 모두 뒤엎는 반전이 아닌 이상 20강에 결론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윤희가 정조를 변화시키고 정조와 노론의 타협을 이끌어내는 결론이 나름 괜찮았다.
잘금4인방의 미래 모습은 별로였지만 작가는 세상을 이렇게 보고 있구나 정도였다.
(사실 미래모습에 그닥 애정이 보이지도 않고 닫힌 결말을 내야한다는 강박에 넣었다는 느낌이다.
그 몇분의 시간동안 미래보다는 현재의 다른 이야기들을 더 잘푸는게 나았을텐데)

도용 이야기가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작가에 대해서 나쁜 느낌보다 좋은 기억을 갖고 끝낼수 있었다.
기생분장이야 남장여자스토리에서는 나올수 있는 얘기고 상황도 다르니까 그러려니 했고
청벽서 화홍점은 제작진에서 넣으라고 하니까 원작에 나오는지 모르고 넣었나보다 했었다.
그런데 원작자의 항의에 대해서 규장각을 읽지 않았다는 한마디 말로 무시해버리는 것을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김작이 규장각을 읽었던 안읽었던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정황상 청벽서나 화홍점은 분명 어디선가 제공받지 않으면 짧은 시간에 스스로 생각해 낼 수 있는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일단 규장각을 안읽고 제작진에게서 소스를 받아서 넣은거였더라도
본의아니게 도용이 된 데 대해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하고 봤어야 하는게 아닐까.
또 규장각은 성균관의 인물들이 그대로 등장하는 것인데 읽고나서 에피나 소재가 겹치지 않도록
미리 주의해서 저작권에 대한 불필요한 잡음을 예방했어야 했다고 본다.
김작이 신문방송학과를 나왔다고 하는데
신문기사야 워낙 같은 소재, 같은 사회현상에 대해서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글을 쓰느냐가 중요하니
소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일 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이나 대본에서는 소재 선택 자체가 중요한 창작의 결과물이다.
배경도 물론 소재이고, 캐릭터도 잘게 잘라보면 소재의 집합체이고, 사건구성에도 소재는 중요하다.  
한국드라마에서 다른 드라마나 책의 상황을 통째로 베끼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성스에서 소재 몇개 차용한거 가지고 그러냐고 할수도 있지만
나는 차용 자체보다는 사건 전후에 김작의 태도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김작이 정말 기자가 아닌 드라마 작가가 되기를 원한다면
소재 차용에 대해서 가벼이 여기는 기존에 자신이 가진 생각과 태도를 바꿔야 한다.
아무리 드라마에서 주옥같은 대사를 뽑아낸다고 해도 보는 사람들이 그 대사를 믿지 않고
또 어디서 가져온거 아닌가 생각하고 설득력이 없어진다면 결국 본인의 손해일 뿐이다.

드라마를 몇편 안봤지만 보면 볼수록 드라마 제작 현실의 어두운 면을 알게 되어
맘편히 드라마를 즐기지 못하게 되어 안타깝다.
성스를 보면서도 내내 나쁜남자의 안좋은 기억 때문에 맘편히 드라마를 찬양할 수 없었다.
마지막에 어떤 뒷통수를 날릴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20회 무사히 끝나나 싶었는데 결국 다시 한번 뒷통수를 맞게 되니 씁쓸하다.
역시 드라마는 그냥 안보는게 제일 좋은 것인가.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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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가 지나니 캐릭들의 성격이 어느정도 자리 잡은 듯 하다. 새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데미안의 말처럼, 성스의 주인공들은 유년기의 세계에서 벗어나 성균관으로 와서, 각자 자신이 갇혀 있던 알을 깨고 다시 태어나고 있다.


선준 – 이상주의자, 현실에 부딫치.

지금껏 자신이 살아왔던 책 속에서 말하는 원칙과 완벽한 삶이 얼마나 유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느끼고 있다. 술 한사발에 20년을 지켜왔던 단정한 옷차림을 벗어던진 것 처럼, 온실 같은 집안에서의 삶이 사회에서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옳다고 믿는 신념만으로 거칠것이 없던 그가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처지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아울러 가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그의 세계의 전부였던 아버지가 책과는 전혀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도 곧 알게 될 것이다.

당색을 나누지 않는다는 책속의 글 한줄을 지켜내기가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깨닫지만, 변명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타협하지 않고 정면돌파하며, 가망없어 보이는 일도 할수 있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은 어째서 선준이 4인방의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윤희 – 냉소주의자, 꿈을 갖게 되.

고단한 삶의 무게로 자신의 글재주를 펼치기보다 남의 글을 필사하며 하루하루 세상을 비웃는 것으로 견뎌나가던 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스스로 만들어 가리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스승과 동학이 없어 혼자 책을 외우고 베껴쓰기만 했던 그가 성균관에 와서 책의 가르침이 이런 것이구나 몸으로 깨닫고 학문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된다.

윤희는 고관자제들만 득실거리는 성균관에서 자칫 철학적으로만 흐르기 쉬운 이야기들을 서민의 삶이라는 땅에 발을 붙이고 있게 해주는 캐릭이다. 귀하게 자란 선준이 현실을 모르는 말을 할 때 서민들의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고, 성균관 유생들이 본분을 잊고 출세에 눈이 멀 때도 백성을 보살펴야 한다는 성균관의 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 불우한 자신의 환경을 딛고 일어서려 노력하고, 열악한 상황에서도 견뎌내고 또 견뎌내며 도전하는 모습이 다른 인물들의 지치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걸오 – 아웃사이더, 편견에서 벗어나.

세상에 대한 증오심으로 스스로가 만든 감옥에 자신을 가두고 있던 그는, 자신과 사회를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다른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서 차차 마음의 벽을 허물게 된다. 윤희와 마찬가지로 걸오도 세상을 비난할 뿐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윤희가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 자신도 변화할 생각을 하게 되고, 당색을 없애려고 한다는 이유로 노론과 소론 모두에게 괴롭힘 당하는 선준을 보면서 자신이야말로 당색에 갇혀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항아 캐릭은 흔하지만, 걸오는 겉멋에 반항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형을 잃은 아픔이 있었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실제로 행동한다. 평소에는 홍벽서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 듯 느슨하게 멍한 듯한 표정으로 있지만, 불의를 보면 난폭하게 돌변하고, 속에는 슬픔과 분노를 감추고 있지만, 본성은 순진하고 새침한 면이 있는 매력적인 캐릭으로 잘 뽑아진 듯 하다.


여림 – 쾌락주의, 현실에 참여하게 되.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고 그래서 사회의 부조리를 일찌감치 깨달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에 빠져 외면하고 쾌락으로 도피해왔. 지만, 친구들을 위해 방관자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선준과 불우한 환경과 여인의 몸으로도 굴하지 않는 윤희의 모습에 감화되어 묻혀져 있던 그의 열정과 의지가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여림은 하인수의 편을 들어 선준을 궁지에 몰기도 하고, 이상을 쫒는 선준윤희의 편을 들어주기도 하면서 양쪽을 오락가락하고, 심지어 모든 유생들로부터 스스로를 왕따시키는 걸오가 찾는 유일한 친구인데,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진지한 독백과 가벼운 대사를 자유자재로 소화해내는, 생각과 재미를 동시에 주는 독특한 캐릭이다.


인수 – 현실주의자, 질서의 붕괴에 혼란스러워하.

철저하게 현재의 질서와 구도 아래서 권력을 추구하는 인수에게 선준은 여러가지로 불편한 존재다. 노론1인자 좌의정의 아들이라는 선준의 등장은 현실의 정치에서 2인자의 아들인 인수에게 위협적이다. 그런데 선준은 한술 더 떠서 당색을 갈라 무리짓는 것을 부정하는데, 그것은 인수가 가지고 있는 그나마의 기득권마저 위협하는 행위다. 또 불가능한 상황에서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도 예측가능한 현실의 질서를 예측할 수 없게 어지럽히는 일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믿던 모든 기존의 질서체계를 뒤흔드는 선준의 등장으로 인수도 원치 않는 심경의 변화를 겪게 된다.



남은 회 동안 주인공들이 어떻게 더 변화하게 될지 궁금하다. 매회 성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일이다. 젊은 주인공들이 영향을 미쳐 정약용 정조 좌의정 등의 성균관과 조정의 인물들도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일 것 같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처럼, 주인공들의 성장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보게 될 것 같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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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성스 마지막 20분을 우연히 보고는 결국 다운받아서 처음부터 봤는데

배우들 연기에 빠져서 계속 돌려보게 된다

예전엔 남자배우는 30대나 되야 연기 비슷한 걸 했는데

요즘 20대 초중반 애들이 왜일케 연기를 잘하는지 무서울 정도다

발성은 좀 다듬어야겠지만 표정이나 캐릭은 주변에서 좀만 잡아주면 장난아니게 흡인력 있다

윤시윤도 생각보다 잘한다 싶었는데 걔만 잘하는게 아니었다

화면에 빨려들어가는건 연출의 힘도 있고 작가의 대사빨도 있겠지만

진짜로 애들이 타고난거 같기도 하고 재능을 빨리 발견하고 노력도 많이 해온거 같고

30대가 되면 어떻게 더 클지 모르겠지만 이런 속도로 발전하면 몇년후엔 어떨지...

전에는 여자배우들만 일찍 발굴해서 키웠지만

요즘은 남자배우들도 조기발굴을 하니까 그런지도 모른다


여림이는 송중기가 대사 치는게 정말 맛깔나서 들어도 들어도 싫증이 안난다

책에서는 아픔이 있는 캐릭으로 나오는거 같은데

드라마에서는 아직까지는 그냥 밝고 재미있는 조연 역할인 듯 하고

20회의 줄거리에서 주인공들에 집중되기 위해서는 그것도 나쁘진 않다

크게 변화없는 조연 역할이라도 존재감이 있게 등장하면 되고

눈빛과 억양만으로도 여림의 과거나 아픔에 대해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면 된다.

지금까지 송중기가 보여준 연기로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지금도 권력을 쫒는 하인수의 편을 들어 선준을 궁지에 몰기도 하고

이상을 쫒는 선준윤희의 편을 들어주기도 하면서 오락가락하는데

그런 모순적이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이건 캐릭을 잘 잡고 연기를 잘해서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되는듯


하인수는 지금까지는 눈빛으로 먹혔지만

다음회부터는 대사도 더 강약을 줬으면 하고 눈에 힘좀 풀고 다른 모습도 봤으면 좋겠다

악역이긴 하지만 젊으니까 완전히 이기적이고 사악한 모습을 보이는건 아버지 세대 배우들에게 맡기고

조금은 풋풋하고 가끔은 갈등하고 가끔은 선준에게 열폭하는 모습도 보이는

인간적이고 매력적인 악인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여림보다 오히려 변화의 여지가 많은 캐릭이다

여림이 지금까지 50% 정도 보여줬다면 하인수는 이제 20%만 보여줬을 뿐이다


선준이는 흠잡을데없고 무난하긴 한데 자꾸 돌려보게는 안되는듯

원칙주의자 캐릭이지만 가끔은 코믹하게도 가끔은 부드럽게 혹은 여린 모습으로도 변화를 줄 필요가 있어보인다

그런 금욕적이고 건조해보이는 캐릭일수록 조금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도 설레니까(예를들면 강마에처럼)

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캐릭이라는걸 알고 살려줬으면 한다

작가가 앞으로 많은 에피를 줄텐데 늘 똑같은 표정으로 수행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걸오는 아직까지는 그저 겉모습만 그려졌던거 같고 다음회부터 내면의 모습이 드러날 거 같은데

권력 싸움에 형을 잃은 슬픔을 가진 캐릭이지만 그 슬픔을 곧바로 드러내기보다는

반항으로 폭력으로 드러내어야 한다는 점에서 참 쉽지 않은 캐릭인 것 같다

자칫하면 너무 무거워지고 반대로 너무 가벼워질 수도 있으니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겉으론 화를 내거나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연기를 해야하니 잠시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될 것이다.


윤희도 사실 무척 까다로운 캐릭이다.

사극에서 여주는 들러리나 민폐여주가 되기 십상이다.

요즘은 여주라고 해도 존재감이 없으면 조연 남배우들한테 밀려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주 캐릭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고

윤희는 고관자제들만 득실거리는 성균관에서 서민이라는 독자적 캐릭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는 작가가 캐릭뿐 아니라 윤희에게 늘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역할을 주면서

줄거리를 이끌어가고 있어 민폐여주는 안될거 같아 기쁘고

박민영도 남장여자라는 역할을 어색하지 않게 다양한 표정으로 소화하고 있어 다행이다


감독과 작가가 대왕세종을 했다던데 그래서인지 연출이 매끄럽고
작가와 감독이 호흡도 잘 맞는 느낌이고 전체적으로 빈틈이 없고 안정적인것 같다

대왕세종 아역시절 무척 재미있게 봤고 대사의 깊이나 철학에 감탄했었는데

성스같이 정통역사물이 아닌 학원물에서도 그런걸 기대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감독과 작가가 자신들의 장점을 살려서 생각할 거리도 있고 재미도 있는

두고두고 회자될 멋진 드라마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에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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